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의 칭찬을 듣자 권희연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더욱 부드러워졌다.“고마워요.”하지만 그때 옆에서 괴상야릇한 음성이 들려왔다.“권씨 집안 사람인데 사람 시중드는 건 당연히 잘할 거 아니에요.”여실히 드러낸 민승현의 경멸에 찬 눈빛에 권희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이런 건 저도 잘해요. 제 접시에 있는 음식은 권희연 씨가 드세요.”민지훈은 미소 지으며 이미 썰어 둔 음식을 권희연에게 넘겼다.그제야 권희연은 표정을 살짝 풀며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민지훈 씨.”“우리 나이도 미슷한데 성은 붙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가자 그제야 분위기는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민승현은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마구이로 잘게 썰어놓고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권하윤은 그가 권씨 집안을 들먹이면서 그녀를 모욕하려던 것이 실패해 화내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민지훈이 분위기 메이커 역을 자초한 덕에 식사 분위기는 어색해지지 않았다.게다가 식사 내내 권희연은 민도준의 옆에서 이것저것 시중을 들었고 민도준도 지난번처럼 그녀를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 그나마 체면을 세워주었다.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권하윤과는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그 때문에 처음에는 가벼웠던 권하윤의 마음은 점차 이상해졌다.‘설마 정말로 입맛을 바꾸고 싶은 건가? 하긴, 나랑 관계를 오래 유지해 왔으니 질릴 때도 됐겠지.’권희연은 물처럼 부드러운 성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속삭일 때 목소리는 여자인 그녀가 들어도 뼈가 나른해질 지경이다.그러니 민도준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디저트까지 먹고 나자 무미건조했던 점심 식사도 겨우 끝났다.하지만 민도준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그 누구도 먼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가자고.”민도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권희연만 계속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였다.하지만
민승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어머니 강수연은 계속 그가 공아름과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만약 공아름이라면 강민정의 껍질을 벗기고도 남았을 거다.설령 공아름이 아니더라도 있는 집 자식으로 자라온 여자라면 쉽게 넘어갈 리 없다.그게 바로 그가 권씨 집안 여자를, 그것도 권하윤을 선택한 원인이었다. 그는 강민정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으니까.꿍꿍이가 그대로 까발려지자 그는 냉소를 지었다.“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그냥 이렇게 넘어가 달라 이 말이야? 꿈 깨!”“넘어가 달라는 거 아니야. 그저 득실을 따져보라는 거야. 만약 이 일이 커진다면 너랑 나 둘 다 좋을 거 없어.”민승현은 권하윤을 몇 초간 빤히 쳐다보더니 차갑게 물었다.“그 자식 대체 누구야?”그가 이런 물음을 물어볼 거란 걸 권하윤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차분하게 대답했다.“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설마…….”민승현은 이를 갈았다.“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야?”“누구 말하는 거야?”“씨발, 모른 척하지 마!”남자의 이름 세 글자를 말할 때 민승현은 목소리를 한껏 내기 깔고 으르렁대는 듯 뱉어냈다.“맞냐고!”“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만약 네가 말한 그 사람이라면 내가 여기에서 너랑 실랑이 벌이고 있을까?”권하윤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하지만 민승현은 당연히 쉽게 믿지 않았다.“화제 돌리지 마!”그는 마치 머리 없는 파리처럼 마구 날뛰었다. 분출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에 미칠 지경이었다.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살가죽이라도 벗겨 화를 풀 수 있었지만 그게 민도준이라면…….직접 물어볼 용기조차 없기에 눈 가리고 못 본 체해야 했다.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주먹을 쥔 채로 차를 세게 내려쳤다.“삐- 삐- 삐-”귀에 거슬리는 경보 소리에 그는 가슴에 쌓여 있던 화가 당장 터지기라도 할 듯 마구 날뛰었다.그는 곧바로 권하윤의 어깨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말해! 맞냐고! 두 사람이 나 몰래 붙어먹은 거 맞냐고! 너 매일 날 비웃었겠네! 씨발, 걸
분노로 일그러졌던 민승현의 얼굴은 일순간 멍해져 약간 웃기기까지 했다.“한민혁? 도준 형이 아니라?”“민 사장님?”강민정은 어안이 벙벙해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민 사장님 좋아하는 여자 널리고 널렸는데 왜 새언니를 좋아하겠어?”“사실 얼마 전…….”강민정의 설명을 들은 민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니까 그 자식이 한민혁이란 말이야?”“그렇다니까. 내가 두 번이나 봤어. 게다가 두 사람이 같이 쇼핑까지 하더라고.”강민정은 사립탐정이 자기한테 준 사진을 민승현에게 보여주면서 “우연히” 찍은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사진 속 두 사람은 친밀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권하윤 몸에 나 있는 흔적만으로도 충분히 온갖 상상을 할 수 있었다.게다가 사진까지 있으니 민승현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하긴, 형 좋다는 여자가 주위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게다가 권하윤이 내 약혼녀라는 걸 아는데 두 사람이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형도 대미지 입을 텐데 그럴 리 없어. 그리고 권하윤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권희연과 엮이지 않았겠지.’오늘 식사 자리에서 권희연이 민도준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고 또 민도준이 그녀를 남겼다는 건 받아줬다는 뜻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모든 생각을 정리하자 민승현은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한시름 놓이면서도 화는 계속 났다.시름 놓인 건 그가 민도준을 상대로 경쟁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고 화가 나는 건 권하윤이 자기를 두고 한민혁 같은 망나니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였다.민승현은 마음을 진정한 뒤 핸드폰을 강민정에게 돌려주었다.“이건 잠시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지 마,”속으로 기뻐하고 있던 강민정은 민승현의 말에 멍해졌다.“혹시…… 새언니 때문이야?”“당분간 말할 수 없어, 어쨌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민승현은 머리가 복잡해 설명할 마음이 없어 이렇게 행동한 거였지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강민정의 눈에는 민승현이 권하
