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를 힐끗 보더니 민도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아니, 여기로 오고 싶은 모양인데?”권하윤은 당장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늘 민승현 하나 상대하느라 이미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또 한 번 더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때문에 한껏 누그러든 태도로 민도준에게 부탁했다.“민 사장님, 도준 씨, 제발 언니더러 가라고 하면 안 돼요?”“지금 나한테 비는 거야?”“네, 이렇게 빌게요.”“성의가 없어 보이는데.”민승현은 권하윤의 목덜미에 놓인 손에 힘을 주었다.“난 나를 배신한 사람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아니에요.”상황이 이렇게 되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솔직하게 털어놨다.“저 민승현이랑 아무 짓도 안 했어요.”“그래? 어떻게 믿지?”밖의 상황을 볼 수 없는 권하윤은 이미 초조함이 극에 달했고 권희연이 벌써 이쪽으로 걸어와 다음 순간 이 상황을 발견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조급한 나머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믿기지 않으면 검사하면 될 거 아니에요!”민도준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악의적인 미소를 지었다.“약속 지켜.”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권하윤의 귓가에 갑자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언니가 이 차로 오고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엔진 소리가 들리지? 설마…….’권하윤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식하고 민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그때 마침 권희연이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속인 거예요?”권하윤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일말의 미안함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권하윤은 심장이 후들거려 한참 동안 진정했다. 그리고 순간 민도준의 곁에 한시라도 더 있다간 살인하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 없을까 봐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문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다시 남자의 손에 잡혔다.“어디 가?”“집에요!”‘건드릴 수 없다면 피하
그 뒤로 이어진 검사는 상상을 초월하여 권하윤은 수치스러운 나머지 벽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었다.이렇게 하면 모든 게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욕실로 끌고 가 불합격이라고 결론지은 부위를 깨끗이 씻겨줬다.하지만 거친 손길은 마치 그녀에게 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욕실 안 유리에 희뿌연 수증기가 점차 끼더니 조금씩 커졌다 물방으로 되어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그리고 옆에 놓인 욕조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관계가 어느새 겨우 끝났다.“웅-”헤어드라이기의 바람 소리에 정신을 잃었던 권하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렵사리 베개에 머리를 붙였더니 잠을 방해하는 소리에 권하윤은 짜증이 치밀었다.하지만 힘들고 졸려 방해받고 싶지 않은 그녀는 머리를 베애 아래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시끄러.”베개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잠깐 멈추어 겨우 다시 잠들까 하던 그때 웬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빼냈고 소음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권하윤은 누꺼풀을 들지도 못한 채 “짜증 나”라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이미 캄캄했다.권하윤은 반응한 뒤에야 여기가 민도준의 개인 별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이 다 되어갔다.어렵사리 민승현을 진정시켰는데 만약 그녀가 외박까지 했다는 걸 알면 분명 또 화를 낼 게 뻔했다.힘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허리가 갑자기 조여왔다.‘응? 잠깐만. 이거…….’권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침대의 절반을 차지한 채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고 있는 민도준의 모습이 보였다.그가 곁에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권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몇 번이나 함께 몸을 섞었지만 잠까지 함께 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심지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 데다가 민도준의 잠을 방해라도 할까 봐 할 수 없이 다시 잘이에 누웠
이불이 허리에 걸쳐 있어 잘빠진 허리 근육이 그의 호흡과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은 어둠 속에서 더욱 야릇하게 보였다.민도준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꺼풀을 들어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갓 잠에서 깬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누가 하도 문질러대서 말이야.”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려 했다는 걸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화장실 가려고 했는데 깰까 봐 그랬죠.”“그래?”끝음을 살짝 올린 남자의 말투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민도준은 그제야 눈을 감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는 또 내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선 줄 알았잖아.”순간 귀까지 빨개진 권하윤이 낮게 중얼거렸다.“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 않네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자요.”“난 자고 싶은데 하윤 씨는 자고 싶지 않은 가 봐?”더 이상 민도준을 속일 수 없다는 걸 발견하자 권하윤은 결국 사실을 고했다.“사실, 민승현이 이미 눈치채서 외박한 게 들키면…….”한참 동안 말하던 권하윤은 이 모든 게 민도준과는 상관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민도준은 남이 어떤 고통을 느끼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남이 고통받는 모습, 세상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고대한다면 모를까.