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성연신은 덤덤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 때문에 불쾌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를 높였다.“아니요, 난 지안 씨를 지켜야 해요. 고청민의 옆에 있는 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고청민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심지안이 기억을 잃은 양 진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게 했는지 성연신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심지안을 이대로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물론 다시 그녀와 만나길 바라는 사심도 있었다. 아무리 그 가능성이 작다고 하더라도 말이다...심지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가 연신 씨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전에 연신 씨도 나 많이 괴롭혔잖아요.”“그게...”5년 전에 있었던 얘기만 꺼내면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젊고 철없을 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도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었지만 그래도 고청민처럼 겉과 속이 다른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척하지만 사실은 남몰래 음흉하고 더러운 거래나 하고 말이다.성우주는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심지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고모, 화내지 마세요. 아빠가 말을 정말 못하시거든요.”진유진은 어이가 없었다.성연신이 벙어리로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말을 못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응, 괜찮아.”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심지안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이제 가야 하니까 다음에 다시 보자.”성우주는 다급한 마음에 자기 팔을 힘껏 꼬집으며 눈물을 겨우 짜내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엉엉, 고모, 가지 마요. 가지 마세요.”깜짝 놀란 심지안은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웅크려 앉아 아이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아이는 심지안의 품에 쏙 안기더니 거짓말을 해서인지 얼굴이 불그스름해져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저 팔이 아파요...”‘정말 창피하네. 평소에 거짓말하는 애들 제일 싫어했는데. 오늘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겠네. 어휴. 아빠
심지안이 고개를 돌리자 성연신과 눈이 마주쳤다. 예쁜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녀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직원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성우주가 한발 먼저 대답했다.“아니에요, 고모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제 엄마가 아니세요.”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셔서...”게다가 방금 말을 한 꼬마는 트렌치코트에 카키색 셔츠를 입었는데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얌전하고 잘생긴 데다가 허리를 곧게 펴니 뒤에 선 남자와는 판박이였다. 분명 커서도 수많은 소녀들을 매료시킬 멋진 모습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괜찮아요, 저도 익숙해요. 어차피 저는 엄마가 없으니까요.”성우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심지안은 가슴이 비수에 꽂히듯이 아팠다. 그리고 갑자기 성연신과 아이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성우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핫윙을 사달라며 조른 것도 아니지만 심지안은 아이의 눈빛 속에서 갈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당연히 보잘것없는 핫윙을 향한 갈망은 아니었다. 그가 갈망하는 건 엄마의 따뜻한 사랑, 그리고 가족애였다.진유진은 조용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런 가족사진은 반드시 가게 홍보용으로 쓰일 것이고 장기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띌 곳에 놓일 텐데 곧 고청민과 결혼할 사람인 심지안에게는 충분히 고사할 만한 일이었다.심지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미간을 구기더니 이내 미간을 펴고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우주에게 말했다.“너에게도 엄마가 생길 거야, 다만 엄마가 아직 일이 있어서 네 곁에 못 오고 있는 것뿐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성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그는 다른 여자가 엄마로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아빠처럼 오로지 심지안만을 엄마로 원하는데 말이다.심지안은 KFC에 오랜만에 왔기에 에그타르트 한 박스와 커피 두 잔, 그리고 감
진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심지안을 향해 말했다.“환자의 돈을 뜯어먹는 개인 병원이 있는 건 알았지만 대놓고 사기 치는 병원은 처음 보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심지안의 얼굴에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았다.예쁜 그녀의 얼굴이 한껏 어두워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했다.심지안은 이상한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 돈을 좀 쓰려고 했는데 상대가 그녀를 바로 호구로 볼 줄이야.“2억이 없는 건 아닌데 제가 왜 돈을 줘야 하죠? 당신들,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는데 내가 왜 돈을 내놔야 하죠?”그녀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참, 의료 장비가 많이 비싼 거로 아는데 경찰에 신고하는 건 어떨까요? 경찰이 와서 직접 조사한 뒤에도 저보고 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순순히 돈을 낼게요.”“그래요, 그렇게 하죠.”음흉한 남자가 바로 대답하고는 실눈을 뜬 채 옹졸한 목소리로 원장에게 말했다.“삼촌, 빨리 작은삼촌에게 전화해요.”“그래, 이번 달 마침 병원 수입이 좋지 않았는데 이참에 돈을 제대로 거둬야지.”남자는 심지안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어쩌면 돈도 여자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경찰과 엮이는 건 두려워할 테니 말이다.‘저년이 돈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어느 부잣집 사장님의 애인 아니야? 그래서 일이 커질까 봐 저렇게 덜덜 떠는 거겠지?’심지안은 우아하게 커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는 경찰 지인에게 연락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씨 가문도 분명 경찰서에 인맥이 있으니 말이다.“나에게 맡겨요.”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곧 재미난 구경이라도 있는 듯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그래요, 아빠에게 맡겨요. 저랑 아빠가 고모를 보호해 드릴게요.”성우주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작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심지안은 그런 아이가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우주가 내 아이였으면 좋겠네. 이렇게 잘생기고 사람 마음을 잘 헤아