아까 민지훈이 제때에 나타난 덕에 민승현은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만약 평소 같았으면 그녀는 상황을 설명했을 거다.이미 민도준의 애인으로 지내는 동안 민승현이 자기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까.하지만 방금 전 “바람 소동”으로 민승현과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라 권하윤은 힘이 남아나지 않았다.게다가 눈앞에 있는 모든 일의 원흉에 대한 원망을 숨길 자신도 없었다. 어째 됐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민도준은 권희연의 시중을 받으며 즐기느라 그녀를 나 몰라라 했으니까.하지만 원망이 쌓여 참을 수 없게 되자 권하윤은 겨우 입을 열었다.“그러는 민 사장님은 왜 저를 차 안으로 불러들였어요? 희연 언니가 만족시켜주지 못해 욕구불만인가 봐요?”의외의 대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민도준은 이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하, 이젠 말대꾸도 할 줄 아네?”민도준은 말하면서 권하윤의 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권하윤은 표정을 찡그리더니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가 조금도 안쓰럽지 않은지 민도준은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어?”눈을 내리깐 민도준은 권하윤의 목에 난 손자국을 바라보면서 콧방귀를 뀌었다.“아주 격렬했나 봐. 말해 봐. 민승현이 나랑 뭐가 다른지.”“다를 거 없던 데요.”이를 악물며 내뱉은 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은 혀끝으로 볼살을 밀더니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다를 거 없단 말이지? 그럼 한 번 더 해도 괜찮겠네?”민도준의 말투는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그걸 바로 눈치챈 권하윤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이미 차를 길 옆에 세웠다. 만약 여기서 뭘 하기라도 하면 내일 뉴스에 커다랗게 실릴 게 뻔했다.그제야 권하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민도준을 달랬다.“도준 씨, 저 방금 홧김에 아무 말이나 막 한 거예요. 저 민승현이랑…….”말을 채 끝맺기도
아직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를 힐끗 보더니 민도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아니, 여기로 오고 싶은 모양인데?”권하윤은 당장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늘 민승현 하나 상대하느라 이미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또 한 번 더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때문에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민도준에게 부탁했다.“민 사장님, 도준 씨, 제발 언니더러 가라고 하면 안 돼요?”“지금 나한테 비는 거야?”“네, 이렇게 빌게요.”“성의가 없어 보이는데.”민승현은 권하윤의 목덜미에 놓인 손에 힘을 주었다.“난 나를 배신한 사람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아니에요.”상황이 이렇게 되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솔직하게 털어놨다.“저 민승현이랑 아무 짓도 안 했어요.”“그래? 어떻게 믿지?”밖의 상황을 볼 수 없는 권하윤은 이미 초조함이 극에 달했고 권희연이 벌써 이쪽으로 걸어와 다음 순간 이 상황을 발견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조급한 나머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믿기지 않으면 검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민도준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악의적인 미소를 지었다.“약속 지켜.”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권하윤의 귓가에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언니가 이 차로 오고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엔진 소리가 들리지? 설마…….’권하윤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식하고 민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그때 마침 권희연이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속인 거예요?”권하윤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일말의 미안함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권하윤은 심장이 후들거려 한참 동안 진정했다. 그리고 순간 민도준의 곁에 한시라도 더 있다간 살인하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 없을까 봐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문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다시 남자의 손에 잡혔다.“어디 가?”“집에요!”‘건드릴 수 없다면 피하
그 뒤로 이어진 검사는 상상을 초월하여 권하윤은 수치스러운 나머지 벽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었다.이렇게 하면 모든 게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욕실로 끌고 가 불합격이라고 결론지은 부위를 깨끗이 씻겨줬다.하지만 거친 손길은 마치 그녀에게 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욕실 안 유리에 희뿌연 수증기가 점차 끼더니 조금씩 커졌다 물방으로 되어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그리고 옆에 놓인 욕조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관계가 어느새 겨우 끝났다.“웅-”헤어드라이기의 바람 소리에 정신을 잃었던 권하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렵사리 베개에 머리를 붙였더니 잠을 방해하는 소리에 권하윤은 짜증이 치밀었다.하지만 힘들고 졸려 방해받고 싶지 않은 그녀는 머리를 베애 아래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시끄러.”