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간을 찌푸리던 심지안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깔끔하게 돈을 집어넣고는 카운터에 있는 QR코드를 찍어 돈을 보냈다. 사장은 2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안내음을 듣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돌려주었다. “여기까지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놓칠 뻔했어요.”심지안은 고청민을 쳐다보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내 말 맞죠?”고청민은 옛날 사진을 집어 들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저들이 일부러 바가지를 씌우는 걸 알면서 왜 돈을 준 거예요?”“이 사진이 당신에게 중요한 거잖아요. 당신한테는 값진 보물이니까. 잃어버렸던 걸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니까요. 그 정도의 요구는 들어줄 수 있는 거니까 저들과 굳이 얼굴 붉힐 필요 없잖아요?”심지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편안했다. 옅은 화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밝고 아름다웠으며 달빛이 그녀의 몸에 내리비추자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고청민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세상의 아름다운 수천만 가지, 각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 또한 천차만별이다.심지안은 비록 그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쁜 여자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심지안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상한 눈빛을 눈치챈 심지안이 손을 뻗어 그를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왜요? 감동받았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요.”그녀가 그의 아픈 곳을 콕 찔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한테 잘해줬다. 그러나 그건 아첨일 뿐 진심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엄마와 함께 찍은 지 오래된 사진이 있어요. 만약 잃어버린다면 너무 슬펐을 거예요. 20만 원이 아니라 100만 원, 200만 원을 주더라도 사 올 거예요. 청민 씨 마음 이해해요.”심지안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이 지키고 싶은 뭔가가 있으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기억하고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진정으로 사라지는 건 잊혀지고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고청민은
“난 예쁘면 다 좋아. 너도 마찬가지고.”여진구는 잘생긴 외모와 훤칠한 키, 그윽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진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여진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결혼 전에 한번 놀아보는 건 어때?”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여진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널 돕는 게 내 마지막 한계야. 저 여자까지 상대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성연신이 이런 자리에 데리고 나온 여자는 눈앞의 임시연을 제외하고 오늘 이 여자가 처음이었다. 그의 직감으로 성연신은 오늘 데리고 나온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여자 연신이 말고는 다른 남자랑 잔 적 없어. 어떤 기분인지 한번 느껴보고 싶지 않아?”옅은 화장을 하고 있는 임시연은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 있어 입술이 유난히 깨끗하고 연약해 보였고 사람의 보호 의식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엄청난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너 알잖아. 난 예쁜 여자보다 출세가 더 좋아.”물론 임시연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여진구가 출세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어찌 키도 작고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무드 없는 여자랑 결혼할 수 있겠는가?“그래. 네가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 물건은 너한테 줬으니까 반드시 연신이가 마시도록 해야 해.”“알았어. 성연신이 물만 마셔도 덫에 걸려들 거야. 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나도 별다른 방법 없어.”임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가 제일 걱정되는 건 심지안이 지난번처럼 튀어나와 그녀의 계획을 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약의 양이 적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연신이와의 잠자리를 남한테 들키는 것보다는 심지안 그 여자한테 들키는 것이 백배 더 낫지 않을까?’포럼이 진행되었고, 예전에 보광 중신에 있을 때, 성연신과 함께 이런 자리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던 심
무대로 내려오는 계단은 길이가 5m 정도 되었다. 1분이면 내려올 수 있는 길을 성연신과 임시연은 한참 동안 걸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니 심지안은 마음이 아팠고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 자리를 떴다.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성연신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안 씨, 앞에는 길이 없어요.”소년의 독특하고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성연신이 아니라 고청민이었다. 그녀는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서 고청민을 쳐다보았다.“왜 따라왔어요?”“지안 씨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지안 씨랑 함께 있어 주고 싶었어요.”흠칫하던 그녀는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고마워요.”‘고청민도 그 인간보다는 눈치가 있네.’“사실 이런 일에 난 지안 씨 편이에요. 남자로서 성연신 씨가 굳이 직접 임시연 씨를 부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심지안은 그를 쳐다보았다.“청민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그럼요. 현장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성연신 씨가 아니더라도 부축해 줄 사람은 많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어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는 지안 씨랑 함께 온 거잖아요. 그럼 다른 여자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죠.”“그만 해요.”심지안은 점점 더 화가 났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30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연신은 전화 한 통도 없고 문자 한 통도 없었다.‘설마 임시연이랑 같이 있는 건가?’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안돼, 임시연의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거야. 돌아가야 해!’화가 잔뜩 나서 뾰로통해진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고청민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볼 한번 꼬집어 보고 싶네.’“됐어요. 나도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예요. 성연신 씨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죠. 어찌 됐든 임시연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성연신 씨의 아이니까.
