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안에서.소장이 직접 성연신에 커피를 건네는 걸 본 엄교진은 얼굴색 한 번 바뀌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는 알겠으나 환자분의 자료는 함부로 공개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정욱은 이미 예상했기에 여전히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교수님, 제가 찾아봤는데 심지안 씨가 예약하거나 정보를 등록한 것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교수님 환자라고 할 수도 없으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마음이 내키지 않은 엄교진은 미간을 구겼다.도윤지도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환자 본인의 동의도 없이 조사를 시작했다니, 정말 프라이버시 의식이 취약하군. 수준 떨어져. 반대로 청민 선배님은 얼마나 선을 잘 지키는데. 나라도 청민 선배님을 선택하겠어.’소장이 한심한 얼굴로 엄교진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자네 정말 답답하군. 말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대표님도 심지안 씨가 걱정되어서 물어본 것이니 그 친구의 몸 상태가 어땠는지만 솔직하게 말해주게.”“심지안 씨의 몸 상태는 안 좋았습니다. 우울증도 앓고 있는 것 같고요.”엄교진이 성연신을 빤히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심지안 씨는 5년 전에 성연신 대표님과의 결혼 생활로 큰 타격을 받고 트라우마가 생겼거든요. 제 학생도 심지안 씨를 치료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성연신은 마음이 씁쓸했다.“정말 지안 씨가 우울증에 걸린 게 확실해요?”엄교진이 흠칫했다. 직접 진단하진 않았지만 심지안의 정신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고청민은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으니 아마 그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네, 심한 우울증을 앓고 계십니다. 정말 심지안 씨를 위해 생각하신다면 대표님도 더는 심지안 씨를 찾아가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그 말을 듣자 안철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X끼랑 똑같은 말이잖아.’그는 성연신에게 귓속말로 말했다.“대표님, 이 엄교진이라는 교수도 고청민과 같은 편이 아닐까요?
7월의 제경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37, 8도에 달하여 차 밖은 불볕더위처럼 후텁지근했지만 차 안에는 에어컨 덕분에 20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운전기사가 워낙 운전을 안정적으로 잘하니 집에 있는 거나 다를 바 없이 편안했지만, 불과 한 시간 거리에도 성동철은 운전기사를 몇 번이나 재촉했다. 운전기사는 그런 성동철의 닦달에 마음이 괴로웠고 식은땀까지 뻘뻘 흘렸다.40분 후, 성동철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란히 문 앞에 서서 그를 맞이하는 심지안과 고청민 두 사람을 발견했다.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잔뜩 굳은 성동철의 얼굴은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는 비싼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걸어갔다.“할아버지, 즐거우셨어요? 카카오 스토리에 올린 풍경 사진을 보니까 저까지 세움에 휴가를 내고 싶더라고요. 시간이 되면 지안 씨랑 같이 여행 가야겠어요.”고청민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성동철에게 인사를 건넸다.“괜찮았어.”성동철은 덤덤한 얼굴로 무심한 듯이 물었다.“너랑 지안이는 준비가 잘 되어가? 결혼식까지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때 가서 나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모든 준비는 마쳤어요. 이제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성동철이 고개를 끄덕인 후 심지안을 바라봤다.“지안이는, 기분이 좀 나아졌어?”심지안이 입술을 오므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네, 많이 괜찮아졌어요.”“그런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여?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그게...”심지안이 머뭇거렸다.“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서요.”“병원에 안 가봤어?”“아니요, 오후 내내 잤어요.”성동철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온도 체크를 하더니 고청민에게 물었다.“왜 지안이를 데리고 병원에 안 갔어?”고청민이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아직 안 갔어요. 내일 지안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갈게요.”“나 괜찮아요. 머리 아픈 것만 빼면 다 괜찮아요. 게다가 지금 많이 나아졌는데요, 뭐.”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심지안은 고
“아닙니다, 어르신. 도련님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집사인 저는 도련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에요.”하지만 성동철은 속을 뻔히 내다보는 사람이었기에 집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재무팀에 가서 월급을 받고는 이 집에서 당장 나가.”집사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그는 꿈에도 이렇게 엄중한 결과가 기다릴 거로 생각하지 못해 철썩 무릎을 꿇었다.“어르신, 제가 성씨 가문에서 10년 넘게 열심히 일한 걸 봐서라도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성씨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서야. 이보다 더 멍청한 잘못이 어디 있어?”성동철은 인내심을 잃고 손을 내저으면서 빨리 나가라고 했다.집사는 몸을 흠칫 떨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는 실수를 한 자신 때문에 후회가 몰려왔다.성동철은 그동안 계속 자애로운 어르신의 이미지를 보였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스스로 A 국의 주얼리 시장을 연 개척 공신일 정도로 능력이나 기개가 대담한 사람이었다.성동철은 바로 고청민을 부른 대신 세움 임원들에게 내일 아침 일찍 이사회를 열 거라는 통보를 내렸다.그는 고청민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을 한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다. 게다가 성씨 가문의 사람까지 끌어서 그를 속이려고 했으니 이건 저지르면 안 되는 큰 실수였다.‘내가 청민이를 제대로 교육해야겠네. 아니면 앞으로 지안이까지 괴롭히면 어떻게 해?’...성씨 가문의 본가 저택에서.성연신이 스스로를 서재에 가두면서 밥도 먹지 않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성우주가 국수를 들고 오고는 애어른처럼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왜 안 드시는 거죠? 어른인데도 전혀 말을 듣지 않네요.”성수광이 휠체어에 앉은 채 콧방귀를 뀌었다.“저놈을 신경 써서 뭐 해. 하루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증조할아버지는 아빠가 걱정 안 되세요?”“걱정이 안 돼. 말 안 하니까 훨씬 좋은데? 적어도 말할 때보다는 사람이 호감이 가네.”성우주는 반듯하게 차려입고
