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돈에 눈이 먼 장학수라 할지언정 진성태의 꼴을 보자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죽은 지 고작 3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딸의 죽음을 이용해서 돈을 벌기 급급한 모습이라니, 이런 아버지가 있다는 자체가 너무 비참하군요.”진용택이 맞받아쳤다.“당신이 뭘 알아? 죽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는 법, 살아서 집에 도움이 안 되었으니 죽음으로 힘을 보낼 수 있다면 저승에 가서도 영광으로 생각할 거야.”“호랑이도 제 새끼는 이뻐한다고, 가족은 더더욱 챙겨줘야 하지 않겠어? 네 일거수일투족을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기억해. 이름이 거창하면 뭐 해? 매번 이름값도 못 하는데,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업보를 치른 탓에 그렇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진용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진성태가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입만 살면 뭐 해? 당신도 사랑하는 아내가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성연신은 꼿꼿이 서서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물론이죠.”진성태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조건을 제시하려던 찰나, 성연신이 대뜸 화두를 바꿨다.“이번 사건에 개입한 사람을 찾아낸다면 한 놈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무사히 넘어가길 기도나 하세요.”진성태의 표정이 돌변하더니 말투도 차갑게 변했다.“지금 겁을 줘도 아무 소용 없어. 굴복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아니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체면 잃을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심지안은 성연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사로잡은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진용택도 맞장구를 치더니 자신만만하게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예전 같았으면 진씨 집안에서는 감히 성연신에게 이런 어조로 말을 걸 엄두조차 못 냈을 테지만, 지금은 사업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그는 성연신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경찰서에서 용의자를 구해낼 정도는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입꼬리를 살짝 올린 성연신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장학수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장학수가 멈칫했다.“그 관계를 잊을 뻔했네.”어르신도 평생 군에 몸담고 계셨으니 많은 공을 세우셨다. 퇴직한 지 몇 년 되셨다. 직위는 없어졌지만, 명망은 여전하셨다.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심지안을 인맥을 통해 빼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심지안은 통보를 받았을 때 정말 기뻤다. 마침내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그녀는 사인을 하러 따라가던 중에 다른 경찰 두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막 자백을 마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자가 있었다.그 여자는 머리 길이가 허리까지 왔다. 검은색 머릿결이 윤기가 날 정도로 좋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얼굴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 보이진 않았다. 분위기가 꼭 부잣집 사모님 같았다.경찰은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공공장소에서 절도했습니다.”“자주 있는 일이잖아. 근데 표정이 왜 그래?”“절도는 흔하죠. 흔하지 않은 건 이 여자가 도둑맞은 사람한테 자기가 훔쳤다고 먼저 알려줬답니다. 그러니 빨리 신고하라고 재촉했답니다. 꼭 빨리 감옥에 가고 싶은 것처럼요.”“... 너무 거만하네.”심지안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지만, 그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절차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오니 성연신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괜찮아요?”심지안은 고개를 젓다가 또 끄덕였다.“네, 괜찮아요.”단지 그녀는 오늘 놀랐을 뿐이다. 덕분에 배가 살살 아팠다. 아이에게 문제가 없는지 모르겠다.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저 사람들이 괴롭혔어요?”성연신은 경찰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기사님한테 먼저 지안 씨부터 데려다 달라고 할게요.”성연신은 머뭇거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어머니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가 봐야 해요.”심지안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바로 동의했다.“그래
“저 밖에 볼일이 있었어요.”성연신은 핸드폰을 꽉 잡은 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안씨가 병원에 갔어요?”“사랑하는 내 손자며느리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야?”“어떤 사람이 해신 광장에서 어머니를 봤다고 해서요.”성수광은 잠시 침묵했다.“찾았니?”“아니요. 아마 잘못 본 것 같아요.”“아니면 송씨 가문에서 널 속이기 위해 헛소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 거니?”“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전 어머니가 살아서 도망쳤다고 믿어요. 절대로 오래전에 돌아가신 건 아니에요.”성수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우리 성씨 가문이 평안하길 바랄 뿐이야.”“성씨 가문의 평안과 어머니가 살아계신 건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애초에 저희가 나약해서 생긴 일이에요.”“됐다. 나도 이 나이까지 살 만큼 살았는데 뭐가 더 무섭겠어.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이놈의 자식.”성수광은 말하다가 기침했다.기침 소리가 마치 거대한 돌이 심장을 누르는 것처럼 압박감이 있었다.