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신과 의사인데요, 방금 두 분의 대화를 들었는데 진료를 해드릴 수 있어요. 제 진료실로 와서 진료받으실래요?”빡빡이 머리를 가진 남자의 얼굴에는 느끼한 기름이 떠 있었다.그는 마치 은혜로운 기회를 선사하는 듯 그녀를 훑어보며 거만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저 건강하거든요.”심지안은 이 대화가 불편했지만 여전히 예의를 지키면서 거절했다.“기회가 귀한 줄 모르네요. 나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저는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인데 나중에 진료받아달라고 애원하지나 말아요.”“의사면서 말을 왜 그렇게 안 가리고 해요? 내 친구 안 아프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마요, 부정 타니까.”의사가 예의도 지키지 않고 말을 막 내뱉자 진유진은 화난 얼굴로 반박했다.“안 아픈데 병원에는 왜 와요?”남자는 턱을 만지면서 그들을 지켜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사생활이 문란해서 이상한 성병 있는 거 아니에요?”“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심지안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머리가 아파서인지 심지안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였으면 이런 무례한 인간들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따지고 싶었다.한발 물러서면 일은 더 커지지 않겠지만 그 화를 굳이 참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그러면 내가 무서워서 말 못 할 줄 아는데, 당신 몸 파는 여자죠? 젊은 나이에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남자에게 제대로...”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지안은 뾰족한 힐로 남자의 발등을 내리찍었다.남자는 극심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는 팔을 뻗어 심지안에게 귀싸대기를 날리려고 했다.심지안은 남자가 반격할 걸 진작 예상했기에 이미 도망갈 준비를 마쳤다.그녀는 진유진의 팔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는데 몸을 돌리자마자 어떤 남자의 뜨거운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당장 꺼져! 네 몸에 손 쓰는 것도 손을 더럽히는 거야.”성연신이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고는 카리스마 있게 심지안을 품에
하지만 성연신은 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 때문에 불쾌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를 높였다.“아니요, 난 지안 씨를 지켜야 해요. 고청민의 옆에 있는 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고청민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심지안이 기억을 잃은 양 진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게 했는지 성연신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심지안을 이대로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물론 다시 그녀와 만나길 바라는 사심도 있었다. 아무리 그 가능성이 작다고 하더라도 말이다...심지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가 연신 씨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전에 연신 씨도 나 많이 괴롭혔잖아요.”“그게...”5년 전에 있었던 얘기만 꺼내면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젊고 철없을 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도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었지만 그래도 고청민처럼 겉과 속이 다른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척하지만 사실은 남몰래 음흉하고 더러운 거래나 하고 말이다.성우주는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심지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고모, 화내지 마세요. 아빠가 말을 정말 못하시거든요.”진유진은 어이가 없었다.성연신이 벙어리로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말을 못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응, 괜찮아.”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심지안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이제 가야 하니까 다음에 다시 보자.”성우주는 다급한 마음에 자기 팔을 힘껏 꼬집으며 눈물을 겨우 짜내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엉엉, 고모, 가지 마요. 가지 마세요.”깜짝 놀란 심지안은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웅크려 앉아 아이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아이는 심지안의 품에 쏙 안기더니 거짓말을 해서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해져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저 팔이 아파요...”‘정말 창피하네. 평소에 거짓말하는 애들 제일 싫어했는데. 오늘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겠네. 어휴. 아빠
심지안이 고개를 돌리자 성연신과 눈이 마주쳤다. 예쁜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직원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성우주가 한발 먼저 대답했다.“아니에요, 고모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제 엄마가 아니세요.”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셔서...”게다가 방금 말을 한 꼬마는 트렌치코트에 카키색 셔츠를 입었는데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얌전하고 잘생긴 데다가 허리를 곧게 펴니 뒤에 선 남자와는 판박이였다. 분명 커서도 수많은 소녀들을 매료시킬 멋진 모습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괜찮아요, 저도 익숙해요. 어차피 저는 엄마가 없으니까요.”성우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가슴이 비수에 꽂히듯이 아팠다. 그리고 갑자기 성연신과 아이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성우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핫윙을 사달라며 조른 것도 아니지만 심지안은 아이의 눈빛 속에서 갈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당연히 보잘것없는 핫윙을 향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가 갈망하는 건 엄마의 따뜻한 사랑, 그리고 가족애였다.진유진은 조용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런 가족사진은 반드시 가게 홍보용으로 쓰일 것이고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띌 곳에 놓일 텐데 곧 고청민과 결혼할 사람인 심지안에게는 충분히 고사할 만한 일이었다.심지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미간을 구기더니 이내 미간을 펴고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우주에게 말했다.“너에게도 엄마가 생길 거야, 다만 엄마가 아직 일이 있어서 네 곁에 못 오고 있는 것뿐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성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그는 다른 여자가 엄마로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아빠처럼 오로지 심지안만을 엄마로 원하는데 말이다.심지안은 KFC에 오랜만에 왔기에 에그타르트 한 박스와 커피 두 잔, 그리고 감
