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지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됐어요, 우리의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심지안은 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서류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성연신은 유리창 앞에 서 있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심지안을 쳐다보았다.“딱 맞춰 왔네요.”심지안은 서류를 그에게 건네주며 괜찮은 척 얘기했다.“열어봐요.”성연신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결국 검사 보고를 꺼냈다.그저 흘깃 쳐다봤을 뿐인데 답안이 나와 있었다.성연신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졌다가 또 힘을 풀었다.엎어진 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옆의 심지안이 뒤꿈치를 들고 보고서의 내용을 보았다.「DNA검사 결과 99.9% 일치하기에 친자관계가 성립됩니다.」머릿속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끈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안은 가슴이 아파 침착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결과를 몇 번이고 예상했었지만 사실로 다가오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똑같았다.심지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아까 담담했던 그녀의 침착함이 모두 깨져버렸다.성연신은 얼른 심지안을 부축 했다.“지안 씨...”“이거 놔요.”심지안은 진정하려고 애썼다.“보고서를 줘봐요. 한번 다 봐야겠어요.”성연신은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위로를 건넸다.“보지 마요. 볼 거 없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밥 먹으러 갈까요?”“이리 줘요.”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고집스러웠다.성연신은 그런 심지안을 보며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일은 항상 그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모든 일을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그는 이 느낌을 형용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이 그의 손위에서 모래로 되어 손가락 사이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성연신은 이런 감각이 싫었다.그러다가 그는 성수광이 한 얘기가 떠올랐다.심지안은 마음이 넓은 것이 아니라, 성연신을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이리 줘요!”심지안은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시연의 눈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떠나갔다.문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조심하지 않아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부여잡았다.이를 본 성연신은 빠른 걸음으로 임시연의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괜찮아? 병원에 데려다줄까?”“괜찮아.”임시연은 머리를 돌려 심지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심지안 씨와 얘기 나눠. 난 다음에 다시 올게.”“그래.”성연신은 정욱한테 그녀를 데려다주게 시켰다.정욱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데려다주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거절할 수 없어 그는 옆에 있는 임시연을 슬쩍 쳐다봤다.심지안은 얼굴을 붉히며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임시연 앞에서 다시는 패배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등을 꼿꼿이 세우고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정욱도 이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괴로워 났다.“연신아 고마워. 너한테 폐를 끼쳤네. 앞으로는 길을 걸을 때 가능한 조심 해서 걸을게. 우리 아이도 잘 돌보고 이렇게 무모하게 굴지 않을게.”임시연은 부드럽게 배를 어루만지며 엄마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아이’라는 말을 들은 성연신의 차갑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처음으로 아버지가 된 심정은 더없이 묘했다.이 아이가 자신과 심지안의 아이였으면 했다.심지안은 이 장면을 보고 무언가가 마치 심장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손바닥의 살을 힘껏 꼬집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이 순간 그녀의 마음이 차갑게 얼었다.임시연은 더 머물지 않고 정욱을 따라나갔다.사무실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성연신은 심지안을 바라봤다.“우리 얘기 좀 해요. 억울한 거 있으면 다 말해봐요. 들어줄게요.”“더 얘기할 거 없어요. 저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심지안은 정서를 회복했고 그녀의 눈동자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성연신은 당황했다.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
심지안은 핸드폰 화면에 뜬 ‘발송 성공’ 이란 글자를 보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 해졌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아도 됐다. 그 아이를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임시연을 볼 필요도 없었다.심지안은 이 불순한 관계를 처리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 했다.그녀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에서 날개를 펴고 높이 날고 있는 기러기를 보며 자신도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예전에 심전웅에게 압박을 당할 때 그녀의 제일 큰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전국을 여행 다니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돈은 있지만 임신 중이었다...완벽한 인생은 없는 것 같다.심지안은 머릿속이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뚜렷이 알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앉아있다가 진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뭐? 헤어졌다고?”진유진이 귀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 좀 조용히 말해. 귀 아파.”“미안해. 너무 흥분했어.”진유진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네가 헤어지자 한 거야?”“응. 임시연이 성연신의 아이를 임신한게 맞아.