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턱을 치켜올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어때요? 나 똑똑하죠?”방금 울고 난 그녀의 눈시울은 아직도 약간 붉어있었지만 여전히 톡톡 튀는 아이 같은 매력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를 쳐다보며 성연신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죽을 까봐 걱정하는 게 안쓰럽군. 아무 걱정 없이 살아야 할 사람이... 예전처럼...’“경호원 붙여줄까요?”심지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예요?”“그래요.”그 말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녀가 기뻐할 새도 없이 그가 말을 이어갔다. “당신한테 사고라도 나면 날 대신해 우리 할아버지를 상대할 사람이 없으니까.”“필요 없어요!”성연신은 허리를 숙이고는 그녀의 두 볼을 감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당신 걱정하는 줄 알았어요?”그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며 그를 밀어냈다.“아니요! 착각하지 말아요.”“쳇.”성연신은 말끝을 흐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심지안을 별장 단지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집 앞에 도착한 심지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진현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턱에 잔수염이 가득했고 예전에 혈기 왕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아직 다리가 회복되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있어 많이 초라해 보였다. “지안 씨,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교통사고에 관해 당신한테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아니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진현수가 거짓말한 걸 알고 화는 내지 않았다. 단지 그가 그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을 뿐.진현수는 심지안이 아직도 화가 난 줄 알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알아요. 지안 씨한테 신뢰를 잃었다는 걸. 하지만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길 바라요. 날 시험해도 좋고 어떻게 해든 좋아요.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이러지 말아요. 우린 이미 끝났어요.”긴 아픔보다는 짧은 아픔이 낫다는 생각에 심지안은
심지안은 간단히 씻은 뒤 집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오지석은 그녀를 경찰서로 부른 것이 아니라 경찰서 옆에 있는 공원으로 그녀를 불렀다. 심지안은 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범인이 다 털어놓았나요?”그녀를 침범하려 했던 그 남자는 고청민의 칼에 찔려 피를 많이 흘렸고 체포 당시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치료를 받고 어제 의식이 돌아왔다. 그 물음에 오지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자살 시도까지 했어요. 하지만 다 털어놓을 때까지 취조할 생각이에요.”심지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인간이 이렇게 의리가 깊을 줄은 몰랐네. 자살하면서까지도 동료들을 말하지 않은 걸 보면.’“지안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이 자살한 이유는 아마 더 이상 정상적인 남자로 살 수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그리고 조사한 결과 그의 가족은 그가 체포당하는 날 실종되었어요.”“가면을 쓴 여자가 가족을 빌미로 협박했을 거라는 말인가요?”“네.”그 말에 심지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이 날 납치한 목적이 뭐예요?”‘내가 왜 이런 무서운 사람들과 엮이게 된 걸까?’“일단은 돈을 목적으로 저지른 납치 사건이라고 정했어요.”오지석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지안 씨 인간관계에 대해 조사해 본 결과 원한에 의한 납치는 아닌 것 같아요. 반면, 세움의 후계자인 고청민 씨를 노리고 납치한 확률이 높아요. 게다가 범인들은 성씨 가문에 편지를 보내 2000억을 요구했었어요. 가면을 쓴 여자가 지안 씨 목숨을 원한다는 건 아직 그 진위를 밝혀내지 못해서 조금 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의 목적이 고청민 씨였다면 왜 그 가면을 쓴 여자는 화장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고 오지석은 말을 이어갔다.“사건을 조사하는 건 우리의 책임이에요. 오늘 지안 씨를 여기로 부른 건 혈액 검
의사가 하는 말을 심지안은 한 글자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매번 피임약 꼭 챙겨 먹었는데.”“피임약을 먹었다고 해서 꼭 피임되는 건 아니에요.”의사는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 아이 낳을 거예요? 지워버릴 거면 최대한 빨리 입원해서 수술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이가 크면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을 테니까.”“저도 잘 모르겠어요...”“일단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요.”심지안은 넋을 잃은 채 병원을 나섰다. 그녀는 손을 들어 평평한 배를 만지며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한편, 그녀는 택시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임신 1개월이라는 건 남해 별장에서 생겼다는 거잖아. 이혼 후의 임신이라니... 참 웃기는 일이군.’ 가는 길에 한 중년 부부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며 절망적으로 울기 시작했고 그들의 손에는 병원 기록이 들려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야. 이번에도 시험관 실패했어.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하느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벌하는 거야?”“울지 마, 우리 이제 그만 포기하자. 당신 고생하는 거 더는 못 보겠어. 내 마음이 너무 아파...”“하지만 난 아이를 갖고 싶단 말이야...”“여보, 우리 그냥 아이 입양하자. 그만 울어.”남자는 다정하게 여자를 위로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심지안은 저도 모르게 산부인과 검사 기록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들을 용기가 없었던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의 영향도 받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는 성연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임시연과 헤어지라고 강요해야 하는 걸까? 연신 씨가 그걸 원할까? 한발 물러나 그가 승낙한다고 해도 그럼 임시연의 아이는?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임시연의 아이를 데려다 키울 만큼 그녀는 너그럽지도 않았고 마음이 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성연신이 외도한 사실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심지안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바로 이때 진유진한테서 같이 밥을