한편, 심지안은 고청민의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가 금융 쪽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야 한다는 어르신의 당부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진구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룸 안, 원형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많아 앉아있었고 심지안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성연신도 있었고 임시연도 있었다. 임시연은 자신이 성연신의 파트너인 것처럼 그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심지안은 두 발이 묶인 듯 움직일 수가 없었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목적에 달성했다고 생각하던 여진구가 일부러 말을 건넸다.“성 대표님, 심지안 씨 오셨습니다.”“청민 도련님, 편하게 앉으시죠.”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성연신은 얼굴이 어두워졌다.“이쪽으로 와요.”심지안은 그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걸 발견하였다.‘내가 가서 앉으면 임시연과 같이 그의 옆에 앉아있는 거잖아. 자기가 뭐 왕이야? 이 여자 저 여자 다 안고 있게?’반항심이 생긴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청민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그 모습에 성연신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 그의 싸늘한 기운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내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계속하죠. 계속 얘기해요.”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썼다. 토론 내내 성연신은 크게 말이 없었고 가끔 일침을 가했다. 그 사이 여진구는 고급 차 한 주전자를 가져왔고 임시연은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차를 따라줬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에 꽤 익숙한 듯했다. 이 자리에 데리고 온 여자 파트너는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동시에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심지안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는 하인처럼 이 남자들을 모실 생각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들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진정해요. 할 얘기 있으면 우리 집에 가서 해요.”성연신은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진구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성 대표님, 임시연 씨가 방금 쳐들어온 건달에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대표님께서 한번 가보시죠.”“당신도 같이 가요.”심지안과 고청민이 함께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성연신은 심지안을 끌고갔다. ‘어린놈이 꿍꿍이는 많아서.’임시연이 또 무슨 일을 벌이는지 궁금했던 심지안은 고청민과 인사를 나누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휴게실.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옷이 다 찢어져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연신을 발견한 그녀는 대성통곡하며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연신아, 아까 어떤 건달이 하마터면 내 옷을 다 찢어버릴 뻔했어. 우리 아이를 해칠까 봐 무서웠어...”성연신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소매를 꽉 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그는 양복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뒤에 서 있던 심지안은 임시연의 작은 움직임을 보지 못한 탓에 성연신이 주동적으로 외투를 덮어준 거라고 오해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이리 보게 될 줄 심지안은 상상도 못 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는 뒤에서 종업원이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였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몸에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여보니 배 위가 흠뻑 젖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옷 갈아입으세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종업원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사과했다. 성연신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잠깐만 기다려요. 나랑 같이 가요.”“아니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그곳에 있는 것이 답답했던 심지안은 바로 거절했다. 옷도 젖은 상태라 아이가 불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빨리 옷을 갈아입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성연신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 괴로우면 의사 불러줄게. 난 지안 씨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소년에게로 쏠렸다. 고청민은 맑은 눈빛을 한 채 전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성연신은 이를 악물었다.‘이 어린놈이 또 시치미를 떼고 있군.’그는 고청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방금 본 거 다 말해봐요.”고청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을 도와줄 거라고 그리 확신해요?”그 말에 성연신은 하찮은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웃었다.“거짓말하면 어른들한테 혼날 거예요. 꼬마 청년.”“내가 어린 게 아니라 그쪽이 나이가 많은 거라고요.”고청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풋풋한 그의 얼굴에 남의 여자를 엿보는 밉살스러움이 가득했다. “세 살 차이는 천생연분이라고 하던데 마침 지안 씨가 나보다 딱 세 살 많더라고요.”