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기 바쁘게 성연신을 찾아와서 내 앞에서 엄청 엄살을 부리더라.”“그래? 걘 왜 그렇게 뻔뻔하냐? 남의 남편 아이를 임신한게 무슨 자랑이라고.”“걔 말하지 말자. 내가 최근 휴대폰을 꺼 놓을 수 있어. 일 있으면 문자 보내, 보면 답장할게.”“성연신이 귀찮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비웃는 듯 말했다.“날 귀찮게 한다고? 화만 내지 않아도 감지덕지할 것 같은데.”성연신 같이 오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차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그는 아예 심지안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심지안은 혼자 오버하며 착각했다.“하지만 그건 연신 씨 잘못이잖아...”진유진이 중얼거렸다.깨끗하면 하루살이가 꼬이겠는가? 임시연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성연신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나도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어.”“너에겐 책임이 없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너와
성연신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도 망가졌다.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그는 몇 시간 전, 심지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모습을 회상했다.성연신은 그녀가 그때 헤어질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니, 어쩌면 더 일찍이 했었을 수도.’여기까지 생각한 성연신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마치 가슴이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듯한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정욱은 뚫어져라 쳐다보다 성연신의 정서적 변화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대표님, 어떻게… 사장님들과 계속 얘기를 나누실 건가요?”“성 대표님, 우리에게 기회를 주세요. 친구 한 명 늘면 힘도 그만큼 더 생기잖아요.”“금호 그룹이 이렇게 심하게 나오지 않았으면 우리도 뻔뻔스럽게 와서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 겁니다.”“맞아요. 성 대표님이 우리를 도와 이 난관을 극복해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성 대표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협력사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줄 알고 너나 할 것 없이 잇달아 충심을 표시했다.그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누군가를 더욱 심란하게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꺼져!”성연신은 갑자기 폭발했다. 그의 봉황처럼 생긴 두 눈은 붉어졌으며 이마에는 파란 핏줄이 뛰었다.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정욱은 성연신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의문스러웠다.그렇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정욱은 그의 휴대폰 속의 내용을 언뜻 보고는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마침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심지안 씨, 용감하네요.’정욱은 두려움을 참으며 깜짝 놀라 멍해 있는 합작사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가 다시 돌아갔을 때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성연신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성연신은 생에 제일 빠른 속도로 차를 몰고 중정원으로 돌아갔다. 가슴속에는 아직 화가 들끓고 있었다.가는 길에서 신호등 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벌금 고지서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지만 더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심지안 내가 3까지 셀 동
심지안이 계획적으로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친구라고는 진유진뿐인데 연락 두절로 그녀를 걱정시킬 일은 없을 거다.그리고 진유진의 태도가 무덤덤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유도 물어보지 않았다.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것은 여자의 천성이다.“아... 그러면 진유진에게 다시 물어볼까요?”“됐어. 물어보지 마.”“네.”성연신은 정욱과 통화를 끝내기 바쁘게 심씨 가문의 별장에 도착했다.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람이 살고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심지안이 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성연신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있는 힘껏 핸들을 세게 내려쳤다.‘아주 좋아. 나와 숨바꼭질을 하겠다는 건가? 내가 진짜 못 찾을 줄 알아?’성연신은 차를 돌려 다시 중정원으로 가서 아파트 CCTV를 확인했다.화면에는 심지안이 여행 가방을 들고 택시에 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택시 번호는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아파트 관리 사무소 소장이 아첨하며 말했다.“성연신 씨, 제가 택시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성연신은 너무 짜증이 났지만 그는 관리사무소 소장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반 시간 쯤 지나자 심지안을 태웠던 택시 기사가 성연신에게 찾아와서 그때 상황을 다시 회상했다.“성연신 씨, 저는 당시 이 여성분을 데리고 화안거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여성분은 당시 명확한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화안거리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 거리는 아주 번화하고 호텔과 민박이 많은 거리였습니다. 한 사람을 찾기에는 좀 어려울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연신은 일어나서 밖으로 달려나갔다.운전기사는 혀를 차며 말했다.“누구를 찾고 있는 거예요? 엄청 급하시네.”관리사무소 소장은 그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누구겠어요? 마누라지.”“저렇게 돈이 많은데 마누라가 저분과 싸운다고요? 저렇게 좋은 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뭐 하는 것인지.”“허, 아마 저 집 마누라도 돈이 있을 거예요. 가족 일은
