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는 싸우는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차에서 싸우지 말아요! 일 생기면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요!”심지안은 김슬비의 두 팔을 꺾어 제압해 버리고 말했다.“문 잠그면 되잖아요.”기사는 그 말을 듣고 급하게 문을 잠갔다. 최소한 잠시 동안은 위험하지 않을 거다. 막혔던 길도 금방 풀릴 것이다.두 비서는 있는 힘껏 차를 두드렸지만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저 자기 연예인이 심지안에게 뺨을 맞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내 얼굴! 얼굴은 때리지 마!”엄청난 고통에 김슬비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고 무서워서 울기까지 했다.연예인에게 제일 중요한 게 얼굴이란걸 누가 모르겠는가. 일 년에 얼굴에 들이는 돈만 해도 몇천만이었다. 역시 악독한 여자라서 그런지, 상대방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심지안은 손을 잠깐 멈췄다.“나는 고작 네 뺨을 때리는 거고. 너는 나 죽이려고 했잖아.”“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언제 너 죽이려고 했어?”“며칠 전에. 네가 빨간색 차로 나 스토킹했잖아. 만약에 내가 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너한테 치여 죽었겠지.”김슬비는 어리둥절했다.“내가 안 그랬어.”심지안은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예전에 찍은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이거 네 차 아니야?”“내 차 맞긴 한데...”퉁퉁 부은 얼굴로 어리둥정한 표정을 짓는 김슬비를 보자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웃고 싶었다.“그렇지만 나는 그날 드라마 촬영 중이었다고. 운전한 적이 없단 말이야.”“누굴 속이려는 거야. 임시연이 널 대신해서 사과까지 다 했어.”그녀는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이해를 못 하고 있다가 전후 사정을 눈치채고는 분노에 휩싸였다.그녀는 그제야 임시연이 진작 그 차를 빌려 갔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임시연이 그녀를 사칭해서 심지안을 스토킹하고 들키니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었다.그것도 모르고 임시연의 편에 서서 같이 심지안을 손봐주려고 했다니,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그날은 나 아니야. 임시연이 나처럼 꾸민 거라고.
거대한 트라우마가 심지안을 덮쳐왔다. 그녀는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서 고개를 들어 고청민을 보았다.그 얼굴은 여전히 청순하고 수려한 게 무해해 보였다. 아마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워져서 심지안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했다.다행인 건 인터넷상의 사진들이 대부분 흐릿한 데다가 그녀는 쭉 차 안에만 있으면서 내리지도 않아서 대부분이 김슬비가 찍힌 사진들이었다.심지안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고청민이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게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내일 장현진 씨가 찍은 쇼츠가 올라온다던데, 그때 반응 좋으면 초대해서 라이브 방송 해도 좋을 것 같아요.”“라이브 방송은 좀 아닌 것 같아요.”고청민이 말했다.“왜요?”“라이브 방송 회사에 더 적당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별로예요.”심지안은 “오.” 한마디 하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고청민에게도 그만의 판단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성동철은 그 둘을 지켜보다가 무표정하게 헛기침했다.“밥 먹을 때 일 얘기 하지 마라.”“알겠어요. 할아버지.”심지안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는 무언가 생각이 나서 물었다.“할아버지, 박만호라는 사람 아세요?”“박만호?”성동철은 흐릿하게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다.“아마 어느 왕실에 심복이라서 세움 주얼리 경매에도 몇 번 참가했을 거다.”“그랬군요.”“무슨 일이야?”심지안이 고청민을 보자 고청민이 말해도 된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엄마랑 박만호라는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일반적인 관계도 아닌 것 같고요. 아버지 말로는 엄마가 그 사람 빼고는 다른 남자랑 만나본 적 없다는데요.”성동철은 나이가 지긋하긴 해도 머리만큼은 여전히 빠르게 돌았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통쾌하게 몇 번 웃었다.“너 혹시 무슨 오해라도 한 거 아니니? 박만호 그 사람은 몸에 문제가 좀 있어.”“네? 몸에 문
티비 속 화면을 노려보던 성연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빠르게 성수광의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임시연이 다른 남자랑 얽히고 있다는 걸 똑똑히 들었다니까.”성연신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임시연의 교활함에 놀라움을 느끼긴 했지만, 이 쪽으로 더 놀랄 것도 없었다.“우주만 제 아이면 됩니다.”성수광은 마음에 들었다. 어찌 보면 좋은 일인 게 그 남자애가 척 봐도 똘똘한 게 성씨 집안 핏줄인 것도 좋았다.“너 몇 년 동안 비밀 조직이랑 충돌 생긴 거 있니?”“거의 없어요.”그는 멈칫하고 떠보듯이 물었다.“너희 엄마...”성연신은 손끝으로 매화꽃을 만지면서 그윽하게 말했다.“실마리는 있어요.”성수광은 깜짝 놀라 안간힘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읊조렸다.“정말 살아있었네.”게다가 송석훈을 벗어난 데다가 송씨 집안에서 도망쳐 나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생명력이란 말인가... 성연신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고 수년간 마음에 품어온 한을 억누르며 말했다.“네. 엄마는 살아계세요. 하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제 기억이랑은 완전히 달라졌어요.”평범한 얼굴이 그녀의 원래 아우라를 덮어버렸다.그녀는 예전에 굉장히 예뻤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보고, 결혼한 뒤에는 돈 때문에 머리 아파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체면도 내려놓고 이름도 바꾸고 웃는 얼굴로 영업을 뛰며 입에 풀칠하고 있었다.빛나던 인생이 모두 망가졌다.이런 고통은 그녀가 겪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성수광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연히 그 고통을 알기에 마음이 아팠다.