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은 빠르게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심지안은 간단하게 한번 검사를 했다.계약서를 확인한 후, 계약서를 여자에게 건네며 얘기했다.“한번 보시고 문제없으면 계약서에 사인하시죠. 그렇지 않으면 비즈니스 때문에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워요.”여자는 계약서를 들고 읽어보았다. 분명 다 아는 글이지만 붙여놓으니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하지만 심지안의 작은 회사에서 무슨 큰 프로젝트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범하게 진세호를 대신해 사인을 했다.심지안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마침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춰 마치 빛나는 조각상 같았다. 그 모습에 반한 남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역시 성연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저 탱글탱글한 피부를 보면 한입 베어 물어 주고 싶었다. 그러면 베어 문 곳에서 과즙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마 침대에서도...“어때, 지안 아가씨는 마음에 들어?”여자는 자신의 동창을 보면서 물었다. 속으로는 메스꺼웠지만 참고 얘기했다. 둘 다 좋은 인간은 아니니 둘이 결혼하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야 좋지.”남자의 시선은 심지안의 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정말 성연신과 헤어진 거지?”“당연하지. 성연신 아내가 임신까지 했는데, 무조건 헤어져야지.”여자는 심지안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심지안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임시연은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여온 것일까. 중년 여자도 그녀를 위해 힘을 써주려고 하고 있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임시연을 응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연기 실력으로 연예계에서 배우를 했더라면 연기대상은 문제없을 텐데.“그럼 이따가 우리 집에 올래요?”남자의 더러운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심지안의 손을 만졌다. 심지안은 빠르게 손을 빼며 웃을락 말락 하며 물었다.“이혼한 여자여도 좋아하시네요?”“뭐라고?!”스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심지안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진세호의 아내와 그 동창은 심지안 앞의 오렌지 주스를 힐끔힐끔 보았다. 심지안은 그냥 감자튀김만 먹으면서 화제를 주동적으로 이끌어갔다.심지안이 남자를 향해 질문을 여러 가지 하자 여자는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추진했다.심지안은 시간을 보다가 일부러 두 개의 차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여자와 남자가 같이 허리를 숙여 차 열쇠를 찾으려고 할 때, 심지안은 재빨리 자신의 오렌지 주스와 여자의 오렌지 주스를 바꿔치기했다.두 사람은 다 오렌지 주스를 시켰고 다 별로 마시지 않았다.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심지안은 그들의 앞에서 보란 듯이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여자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다.하지만 심지안이 불륜녀라는 것을 생각하자 죄책감 따위는 사라졌다.그러나 20분이 지났지만 심지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잘 웃고 잘 떠들었으며 약 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오히려 여자의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외투를 벗었지만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남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약을 푼 시간이 오래되어서 약 효과가 떨어졌나?“끝났어요?”남자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살짝 차가운 말투였다.심지안이 고개를 돌려보니 성연신이 검은 셔츠를 입은 채 카페 입구에 서 있었다. 팔에는 정장 외투를 들고 있었는데 여유로운 느낌이 온몸에서 흘러내렸다.남자는 성연신을 보고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여자가 그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연신이 그를 발견하게 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안은 그 두 사람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얘기했다.“안녕히 계세요. 절 데려다주실 필요는 없어요. 여사님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여사님부터 신경 써주세요.”여자는 이미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저도 모르게 옷을 벗으려고 하며 살을 확 드러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설마 약을 탄 주스를 마신
“엄청 오래 잤어요.”성연신은 심지안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귀를 스치면서 간지럽혔다.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어제 좀 피곤해서 그래요.”심지안은 말 하면서 성연신을 밀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성연신은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 자리에서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 했다. “우리 엄청 오래 안 한 거 알고 있어요?”심지안이 동공이 흔들리더니 불쑥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성연신은 아주 태연해 보였다. 그의 매력적인 얼굴은 하나님이 만든 제일 완벽한 작품과도 같았다. 심지안은 금방 깨어난 그가 검고 깊은 눈빛을 하고 저런 변태적인 말을 내뱉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어젯밤부터 성연신은 계속 참고 있었다.그는 새근새근 깊게 자고 있는 심지안을 건드리지 않았다.심지안의 손바닥처럼 작은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누가 당신이랑 하겠다는 것처럼 말해요. 우린 지금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연신 씨가 누구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지금 무슨 신분으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내 침대에서 내 품 안에 안겨 자기까지 했는데, 지안 씨가 말해봐요.