하지만 생각 밖의 일이 벌어졌다.이불을 걷은 순간 권하윤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느게 아니겠는가?소리에 놀란 그녀는 흐릿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어머님, 형님, 왜 다들 여기 계세요?”권하윤은 잠옷을 입은 채 방금 잠에서 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불 아래 하반신은 여전히 들어올 때 입고 있던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발도 미처 벗지 못했다.원혜정은 놀란 눈으로 권하윤을 살피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동서가 갈 때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것 같아 보여 보러 왔어요.”“흥, 잠이나 퍼자고 있었어?”강수연은 아니꼬운 말투로 권하윤을 쏘아붙이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두리번거렸다.“근데 왜 너 혼자뿐이니? 승현은?”“엄마, 저 여기 있어요.”얘기를 듣고 달려온 민승현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원혜정은 권하윤과 민승현을 번갈아 보면서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도련님,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동서 혼자 외로웠겠어요.”“네? 아…… 그게, 민정이 보러 갔다 왔어요.”강수연은 민승현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야밤에 민정이 방엔 무슨 일로 갔지?’“아까 민정 씨가 아파 보여서 제가 갔다 오라고 했어요.”생각지도 못한 권하윤의 말에 민승현은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 곧바로 맞장구쳤다.“맞아요. 민정이가 구급상자를 찾지 못하겠다고 해서 찾아주고 오는 길이에요.”그리고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마디를 더 보탰다.“하윤이도 저랑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먼저 휴식하라고 했어요.”그 소리에 원혜정은 낮게 웅얼거리더니 활짝 웃었다.“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동서가 괜찮다니 다행이네요.”그 모습은 마치 권하윤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해하고 상냥했다.하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원혜정을 다시 보니 구역질이 났다.다행히 일은 머물다간 바람처럼 훅하고 지나갔다.원혜정이 간 뒤 강수연은 의외로 권하윤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오히려 민승현을 따로
어머니의 말에 민승현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공씨 가문 셋째의 오만하고 잔인한 성격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해원에서의 공씨 가문 세력은 경성에서 민씨 가문 세력에 맞먹기에 그 여자가 얼마나 막 나가는지 안 봐도 뻔했다.‘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남은 평생 잡혀살게 뻔해.’“원래도 제 차례가 오지 않거든요. 할아버지가 도준 형의 짝으로 그 여자를 점찍어 두셨잖아요.”“됐다 그래. 민도준이 어떤 사람인데 네 할아버지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할아버지 말을 듣겠어?”“하긴.”민도준의 얘기를 하자 갑자기 자기를 바라보던 민도준의 눈빛이 떠올라 민승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깊은 밤 밖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한민혁이 권하윤을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민도준은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잘 바래다줬어?”흐트러진 가운과 몸 이곳저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에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한민혁의 얼굴이 오히려 화끈 달아올랐다.“응. 지금쯤 매원에 있을 거야.”“음.”민도준은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때 한민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사람을 빼냈으면서 왜 다시 돌려보냈는데? 이 기회에 확 낚아채면 좋았잖아.”“왜? 네가 낚아채고 싶어?”“하하하하.”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하는 민도준의 말에 한민혁은 자기 얼굴을 살짝 때리며 헤실 웃었다.“내가 막 말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그리고 민도준의 낯빛을 살폈다.“그런데 형. 아무리 그래도 권하윤 씨가 민승현 약혼녀인데 괜찮겠어? 민승현이 아무리 등신이라고 해도 민재혁이 만약 뭔가 눈치채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뭔 말이 하고 싶은데?”“내가 형 곁에 몇 년 있으면서 형이 밑지는 장사하는 건 처음 봐서 말이야.”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지훈처럼 이익을 따지는 놈이 민도준을 도와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게다
권하윤은 낮게 깐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지금 전화해요? 별원 쪽 사람들에게 들킨 건 아니죠?”“…….”“뭐라고요?”권하윤의 머리는 아직 반응하지 못했지만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깨어났다고요? 제가 당장 갈게요!”갑자기 밀려오는 기쁨에 권하윤은 손마저 떨렸다. 차 키가 자꾸만 손에서 미끌어 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이 지나서야 동네를 나섰다.2년 전 집에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그녀의 아버지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고 유일하게 내막을 아는 오빠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만약 그녀의 얼굴이 권미란의 눈에 들어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죽은 것처럼 꾸며 경성으로 도망치지 못했다면 그의 가족은 모두 해원에서 죽었을 거다.그렇게 남은 생명을 허비하면서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오빠가 깨어났단다.권하윤은 기쁜 소식에 당장이라도 오빠한테로 날아가고 싶었다.감속 구간에 진입한 권하윤은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다급한 마음에 경적을 울렸지만 매번 빨간불에 걸렸다.별원은 교외에 위치해 있었지만 북적거리는 시내 못지않았다. 요양원도 많았고 리조트도 많았다.별원은 밖에서 볼 때 평범한 요양원과 다를 바 없지만 사실은 권씨 가문의 산업 중 하나다. 대외로는 개방되지 않은.하지만 권하윤이 문밖에서 반나절을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이곳에 처음 온 것도 아니고 경비가 그녀를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들여보내지 않는 게 이상했다.