때문에 잠시 생각하던 권하윤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민승현이 이미 우리 관계까지 의심하고 있어요. 그러다 정말 제가 바람피운 상대가 민도준 씨라는 걸 눈치챌까 봐 그래요. 영예로운 일도 아닌데 아려지면 곤란하잖아요.”그녀가 말하는 동안 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봤다. 게다가 입가에 알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어 권하윤은 말하면서 점점 자신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말 다 했어?”권하윤은 이내 고개를 뜨덕였다.“그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권하윤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민도준은 그녀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권하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강한 힘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곧바로 뺨 한 대를 얻어맞았다.“씨발, 이 더러운 년!”차에서 내리자마자 권하윤이 맞는 모습을 본 한민혁은 화가 난 듯 상대를 발로 차버렸다.“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 당신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준비도 없이 갑자기 걷어차인 민승현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심지어 평형을 잃고 화단에 넘어질 뻔했다.“하윤 씨, 괜찮아요?”자기가 누구를 찼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한 한민혁은 권하윤부터 걱정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난 빨간 손자국을 보는 순간 귀찮아지겠다는 직감이 들었다.‘도준 형이 분명 하윤 씨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말했는데 뺨까지 맞은 걸 알면 아마 나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런데 뭐 내 탓 아니지 않나? 대체 어떤 미친놈이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난리야.’‘잠깐만, 아까 저 미친놈이 설마…….’제대로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이 상대방의 손에 잡혔다.“감히 나를 차? 내가 누군 줄 알고!”한민혁은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설마가 사람 잡네!’그는 눈알을 빙 굴리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아유, 민승현 씨였네요. 실례했습니다.”“쓸데 없는 소리 집어 치워! 너 저 년이랑 언제부터 바람 폈어?”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뭐라고요?”그는 권하윤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 시각 권하윤도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다.두 사람은 이내 같은 생각을 했다. 전에 강민정이 사람을 시켜 권하윤을 미행하게 했을 때 그녀는 마침 한민혁과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이미 화가 폭발한 민승현은 한민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내가 오늘 너희 두 연놈들 죽여버릴 거야!”한민혁도 그나마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민도준 곁에서 오랫동안 따라다녔기에 민승현의 공격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역시나 가볍게 몸을 피한 한민혁은 오해를 설명하려고 했다.“오해예요. 저 하윤 씨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민승현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땀을 뚝뚝 흘렸다.한바탕 싸운 뒤 그는 한민혁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건달이라도 싸움 실력만은 강하다는 걸 눈치챘다. 이대로 계속하다간 아무런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다.이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땀을 닦더니 권하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넌 안으로 들어가서 죽을 줄 알아!”화가 난 듯 안으로 들어가는 민승현의 뒷모습에 한민혁은 걱정이 앞섰다.“하윤 씨, 저 자식 설마 하윤 씨 난처하게 하진 않겠죠? 제가 다시 도준 형 별장으로 데려다 줄까요?”“아니에요. 한번 피한다고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해결해야 할 일이에요. 그저 민혁 씨한테 피해줬네요.”“이게 뭐 별일이라고. 어차피 저 다친데도 없어요.”한민혁은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저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권하윤이 거절하려는 걸 눈치챈 한민혁은 몇 마디 덧붙였다.“걱정 마요. 제가 멀리에 차 대고 지켜볼 테니까. 반 시간 뒤에도 괜찮다면 그냥 갈게요.”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권하윤은 그저 감사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럼 부탁할게요.”-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권하윤의 눈앞에는 난장판이 된 집이 들어왔다.의자와 테이블이 모두 넘어져 있었고 그녀가 정성껏 고른 꽃병도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민승현이 그 난장판 속에서 눈을 시뻘겋게 뜬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내연남과는 작별 인사 잘했어? 그래도 기어 들어오긴 하네?”권하윤은 넘어진 의자를 지나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놓고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얘기 좀 해.”“얘기? 일이 이 지경에 됐는데 할 얘기가 더 남았어?”권하윤은 소파에서 그나마 앉을 수 있는 곳을 골라 앉더니 평온한 눈빛으로 민승현을 바라봤다.“파혼에 관한 얘기야.”민승현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파혼?”사실 권하윤이 한민혁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그는 권하윤을 버릴 생각이었다.하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하윤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김장한 탓에 한껏 구부리고 있었다.만약 민승현이 파혼을 선택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이대로 끝장나는 거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주눅 들면 안 된다. 민승현이 그녀가 파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절대 주저하지 않고 파혼할 테니까.얼마쯤 지났을까? 민승현은 끝내 권하윤을 경멸하는 듯 입을 열었다.“그래, 난 너처럼 이미 다른 사람 손을 탄 여자와 절대 결혼 안 해.”권하윤은 순간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실패했나?’