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몇 호 실이에요?”사장은 머리를 숙이고 컴퓨터를 훑어봤다.“잠시만요, 찾아볼게요.”오지석은 경찰증을 도로 가져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남자를 흘겨봤다.“2층에 있는 3호실입니다.”성연신은 담배를 꺼내 피며 2층으로 올라갔다.오지석도 뒤에서 따라갔다.“너 심지안 씨와 싸운 거야?”성연신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너희 재혼했어? 혼인신고는 한 거야? 지안 씨 요즘… 몸은 어때?”성연신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오지석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심지안이 배 속의 아이를 지웠는지 궁금했다.성연신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아이를 지운 것 같았지만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4개월 때부터는 임신한 게 완전히 티가 나니까 말이다.크지 않은 민박이라서 1, 2분 사이에 심지안이 묵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성연신은 오지석에게 말했다.“넌 이제 가봐.”“알았어. 나도 너희 부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오지석도 눈치가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동료를 찾아갔다.성연신은 팔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가요.”안에서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멍청한 여자가 진짜 여기에 있을 줄이야, 하룻밤에 2만 원도 안 되는 이런 방에 묵을 수 있다고? 카드를 줬는데 왜 사용하지 않는 거야.’심지안은 배달을 시켰기에 배달이 도착한 줄 알고 무방비 상태로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성연신은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멍해 있다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서로의 눈빛이 마주쳤고 불꽃이 튀었다.심지안은 눈이 휘둥그레서 남자를 밖으로 내보내려 했지만 건장한 체구의 성연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감히 나를 밀어요?”“여긴 제 방이에요. 성연
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고 싶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성연신은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서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를 내려다봤다.“지안 씨 발로 걸어갈래요. 아니면 제가 도와줄까요?”심지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날 강요하지 말아요. 우리 좋게 끝내면 안 될까요?”좋게 끝내자는 말이 성연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그는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일상생활용품과 여행 가방 모두 챙기지 않았다.심지안은 가는 길 내내 반항을 했다. 성연신과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배 속에 아이가 다칠까 봐 크게 힘을 쓰지도 못했다.그녀의 반항은 성연신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다.이렇게 심지안은 그에게 끌려 강제적으로 다시 중정원으로 돌아갔다.“여기서 반성하고 내일 다시 제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줘요.”말을 마친 그는 힘껏 문을 닫았고 심지안은 방에 갇히게 됐다.심지안은 다가가서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잠근 듯 했다.그녀는 몸서리를 쳤고 창백한 작은 얼굴엔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만약 내일에도 그녀가 고집을 피운다면 계속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건가...아래층에 있는 성연신도 마음이 불편했다. 소파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마치 마누라에게 쫓겨난 사람처럼 말이다.두 사람은 뜬 눈으로 날을 지새웠다.아침 여섯 시.성연신은 방안의 문을 열고 언제 깨어났는지 모르는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생각하고 말해요.”심지안의 눈 아래에는 다크써클이 생겼다. 마치 망가진 인형 같았다.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제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임시연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 이상 우리 둘은 더는 만날 수 없어요.”바꿀 수도 없었고 생각을 바꾸어서도 안 됐다.아기는 잘못이 없었다.하루 밤을 꼬박 샌 성연신은 이런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는 심지안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라인만이 비번으로 바로 로그인할 수 있었다.진유진이 확인 할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진유진이 방법을 생각해 내 자신을 빼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진유진은 라인을 몇 달째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여서 심지안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더욱이 심지안이 전화로 그녀에게 폰을 꺼둔다고 말했기에 2, 3일 연락이 안 돼도 이상하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그저 심지안이 성연신을 피해 전화기를 꺼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그렇게 며칠째 심지안은 방에 갇힌 채 먹고 자기를 반복했다.성연신은 그녀와 싸운 뒤로 여기에 돌아온 적은 없었다.심지안은 배를 어루만지며 셩연신이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가까이에서 그녀를 본다면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무조건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 더 보내려 하지 않겠지.심지안이 라인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컴퓨터가 울렸다.누군가 그녀에게 친구추가를 보냈다.「심지안 씨, 저 고청민이예요. 한남더힐에 가봐도 집이 텅 비어 있던데 이사한 거예요? 전화기도 꺼져있던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저녁 7시.성연신은 성수광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네가 어떻게 지안이를 집에 가둬 놓을 수 있어? 나쁜 놈. 콜록콜록.”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알려준 거예요?”“누가 알려준 게 중요해? 네가 말해봐. 사실이야?”“제가 왜 대답해야 하죠?”성수광은 심호흡을 하며 인중을 꾹 눌렀다.“네가 진짜 착한 내 손주 며느리를 며칠째 가둬 놓은 거야? 성연신, 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마누라를 얻었으면 애를 낳고 잘 살아야지. 그렇게 괴롭히면 안 된다는 걸 몰라?”“괴롭히는 거 아니에요.”“그럼 지안이를 도대체 왜 가둬 놓은 거야?”“지안 씨가 저와 헤어지겠대요.”‘가둬 놓지 않으면 그냥 이렇게 보내주라고?’그는 그럴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요 며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광 중신에서 지냈다. 그녀가 고집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