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이 허리에 걸쳐 있어 잘빠진 허리 근육이 그의 호흡과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은 어둠 속에서 더욱 야릇하게 보였다.민도준은 움직이지 않은 채 눈꺼풀을 들어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갓 잠에서 깬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누가 하도 문질러대서 말이야.”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려 했다는 걸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화장실 가려고 했는데 깰까 봐 그랬죠.”“그래?”끝음을 살짝 올린 남자의 말투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민도준은 그제야 눈을 감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나는 또 내가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선 줄 알았잖아.”순간 귀까지 빨개진 권하윤이 낮게 중얼거렸다.“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 않네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자요.”“난 자고 싶은데 하윤 씨는 자고 싶지 않은 가 봐?”더 이상 민도준을 속일 수 없다는 걸 발견하자 권하윤은 결국 사실을 고했다.“사실, 민승현이 이미 눈치채서 외박한 게 들키면…….”한참 동안 말하던 권하윤은 이 모든 게 민도준과는 상관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민도준은 남이 어떤 고통을 느끼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남이 고통받는 모습, 세상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고대한다면 모를까.때문에 잠시 생각하던 권하윤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민승현이 이미 우리 관계까지 의심하고 있어요. 그러다 정말 제가 바람피운 상대가 민도준 씨라는 걸 눈치챌까 봐 그래요. 영예로운 일도 아닌데 아려지면 곤란하잖아요.”그녀가 말하는 동안 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봤다. 게다가 입가에 알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어 권하윤은 말하면서 점점 자신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말 다 했어?”권하윤은 이내 고개를 뜨덕였다.“그럼,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권하윤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민도준은 그녀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권하윤은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강한 힘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곧바로 뺨 한 대를 얻어맞았다.“씨발, 이 더러운 년!”차에서 내리자마자 권하윤이 맞는 모습을 본 한민혁은 화가 난 듯 상대를 발로 차버렸다.“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손찌검을 해? 당신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준비도 없이 갑자기 걷어차인 민승현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렸다. 심지어 평형을 잃고 화단에 넘어질 뻔했다.“하윤 씨, 괜찮아요?”자기가 누구를 찼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한 한민혁은 권하윤부터 걱정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난 빨간 손자국을 보는 순간 귀찮아지겠다는 직감이 들었다.‘도준 형이 분명 하윤 씨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말했는데 뺨까지 맞은 걸 알면 아마 나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런데 뭐 내 탓 아니지 않나? 대체 어떤 미친놈이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난리야.’‘잠깐만, 아까 저 미친놈이 설마…….’제대로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이 상대방의 손에 잡혔다.“감히 나를 차? 내가 누군 줄 알고!”한민혁은 그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설마가 사람 잡네!’그는 눈알을 빙 굴리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아유, 민승현 씨였네요. 실례했습니다.”“쓸데 없는 소리 집어 치워! 너 저 년이랑 언제부터 바람 폈어?”한민혁은 어안이 벙벙했다.“뭐라고요?”그는 권하윤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 시각 권하윤도 그와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다.두 사람은 이내 같은 생각을 했다. 전에 강민정이 사람을 시켜 권하윤을 미행하게 했을 때 그녀는 마침 한민혁과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이미 화가 폭발한 민승현은 한민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내가 오늘 너희 두 연놈들 죽여버릴 거야!”한민혁도 그나마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민도준 곁에서 오랫동안 따라다녔기에 민승현의 공격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역시나 가볍게 몸을 피한 한민혁은 오해를 설명하려고 했다.“오해예요. 저 하윤 씨랑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민승현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땀을 뚝뚝 흘렸다.한바탕 싸운 뒤 그는 한민혁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건달이라도 싸움 실력만은 강하다는 걸 눈치챘다. 이대로 계속하다간 아무런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다.이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땀을 닦더니 권하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넌 안으로 들어가서 죽을 줄 알아!”화가 난 듯 안으로 들어가는 민승현의 뒷모습에 한민혁은 걱정이 앞섰다.“하윤 씨, 저 자식 설마 하윤 씨 난처하게 하진 않겠죠? 제가 다시 도준 형 별장으로 데려다 줄까요?”“아니에요. 한번 피한다고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해결해야 할 일이에요. 그저 민혁 씨한테 피해줬네요.”“이게 뭐 별일이라고. 어차피 저 다친데도 없어요.”한민혁은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저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권하윤이 거절하려는 걸 눈치챈 한민혁은 몇 마디 덧붙였다.“걱정 마요. 제가 멀리에 차 대고 지켜볼 테니까. 반 시간 뒤에도 괜찮다면 그냥 갈게요.”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권하윤은 그저 감사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럼 부탁할게요.”-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권하윤의 눈앞에는 난장판이 된 집이 들어왔다.