베개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잠깐 멈추어 겨우 다시 잠들까 하던 그때 웬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빼냈고 소음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권하윤은 누꺼풀을 들지도 못한 채 “짜증 나”라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이미 캄캄했다.권하윤은 반응한 뒤에야 여기가 민도준의 개인 별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이 다 되어갔다.어렵사리 민승현을 진정시켰는데 만약 그녀가 외박까지 했다는 걸 알면 분명 또 화를 낼 게 뻔했다.힘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허리가 갑자기 조여왔다.‘응? 잠깐만. 이거…….’권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침대의 절반을 차지한 채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고 있는 민도준의 모습이 보였다.그가 곁에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권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몇 번이나 함께 몸을 섞었지만 잠까지 함께 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심지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 데다가 민도준의 잠을 방해라도 할까 봐 할 수 없이 다시 잘이에 누웠
이불이 허리에 걸쳐 있어 잘빠진 허리 근육이 그의 호흡과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은 어둠 속에서 더욱 야릇하게 보였다.민도준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꺼풀을 들어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갓 잠에서 깬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누가 하도 문질러대서 말이야.”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려 했다는 걸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화장실 가려고 했는데 깰까 봐 그랬죠.”“그래?”끝음을 살짝 올린 남자의 말투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민도준은 그제야 눈을 감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는 또 내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선 줄 알았잖아.”순간 귀까지 빨개진 권하윤이 낮게 중얼거렸다.“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 않네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자요.”“난 자고 싶은데 하윤 씨는 자고 싶지 않은 가 봐?”더 이상 민도준을 속일 수 없다는 걸 발견하자 권하윤은 결국 사실을 고했다.“사실, 민승현이 이미 눈치채서 외박한 게 들키면…….”한참 동안 말하던 권하윤은 이 모든 게 민도준과는 상관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민도준은 남이 어떤 고통을 느끼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남이 고통받는 모습, 세상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고대한다면 모를까.때문에 잠시 생각하던 권하윤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민승현이 이미 우리 관계까지 의심하고 있어요. 그러다 정말 제가 바람피운 상대가 민도준 씨라는 걸 눈치챌까 봐 그래요. 영예로운 일도 아닌데 아려지면 곤란하잖아요.”그녀가 말하는 동안 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봤다. 게다가 입가에 알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어 권하윤은 말하면서 점점 자신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말 다 했어?”권하윤은 이내 고개를 뜨덕였다.“그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권하윤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민도준은 그녀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권하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강한 힘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곧바로 뺨 한 대를 얻어맞았다.“씨발, 이 더러운 년!”차에서 내리자마자 권하윤이 맞는 모습을 본 한민혁은 화가 난 듯 상대를 발로 차버렸다.“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 당신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준비도 없이 갑자기 걷어차인 민승현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심지어 평형을 잃고 화단에 넘어질 뻔했다.“하윤 씨, 괜찮아요?”자기가 누구를 찼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한 한민혁은 권하윤부터 걱정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난 빨간 손자국을 보는 순간 귀찮아지겠다는 직감이 들었다.‘도준 형이 분명 하윤 씨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말했는데 뺨까지 맞은 걸 알면 아마 나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런데 뭐 내 탓 아니지 않나? 대체 어떤 미친놈이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난리야.’‘잠깐만, 아까 저 미친놈이 설마…….’제대로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이 상대방의 손에 잡혔다.“감히 나를 차? 내가 누군 줄 알고!”한민혁은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설마가 사람 잡네!’그는 눈알을 빙 굴리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아유, 민승현 씨였네요. 실례했습니다.”“쓸데 없는 소리 집어 치워! 너 저 년이랑 언제부터 바람 폈어?”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뭐라고요?”그는 권하윤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 시각 권하윤도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다.두 사람은 이내 같은 생각을 했다. 전에 강민정이 사람을 시켜 권하윤을 미행하게 했을 때 그녀는 마침 한민혁과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이미 화가 폭발한 민승현은 한민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내가 오늘 너희 두 연놈들 죽여버릴 거야!”한민혁도 그나마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민도준 곁에서 오랫동안 따라다녔기에 민승현의 공격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역시나 가볍게 몸을 피한 한민혁은 오해를 설명하려고 했다.“오해예요. 저 하윤 씨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