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찬은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증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난 성원에서 버려진 적 없어요. 봐요. 아직도 성원의 별장에서 살고 있잖아요. 전 주식도 있다고요.”성형찬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주식이요? 그건 성연신이 당신을 모욕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 재미없죠.”일반인에게 성원 그룹의 주식 1%는 한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성형찬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다. 이번 생은 더 이상 일어날 기회가 없었다. “성연신과 성원을 하나로 보면 안 돼요. 전 성원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성형찬은 거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성연신을 발밑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성원을 망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성원은 내꺼야.’성여광에게는 지금 몇천억이 있었다. 아직 성원을 팔아먹을 수준까지는 아니란 소리였다. 남자는 여유롭게 명함을 남겼다.“급할 건 없어요. 필요할 거라 믿어요.”남자는 몸을 일으켜 차에 앉아 자리를 벗어났다. 성형찬은 명함에 쓰인 송준이라는 글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서랍에 넣었다. 이때, 백연이 성수광을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왔다. “아버님, 저 어떡해요. 제가 이 집에 시집와서 며느리로 열심히 20여 년을 살았어요. 형찬 씨는 새살림을 차린 것도 모자라 저와 이혼하겠대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백연은 성형찬과 진희수가 호텔에 간 사진을 받은 후, 단서를 따라 성형찬이 몇 년간 여대생을 스폰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형찬이 처음 여대생과 관계를 맺었을 때, 여대생은 고작 고1이었다. 성여광보다도 한 살 어린 나이였다. ‘짐승 같은 자식!’성수광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말이 다 사실이냐?”“제가 이혼하려는 건 백연이 밤 중에 식칼로 하마터면 절 죽일 뻔했기 때문이에요.”성형찬은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죽을 뻔했다고요. 백연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 꼭 할 거니까.”“해야지, 꼭.”성수광이 호통쳤다
늘어지게 낮잠을 잔 심지안은 일어나 토스트와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그녀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제 싸운 후 지금까지, 성연신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었다. 심지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성연신을 탓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먼저 거짓말을 한 거니까. ‘회사로 찾아갈까?’‘내가 먼저 사과할까?’‘예전처럼 달래볼까?’심지안이 한참 머리를 굴리던 중, 벨이 울렸다. 심지안은 성연신이 찾아온 줄 알고 눈을 반짝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심지안 씨 되시죠?”문 앞엔 정정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네. 누구시죠?”“대표님께서 심지안 씨 맥을 짚어보라고 하셔서요. 이건 제 자격증이에요. 그리고 여긴 주민등록증. 확인하시고 문제없으면 시작할게요.”심지안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연신 씨가 선생님께 저를 진찰해 달라고 했다는 건가요?”“네. 괜찮아요. 생리불순은 한약 몇 첩 마시면서 관리만 잘하면 돼요. 전혀 긴장할 거 없어요.”눈을 깜박이던 심지안은 드디어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인간이, 생리불순이 진유진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얘기하기 뻘쭘해서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그래서 따로 의사 선생님을 집으로 부른 거고?’의심이 확신이 되자 심지안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진찰 안 하셔도 돼요. 전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돌아가세요.”진찰을 받으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텐데. 심지안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안 돼요. 전 이미 돈을 받았거든요.”“괜찮아요. 제가 연신 씨에게 얘기할게요.”의사는 심지안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본인이 진맥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를 돌려보낸 심지안은 고청민에게 연락했다. 고청민은 수업 중인 듯 교수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지안 씨, 무슨 일이에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지금 바빠요? 제가
정욱은 빨라진 성연신의 걸음을 따라 최대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문 앞에 다다르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가 진유진이라는 것을 확인한 정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대표님,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문 앞에 있을게요.”성연신은 정욱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심지안을 향했다. 심지안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그녀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보여줬다. 그녀의 예쁜 옆선과 작고 오뚝한 콧날은 완벽한 라인을 형성했다. 젤리처럼 탱탱한 빨간 입술은 유혹적인 매력이 흘러넘쳤다. 성연신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 못 본 사이,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찾아올 줄도 알고.’인기척을 느낀 심지안이 고개를 들어 성연신을 쳐다보았다. “일 끝났어요?”“네.”사실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늘 회의는 2시간 이상이 걸리는 큰 회의였지만 성연신이 일찍 끝낸 것이었다. 심지안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전부에요?”“말은 똑바로 하죠. 거짓말한 건 제가 아니라 지안 씨예요.”“알아요.”심지안은 회사로 오는 길에 이미 핑곗거리를 전부 생각해 뒀다. “인정할게요. 생리불순은 진유진이 아니라 저예요. 제가 뻘쭘해서 얘기하지 못한 거예요.”심지안의 말에 성연신은 사르르 마음이 풀렸다. 그가 말했다. “제가 지안 씨에게 보낸 한의사는요? 안 갔어요?”“왔었어요. 제가 병원에서 이미 처방받아서요. 약을 더 먹을 수도 없어서, 돌아가라고 했어요.”“그 한의사님 유명하신 분이에요. 일단은 그분 말씀대로 하고, 효과가 없으면 병원 가요.”“이미 약을 먹기 시작해서요. 마저 먹으면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게요.”심지안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젯밤 청민 씨가 전화 와서 무슨 말 했어요?”성연신이 냉소