“그런데 네가 그렇게 쉽게 떠나게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내가 파혼하고 싶다고 할 때 파혼해!”그 말을 듣고 나서야 권하윤은 안심했다.시간만 벌 수 있다면 방법은 생각하면 그만이니까.“그래.”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지금 이 결과는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기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더 이상 민승현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걸 선택했다.하지만 그녀가 일어서기 무섭게 민승현이 달려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어디 가는데!”“위층에 자러 가.”권하윤은 살짝 미소 지었다.“이것도 불만이야?”민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노려봤다.권하윤이 담담한 반응을 보일수록 그는 더욱 미쳐 날뛰었다.‘나는 이렇게 괴롭고 미치겠는데 권하윤은 대체 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거야!’아까 전 한민혁의 차에서 활짝 웃던 권하윤의 모습이 다시 떠오루자 그는 당장이라도 권하윤을 죽이고 싶었다.“경고하는데 우리 파혼하지 않는 이상 나는 네 약혼남이야. 그러니까 밖에서 딴 놈 만나지 마!”권하윤은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민승현, 너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민승현은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무슨 뜻이야?”“네가 예전에 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줬으면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을걸. 네가 내 약혼남이라서가 아니라, 민씨 집안 다섯째 도련님이라서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좋아
“전화를 받는 걸 보니 내 동생 벌써 달랬나 봐?”전화 건너 편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남자의 말에서 한민혁이 모든 사실을 말했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화장대에서 귀걸이를 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쉬울 리가요. 그냥 잠시 넘어간 것뿐이에요.”“하.”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내연남이 자기 약혼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걸 봤는데도 잠시 넘어간 걸 보면 하윤 씨도 사람 달래는 데 아주 도가 텄나 봐?”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그녀는 곧바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낮게 중얼거렸다.“그럴 리가요. 제가 사람을 그렇게 잘 달래면 민도준 씨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았겠겠요.”약간의 불평이 섞긴 말투가 전류를 타고 귀에 흘러들자 약간의 애교가 섞인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내가 달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거야?”권하윤은 속으로는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다 제가 부족해서죠.”“급할 거 없어.”민도준은 약간 흐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연습 많이 해.”거울에 비친 권하윤은 화장함을 덮은 뒤 눈을 내리깔았다.“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오늘 제가 이 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도준 씨가 저 도와줄 수 있어요?”그녀의 말투는 마치 상대를 영탐하는 듯 조심스러웠다.그녀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민도준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물론 스스로도 이 문제는 득실을 따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침묵이 흐르자 예전처럼 객관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몇 시간 전만 해도 친밀하게 몸을 섞었던 두 사람은 현재 마치 남인 것처럼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한참이 지나서도 답을 얻지 못하자 권하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제가 주제넘었네요.”‘민도준은 역시 민도준이네. 나도 참 무슨 환상을 품고 있어.’“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말했잖아, 표현이 좋으면 내가 보호해 주겠다고.”민도준은 목소리를 낮추며 야릇한 말투로 권하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오늘 밤 표현이 좋았거든.”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하고 쌀쌀한 자정의 공기에 애틋함을 더했다. 분명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아까 전 몸을 섞을 때보다도 더욱 가까이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일부러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좀 진지해져 봐요.”“이것도 진지하지 않아? 내려와서 들어볼래?”민도준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눈을 들어 권하윤을 쳐다봤다. 마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듯 거침없는 눈빛이었다.권하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요동쳤다. 하지만 여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다.“민승현 아직 맞은 켠 방에 있어요. 제가 나가면 그곳을 지나야 해서 발각돼요…….”“그러면 뛰어내려, 내가 받아줄게.”민도준은 말하면서 팔을 활짝 폈다.그 동작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높이를 살폈다.‘여기 2층인데 뛰어내려도 문제없겠지?’하지만 그녀가 답을 얻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제수씨, 설마 진짜로 뛰어내리려고 한 건 아니지?”그제야 상대가 농담했다는 걸 알아차린 권하윤은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뭐 타이타닉의 You Jump I Jump도 아니고, 저 죽는 거 무서워요.”민도준은 콧방귀를 뀌었다.“고집은.”민도준이 떠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권하윤은 다급히 물었다.“오늘 왜 희연 언니 만났어요?”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 선 넘는 질문은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주체할 수 없었다.어두운 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갑자기 배짱이 커진 지도 모른다.순간 민도준에게 정말로 입맛을 바꾸고 싶은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의 배짱은 점점 사라졌고 결국 불안으로 변했다.아래에 있던 민도준은 어느새 담배를 또 하나 꺼내 불을 붙이더니 입을 열었다. 담배 연기가 묻은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