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의 차가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런 표정을 지었겠죠.”10여 년간 못 본 어머니는 새 얼굴과 새 신분으로 다시 그와 만나게 되었다. 반가움과 낯섦, 그리고 놀라움... 심지안은 방매향의 행동들을 떠올렸다. 자세히 보면 확실히 일반인과 달랐다.사치품에 대해 잘 알지만 사치품에 눈이 멀지 않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브랜드만 입는다. 수수한 얼굴이지만 우아한 기품이 있었다. 기품이라는 것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심지안은 그저 고귀한 사모님이 파산해서 일하러 나온 줄 알았다.심지안 같은 일반인에게 이건 너무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같았다.“왜 세움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보광 중신이나 성원 그룹으로 가도 괜찮잖아요.”“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비밀 조직에서 눈치채기 쉬우니까요.”눈을 깜빡이던 심지안은 갑자기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었다...송석훈과 거래를 하지 않아서.방매향은 그렇게 오랜 시간 갇혀서 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 도망쳐 나와도 매사에 신경 쓰며 조심해야 했다.성연신은 심지안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또 웃는 것을 보고 그녀가 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송석훈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어요?”심지안은 약간 멍해 있다가 다시 침착하게 얘기했다.“송석훈이 누구예요? 왜 저랑 연락해요?”“연기 그만 해요.”성연신은 그녀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그날 제 어머니를 만나보겠다 한 건 송석훈 때문이죠? 그런데 갑자기 후회됐나봐요?”“...알고 있었어요?”“당연하죠.”심지안은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워서 아무 곳에나 숨고 싶었다.하지만 심지안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이미 알았다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아무 말 안 할게요. 어차피 연신 씨를 판 건 아니니까요.”심지안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보면서 당당하게 얘기했다.“탓하는 게 아니에요. 걱정하는 거지.
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심지안 곁으로 와 물었다.“왜요?”심지안은 난감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방매향 씨... 좀 불러줄래요?”“어디 아파요?”놀란 성연신이 배를 그러안은 심지안을 쳐다보았다.“배가 아파요? 같이 병원 가요.”“아니에요. 그저 방매향 씨만 좀 불러달라니까요!”조급해진 심지안이 재촉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안 돼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성연신은 물러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걱정되어 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다.“잠깐, 알았어요! 그러니까... 생리가... 터졌어요.”심지안은 급하게 얘기하며 창피함 때문인지 화가 나서인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굳이 이렇게 난감하게 만들어야 해?’정말 쓰레기...성연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배가 아파와서 심지안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생리 첫날은 너무 아파서 약을 먹어야 했다. 성연신은 흠칫하더니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외투를 벗어 그녀의 허리에 매주고 바로 그녀를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심지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눈에 반항심은 가득했다. 커다란 남자의 품에 안기니 심지안은 더욱 자그마해 보였다.“일단 차에 데려가 줄게요. 이렇게 직원들 앞에 설 건 아니죠?”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 만져보았다.“설마 치마에 이미...”사실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움직인다면 붉은 피로 물들 것이다. 그래서 성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네. 아주 잘 알려요.”그 말에 심지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성연신이 방매향에게 연락해 생리대를 챙겨오라고 하기를 기다렸다.차 안의 온도는 딱 적합했다. 정욱은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설렜다.‘재결합 한 건가? 너무 갑작스러운데...’성연신이 정욱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아직 말하기도 전에 정욱이 먼저 얘기했다.“제가 내리면 되죠?”성연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얘기했다.“응.”