권하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멸 걸음 걷지 않았을 때 경비가 그녀를 막아 나섰다.“아가씨.”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죄송하지만 저희는 통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누구 통지요?”“사모님이요.”권하윤은 멈칫했다 그제야 별원은 권씨 가문이 관리하는 곳이며 권미란이 자기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접했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게다가 얼마 전 이번 달 내로 가족 방문을 허락하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권미란의 차가운 말투에 권하윤은 말을 잃었다.그녀가 권씨 가문에 들어선 그때부터 권미란은 그녀에게 경고했었다. 신분을 들키면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가족들이 모두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라고 말이다.“내일 입을 드레스 챙겨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내일 일찍 보낼 테니까 그전에 다른 준비는 다 마치고.”“네, 어머니.”권하윤이 파티에 참석할 때 입는 드레스는 매번 권미란이 선택해 줬다. 심지어 약혼식을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이건 그녀뿐만 아니라 권씨 가문의 모든 여자애들이 똑같았다.권씨 가문에서 여자애는 사람이 아닌 상품이다. 아름다운 포장지에 곱게 포장해 내다 팔고 가끔 진열대에 올려놓고 가문을 위해 홍보까지 해야 하는 그런 물건.볼일도 끝났겠다 인사를 하고 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 권미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민도준이랑 사이가 어때?”권하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가장 먼저 든 생각은 권미란이 자기와 민도준의 관계를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거였지만 그 일은 민씨 가문 사람들조차 모르는 일이기에 아닐 거라고 스스로 부정했다.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민씨 저택에서 만나긴 했지만 말은 섞지 못했습니다.”권하윤은 말하면서 권미란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했던 반응이었다.‘보아하니 그냥 물어본 거였네.’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내일 연회에 참석할 대 기회를 봐서 둘째를 민도준한테 소개해 줘.”“네?”권하윤은 자기 귀를 믿을 수 없었다.“뭔 호들갑이야. 예의 없게.”그제야 자기의 실수를 눈치챈 권하윤은 놀란 가슴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가까이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가까이하기 쉽지 않은 거 누가 몰라서 그래? 그런데 둘째의 명성은 들어봤을 것 아니니? 남자라면 거
공씨 가문이 경성에서의 영향력은 해원에서보다는 못했지만 여전히 명문가는 명문가인 모양이다.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제국 호텔 주위의 교통이 마비됐으니 말이다.호텔 주위의 경비들도 질서 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귀빈들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권하윤은 자차를 끌고 호텔에 나타났다. 하지만 경비는 BMW mini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고객님, 죄송하지만 주차 구역이 남지 않았으니 길 옆에 세워두세요.”“저런 차를 끌고 오다니.”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마세라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권하윤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힐끗 살폈다. 차 안에 앉은 여자는 화끈한 몸매에 달라붙는 V넥 드레스를 입은 채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리고 권하윤이 눈빛을 보내오자 불쾌했는지 째려보고 다시 립스틱을 발랐다.“여기요.”권하윤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초대장을 건넸다.초대장에 적힌 민씨 가문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경비의 태도는 바로 공손하게 바뀌었다.“이쪽으로 가시면 저희 직원이 주차를 도와줄 겁니다.”“고마워요.’권하윤이 들어가자 마세리티를 운전하던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녀도 방금 길가에 주차하라고 들었는데 저런 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는 게 못내 아니꼬웠다.“이봐요! 방금 주차 구역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죄송하지만 방금 들어가신 고객님은 민씨 가문 다섯째 작은 사모님이셔서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허리 숙여 설명하는 경비의 말에 여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순간 방금까지 보였던 행동이 후회됐다.한편 권하윤은 주차를 마친 뒤 민승현에게 전화했다.하지만 상대는 헐떡이는 소리로 혼자 들어가라는 말만 남겼다.권하윤의 눈살은 저도 모르게 찡그러졌다. 솔직히 민승현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었지만 약혼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약혼 후 함께 바깥 행사에 나오는 것이기에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게다가
그리고 입구에 파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자기 구역이 아니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태도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바닥을 끄는 긴 드레스에는 보석이 수도 없이 달려 있었고 옆에 있는 남자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왕님이었다.여자의 눈에 띄는 행동에 권희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니꼬운 듯 고개를 돌려 권하윤과 뭔가를 얘기하려 할 때 옆에 있는 권하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발견했다.“하윤아, 너 왜 그래?”“하윤아?”권하윤은 권희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렸고 위경련이 일어나는 듯 헛구역질이 올라왔다.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공씨 가문 셋째 아가씨 옆에 있는 남자는 문태훈이다.‘문태훈이 왔다는 건 설마 그 사람도 왔다는 뜻인가? 해원에서 항상 둘이 붙어 다녔으니까.’“하윤아?”