성연신이 아니였으면 그녀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언제 너희 엄마를 모셔 올거니?”성연신은 고개를 저었다.“송석훈이 무조건 제 주변에 첩자 심어뒀을 거예요. 지금은 기회를 찾고 있어요.”송석훈이 남하영에 대한 병적인 점유욕이 선을 넘었다. 만약에 발각되면 그녀는 또 2차 상해를 입게 될것이었다.그가 송석훈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임시연은 회색 패딩에 하얀색 긴 부츠를 신은 채 마스크를 끼고 예쁜 눈망울만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 신비로움이 그녀를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들었다.변석환은 마음이 아파서 말했다.“속눈썹에 서리 꼈어요. 다음부터는 많이 입어요. 따뜻하게.”“싫어요. 쭉 차 안에만 있고, 게다가 패딩 입어서 그렇게 춥지도 않아요.”“그래요. 그럼 다음부터는 안까지 운전해서 들어갈게요. 적게 걷게.”임시연은 눈이 붉어져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변석환은 당황해서 급하게 티슈를 찾았다.“무슨 일이에요. 내가 뭐 잘 못 말했어요?”그녀는 목이 멨다.“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게 석환 씨가 처음이라...”변석환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윽고 임시연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이 느끼며 얘기했다.“시연 씨. 난 시연 씨한테 쭉 잘할 거예요.”“진짜요?”“그럼요. 난 내가 한 말은 지켜요.”임시연은 수줍게 웃고는 가볍게 그에게 팔짱을 꼈다.“먼저 밥부터 먹어요.”“그래요.”변석환이 웃으면서 대답했고 종업원이 그들을 심지안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임시연은 처음에는 심지안을 못 보고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심지안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안녕~”임시연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부드럽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나 미행한 거예요?”“그럴 리가요. 누구처럼 한가한 게 아니라서.”“거짓말! 분명히 일부러 한 거죠!”“마음대로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다 당신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임시연은 얼굴이 구겨지고 손에서 식은땀이나 마음 한구석이 찔리고 무서웠다.김슬비가 어제 그녀에게 전화 쳐 밑도 끝도 없이 한참을 욕했었다.임시연은 한참 뒤에야 심지안이 한 짓이라는 걸 알았다.“시연 씨. 이분은?”변석환은 사실 인터넷에서 임시연에 관한 찌라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정색하고 화도 내지 않으면서 대인배 같은 면모를 보였다.기회를 찾아서 대화에 끼어든 건 단순히 임시연을 보호하고 싶어서였다.심지안은 더 밝게
성연신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들어와요. 제가 뭐 잡아먹기라도 해요?”심지안은 경계를 풀지 않고 문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밥해달라면서요.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요?”“왜 안 돼요?”그녀는 귀찮았다.“여기 카페예요.”성연신이 뒤쪽에 있는 커튼을 거두자, 복고풍의 조리대가 눈에 안겨 왔다. 야채나 고기, 있을 건 다 있었다.“...이런거 쓸 줄은 몰라요.”“안의 구조는 다 현대식이야.”변요석은 해명을 하다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멈칫했다.“오늘 너를 부른 건 밥해달라고 부른 게 아니야. 그건 성연신 씨의 농담이야.”심지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밥 안 해도 되는 거면 갈게요. 다음번에는 용건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요. 두 분이랑 차 마시면서 풍경이나 구경할 시간도, 의무도 없으니까.”하룻저녁에 두 탕이나 뛰는 건 힘든 일이었다. 편하게 동료들이랑 회식이나 하는 게 더 재밌지 않겠는가?“용건이 있어요.”성연신은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서 빈 자리에 놨다. 골격이 분명한 손가락을 뻗은 성연신은 마치 조각품처럼 눈앞의 의자를 가리켰다.“앉아요. 관심 가는 일일 테니까.”다른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심지안 눈에는 그냥 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 말했다.“그런 전 이만.”말을 마친 심지안은 태연하게 떠나면서 룸에 문도 닫아줬다.성연신은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따라나섰다.“저랑 돌아가요.”“싫어요. 관심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귀먹었어요?”“친아빠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요?”심지안은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할 필요 없어요.”성연신은 도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박만호가 아니에요.”“그럼, 누군데요.”“아까 카페에서 본 그 남자요.”...변요석은 태어날 때부터 귀한 사람이었고 일찍이 많은 일을 겪어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심지안과 마주 앉자, 어딘가 어색했다.“그러니까... 몇 년 전에 발생한 사고였어. 내가 다른 사람의 함정에
“아니, 절대로 널 돈으로 사겠다는 뜻은 아니야.”심지안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믿지 않았다.변요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성연신에게로 돌렸다.심지안의 경계심은 너무 강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완전히 달랐다.변요석은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성연신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심지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변요석 덕분에 원망만 더 샀다.하지만 변요석의 시선 아래, 성연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혈연관계로 따지면 지안 씨는 변요석 씨의 딸이에요. 하지만 직접 키운 적은 없으니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하지 않을 거죠. 미래도 생각해 봐요.”심지안은 성연신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그러니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익을 챙기라는 거예요?”성연신은 대답하지 않고 반박하지도 않은 채 담배만 피우면서 그저 심지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길게 숨을 들이쉰 심지안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바로 얘기했다.“실망할 수도 있지만 저는 돈이나 권력에 관심이 없어서요. 