“헤헤, 알아챘네.”진유진은 머리를 몇 번 쓸어내리고는 정색하며 말했다.“사실 이 일은 여러 가지 각도로 봐야 해. 예를 들어 네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치자. 비록 탑티어의 부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먹고 사는 거나 도우미를 고용해서 아이를 돌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 하지만 가정형편, 학벌, 업무처리 수준이 모두 평범한 월급쟁이가, 그것도 한창 사업 상승기에 있는 여성이 싱글맘이 되는 건 하나의 큰 도전일 거야.”“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애를 번듯한 성인으로 키우면 보람 있지 않을까?”심지안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몽골몽골해지고 눈에서 빛이 났다.“이건 성취감뿐만이 아니야. 구원이라고.”진유진의 지지하에 그녀는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섭섭해할 것도 없으니 그냥 여기에 남도록 하자.어차피 못 키울 것도 아니었다.성연신은 성연신이고 그녀는 그녀였다.어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죄가 없었다.갑자기 싱글벙글 웃고 있던 그녀를 본 진유진은 이상하다는 듯이 다가가서 물었다.“너 혹시 임신했어?”심지안은 두 눈을 깜빡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진유진은 입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저번처럼 말이 새어나갈까 봐 아예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럼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길 가다가 출산 문제로 싸우면서 대성통곡하는 부부를 보고 생각이 좀 많아져서.”진유진은 “아.”라고 응답을 했다. 직원이 새우요리를 식탁에 올려두자 그녀는 곧장 음식에 주의를 기울였다....오지석은 심지안과 헤어지고는 경찰로 돌아왔고 고청민도 거기에 있었다.다른 동료들이 고청민에게 검사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오지석은 대충 곁눈질해 보고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의 손에 있는 보고서를 똑똑히 보고 안색이 변했다.“심지안의 검사 보고서를 가지고 뭐 하는 거지?”동료는 순간 당황했다. “이분이 심지안 님과 친구라고 해서...”“이건 남의 프라이버시라고, 그것도 몰라?”“대장님, 다신 안 그럴게요.
심지안은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아니에요!”“그 사람 말고 또 다른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고청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전 진현수를 싫어합니다.”진현수와 함께 있는 것은 보답과 감동 때문이었다. 하필 사랑이 아니었다.만일 어느 정도의 사랑이 있다면 그가 그렇게 비열한 수단을 써가면서까지 심지안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어떻게 아셨어요?”“제 말이 맞았네요.”그는 애써 본인의 감정을 숨기고 제3자의 시선으로 호기심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한 달 전 성연신과 이혼한 거 아니었어요? 그가 강요한 건가요?”심지안의 몸이 굳어버렸다.“묻지 마세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미안해요. 당신의 사적인 일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친구로서 듣기 안 좋은 말 몇 마디만 할게요. 난 당신이 아파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임시연이 지금 성연신의 별장에서 머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배 속의 아이를 낳도록 허락한 모양인데 만일 남자아이를 낳는다면 성씨 집안의 첫 증손자가 되고 성 어르신께서도 기뻐하면서 그녀의 신분을 인정하실 겁니다.”“그때가 되면 당신은 완전히 남이 될 겁니다. 그냥 지금 아이를 지우고 새 출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심지안 씨의 인생은 이제 곧 시작인 거잖아요.”심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전 안 지울 겁니다.”그녀는 확실히 이 아이가 때아닌 곳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혈육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은 그녀로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고청민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말했다.“당신이 애를 지우지 않는다고 해도 성연신은 다른 아이의 아빠입니다.”심지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는데 마치 수많은 유리 조각이 살갗에 깊이 박혀 피가 흐르는 듯 아파왔다. “아이 저 혼자 키울 거예요.”“그러면 당신이 많이 힘들 겁니다.”“괜찮아요. 사는데 고생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연신은 화를 내기보다 도리어 피식 웃더니 고청민을 비웃는 듯 말했다.“당연히 내가 네 윗사람이지.”고청민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그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심연아와 남진영은 무슨 사이지?”그의 말끝이 흐트러졌고 가는 눈매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고청민은 웃으며 말했다.“이게 궁금하시면 남진영한테 직접 찾아가 물어보시죠. 저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남진영, 심연아, 그리고 너, 아니면 성씨 가문과 무조건 연관이 있어.”그의 말투는 확고했다.고청민은 입술을 잘게 깨물고는 두려움 하나도 없이 말했다.“그럼 가서 확인해 보세요.”성연신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그럴 거야.”그가 일부러 숨긴 이상,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조사는 해야 했으며, 심지안에게 알려야 할 일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다....고청민이 가자 또 다른 사람이 왔다.심지안은 조금 긴장했다. 혹시 성연신도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아까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심경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아침에 경찰서 갔었습니까?”성연신은 다리를 꼬고 심지안의 의자에 앉아 무심코 그녀를 훑어보았는데 그한테서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심지안은 이 물음에 온몸이 굳어졌다.오지석이 그에게 말했나 보다.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친척이었기에 말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성연신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며 말했다.“말하세요.”“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더 물어보시는 거죠?”성연신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진짜 몸에 문제가 생겼습니까?”오지석은 죽어도 경찰서에 간 정욱에게 자료를 넘기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일에 반응이 이렇게 크다니.그는 즉시 심지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오후 회의도 미루고 여기로 달려왔다.심지안은 멈칫하며 물었다.“아직 몰라요?”“내가 알면 당신한테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요.”“저.