의자와 테이블이 모두 넘어져 있었고 그녀가 정성껏 고른 꽃병도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민승현이 그 난장판 속에서 눈을 시뻘겋게 뜬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내연남과는 작별 인사 잘했어? 그래도 기어 들어오긴 하네?”권하윤은 넘어진 의자를 지나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놓고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얘기 좀 해.”“얘기? 일이 이 지경에 됐는데 할 얘기가 더 남았어?”권하윤은 소파에서 그나마 앉을 수 있는 곳을 골라 앉더니 평온한 눈빛으로 민승현을 바라봤다.“파혼에 관한 얘기야.”민승현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파혼?”사실 권하윤이 한민혁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그는 권하윤을 버릴 생각이었다.하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하윤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김장한 탓에 한껏 구부리고 있었다.만약 민승현이 파혼을 선택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이대로 끝장나는 거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주눅 들면 안 된다. 민승현이 그녀가 파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절대 주저하지 않고 파혼할 테니까.얼마쯤 지났을까? 민승현은 끝내 권하윤을 경멸하는 듯 입을 열었다.“그래, 난 너처럼 이미 다른 사람 손을 탄 여자와 절대 결혼 안 해.”권하윤은 순간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실패했나?’“그런데 네가 그렇게 쉽게 떠나게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내가 파혼하고 싶다고 할 때 파혼해!”그 말을 듣고 나서야 권하윤은 안심했다.시간만 벌 수 있다면 방법은 생각하면 그만이니까.“그래.”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지금 이 결과는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기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더 이상 민승현과 충돌하고 싶지 않았기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걸 선택했다.하지만 그녀가 일어서기 무섭게 민승현이 달려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어디 가는데!”“위층에 자러 가.”권하윤은 살짝 미소 지었다.“이것도 불만이야?”민승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노려봤다.권하윤이 담담한 반응을 보일수록 그는 더욱 미쳐 날뛰었다.‘나는 이렇게 괴롭고 미치겠는데 권하윤은 대체 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거야!’아까 전 한민혁의 차에서 활짝 웃던 권하윤의 모습이 다시 떠오루자 그는 당장이라도 권하윤을 죽이고 싶었다.“경고하는데 우리 파혼하지 않는 이상 나는 네 약혼남이야. 그러니까 밖에서 딴 놈 만나지 마!”권하윤은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민승현, 너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민승현은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무슨 뜻이야?”“네가 예전에 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줬으면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을걸. 네가 내 약혼남이라서가 아니라, 민씨 집안 다섯째 도련님이라서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좋아
“전화를 받는 걸 보니 내 동생 벌써 달랬나 봐?”전화 건너 편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남자의 말에서 한민혁이 모든 사실을 말했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화장대에서 귀걸이를 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쉬울 리가요. 그냥 잠시 넘어간 것뿐이에요.”“하.”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내연남이 자기 약혼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걸 봤는데도 잠시 넘어간 걸 보면 하윤 씨도 사람 달래는 데 아주 도가 텄나 봐?”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그녀는 곧바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낮게 중얼거렸다.“그럴 리가요. 제가 사람을 그렇게 잘 달래면 민도준 씨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았겠겠요.”약간의 불평이 섞긴 말투가 전류를 타고 귀에 흘러들자 약간의 애교가 섞인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내가 달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거야?”권하윤은 속으로는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다 제가 부족해서죠.”“급할 거 없어.”민도준은 약간 흐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연습 많이 해.”거울에 비친 권하윤은 화장함을 덮은 뒤 눈을 내리깔았다.“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오늘 제가 이 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도준 씨가 저 도와줄 수 있어요?”그녀의 말투는 마치 상대를 영탐하는 듯 조심스러웠다.그녀는 자기가 해결하지 못할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민도준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물론 스스로도 이 문제는 득실을 따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침묵이 흐르자 예전처럼 객관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몇 시간 전만 해도 친밀하게 몸을 섞었던 두 사람은 현재 마치 남인 것처럼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한참이 지나서도 답을 얻지 못하자 권하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제가 주제넘었네요.”‘민도준은 역시 민도준이네. 나도 참 무슨 환상을 품고 있어.’“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말했잖아, 표현이 좋으면 내가 보호해 주겠다고.”민도준은 목소리를 낮추며 야릇한 말투로 권하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오늘 밤 표현이 좋았거든.”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하고 쌀쌀한 자정의 공기에 애틋함을 더했다. 분명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아까 전 몸을 섞을 때보다도 더욱 가까이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일부러 화를 내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좀 진지해져 봐요.”“이것도 진지하지 않아? 내려와서 들어볼래?”민도준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눈을 들어 권하윤을 쳐다봤다. 