진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심지안을 향해 말했다.“환자의 돈을 뜯어먹는 개인 병원이 있는 건 알았지만 대놓고 사기 치는 병원은 처음 보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심지안의 얼굴에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았다.예쁜 그녀의 얼굴이 한껏 어두워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했다.심지안은 이상한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 돈을 좀 쓰려고 했는데 상대가 그녀를 바로 호구로 볼 줄이야.“2억이 없는 건 아닌데 제가 왜 돈을 줘야 하죠? 당신들,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는데 내가 왜 돈을 내놔야 하죠?”그녀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참, 의료 장비가 많이 비싼 거로 아는데 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떨까요? 경찰이 와서 직접 조사한 뒤에도 저보고 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순순히 돈을 낼게요.”“그래요, 그렇게 하죠.”음흉한 남자가 바로 대답하고는 실눈을 뜬 채 옹졸한 목소리로 원장에게 말했다.“삼촌, 빨리 작은삼촌에게 전화해요.”“그래, 이번 달 마침 병원 수입이 좋지 않았는데 이참에 돈을 제대로 거둬야지.”남자는 심지안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어쩌면 돈도 여자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경찰과 엮이는 건 두려워할 테니 말이다.‘저년이 돈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어느 부잣집 사장님의 애인 아니야? 그래서 일이 커질까 봐 저렇게 덜덜 떠는 거겠지?’심지안은 우아하게 커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는 경찰 지인에게 연락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씨 가문도 분명 경찰서에 인맥이 있으니 말이다.“나에게 맡겨요.”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곧 재미난 구경이라도 있는 듯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그래요, 아빠에게 맡겨요. 저랑 아빠가 고모를 보호해 드릴게요.”성우주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심지안은 그런 아이가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우주가 내 아이였으면 좋겠네. 이렇게 잘생기고 사람 마음을 잘 헤아
“작은삼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피해자라고요...”“조용히 하세요.”오지석은 짜증 섞인 얼굴로 음흉한 남자 의사를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뒷수습을 하려고 했다.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었다.오지석은 전에 다른 큰 사건 때문에 바빠서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침 큰 사건을 끝낸 그에게 성연신은 문자를 한 통 보냈다.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동료가 그와 같은 곳으로 가는 걸 보고 대충 일의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나이도 많은 동료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폐만 끼치고 있으니 그는 여간 짜증이 나지 않았다.“아니... 작은삼촌, 저 사람 누구예요? 왜 사람들이 다 굽신거리죠?”음흉한 남자 의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몰라, 그런데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성연신이잖아요, 성원그룹 대표님.”어떤 젊은 경찰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두 분, 큰일 난 것 같은데요?”음흉한 남자 의사와 그의 삼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리에 힘이 털썩 풀렸고 곧바로 얼굴색도 어두워졌다.젊은 경찰이 가볍게 말했으니 일부러 그들에게 겁주는 줄 알았다.오만방자하기로 소문이 난 성원그룹 대표이자 제경에서 남다른 권력을 누리고 있는 성연신은 분명 성격이 화끈할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있고 참는 걸 보면 젊은 경찰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성연신은 참고 있는 게 아니라 심지안을 만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바보 같은 인간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은 성연신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으니 어마어마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제경에 발령 나셨어요?”심지안은 오랜만에 오지석을 만나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 몇 년 전에 큰 사건 하나 해결하고 승진했어요.”오지석이 남자 의사와 원장을 노려보며 물었다.“괜찮으시죠? 괴롭힘당한 건 아니죠?”성우주가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만만
“참견하지 말아요.”심지안이 그를 흘겨보고는 곧바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성우주에게 말했다.“나 갈게, 안녕.”“고모, 조심히 가세요.”성연신은 멀어져 가는 심지안을 빤히 지켜봤다. 가녀린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움켜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말해봐, 왜 나를 못 쫓아가게 하는 거야?”“그러니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그게 무슨 말이야?”“홍지윤이라는 아줌마가 아직 우리 집에 갇혀있는 거 아니에요? 돌아가서 고모의 아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잘 물어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고모를 찾아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성연신이 흠칫했다.“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성연신은 홍지윤에 관한 일을 모두 성우주에게 숨겼었다. 그런데 아이가 이 정도로 예민할 줄이야...“아빠가 변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요.”