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성연신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문을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문틀이 흔들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그녀는 화가 나고 또 웃겼다.‘사실을 말하지 말라고?’‘성깔 한번 엄청 나네.’성연신이 떠난 후, 심지안은 수리부 직원을 불러 문틀을 고정한 뒤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저녁까지 바빴던 그녀는 원래 야근을 해야 했는데 의사가 한 말이 생각나서 그냥 제때 집에 가서 쉬기로 했다.임신 3개월 전까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했다.심지안은 회사 근처에서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잤다.한밤중에 그녀는 마치 개가 짖는 듯한 기척을 들었다.그녀는 비몽사몽인 채로 눈을 뜨고 침대에서 내려와 살펴보았다.어둠 속에서 그녀는 마당에 가엾게 앉아 있는 원이를 보았다. 검고 큰 두 눈은 막막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원이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며 그녀에게로 달려가 부드러운 머리로 그녀의 손을 문질렀다.심지안은 밖이 캄캄하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원이는 어떻게 온 거지?’그녀는 별생각 없이 침실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마 자고 있겠지.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심지안은 웅크리고 앉아 원이를 만졌다.“혼자 온 거야?”두 사람이 헤어진 뒤, 임시연이 한 번 원이와 오레오를 데리고 집에 와서 동물 간식을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그녀는 가르치고 싶지 않았지만 전보다 홀쭉해진 오레오와 원이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직접 동물들 간식을 많이 만들어 임시연에게 가져다주었다.딱 한 번 그렇게 한 뒤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설마 원이가 한 번 왔다고 길을 기억한 건가?그녀는 보더콜리가 다른 품종의 개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말고는 한밤중에 원이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설명할 원인이 없었다.심지안은 윤기 나는 원이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너 혹시 내가
심지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초조한 듯 성연신에게 말했다.“빨리, 원이를 동물 병원으로 보내요!”성연신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지며 즉시 동물 병원 의사에게 차를 몰고 오라고 연락했다.칼이 아직 몸에 꽂혀 있어 쉽사리 건드릴 수 없었다.임시연은 원이 배에 꽂혀 있는 과일칼을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심지안씨, 원이 배에 있는 이 칼 당신네 집꺼죠?”심지안은 다시 보니 머리가 곤두섰다.그녀의 집이 있던 과일칼이 맞았다.누군가 밤중에 그녀의 집에 침입해 원이를 공격했다.만약 이 사람의 목표가 자신이었다면...원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까.아니면, 원이가 없었다면 지금 저 피바다에 누워있는 게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어떻게 이렇게 천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죠? 당신이 저를 미워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원이는 아무 잘못 없는 강아지일 뿐이라고요.”임시연은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을 흘렸는데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하지만 심지안은 그녀의 눈에 비치는 득의양양함을 똑똑히 보았다.심지안은 임시연을 죽일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당신이 한 짓이죠? 그렇죠?”지난번에 일부러 집에 원이와 오레오를 데려온 건 이런 짓을 벌이기 위한 밑거름이었다.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어떻게 간식을 만드는 방법만 배우려고 이렇게 먼 길을 올 수가 있을까!그리고 원이와 오레오가 납치를 당했을 때 간식으로 사각지대까지 유인했던 것도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원이는 당신 집에서 이런 일을 당했고 흉기도 당신 집 물건이었는데 왜 생사람 잡고 이래요!”“이런 말은 서에 가서 하시죠!”과일칼은 그녀가 건들지 않았기에 반드시 범인의 지문이 찍혔을 것이다.심지안은 임시연을 붙잡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임시연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음흉함이 스쳤고 이내 심지안의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힘껏 당겼다.그녀는 갑자기 몸이 뒤로 기울여졌고 다행히 눈치가 빠른 성연신이 그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