성연신은 그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꿈이 있는 건 좋은 일이지.”“그래요. 자신감이 있는 것도 좋은 일이죠.”“청민 씨, 말해봐요. 당신이 본 게 뭔지.”심지안은 그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임시연 또한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고청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행여라도 고청민이 허튼소리를 할까 봐 그녀는 두려웠다. 고청민은 심지안을 쳐다보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그 모습에 심지안은 심호흡을 하며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괜찮아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요.”사실이 어떻든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말해요, 당신이 본 게 무엇인지.”차갑게 말하는 성연신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고청민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성 대표님과 임시연 씨는 계속 앉아있었고 선 넘은 행동을 한 적도 없었어요. 다만 지안 씨가 돌아오기 1분 전, 임시연 씨가 갑자기 성 대표님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그리고 그녀의 옷이... 벗겨졌죠.”성연신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상처를 봐달라고 했어요. 다만 임시연의 옷이
“연신아, 이게 다 내 탓이야. 빨리 심지안 씨한테 가봐. 나 신경 쓰지 말고.”임시연은 착한 여자인 척했다. 한편, 성연신의 안색은 극히 어두워졌다.“구급차 불렀으니까 금방 올 거야. 그럼 난 먼저 갈게.”“알았어. 조심히 가.”멀어져가는 성연신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임시연의 초췌한 얼굴이 점점 음흉하게 변해갔다. 이번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두 사람 사이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감정을 소모한다면 날이 갈수록 쌓여서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끝없는 싸움에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견고한 사랑이라도 그때가 되면 깨끗이 사라지게 될 거다. 임시연은 천천히 성연신의 외투를 챙겨입고는 메이크업과 헤어를 정리하고는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자리를 뜨려던 그녀는 고청민이 아직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임시연은 김슬비가 세움의 광고 모델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만약 내가 그걸 따낸다면... 심지안이 현재 모델인 건 맞지만, 명품 브랜드의 모델이 어디 한두 명인가?’그 생각을 한 임시연은 고청민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임시연이에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그 소리에 고개를 든 고청민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임시연은 전혀 어색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고청민은 또래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똑똑한 사람처럼 보였다. 성연신 같은 능구렁이만 아니라면 그녀는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세움 주얼리의 디자인과 컨셉이 정말 훌륭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칭찬을 들었을 때 기본적으로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청민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네. 물론 친구가 될 기회가 있다면 더 좋고요.”임시연은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가식적인 여
심지안은 십여 분 동안 귀를 쫑긋 세우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성연신이 돌아간 것인지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함께 지낸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 사람은 나한테 전혀 인내심이 없구나.’심지안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누워 그동안 성연신과 함께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고 화날 때도 있었고 감동받은 적도 있었다...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심씨 가문에서 하루가 멀다 하게 괴롭힘을 당했었다.그 당시 강우석은 가끔 그녀에게 간식과 예쁜 옷을 챙겨주곤 했었다. 그런 그의 다정함에 그녀는 기뻤고 그래서 이번 생에는 그 사람과 꼭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강우석은 바람을 피웠고 이제 그녀에게 잘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진유진뿐이었다. 그 후, 성연신이 점점 그녀의 삶으로 들어왔다. 까칠하고 무서운 사람이지만 그는 가끔 그녀에게 잘해줬다. 그녀에게 일자리도 주고 그녀의 편도 들어주고 그녀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녀를 도와주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심연아는 아직도 날뛰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진짜 이유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도 바로 성연신이었다.깊은 고민에 빠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심지안은 온몸을 떨었고 그녀는 성연신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누구 없어요? 가구 배달 왔는데요.”“가구 산 적 없거든요. 잘못 오신 거 아니에요?”“심지안 씨 아니에요?”“맞아요...”“그럼 맞아요. 여기로 배송되는 거 맞아요.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가구가 많아요. 복도에 두면 길을 막고 있어서요.”심지안은 경계심이 가득 찬 얼굴로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문밖에는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가죽 소파, TV, 의자 등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주문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