있다고 해도 다 알아서 쟁취할 거예요. 이익을 가지려고 어머니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은 못 하겠네요. 어머니의 과거를 발판 삼아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건, 제정신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정말 묻고 싶네요. 당신들은 제정신이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변요석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모든 희망을 성연신에게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가 보면 변요석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변요석은 급하게 반박하지 않고 평정심으로 대책을 세웠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온 것 같았다. 심지안은 그의 자식들과 달랐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고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는 아이들과는 달랐다.변요석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면 그대로 갚으려고 했다.하지만 심지안은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드러내 상대를 쫓아내려고 한다.성연신은 깊은 검은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설득력 있게 얘
고용인은 원인은 몰랐다. 하지만 변요석이 조금 화난 것같아서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저녁 열 시 반. 변석환은 운전해서 돌아왔다.고용인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공작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변석환은 멈춰서서 얘기했다.“여동생이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니야?”변석환의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자라서 성격이 불같았다. 별것 아녀도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들어가 보세요.”“그래.”거실에 앉아있던 변요석은 변석환을 보고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여자 친구가 생겼다며?”“네. 다음 주에 부모님께 얘기하려고 했습니다.”“임시연이라고 했지?”“네. 시연 씨는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알고 지낸 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애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잖아요.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요.”변요석은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는 바로 변석환의 뺨을 때렸다.“그런 문란한 여자를 애인으로 둬?! 네가 정말 눈이 멀었구나!”“아버지, 시연 씨는 문란한 여자가 아닙니다. 사건을 제대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시연 씨는 피해자라고요!”변석환이 애써 변명했다.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다.“너 이 자식. 당장 헤어져! 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왜요? 계속 결혼하라고 재촉하셨으면서, 지금은 왜 막으시는 거예요!”“임시연은 왕실에 들어올 수 없어. 신분도 깨끗하지 못하고 관계도 복잡해. 네가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 더는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구나.”“아버지, 시연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시연 씨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에요.”변요석은 자기 아들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했다.“이만 나가봐.”변석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
심지안은 눈을 깜빡였다. “내연남?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예요?”“네, 남자랑요.”고청민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흠칫 당황했다. “말도 안 돼요. 이성애자 같았는데, 어떻게...”장현진 집이 부유하다는 건 전에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가 뜨는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자신을 팔면서, 그것도 남자랑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심지안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는 고청민의 눈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고요.”“그렇긴 해요. 임시연도 같은 부류잖아요.”그녀는 장현진한테 큰 미련은 없었다. 그저 놀랍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재밌는 가십거리니까.계약 관계일 뿐이다. 맘에 안 들면 바꾸면 된다.고청민은 심지안을 눈으로 배웅해주고,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그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고청민은 수려하고 점잖아 보였다. 웃는 눈에는 따뜻함이 서려 있어 친절한 사람 같아 보였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미소는 껍데기뿐이었다. 깊이 감춰진 서늘한 시선을 가려주는, 껍데기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심지안은 평소처럼 출근했다.아침 회의가 끝나고 장현진이 찾아왔다.심지안은 의아해하면서 비서더러 커피 두 잔을 타오라고 시켰다."어제 지안씨 부서에서 한 라이브를 봤어요. 왜 제가 못 나오게 하신 거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 장현진은 겸허한 태도로 질문했다.심지안은 어제 고청민이 한 말을 떠올리고는 어색해져서 장현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라이브는 전문가한테 맡기는 거로 결론을 냈어요. 갑자기 사람을 바꾸면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도 힘들 거로 생각해서 우리 회사의 쇼호스트가 하기로 했습니다.”“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저도 전에 쇼호스트를 해본 경험이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라이브를 하고 싶네요. 페이는 받지 않을게요.” 장현진은 오랜만에 좋아하게 된 여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 얘기로 천천히 친해질 수밖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