따듯한 손바닥이 적당한 강도로 복부를 문질러 심지안의 통증을 완화했다.그녀는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는데 삭신이 쑤시고 손발까지 차가웠다.지금 이 순간에도 심지안은 그가 가져다준 편안함을 탐닉하고 싶어 그를 밀어내기 싫었다.‘쪽팔려!’심지안은 이런 자신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반박하지도 않고 입을 삐죽 내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옷이랑 차는 제가 물어줄게요.”성연신은 손으로 계속 그녀의 배를 어루만져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눈빛에는 따듯함과 부드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성연신이 한참 배를 어루만져줬고, 또 차 안의 온도가 맞춤하게 조절되었기에 심지안은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연신이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먼저 옷 갈아입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 부르고요. 속옷도 샀으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갈아입어요. 차에 묻어도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심지안은 부끄러운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거절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소한 배려를 해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것이었다.성연신은 손에 잡힌 대로 산 속옷이라도 했지만 사이즈고 스타일이고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심지안은 속옷의 사이즈를 살폈는데 역시 그녀가 평소에 입던 사이즈였다.그리고 생리대도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브랜드였다. 5년이 지났어도 성연신이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니...심지안은 마음속에 따뜻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에 관한 사소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성연신은 근처에 약국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회사 여직원들이 생리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워하면 진통제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빠르게 약국으로 걸음을 옮겼다.약은 독성 있고, 너무 진통제에 의존해도 안 되었지만 성연신은 심지안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차마 지켜볼 수는 없었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진열대를 훑어보면서 진통제를 찾았다.약을 정리하던 직원이 훤칠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눈이
심지안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잘 맞아요. 하지만 이제는 레이스를 안 좋아하거든요. 어쨌든 순면보다는 편하지 않으니까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걸로 사주세요. 아, 아니다. 나이도 있으신데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있는 걸로 사면 직원들이 특이한 취향이 있는 걸로 오해하겠어요.”성연신의 얼굴색이 한껏 어두워졌다.‘독설이 갈수록 심해지네.’심지안은 어두워진 그의 얼굴색을 보더니 기분이 좋아져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고 있는 듯한 정욱에게도 인사를 건넸다.정욱이 잠깐 멈칫하고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헤헤, 이번에는 화해했겠지?’마침 정욱의 어머니는 요즘 자꾸 옆 동네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맞선을 주선했는데 상대와 똑바로 얘기를 하고 서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내일 휴가를 낼 참이었다.정욱이 차로 돌아가고는 휴가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백미러로 한껏 어두워진 성연신의 얼굴을 발견한 후 곧바로 하려던 얘기를 꿀꺽 삼켜버렸다.“대표님, 지금 회사로 돌아갈까요?”성연신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아니면? 너희 집에 갈래?”“... 네, 알겠습니다.”“내가 많이 늙어 보여?”“아니요, 한창 나이신지라 엄청 매력적으로 보이는데요?”정욱이 거짓말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성연신도 30대였다. 고청민처럼 소년미가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했다.구겨진 성연신의 미간을 살짝 펴졌다.하지만 그는 이내 짜증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지금 여자들은 다 젊은 남자들을 좋아하는 거야?”아니면 심지안은 왜 자꾸 나이를 들먹이겠는가?“아니요, 각자 취향이 다르죠. 지안 씨가 농담하신 건 아니에요?”성연신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무조건 농담이어야 해.”그는 젊은이들만큼 청량한 소년미를 뿜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흐려지고
심지안은 주먹을 꼭 쥐더니 애써 진정한 척하며 대답했다.“전에도 몇 번 전화 온 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고청민이 시선을 거두고는 핸들을 돌렸다.“부동산 번호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급한 일로 찾은 거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전화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아니요, 급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하겠죠.”하지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심지안의 핸드폰은 다시 울렸다.그 순간,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고청민 앞에서 송석훈의 전화를 받으면 모든 게 탄로 날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거절할 다른 이유가 없었다.진동 소리는 마치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 영혼의 울음소리처럼 끊임없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고청민이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천천히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받아요, 무슨 급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심지안은 더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전화가 스스로 끊어지길 바라며 천천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들었는데도 윙윙거리는 진동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화면에는 여전히 똑같은 전화번호가 표시되었다.고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지안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고는 기선제압으로 먼저 차갑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누굴 찾으시는 거죠?”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심지안은 등골이 오싹했다.송석훈은 분명 일부러 전화했을 것이다.그는 어둠 속에 숨어 사냥감을 놀리듯 그녀의 이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길게 늘어진 고청민의 속눈썹은 약간 처지더니 그는 몸을 심지안에게 기울였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똑똑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비좁은 공간은 어디 도망갈 데라도 없었다.심지안은 심장이 멎는 듯했는데 짧은 순간에도 두뇌를 풀가동했다.바로 그때,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저는 인화 별장의 스티븐인데요, 혹시 집 구하시려는 의향 있으세요?”