성우주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도 친구가 하나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동생이든 누나든 형이든 다 좋아요. 그러면 저랑 재한이랑 같이 놀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거잖아요.”‘무엇보다 고모와 아빠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두 사람이 화해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진유진과 심지안은 서로 목적지가 달랐기에 진유진이 먼저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떴다.그리고 오지석은 경찰차로 심지안을 성씨 가문에 데려다줬다.가는 길에 그는 몇 번이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심지안은 인내심 있게 조용히 기다렸고 오지석을 재촉하지 않았다.“연신이는 좋은 사람이에요.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지안 씨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그때 지안 씨가 수술실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도 연신이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지안 씨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해서요.”심지안이 눈을 끔뻑거렸다.“지석 씨도 나와 연신 씨가 화해하길 바라는 거예요?”“그게 아니라.”오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혹시 지안 씨에게 연신이가
심지안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고청민은 믿을 수 없었는지 눈이 커졌고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비몽사몽인 채로 눈을 뜬 심지안은 침대 옆에 있던 고청민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돌아왔어요?”고청민이 그녀를 덥석 껴안고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향을 마음껏 탐닉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심지안을 몸 안에 녹일 듯이 힘을 줬다.심지안이 정신을 차리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를 맡았다.“술을 마셨어요?”“지안 씨, 말하지 마요. 조금만 더 안고 있을게요.”심지안이 얼어붙었다.“얼른 돌아가서 자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그러니까 내가 지안 씨를 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뜨거운 숨결이 심지안의 목덜미 사이로 뿌려져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 불편함을 느꼈다.“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청민 씨도 술을 마셨으니 일찍 돌아가서 쉬어야죠. 아니면... 혹시 회사에서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나요? 말해봐요,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면 훨씬 홀가분해질 거예요.”심지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동문서답했다.고청민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좁히고 싶지 않았다.“내가 싫어요?”고청민이 뜬금없이 물었다.그의 가련한 눈에서 따뜻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안은 마음이 찔렸는지 빠르게 대답했다.“아니에요. 청민 씨는 내 약혼자인데 왜 싫겠어요?”그녀를 안고 있던 고청민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잇따라 한껏 잠긴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오늘 밤 돌아가기 싫어요. 나 여기에 머물러도 될까요?”고청민은 지금 바로 심지안을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몸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면 더는 성연신을 생각하지 않겠지?심지안은 몸이 굳어져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나 지안 씨를 가지고 싶어요. 지금 말이에요.”고청민이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는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안... 안 돼요.”심지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청민이 입술을 그녀의 볼에 겹쳤을 때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다.“미안해요.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심지안은 이런 자신이 답답했다.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청민의 얼굴색이 어두워졌고 그의 눈빛은 실망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억눌렸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그는 이성을 잃고 다시 그녀를 덮치면서 그녀의 얇은 잠옷을 힘껏 찢었다.“지안 씨가 성연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어요. 지안 씨는 내가 그렇게 싫어요? 5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꼭 지안 씨를 강요해야 할까요?”심지안은 눈이 커지더니 뽀얀 속살이 드러난 가슴팍을 가리고는 말했다.“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나 일부러 청민 씨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그녀조차도 왜 성연신에 관한 꿈을 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고청민이 왜 오늘에 돌변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고청민에게 상처를 준 듯하다.“일부러가 아니라고요? 그럼 도대체 왜 나를 밀어내는 거예요? 말해봐요!”벌게진 고청민의 눈에 광기가 서렸있었다. 뻔히 대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물어본 거나 다름없었다.지금 고청민은 평소 점잖은 소년미가 가득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심지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이내 자책감이 들었다.고청민이 이렇게 된 건 그녀의 책임이 없지 않았다.“나 청민 씨 밀어내지 않을게요. 청민 씨 말이 맞아요. 우린 어차피 부부가 될 거예요.”심지안은 몸부림을 멈추고는 벌게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무고하고도 불쌍한 눈빛을 본 고청민은 가슴이 아팠다. 그도 이렇게 심지안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잠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약혼녀를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이건 고청민에게 치욕을 안겨준 거나 다름없었다.고청민은 술김에 심지안의 마지막 옷까지 찢었다.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난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심지안과 눈을 마주치자 고청민은 살짝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