“작은삼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피해자라고요...”“조용히 하세요.”오지석은 짜증 섞인 얼굴로 음흉한 남자 의사를 옆으로 밀어버리고는 뒷수습을 하려고 했다.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었다.오지석은 전에 다른 큰 사건 때문에 바빠서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마침 큰 사건을 끝낸 그에게 성연신은 문자를 한 통 보냈다.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동료가 그와 같은 곳으로 가는 걸 보고 대충 일의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나이도 많은 동료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폐만 끼치고 있으니 그는 여간 짜증이 나지 않았다.“아니... 작은삼촌, 저 사람 누구예요? 왜 사람들이 다 굽신거리죠?”음흉한 남자 의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몰라, 그런데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성연신이잖아요, 성원그룹 대표님.”어떤 젊은 경찰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두 분, 큰일 난 것 같은데요?”음흉한 남자 의사와 그의 삼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리에 힘이 털썩 풀렸고 곧바로 얼굴색도 어두워졌다.젊은 경찰이 가볍게 말했으니 일부러 그들에게 겁주는 줄 알았다.오만방자하기로 소문이 난 성원그룹 대표이자 제경에서 남다른 권력을 누리고 있는 성연신은 분명 성격이 화끈할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있고 참는 걸 보면 젊은 경찰이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성연신은 참고 있는 게 아니라 심지안을 만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바보 같은 인간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은 성연신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으니 어마어마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제경에 발령 나셨어요?”심지안은 오랜만에 오지석을 만나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 몇 년 전에 큰 사건 하나 해결하고 승진했어요.”오지석이 남자 의사와 원장을 노려보며 물었다.“괜찮으시죠? 괴롭힘당한 건 아니죠?”성우주가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만만
“참견하지 말아요.”심지안이 그를 흘겨보고는 곧바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성우주에게 말했다.“나 갈게, 안녕.”“고모, 조심히 가세요.”성연신은 멀어져 가는 심지안을 빤히 지켜봤다. 가녀린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움켜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말해봐, 왜 나를 못 쫓아가게 하는 거야?”“그러니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요.”“그게 무슨 말이야?”“홍지윤이라는 아줌마가 아직 우리 집에 갇혀있는 거 아니에요? 돌아가서 고모의 아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잘 물어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한 대답을 듣고 고모를 찾아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성연신이 흠칫했다.“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성연신은 홍지윤에 관한 일을 모두 성우주에게 숨겼었다. 그런데 아이가 이 정도로 예민할 줄이야...“아빠가 변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요.”성우주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도 친구가 하나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동생이든 누나든 형이든 다 좋아요. 그러면 저랑 재한이랑 같이 놀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거잖아요.”‘무엇보다 고모와 아빠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두 사람이 화해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진유진과 심지안은 서로 목적지가 달랐기에 진유진이 먼저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떴다.그리고 오지석은 경찰차로 심지안을 성씨 가문에 데려다줬다.가는 길에 그는 몇 번이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심지안은 인내심 있게 조용히 기다렸고 오지석을 재촉하지 않았다.“연신이는 좋은 사람이에요.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지안 씨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그때 지안 씨가 수술실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도 연신이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지안 씨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해서요.”심지안이 눈을 끔뻑거렸다.“지석 씨도 나와 연신 씨가 화해하길 바라는 거예요?”“그게 아니라.”오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혹시 지안 씨에게 연신이가