성연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증거가 없이는 확신할 수 없잖아요.”성연신은 임시연과 오랜 시간 함께였다. 그는 그녀의 대인관계, 그녀의 친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에도 아랫사람에게 조사하게 시켰지만, 아무런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하지 못했다. 어렸을 적 저질렀던 ‘연애사’만 제외하면 말이다. “가끔 여자의 직감은 그 어떤 증거보다 정확하다고요.”심지안은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성연신이 임시연을 감싸는 거로 생각했다. 심지안은 자기가 이곳으로 온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똑똑똑.”노크 소리에 두 사람은 다툼을 멈추었다. “들어와.”정욱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심지안을 쳐다보더니 어색해하며 성연신에게 말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얘기해.”“그 대표님... 저 반차 써도 될까요?”성연신이 고개를 들었다. 가늘고 날카로운 두 눈이 정욱을 살펴보았다. “며칠 전에 이미 연차 다 썼잖아. 이번엔 왜?”몇 년 차 직장인인 심정안이 정욱을 공감해줬다. “쓰게 해요. 회사에 급한 일 있으면 제가 도와줄게요. 정 비서님도 연신 씨 옆에서 계속 긴장 상태잖아요. 가끔 반차 쓰는 게 뭐 큰일이라고.”“어떤 프로젝트는 정 비서가 맡고 있어요. 만약 문제가 생겨서 처리하려면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요.”“대표님, 저 멀리 가지 않을 겁니다. 금관성 내에 있을 거예요.”정욱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감출수록 성연신은 더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욱의 가족과 친구는 모두 금관성에 없었다. 유일한 인간관계라곤 보광 중신의 사람들뿐이었다. “...진유진 씨가 남자친구 대역을 부탁해서요.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고.”정욱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어 사정을 얘기했다. 그의 거무스름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하던 성연신은 심지안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멍해졌던 심지안은 눈에 띄게 흥분했다. “정 비서님과 유진이가 언제부터?”전에도 두 사람이 썸 타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빨리
심지안의 싸늘한 눈빛이 임시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하지만 보기만 해도 열불이 터지는걸.”진유진이 주먹을 움켜쥐며 당장이라도 임시연에게 다가가 싸울 것처럼 굴었다. “괜히 일 만들지 마. 조용한 게 나아. 이젠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아. 재미없어.”마지막 한 달이었다. 굳이 일을 만들어 임시연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하... 그래. 네 말대로 할게.”진유진이 실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 신생아 옷은 많이 사지 않으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아기들은 성장하는 속도가 빨라서 태어나자마자 입었던 옷은 2달쯤 지나면 더 이상 입을 수가 없거든요.”아기용품의 직원이 진심을 담아 건의했다. “이런 옷은 하늘색이든 초록색이든 전부 예쁘지만, 하나만 사셔도 충분해요. 고민되시면 아기 아빠에게 물어보세요.”손을 뻗어 조그만 아기 옷을 만지던 임시연은 무심코 쳐다본 척 가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물어봐야겠어요.”그리고 그 말은 심지안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자리를 피하려던 심지안의 발은 바닥에 박혀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임시연은 점원 앞에서 전화한 것이 아니라 휴게실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들어 전화하는 척했다. 진유진이 입을 삐죽였다. “지안아 너도 연신 씨에게 전화해. 연신 씨가 설마 임시연을 거들떠나 보겠어?”심지안은 무슨 생각에선지 진유진의 제안을 동의했다. 그녀는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딱딱한 안내 멘트는 마치 망치처럼 심지안의 가슴을 내리쳤다. 이때, 임시연은 휴게실에서 나오며 초록색 신생아 옷을 가리켰다. “이걸로 할게요. 포장해 주세요.”“네, 잠시만 기다리세요.”진유진은 충격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젠장, 연신 씨가 임시연 전화를 받다니.”심지안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기 일이니까, 받는 것도 당연한 거지.”진유진은 말로 하기 어려운 복
진유진은 컵을 들고 레몬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하! 저번에 리조트에서 맞선 본 거 물 건너갔어. 차승원과 소개팅을 주선한 사람이 정욱이 내 내연남이라는 식으로 몇 마디 하더라고. 그러더니 소개팅을 주선한 사람이 우리 아빠 엄마께도 말을 했고 굳이 나보고 정욱을 데려오라면서 주시해 본다고 하셨어.”“나도 정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앞으로 선을 볼 필요도 없고 많은 번거로움을 덜 수 있을 것 같아.”“그렇지만 너희 부모님은 정욱을 좋아하지 않잖아. 예전에 정욱을 한 번 만났는데 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잖아.”심지안이 이성적으로 분석했다.“싫어도 어쩔 수 없지. 그들은 내가 빨리 결혼하길 바라고 있어.”연봉도 높고 공무원이 여야 하는데 두 말이 모순되었다.그녀는 조건도 평범하고 집안도 평범했다. 그래서 집안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조건 좋은 백마 왕자는 바라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만 어리석은 생각을 하며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심지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해?”