성연신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화제를 바꿨다.“할아버지는 지안 씨가 병원에 갔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장 의사가 병원에 약이 떨어졌다고 하더구나. 백호한테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했더니 우연히 지안이를 봤대.”“백호 아저씨가 지안 씨한테 물어봤대요?”“아니, 지안이는 통화 중이어서 못 봤을 거야.”“알겠어요. 할아버지 요즘 전우분들하고 밖에 다니지 마세요. 집에서 요양 잘하세요.”“난 상관하지 마라. 어서 지안이한테 무슨 일인지 가 봐. 몸이 어디 불편한지.”“네.”심지안은 돌아가는 길에 성연신의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핸드폰에 뜨는 번호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기사님, 길가에 차 좀 세워주세요.”“네.”그녀는 차의 창문을 올려 밖에 시끄러운 소리를 차단했다. 그다음 손가락으로 수락 버튼을 가볍게 터치했다.“어디예요?”성연신이 물었다.“나 유진이하고 같이 있어요. 왜요? 일 끝났어요?”그는 몇 초간 침묵했다.“집에 안 있고 어디를 돌아다니는
“어... 나 혼자가 아니라 유진이하고 같이 갔어요.”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아프면 병원부터 달려갔다.여기서 문제는 성연신이 예리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방금 1초라도 머뭇거렸다면 그는 분명 이상함을 눈치 챘을 것이다.“진유진하고 함께 갔다고요?”“네 네. 유진이가 생리불순이라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해서요.”심지안은 약간 죄책감이 들어 코를 만지며 말했다.“아까는 유진이가 옆에 있어서요. 알잖아요. 여자들은 그런거 민망해 하잖아요. 프라이버신데 내가 마음대로 남자한테 말하는 것도 좀 그렇고.”성연신이 눈살을 찌푸렸다.“생리불순?”“네네.”‘유진아 미안해. 베프가 어려운데 이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한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밖에는 마지막 석양이 지고 있었다.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성연신은 어둠속에 갖힌듯이 온몸에 온기가 하나도 없는 것같았다.심지안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을 똑바라 바라볼 수 없었다.“나 먼저 가서 샤워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심지안은 성연신이 자기를 쉽게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와 다른 행동이 묘하게 불안했다.샤워를 절반쯤 했을 때 심자안은 문득 핸드폰을 현관에 두고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그녀는 서둘러 몸을 닦은 뒤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결국 한발 늦었다. 성연신이 이미 현관에서 손에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심지안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본능적으로 뛰어가서 핸드폰을 뺏었다.화면에 고청민과 5분 동안 통화한 기록이 떠 있었다.고청민이 그녀에게 전화했는데 그것을 성연신이 받았다.살려주세요. 어떻게 이런 우연히!심지안은 급하게 설명했다.“고청민이 아마 내가 말한 쥬얼리 제작 문제 때문에 전화한 걸 거예요. 다른 이야기는 나눈 적 없어요.”“고청민이 오늘 오후에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요.”성연신이 차갑게 말했다.“네? 불가능해요. 그럴 리가 없어요.”심지안의 마음속에서 고청민은 겸손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심지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웃음을 터트렸다.이것이 그녀가 선택한 것이니 견뎌야 했다.힘든 하루였고 그녀도 지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자고 싶었다.잠을 자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다행히 이번 달이 마지막이다.생각하다가 짧은 안도감을 느낀 뒤 더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성연신은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성원그룹에 도착했다.마침 비서가 하반기 기업 프로젝트 계획서를 갖고왔다.성연신은 감히 진성태의 회사가 신청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성연신은 크게 화를 내며 만년필로 진성태의 이름에 X자를 쳤다.그의 힘이 너무 강해서 종이가 찢어졌다.“지시 사항 통지하세요. 지금부터 성원그룹에서 진성태는 블랙리스트에 넣습니다. 현재 진성태와 협력하고 있는 회사들도 성원그룹과 협력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비서는 깜짝 놀랐다. 대표님은 지금 비틀거리는 진성태를 아예 무너뜨리겠다는 것이었다.진씨 가문은 이제 제경에서 살아남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성연신은 비서를 올려다보았다.“이해가 안 됩니까?”“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짧은 시간 안에 진성태의 회사는 수많은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을 것이다.직원 전원이 그 자리에서 해고 되었고 실업난에 빠졌다.진성태는 엉망이 된 회사를 보더니 휘청하며 바닥에 쓰러졌다.성연신은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 있을까? 수천억을 손해 보게 만든 것으로 모자라 아예 사지로 내몰았다.진성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성원그룹으로 가서 따져보기로 했다.아쉽게도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에 치여 사고가 났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구급차에서 생명이 위험하다는 통보를 받았다.성연신은 이 소식을 이진우의 모델하우스에서 들었다.연어회를 먹던 장학수는 큰소리로 웃었다.“쯧, 인과응보야. 벌을 빨리도 받았네.”하지만 그도 변호사가 된 이후로 최소한의 기준도 없는 사건들을 많이 맡았다.다음 날 절에 가서