권희연의 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네?”“너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저 속이 좀 안 좋아서요.”변명을 대며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옆에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공씨 가문 가주는 안 왔대요?”“안 왔을걸요. 들리는 데 의하면 병 때문에 입원해 있대요. 그래서 딸을 문 씨 가문 도련님과 함께 보냈다 것 같더라고요.”“그래요?”두 사람의 무심한 대화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권하윤의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렸다.하지만 이대로 안심하기는 일렀다. 왜냐하면 문태훈은 그녀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권하윤이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권희연의 팔이 앞으로 쑥 나오더니 그녀의 팔을 둘렀다.“하윤아, 민도준 씨 왔어.”권희연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민도준이 서 있었고 준비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의 눈은 마주쳤다.그 순간 권하윤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곧바로 시선이 흔들거리더니 누군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방금 전 마세라티를 타고 문 앞에서 만났던 여자였다.여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처음에는 가볍게 무시한 채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익속한 목소리는 뇌리에서 재생되는 흐느낌 섞인 여자의 목소리와 정확하게 들어맞아 민도준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그리고 그가 멈춰 선 사이 화면 속 주인공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높게 얹은 머리와 목을 반쯤 가린 하얀 드레스, 청초하고 단아한 모습이었지만 그만 볼 수 있는 야릇함도 묻어 있었다.하지만 그런 권하윤을 본 한민혁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매우 이성적으로 보였는데 왜 또 아는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민도준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씩 올리며 나지막하게 물었다.“또 나한테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분명 아무 뜻 없는 한 마디였지만 남자의 눈빛에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오늘 제 언니도 함께 와서 인사드리려고요.”“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그녀의 눈짓에 권희연이 우아한 걸음을 내디디며 민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힐끗 눈을 들어 민도준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눈웃음을 쳤다.“아, 우리 제수씨 언니분이시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죠?”방금 전과는 대조되는 말투에 권희연이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태도면 아까와 같은 대접은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용기가 생긴 모양이었다.“민 사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혹시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조심스럽게 민도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그때.“그래요. 올라가서 얘기하죠.”민도준의 긍정적인 답변이 들려왔다. 하지만 뭔가 재밌다는 듯 호를 그린 눈은 오롯이 권하윤을 향해 있었다.그 대답에 권하윤은 오히려 놀랐다. 그런데 곧바로 스스로를 한심하게 비웃었다.‘이게 뭐가 의외라고. 날 받아들이면 권희연도 당연히 받아들이겠지.’그리고 민도준의 반응에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두 사람이 휴게실 쪽으로 사라지
“방금 공아름 씨와 함께 나타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권하윤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그녀를 한참 동안 훑어보던 문태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착각했어요.”권하윤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그러시다면 전 먼저…….”“하윤 씨는 경성에서 나고 자랐죠?”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태훈이 먼저 그녀의 말을 잘랐다.“저는 해원 사람인데 이번에 경성에는 처음 왔거든요. 혹시 재미있는 여행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그래요.”권하윤의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솔직히 누구보다도 긴장했다. 이게 모두 문태훈이 저를 의심해서 일초라도 더 옆에 붙잡아 두려는 꼼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 있었다.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가며 문태훈이 묻는 말에 대답했지만 그의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마치 심문하는 듯했다.그렇게 몇십 분을 붙잡혀 질문을 받던 그때 호텔 직원이 다급하게 다가오며 권하윤에게 인사했다.“권하윤 씨, 언니분이 지금 휴게실로 잠시 와달라고 하십니다.”권하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미안한 듯 문태훈을 향해 미소 지었다.“죄송해요. 언니가 저 찾아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히 가보셔야죠.”…….한참을 걸어 거리를 넓히고 나서야 감시를 받는 듯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권하윤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동시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혹시 언니가 무슨 일로 절 찾는다고 했나요?겨우 진정한 권하윤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빨리 오라고만 하셨습니다.”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휴게실 문 앞에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안내를 마치고 이내 사라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멍하니 문 앞을 서성거렸다.‘권희연이 민도준과 함께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날 불러내지? 설마 들어갔다가 이상한 장면 목격하는 건 아닌가?’한참 동안 고민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