“응.”심지안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진유진은 성연신이 오는 걸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많이 바쁘신가 봐요?”성연신이 차가운 말투로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네?”“우리는 임시연이 연신 씨한테 전화하는 거 다 봤어요.”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거로 보아 남자들은 모두 똑같은 결함이 있는 것 같다. 증거를 들이 밀지 않으면 영원히 인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언제요?”“반시간 전에요.”성연신이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전화통화 하지 않았어요.”진유진은 몇 마디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서워서 입술을 몇 번 삐죽거리며 팔꿈치로 심지안을 쳤다,“빨리 너도 봤다고 말해. 이렇게 빠져나가게 하면 안 돼.”심지안은 뽀얗고 투명한 피부에 은은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임신 후 몸에 딱 달라붙는 옷들과 하이힐은 벗어 던지니 지금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성연신은 그윽한 눈빛으로 심지안을 바라보며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진용택이 곧 올 거예요.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그도 감히 거짓말을 할 용기가 없을 거예요.”십분 뒤, 진용택이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왔다.그는 얼굴에 상처가 있었고 정서도 위축되어 있었다. 요 며칠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다.“성… 성 대표님.”성연신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스테이크를 썰었다.“녹음 펜은요?”“여기 있습니다.”진용택은 비닐봉지 속의 녹음 펜을 모두 꺼냈다.한눈에 봐도 30개는 되어 보였다. 그날 진희수가 가져왔던 그 녹음 펜 외형과 똑같았다.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먼저 그중 하나를 들고 스위치를 눌러 듣기 시작했다.한바탕의 잡음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참을성 있게 계속 들었다.그렇게 3분 내내 잡음이 들려왔고 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그녀는 단념하지 않고 곧이어 다른 녹음 펜을 들고 들었다.진유진도 그녀를 도와 현장의 녹음 펜을 전부 다 들었지만 유용한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진용택이 말했다.“진희수 그 년은 어릴 때부터 남을 속이기를 좋아했어요. 걔는 지안 씨가 연신 씨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죠. 진희수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돈을 뜯어낼 방법을 생각한 것 같은데 진짜 믿으셨네요.”심지안이 불편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경찰서에 있을 때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저도 제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하라고 강요하시는 바람에 결국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지금 문득 깨달았어요.”진유진이 비웃었다.“문득 깨달았다고요? 막다른 골목에 다 다른 건 아니고요?”심전웅과 같은 사람이었다. 좋은 소리로 달랠 필요도 없고 발로 걷어찰 필요도 없었다.전형적인 이기적인 사람이다.진용택은 그녀를 알지 못했고 더욱이 금관성에서도 본 적이 없어 자기도 모르게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을 지었다.“뭘 안다고 그래요? 우리 집안일에 끼어들지 마세요.”“전 끼어든 게 아니라 그냥 비웃은 거예요.”“미친년.”“미친놈
밥을 다 먹고 한남더힐로 돌아갔다.성연신은 고청민과 심지안의 집이 아주 가깝다는 것을 알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즉시 이삿짐센터에 연락했다.심지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에 빠졌다. 그녀는 밖에서 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지만 졸려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성연신이 소란을 피운 것일 거로 생각하고 아랑곳하지 않았다.이사하는 과정에 성연신은 일부 중 약을 발견했다. 한 봉지씩 포장한, 데워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약들이었고 겉 포장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병원 이름만 쓰여 있었다.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 봉지를 꺼내 보다가 곧 한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제 아내가 병원에서 생리 주기를 관리하는 약을 받아왔는데 이 약 한번 검사해봐 주세요.”중의학 방면에서 그는 자신이 찾은 사람을 더욱 믿었다.금관성의 어느 학교.연구생들은 별도의 침실이 있었는데 보통 두 사람이 한 방을 사용했다.고청민의 룸메이트가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방에는 고청민 혼자 있었다.홍지윤은 배달원으로 변장하고 학교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여우 가면을 쓰지 않았다. 뾰족한 얼굴이 인색하고 음산해 보였다. 그녀의 매의 눈을 닮은 눈동자는 특히 인상 깊었다. 한 번 본 사람은 기억하게 되는 그런 얼굴이다.고청민은 눈앞의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잘못 배달하신 것 같아요. 저는 배달을 안 시켰어요.”말을 마치고 문을 닫으려 하자 홍지윤이 그를 노려보며 발을 문틈에 끼워 넣었다.“내가 이렇게 성의를 보였는데 아직도 만족 못 하세요?”홍지윤은 팔짱을 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완벽하고 뽀얀 피부에 조금의 잡티도 없고 여성스럽지 않은 준수한 얼굴이었다.그는 소위 ‘성의’라는 것이 사람들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희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홍지윤은 손마디를 꺾으며 좋은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얘기 나누실래요?”“무슨 얘기요?”“심지안 씨 좋아하는 거 알아요. 제가 도와줄게요.”고청민은 기지개를 켜며 부인하지 않았다.“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