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심지안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그런데 저 아직 화해하자는 제안 받아들이지 않았잖아요. 우린 지금 서로를 시험 보는 거와 마찬가지라고요.”“제가 말하는 일도 시험 과정의 일부분이 아닌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심지안은 그의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면서 자신의 허리로부터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심지안은 황급히 성연신을 제지하면서 말했다.“그만 해요. 전 하기 싫어요.”“네?”심지안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하기 싫다고요.”성연신의 손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는 심지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녀는 그가 화를 낼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성연신은 그녀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어디 아파요?”심지안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이 좀 불편해요.”“혹시
고청민은 침울한 눈빛을 숨기고 고개를 돌려 하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지안 씨 보러 왔어요. 캔디 가게에 마스코트 시리즈 캔디에요. 기분컬러라는 캔디인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네요.”심지안은 의문스러운 마음을 품고 예쁘게 포장한 캔디를 받았다.“기분컬러요?”“저 오늘에야 어제 라이브 방송 재방송을 보았어요.”그는 요즘 논문을 쓰느라고 전자제품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어제 논문을 완성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는데 우연히 임시연의 자살 라이브 방송을 보았던 것이다.대부분 여론은 성연신 덕분에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부분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저를 위해서 여기까지 가져온 거예요?”고청민은 의아해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물건 사러 서쪽에 있는 거리에 간 김에 산 거예요.”심지안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고청민이 착하고 다른 사람을 잘 대해준다고는 하나 한가한 사람도 아닌데 자신을 위해 캔디 가게까지 들어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앗, 여기 금방 이사 와서 모를 수도 있는데 서쪽 거리에 도둑놈들이 많거든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아까 오면서 이미 당했어요.”고청민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네?”“가지고 다니던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아마도 도둑질 당한 것 같아요.”심지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지갑 안에 혹시 중요한 물건이라도 넣어뒀어요?”“주민등록증 빼고 할아버지랑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는데 그게 저한테 좀 중요하거든요.”심지안은 고청민의 가정 배경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입을 열었다.“내일 서쪽 거리에 야시장을 여는데 어떤 도둑들은 도적질한 물건들을 모아서 야시장에서 중고 거래를 하거든요. 비싼 지갑이라면 아마 야시장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도 운도 따라주면 사진도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고청민은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정욱은 신철호를 데리고 심지안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정욱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신현아를 심지안에게 소개해 줬다.“심지안 씨, 이분은 성 대표님께서 심지안 씨를 보호하기 위해 모신 경호원입니다. 평소에 심지안 씨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보호해 드릴 겁니다.”신현아는 앞으로 한 발 나서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심지안에게 인사했다.“심지안 씨.”모니터를 보고 있던 심지안의 시선이 신현아를 향했다.신현아는 키가 엄청 컸는데 보기에는 아마 175 좌우가 되는 것 같았다.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와 뚜렷한 이목구비, 여자지만 남자 같아 보였다.심지안도 키가 170은 되었는데 신현아 앞에 서니 유독 작아 보였다.“안녕하세요, 하지만... 매일 저의 곁을 따라다니실 건 아니죠? 휴식일 있으세요?”“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지안 씨. 평소에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옆에 서 있던 정욱이 몇 마디 보탰다.“매달 두 날씩 휴식일이 있는데 혹시 휴가를 주고 싶으시다면 심지안 씨 수요에 따라 안배하시면 됩니다.”“네, 알겠어요.”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면서 신현아를 바라보았다.“그럼 성씨 집안으로 갈 때마다 휴가를 줄게요. 아무튼 그곳은 안전해서 괜찮을 것 같아요.”신현아는 심지안과 같은 또래로 보였는데, 솔직히 말해서 심지안은 높은 강도의 업무를 맡은 경호원이 한 달에 두 날만 쉴 수 있다는 게 너무 적다고 생각되었다.신현아는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 곁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을 시키기도 전에 자신에게 휴가를 줄 생각부터 하는 고용인은 처음이었다.“네... 알겠습니다.”정욱은 신현아가 부러웠다.‘우리 대표님은 언제쯤이면 심지안 씨처럼 사리에 밝아질까?’신현아를 심지안 곁에 두고 정욱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임시연의 주치의를 찾아 그녀의 상황을 물어보았다.“환자분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 보아서는 다음 달에 양수검사를 하기 바쁠 것