파파라치는 그래도 신중했다.“증거 있어요? 증거 없으면 나도 함부로 기사를 쓸 수 없어요.”왕실의 스캔들은 오늘 세움 기자회견보다 훨씬 많은 주의를 이끌 것이다. 폭탄급 뉴스라고도 할 수 있다.비밀 인물은 녹음 펜을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이거 들으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예요.”파파라치는 반신반의한 채로 녹음 펜을 틀었다.사실 별 내용이 담겨있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변해영은 말끝마다 계속 사생아를 붙였고, 명확히 심지안이라는 이름까지 언급했다.변해영이 누구인가? 공주 안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다. 그녀는 절대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파파라치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고, 곧바로 이 소식을 상부에 전하면서 오늘의 1면을 확보했다.그리고 그는 다른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이 시작한 후 바로 심지안에게 달려갈 것을 상의했다.어떤 사람은 주저했고, 어떤 사람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세움의 보안은 워낙 철저했기 때문이다.그들은 오히려 경찰이 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부도덕한 짓은 평소에도 자주 했으니 말이다. 이런 참여한 인원이 많으면 경찰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들은 기껏해야 한바탕 혼나면 그만이었다.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졌다.성동철음 정장 차림을 한 채 느릿하지만 힘찬 걸음으로 입장했다.쭈글쭈글한 얼굴에는 자상한 주름이 졌지만 그의 눈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그리고 그는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을 공개 발표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슬하에 자녀가 없다는 건 잘못된 소식입니다. 다만 제 딸이 오래전에 집을 나가 대중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뿐이죠. 이제 제 외손녀가 성인이 됐으니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성동철은 스테이지 뒤에 있던 심지안에게 손을 흔들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자, 이리 와.”심지안은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는 스테이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가늘고 아름다운 다리라인이 적당히 드러났고 약간의 화장을 한 그녀의
성동철의 안색이 한껏 어두워졌다.“누구에게서 들은 거예요?”“반박하지 않으신 걸 보니 인정하시는 건가요?”“저희가 녹음 파일을 입수했는데요 안나 공주의 따님 목소리를 다들 아시겠죠?”심지안은 곧바로 이상한 낌새를 느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파파라치와 가장 가깝던 고청민의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손을 휙 저었다. 곧바로 경호원들이 모여 심지안과 성동철이 퇴장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하지만 성동철은 단단히 화가 나 오히려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는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녹음 펜을 든 파파라치를 보고는 말했다.“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움직이길 바라요. 성씨 가문의 명성을 더럽히려거든 그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제 발등을 제가 찍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언뜻 파파라치에게 한 말 같았지만 사실 녹음 펜의 주인에게 한 말이었다.심지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는데 도대체 누구의 짓인지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평소였다면 변해영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들 사이에는 합의가 이뤄졌기에 이런 기습공격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결국 파파라치는 이 녹음 파일을 공개했고, 오늘의 기자회견까지 더해져 심지안의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졌다.이전에야 가끔 성연신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그것도 겨우 금관성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이제 국내외에서 알려지게 되었다.인터넷 여론은 사흘째 되는 날에도 진정되지 않았다.파파라치들은 성씨 가문의 압박을 받아 기사를 더 쓰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네티즌들은 심지안을 가만 두지 않았다.심지안의 각종 개인정보가 드러났고, 심지어 학창 시절의 졸업사진까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녔다.“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예쁘게 생겼네. 어릴 때부터 미인이었어.”“그래, 임시연보다 훨씬 낫네. 내가 성연신이었어도 심지안을 선택했겠어.”“굳이 비교할 것까지 있나? 임시연은 피아니스트이고, 심지안은 겨우 사생아일 뿐이잖아. 여기서 이미 게임 끝이 아니야?”“NoNoNo,
성연신의 평범한 말 한마디였지만 재무팀 팀장은 몸을 벌벌 떨면서 하마터면 무릎까지 꿇을 뻔했다.“대표님,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저는 심지안 씨의 이슈를 빌려 마케팅할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네티즌들이 먼저 와서 댓글을 남기니 자연스럽게 매출도 오른 것 같습니다.”그는 보광 중신에 오랫동안 일했기에 성연신과 심지안이 한때 부부 사이였던 것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이 무슨 일로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심지안이 떠난 뒤로 보광 중신에서는 감히 그녀의 이름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성연신은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에는 의문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뭐라고요?”재무팀 팀장이 멈칫했다.“대표님, 모르셨어요?”“뭘요?”재무팀 팀장은 핸드폰을 꺼내 가장 댓글이 많이 달린 게시물을 열고는 말했다.“대표님, 직접 보세요.”성연신이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심지안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의 사진이 모두 있다는 걸 발견했다. 네티즌들은 심지어 ‘친절하게’ 타임라인까지 정리했다.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면서 심지안에 대한 악플은 무시하고 그저 심지안의 사진에만 집중했다.그의 눈에 어리던 차가운 빛이 사라지더니 대신 옅은 미소가 점점 얼굴에 띠기 시작했다.‘심지안 어릴 때 이렇게 귀여웠어? 얼굴이 지금의 절반이네. 멍해 보이는데 상은 또 이렇게 많이 탄 거야?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구나. 어쩐지 피아노를 잘 치더라니.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숨길 수 없는 미모를 자랑했구먼. 생얼이라고 해도 누구보다 밝게 빛나고 있네.’특히 반 친구들 모임에서 생일파티를 한 사진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케이크가 묻었지만 심지안은 여전히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카메라를 향해 ‘v’도 날렸다.사진을 뚫고 나오는 청순한 분위기에 성연신은 저도 모르게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학창 시절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내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보호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