고청민이 맑은 눈망울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어제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성동철은 피곤하다며 방에 들어가 쉬었고, 그와 다른 얘기를 더 나누지도 않았다.심지안은 의아한 얼굴을 보였다.‘그럼 할아버지가 모두에게 비밀로 하셨다는 얘긴데. 무슨 중대한 사항을 발표하려고 하시나?’심지안은 앞으로 두 번째 줄 고청민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청민의 앞이 바로 성동철의 자리였다.한참 지나고서야 성동철이 도착했다.“여러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어요.”성동철이 지팡이를 내려놓고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은 채 한가운데의 자리에 앉았다.“아닙니다. 저희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오랜만에 어르신의 얼굴을 뵐 수 있으니 저희야 영광이죠.”“맞습니다. 어르신이라면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참, 식사는 하셨습니까? 마침 어르신께서 가장 좋아하는 만둣집에 들렀다가 조금 포장했습니다.”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아부를 떨었다. 방금까지는 얼굴이 굳어 있던 임원들은 모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성동철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필요 없습니다.”성동철이 손을 내젓고는 비서더러 프로젝터를 켜라고 했다.“시작하죠. 앞으로 3년 동안 매출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지, 또 여러 가지 지출이 어느 정도 될지 토론해야죠.”물론 회사의 상황을 체크하는 건 이번 이사회의 중점이 아니었지만 이사회에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했다.그리고 보통 이사회가 끝날 때쯤이어야 중요한 얘기가 오가곤 했다.한 시간 후, 비서가 PPT를 끄고는 성동철에게 말했다.“어르신, 보고는 전부 마쳤습니다.”“좋아요.”성동철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심지안을 보고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지안이가 제 손녀인 건 다들 아시죠?”같은 시각, 심지안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몰랐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람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고청민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는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는데요.”“마침 나도 시간이 있네.”성동철이 비서에게 말했다.“따라올 필요 없어요. 오늘 바로 지안이랑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지분 양도 계약서를 잘 작성하세요.”...널찍한 사무실에서.성동철은 전용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눈앞에 놓인 백옥 바둑알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앉아.”고청민이 허리를 곧게 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잘못을 저질러 할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제가 어찌 감히 자리에 앉겠습니까.”성동철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 그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뭘 잘못했는데?”“저랑 지안 씨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신 후 보게 될까 봐 그만 집사님에게 CCTV를 삭제하라고 했어요.”“부부는 다투기 마련이지. 그렇다고 CCTV를 삭제해?”고청민이 고개를 들자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는 듯한 성동철과 눈을 마주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면서 최대한 완벽한 거짓말을 지어내려고 했다.“할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네요. 사실 작은 말다툼 정도가 아니었어요. 지안 씨가... 파혼을 하고 다시 성연신 씨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거든요. 일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제가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조처를 했어요.”바둑알을 굴리고 있던 성동철의 손이 급작스레 멈췄다.그는 오늘 아침 그의 앞길을 막았던 성수광을 떠올렸는데 성수광은 심지안과 고청민 사이의 결혼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고청민은 조용히 성동철의 표정을 관찰했는데 그가 의심하지 않은 것 같아 계속 말했다.“저는 지안 씨를 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지안 씨를 방에 가뒀죠. 하지만 지안 씨가 계속 나가려고 했고, 또 정신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아서 제가 지안 씨를 어르고 달래며 정신과 병원으로 갔었죠.”“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필요하면 진정제 주사를 맞아도 된다고요. 집에 돌아와도 지안 씨가 계속 어리광을 부리니까 저도 부득이하게
심지안이 업무를 모두 마친 후 바로 회사를 떠났다. 물론 병원으로 가는 걸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그녀는 방매향과 마주쳤다.방매향이 그녀를 보더니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지안 씨, 괜찮아요? 연신이가 나에게 다 말했어요.”“네? 저야 당연히 괜찮죠.”심지안은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지만 그녀는 얼굴이 푸석하고 입술이 바짝 말라 많이 피곤해 보였다.방매향은 그런 심지안의 모습을 보더니 가슴이 아팠다.“지안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중에 연신이와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안 씨가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요. 그 어떤 일 때문에라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 곁에 억지로 남을 필요 없어요.”심지안은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방매향의 말에 대답했다.