보광 중신.백여 층이 되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높은 건물, 성연신의 사무실은 손만 뻗으면 별이라도 딸 것 같은 제일 꼭대기 층에 있었다.임시연은 성연신의 단독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정욱도 그녀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바로 이때 밖에 있던 직원 한 무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왔는데 아직 닫히지 않은 엘리베이터 문 때문에 마침 그 안에 타고 있는 임시연과 정욱을 보았다.정욱은 그들이 기획팀 직원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그들은 앞에 멈춰서서는 이상한 눈길로 임시연을 바라보았다.“저 여자가 지안 씨를 내쫓고 자리를 차지한 여자라던데. 대표님 애까지 임신했대.”또 다른 한 직원이 말했다.“대표님이랑 저 여자 오래전부터 같이 있었다던데, 지안 씨가 두 사람 사이에 껴들었다는 소문도 있어.”그들은 성연신의 사적인 일에 관해 별로 알고 있는 건 없었지만, 그들은 심지안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임시연은 머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아까 사람들 심지안 씨를 아나 봐요?”정욱은 임시연이 알아차린 걸 보고 더는 숨기지 않았다.“네.”“같은 팀 출신인가 봐요?”“네.”“아까 회사 직원들 주려고 온라인으로 커피 주문해 놨어요. 비록 당신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 것까지 시켰어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그녀의 화려한 자태와 턱을 약간 치켜든 모습은 상류 인사와도 같았다. 마치 이미 성씨 집안 미래 안주인 자리에 앉은 듯했다.‘여기에 와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었던 거야?’하지만 확실히 똑똑한 수단이었다.많은 공을 들이지도 않고 회사 전체 직원들 환심을 사면서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다니.성연신이 알았다고 해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성연신은 임시연이 찾아온 걸 보고 손에 있던 일을 멈추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할 일이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최근 시정에서 경매 과정이 없이 그들에게 프로젝트 하나를 맡겼기 때문에 보광 중신은 아주 바쁜 상태였다. 앞으로 1년 후, 보광
“화내지 말고 진정해. 약혼녀가 시청 책임자 딸인데, 나도 당신이 이 약혼식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힘겹게 얻은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버릴 수는 없잖아.”느릿느릿 말하는 임시연은 성연신 앞에서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다르게 여우처럼 아주 유혹하는 자태였다.여진구는 임시연과 함께 있었던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뭘 도와주면 되는데?”주변에 오고 가는 보광 중신에 직원이 많았는지라 임시연은 경각심을 놓지 않고 말했다.“조금 있다 다시 연락할게.”...저녁 7시.성연신에 손에 있던 일을 다 끝마치고 차를 몰고 선진 그룹으로 가 심지안을 데리고 원이 있는 동물 병원으로 향했다.회복능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하게 다친 탓에 원이는 애완견 캐비닛 안에서 풀이 죽은 듯이 엎드려 링거를 맞았다.“걷는 데 문제가 없으면 한 달 정도만 더 치료하면 될 것 같습니다.”수의사가 말했다.성연신은 허리를 굽히고 큰 손으로 원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언제 퇴원해서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요?”“다음 달이요.”심지안은 성연신의 표정을 보고 멈칫하더니 말했다.“이번에 퇴원하고 성씨 집안 본가 저택으로 데려가는 게 어때요? 환경도 좋고 더 자유롭게 뛰놀 수도 있는 데다가 감히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도 없을 거 아니에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조건만 되면 오레오도 같이 데려가요.”그녀는 오레오와 임시연 사이 관계가 너무 좋지 않은 것 같았다.성연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오레오는 임시연 애완견이에요. 데려가려고 해도 임시연 동의를 받아야 해요.”심지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이 도리는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옥상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양초 두 개, 빨간 장미 한 송이, 맛있는 음식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저녁 바람까지 아주 상쾌하고 편안했다.심지안은 분위기에 도취해 저도 모르게 많이 먹었는지라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하지만 성연신은 별로 먹지 않았다. 그는 나이프와 포
레스토랑에서 떠나니 이미 새벽이었다. 심지안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 났는지 옆의 남자의 옷소매를 잡으며 얘기했다.“그러니까 아까 말한 금융 포럼이 모레라는 거죠?”이미 12시가 지났다. “목요일이요.”그러니까 모레라는 것이다.한남 더힐로 돌아온 심지안을 따라 성연신은 아파트로 올라가 같이 집에 들어섰다. 그는 집에 들어서서 인테리어를 한번 보았다. 가구들도 매우 간단했다.이런 곳에 산다니 조금 불쌍해 보였다.심지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여기서 잘 거예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거절해도 돼요?”성연신이 그녀를 보며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 소파에 던져버렸다.“될 것 같아요?”“자는 건 괜찮은데 저한테 손도 대지 마요.”“왜요?”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감을 드러냈다.“오늘이 그날도 아니잖아요. 얼음물 마시는 것 봤어요.”“그냥 싫어요. 게다가 이런 일은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심지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감정을 담은 눈을 가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삐죽 나왔는데 그 모습이 꽤 가여웠다.어떤 남자라도 그 모습을 봤다면 그녀의 편에 설 것이다. 성연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견을 굽히고 심지안을 자기 다리에 앉힌 후 심지안의 턱을 잡고 물었다.“정말 싫어서 그래요?”심지안은 억지로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사람은 밤에 감성적으로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심지안은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정말 원인을 알고 싶어요?”“네.”“저 임신했어요.”성연신은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심지안은 긴장 해서 손가락을 만지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성연신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고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싫으면 싫은 거지. 이런 핑계를 대요?”성연신은 놀랐다가 곧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심지안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심지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심지안은 크게 실망했다. 아마도 둘째 아이가 갖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