마치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듯 거침없는 눈빛이었다.권하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요동쳤다. 하지만 여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다.“민승현 아직 맞은 켠 방에 있어요. 제가 나가면 그곳을 지나야 해서 발각돼요…….”“그러면 뛰어내려, 내가 받아줄게.”민도준은 말하면서 팔을 활짝 폈다.그 동작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높이를 살폈다.‘여기 2층인데 뛰어내려도 문제없겠지?’하지만 그녀가 답을 얻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제수씨, 설마 진짜로 뛰어내리려고 한 건 아니지?”그제야 상대가 농담했다는 걸 알아차린 권하윤은 수치심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뭐 타이타닉의 You Jump I Jump도 아니고, 저 죽는 거 무서워요.”민도준은 콧방귀를 뀌었다.“고집은.”민도준이 떠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권하윤은 다급히 물었다.“오늘 왜 희연 언니 만났어요?”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 선 넘는 질문은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주체할 수 없었다.어두운 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갑자기 배짱이 커진 지도 모른다.순간 민도준에게 정말로 입맛을 바꾸고 싶은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의 배짱은 점점 사라졌고 결국 불안으로 변했다.아래에 있던 민도준은 어느새 담배를 또 하나 꺼내 불을 붙이더니 입을 열었다. 담배 연기가 묻은 목소
강민정은 완강하게 부인하며 눈알을 굴리더니 곧이어 불쌍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아침 먹으라고 언니 부르러 왔다가 잠을 방해할까 봐 망설였던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알람시계로 저 때렸어요.”강민정이 한참동안 변명을 늘어놓을 때 밖에서 민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침부터 뭔 소란이야!”민승현도 밤새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머리는 이미 까치집이 되어 있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하지만 강민정은 보고 놀랐는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민정아, 너 여긴 어쩐 일이야?”강민정은 권하윤을 밀쳐 버리고 민승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오빠 미안해. 나는 그저 아침밥 가져다주려고 온 거였어. 시끄러워서 깼어?”그녀의 불쌍한 표정을 보자 민승현의 화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괜찮아. 너 요즘 감기 몸살 때문에 괴로워했으면서 뭐 하러 이런 고생을…….”하지만 불현듯 빨갛게 부어오른 강민정의 이마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너 이마 왜 이래?”민승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민정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눈치를 보는 듯 침대 위의 권하윤을 흘깃거렸다.“새언니가 실수로 나한테 알람 시계를 던졌어.”“실수? 이렇게 됐는데 실수라고?”“권하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더 이상 잘 수 없겠다는 걸 인지한 권하윤은 미간을 문지르더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렸다.“민정 씨가 갑자기 내 방에 나타나서 귀신인 줄 알고 손에 잡히는 거 집어서 던진 거야.”“갑자기 나타나다니! 민정이가 우리 집 한두 번…….”“그건 그래. 자주 오긴 하지. 여기에서 자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고. 내가 잊었네, 내 탓이야.”민승현의 말을 자른 권하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비아냥거렸다.“두 사람 사랑이라도 나누게 내가 비켜줄까? 아니면 지난번처럼 안방에 가서 하든가.”그녀의 말이 끝나자 분노가 끓어오르던 민승현의 가슴은 갑자기 찬물이라도 맞은 듯 가라앉았다.어제 자기가 권하윤을 비난하던 장면이 눈앞에 아직도 선한데 오늘 반
예전 같았으면 집에 손님이 있을 때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권미란이 그런 명령을 하지 않자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했다.어찌 됐건 그녀는 진짜 권씨 집안 사람이 아니기에 그녀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니.하지만 방금 들어올 때 그녀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인즉 그녀가 들어오는 걸 묵인한다는 뜻이었다.상황을 연결시켜 보자 그녀는 곧바로 안에 있는 손님이 자기와 관련 있다는 걸 깨달았다.권미란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으면 권하윤은 먼저 손님과 대화할 수 없고 심지어 눈길을 줄 수도 없다.“어머니.”때문에 그녀는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권미란의 방향으로 머리 숙이며 인사했다.“응.”궈미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이 분은 조 사장이야. 인사드리렴.”권미란의 지시가 떨어지자 권하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서른 살 좌우로 보이는 남자는 호랑이 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고 역삼각형 눈은 사람을 볼 때 음습한 빛을 띠고 있어 마치 뱀이 기어다니는 듯 오싹했다.권하윤은 불편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훑어보는 상대의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안녕하세요, 조 사장님.”조 사장은 노골적으로 권하윤을 위아래로 훑으며 명령했다.“이리 와 봐. 얼굴 좀 보자고.”권하윤은 놀란 듯 권미란을 바라봤고 그녀는 마치 익숙하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가 봐.”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했지만 권미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조 사장과 한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가 멈춰 섰다.하지만 조 사장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흠칫 놀랐고 겨우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나서야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조 사장은 170 정도 되는 작은 키에 마른 몸매를 갖고 있었다.그러던 그때 그는 갑자기 권하윤의 턱을 잡으며 그녀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끌끌 혀를 찼다.“너무 밋밋하네.”권하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눈이 자기 옷깃을 파고들 때.하지만 그의 무례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아예 손을 뻣어 그녀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