“방매향 씨도 연신 씨와는 달리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저는 앞으로 더는 연신 씨와 얽힐 일이 없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는 계속 방매향 씨를 보통 직원으로 대할 거예요, 연신 씨 때문에 일부러 괴롭히거나 이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그 말을 들은 방매향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들렸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심지안은 머릿결을 정리한 후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하지만 고청민은 이 모든 걸 휴대폰으로 전송된 CCTV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짜증이 몰려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던진 후 눈을 꼭 감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사실 그도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겨두면 도움은커녕 시한폭탄에 불과했으니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방매향 씨, 제가 아닌 당신의 운명을 탓하세요.’고청민이 눈을 뜬 후 지난번에 받은 송석훈의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요 며칠 동안 심지안 때문에 그는 계속 송석훈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이 그때가 온 것 같았다.심지안이 세움을
“저도 당연히 성연신을 제고하고 싶죠. 다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제가 알아봤는데 성연신은 이틀 후에 성수광 대신 전우에게 제사를 지내러 제원 파크로 간다고 해요. 제원 파크는 산 정상에 있어 도착하려면 반드시 산길을 지나야 하죠. 거기는 인적이 드물고 신호가 좋지 않아 구조를 요청해도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릴 거예요. 그러니 제원 파크에서 손을 쓰면 분명 성원신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송석훈이 차를 마시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3일 후에 있을 심지안 씨와의 결혼식 때문인가요?”고청민은 몸을 흠칫 떨었지만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불필요한 번거로움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이 타이밍에 성연신을 제거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그럼 저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생각인가요?”“성연신이 죽으면 찾고 계신 분을 바로 드리겠습니다.”고청민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방매향이 입사할 때 개인 정보를 모두 똑똑히 작성하진 않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그녀의 주소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연신은 자기가 방매향을 잠 숨겨놓은 줄 알고 있고, 또 아무도 방매향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하느님도 성연신이 눈에 거슬려 나를 도와주고 계신 거 아닐까?’송석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찻잔을 그에게 건네고는 말했다.“그럼 앞으로 잘해봅시다. 술 대신 차로 미리 승리를 자축할까요?”고청민이 찻잔에 담긴 녹차를 바라봤다. 차향이 코끝을 스쳤고 그는 찻잔을 들어 송석훈과 살짝 잔을 부딪쳤다.“네, 앞으로 함께 잘해보죠.”하지만 그는 바로 차를 마신 게 아니었다.그는 송석훈이 차를 마신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한 모금 들이마셨다.모레 손을 쓸 구체적인 얘기를 다 나누고 고청민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자리에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웠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하얗고 고운 그의 얼굴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송석훈이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는 옷 주름을 매만지고 자리를 떴다. 마치 이곳에 일어난 모든 일이 그와 상관없는 듯이 홀가분하게 말이다.그가 떠난 걸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송준은 카메라를 조정하고 고청민을 보더니 씩 웃음을 터뜨렸다.“아직도 참는 거예요? 임시연 씨, 적극적으로 안 움직일 거예요?”비밀 조직은 공짜로 인재를 육성하지 않는다. 조직의 혜택을 받았으니 조건 없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게다가 만약 임시연이 그때 비밀 조직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기껏해야 부자들에게 몸을 내주며 돈을 받는 꽃뱀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되는 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임시연은 당연히 그 도리를 알았고 비밀 조직으로 들어온 후 해야 할 첫 번째 일도 바로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종종걸음으로 고청민에게 걸어가고 희고 고운 속살을 고청민의 팔에 겹쳤다.“청민 씨 많이 괴롭다는 걸 알고 있어요.”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은 탓에 고창민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다 보니 그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있는 힘껏 테이블 모서리를 잡은 그는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손등의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콧속이 뜨거워지더니 코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큰 핏자국이 점점 번지면서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여졌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송준이 흠칫 놀랐다.‘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욕구가 불타올라 코피까지 흘리는 거야?’“미쳤어요? 그대로 참으려고 해요?”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게 무슨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임시연도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청민이 이대로 죽게 될까 봐 두려웠다.또 송석훈이 내린 미션을 완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 허겁지겁 고청민의 버클을 풀어 이 일을 빨리 끝내려고 했다.고청민이 고개를 확 들더니 붉은 핏줄로 뒤덮인 두 눈을 보였다. 분노 어린 그의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