성연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학수에게 말했다.“끊어 버려.”“응.”장학수는 1초도 더 낭비하지 않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핸드폰은 소파에 던졌다.“넌 녹음 펜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이진우는 궁금해서 물었다.오늘 진희수에게 그런 일이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모두 영문을 몰랐다.“죽은 자는 말할 수 없어. 확실하지 않아.”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소식도 없는 핸드폰을 보니 짜증이 났다.‘바보 멍청이 밤새도록 나를 찾지도 않고 많이 컸네.’손남영은 그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서 술잔을 들고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우리가 1년에 몇 번이나 이렇게 다 모이겠어? 기분 좋게 마시면서 놀자.”성연신의 머릿속엔 온통 심지안 뿐이었다. 애초에 손남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닥쳐.”“여자 때문에 이럴래?”이진우는 어이가 없었다. 예쁘장한 잘생긴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자기의 좋은 친구가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는 아직 심지안의 매력을 알지 못했다.하지만 예쁘장한 외모에 분위기는 괜찮아 보였다.고로 여자는 옷과 같고 친구는 손과 발 같은 존재라는 것이 네 명의 공통적인 좌우명 아니었나?성연신은 도도한 태도를 바꾸며 진지하게 말했다.“너희는 몰라. 결혼을 해봐야 알지. 집안엔 여자가 있어야 해.”“아무튼 난 결혼 안 할 건데. 그렇지, 학수야?”이진우가 타트를 던지고 있는 남자에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우리 둘이 파트너 한 명만 찾으면 되지.”몸이 필요할 때 데리고 놀면 된다.“꺼져. 난 게이가 되고 싶지 않아.”“지안 씨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전화해 봐.”손남영이 보다못해 말했다.“고개만 숙이면 해결은 문제도 아니야.”성연신의 눈썹이 꿈틀했다.“내일 지안이가 병원에 가서 대체 뭘 했는지 알아봐야겠어.”“너 지안 씨 감시하니?”‘감시’ 두 글자가 너무 날카로워 성연신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니.”“그럼, 그러지 마. 지안 씨도 거짓말
성형찬은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증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난 성원에서 버려진 적 없어요. 봐요. 아직도 성원의 별장에서 살고 있잖아요. 전 주식도 있다고요.”성형찬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주식이요? 그건 성연신이 당신을 모욕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 재미없죠.”일반인에게 성원 그룹의 주식 1%는 한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성형찬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다. 이번 생은 더 이상 일어날 기회가 없었다. “성연신과 성원을 하나로 보면 안 돼요. 전 성원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성형찬은 거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성연신을 발밑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성원을 망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성원은 내꺼야.’성여광에게는 지금 몇천억이 있었다. 아직 성원을 팔아먹을 수준까지는 아니란 소리였다. 남자는 여유롭게 명함을 남겼다.“급할 건 없어요. 필요할 거라 믿어요.”남자는 몸을 일으켜 차에 앉아 자리를 벗어났다. 성형찬은 명함에 쓰인 송준이라는 글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서랍에 넣었다. 이때, 백연이 성수광을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왔다. “아버님, 저 어떡해요. 제가 이 집에 시집와서 며느리로 열심히 20여 년을 살았어요. 형찬 씨는 새살림을 차린 것도 모자라 저와 이혼하겠대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백연은 성형찬과 진희수가 호텔에 간 사진을 받은 후, 단서를 따라 성형찬이 몇 년간 여대생을 스폰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형찬이 처음 여대생과 관계를 맺었을 때, 여대생은 고작 고1이었다. 성여광보다도 한 살 어린 나이였다. ‘짐승 같은 자식!’성수광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말이 다 사실이냐?”“제가 이혼하려는 건 백연이 밤 중에 식칼로 하마터면 절 죽일 뻔했기 때문이에요.”성형찬은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죽을 뻔했다고요. 백연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 꼭 할 거니까.”“해야지, 꼭.”성수광이 호통쳤다
늘어지게 낮잠을 잔 심지안은 일어나 토스트와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그녀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제 싸운 후 지금까지, 성연신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었다. 심지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성연신을 탓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먼저 거짓말을 한 거니까. ‘회사로 찾아갈까?’‘내가 먼저 사과할까?’‘예전처럼 달래볼까?’심지안이 한참 머리를 굴리던 중, 벨이 울렸다. 심지안은 성연신이 찾아온 줄 알고 눈을 반짝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심지안 씨 되시죠?”문 앞엔 정정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네. 누구시죠?”“대표님께서 심지안 씨 맥을 짚어보라고 하셔서요. 이건 제 자격증이에요. 그리고 여긴 주민등록증. 확인하시고 문제없으면 시작할게요.”심지안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연신 씨가 선생님께 저를 진찰해 달라고 했다는 건가요?”“네. 괜찮아요. 생리불순은 한약 몇 첩 마시면서 관리만 잘하면 돼요. 전혀 긴장할 거 없어요.”눈을 깜박이던 심지안은 드디어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인간이, 생리불순이 진유진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얘기하기 뻘쭘해서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그래서 따로 의사 선생님을 집으로 부른 거고?’의심이 확신이 되자 심지안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진찰 안 하셔도 돼요. 전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돌아가세요.”진찰을 받으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텐데. 심지안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안 돼요. 전 이미 돈을 받았거든요.”“괜찮아요. 제가 연신 씨에게 얘기할게요.”의사는 심지안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본인이 진맥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를 돌려보낸 심지안은 고청민에게 연락했다. 고청민은 수업 중인 듯 교수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지안 씨, 무슨 일이에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지금 바빠요?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