심지안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고청민은 믿을 수 없었는지 눈이 커졌고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비몽사몽인 채로 눈을 뜬 심지안은 침대 옆에 있던 고청민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돌아왔어요?”고청민이 그녀를 덥석 껴안고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향을 마음껏 탐닉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심지안을 몸 안에 녹일 듯이 힘을 줬다.심지안이 정신을 차리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를 맡았다.“술을 마셨어요?”“지안 씨, 말하지 마요. 조금만 더 안고 있을게요.”심지안이 얼어붙었다.“얼른 돌아가서 자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그러니까 내가 지안 씨를 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뜨거운 숨결이 심지안의 목덜미 사이로 뿌려져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 불편함을 느꼈다.“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청민 씨도 술을 마셨으니 일찍 돌아가서 쉬어야죠. 아니면... 혹시 회사에서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나요? 말해봐요, 같이 방법을 생각해 보면 훨씬 홀가분해질 거예요.”심지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동문서답했다.고청민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좁히고 싶지 않았다.“내가 싫어요?”고청민이 뜬금없이 물었다.그의 가련한 눈에서 따뜻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안은 마음이 찔렸는지 빠르게 대답했다.“아니에요. 청민 씨는 내 약혼자인데 왜 싫겠어요?”그녀를 안고 있던 고청민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잇따라 한껏 잠긴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오늘 밤 돌아가기 싫어요. 나 여기에 머물러도 될까요?”고청민은 지금 바로 심지안을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몸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면 더는 성연신을 생각하지 않겠지?심지안은 몸이 굳어져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나 지안 씨를 가지고 싶어요. 지금 말이에요.”고청민이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는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안... 안 돼요.”심지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청민이 입술을 그녀의 볼에 겹쳤을 때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다.“미안해요.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심지안은 이런 자신이 답답했다.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청민의 얼굴색이 어두워졌고 그의 눈빛은 실망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억눌렸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그는 이성을 잃고 다시 그녀를 덮치면서 그녀의 얇은 잠옷을 힘껏 찢었다.“지안 씨가 성연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어요. 지안 씨는 내가 그렇게 싫어요? 5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꼭 지안 씨를 강요해야 할까요?”심지안은 눈이 커지더니 뽀얀 속살이 드러난 가슴팍을 가리고는 말했다.“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나 일부러 청민 씨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그녀조차도 왜 성연신에 관한 꿈을 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고청민이 왜 오늘에 돌변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고청민에게 상처를 준 듯하다.“일부러가 아니라고요? 그럼 도대체 왜 나를 밀어내는 거예요? 말해봐요!”벌게진 고청민의 눈에 광기가 서렸있었다. 뻔히 대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물어본 거나 다름없었다.지금 고청민은 평소 점잖은 소년미가 가득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심지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이내 자책감이 들었다.고청민이 이렇게 된 건 그녀의 책임이 없지 않았다.“나 청민 씨 밀어내지 않을게요. 청민 씨 말이 맞아요. 우린 어차피 부부가 될 거예요.”심지안은 몸부림을 멈추고는 벌게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무고하고도 불쌍한 눈빛을 본 고청민은 가슴이 아팠다. 그도 이렇게 심지안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잠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약혼녀를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이건 고청민에게 치욕을 안겨준 거나 다름없었다.고청민은 술김에 심지안의 마지막 옷까지 찢었다.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난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심지안과 눈을 마주치자 고청민은 살짝 마음
덤덤한 표정의 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안 왔어요.”홍지윤이 멈칫하더니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왜 안 왔어요? 아이의 행방을 알고 싶지 않은 건가요?”“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말문이 막힌 홍지윤은 한참 지나 코웃음을 치고는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당연히 상관있죠. 만약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으면 내가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고 해도 당신은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있잖아요.”성연신보다 홍지윤은 심지안을 더 믿었다.그녀를 루갈에 5년이나 가둔 걸로 봐선 성연신이 얼마나 매정하고 모진 마음을 먹은 사람인지 잘 보아낼 수 있었다.성연신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테이블 서랍에서 박스 하나 꺼내고는 말했다.“이 안에 출국할 수 있는 비자, 현금, 신분증 다 있어요. 당신에게 10분밖에 안 주어졌으니 말할지 안 할지는 당신 마음대로 해요.”홍지윤은 멈칫하더니 그 박스를 열어보려고 다급하게 앞으로 걸어갔다.중심을 잃어서인지 그녀는 걸음을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해 겨우 똑바로 섰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열어 꿈에서도 그리던 신분증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는 새로운 이름이 쓰여 있었다.그녀만의 이름이었다. 앞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과거와 완전히 작별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녀에게는 실로 사치스러운 것들이었다.눈시울이 붉어진 홍지윤은 설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연신에게 물었다.“사실대로 말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출국하는 비행기를 먼저 준비해 줘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줄게요.”솔직히 그녀는 성연신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비밀 조직에 몸을 담갔던 그녀가 이 비밀을 알지 못했더라면 성연신은 그녀를 지금까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그러죠.”의외로 성연신은 빠르게 동의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고 거의 무관심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했다.지금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