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안은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자기를 고단수의 나쁜 여자라고 비꼬는 것 같아 심지안은 발작 버튼이 눌린 듯, 그의 말에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우람한 몸집의 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는 분노의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지안 씨는 처음부터 아주 비열한 수법을 사용했어요, 심지어 엄청 멍청했다고도 할 수 있죠. 목적이 다 드러났는데도 난 속았고요. 내가 거의 다 넘어왔을 때 속으로 나를 바보라고 욕했겠죠?”요 며칠 흥분을 진정하고 성연신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회상했다.처음부터 심지안은 대놓고 그를 유혹했다. 다만 성연신은 그녀의 진정성 있는 눈빛에 속아 넘었을 뿐이다.심지안은 구석에 몰려 두 손으로 성연신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내고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본인이 그렇게 억울한가 봐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내가 연신 씨한테 못 해준 게 있나요? 내가 정말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난 단 한 번도 연신 씨가 나를 대한 것처럼 연신 씨를 대한 적 없어요. 듣기 거북한 말은 더더욱 안 했고요. 연신 씨가 화를 내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까 봐 두려웠어요. 연신 씨는 싱겁게 먹는 걸 좋아하죠? 연신 씨랑 매일 같이 밥을 먹어도 아주 가끔 매운 걸 먹을 수 있었다고요. 심지어 나는 그럴 때마다 감지덕지해야 했어요.”심지안은 말할수록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면서 예쁜 그녀의 얼굴도 눈물범벅으로 되었다. 마치 비와 안개로 덮인 꽃송이처럼 말이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애초에 연신 씨를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처럼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성연신은 펑펑 우는 심지안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움찔했지만 그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성연신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거리를 두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연기는 그만 해요. 정 연기가 하고 싶다면 할아버지가 깨신 다음에 하든가요.”심지안은 아무 말도
심지안은 말문이 막혔다.성연신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바보 같은 여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네. 다만 아쉽게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할아버지의 연기는 바보 같은 여자보다 훨씬 뛰어나다고.’병실에서 나온 심지안이 성연신에게 말했다.“당분간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안 되잖아요, 할아버지 자극 받으시면 안 되니까.”“그래서요?”성연신은 손을 주머니에 꽂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그의 말을 들은 심지안은 미간을 구겼다.‘분명 자기 할아버지인데 왜 저렇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심지안이 차분하게 말했다.“3개월의 시간을 줄 테니까 시연 씨가 나 대신할 수 있게 해요. 그리고 우린 서로 남남이 되는 거죠. 3개월 안에는 협조적으로 움직여 줄게요.”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조금 더 참을 수 있었다.성연신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심지안을 바라봤다.‘이렇게 나랑 끝내고 싶은 건가?’“시연이는 절대 성씨 가문으로 들어올 수 없어요.”“네? 왜요?”“당신이 알 필요는 없어요.”“네...”그녀는 갑자기 장학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임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그럼 빨리 할아버지한테 사실대로 얘기해 드려요.”“왜요? 남자친구 찾는 데에 방해될까 봐 그래요?”성연신은 냉담하고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심지안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그의 말에 반박했다.“당신이랑 시연 씨에게 방해될까 봐 그래요.”‘어이가 없네, 좋은 마음으로 생각해 주었는데 왜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거야?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야?’성연신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질투했어요?”‘하긴, 진현수는 나랑 비교가 안 되지. 어리석은 심지안이 충분히 후회할 수 있지.’심지안은 어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얼버무렸다.“네네, 그쪽 말이 다 맞아요.”그 말을 들은 성연신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후회해도 소용
“그런데... 성연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아.”그녀는 잠시 침묵했다.“왜?”“돈 있고, 지위도 있고, 얼굴도 되는 성연신 같이 뛰어난 사람이 여자를 원한다면 다 가질 수 있지. 굳이 양다리를 걸치면서 숨기지 않을 거야. 아마도 너한테 먼저 알려 줄 가능성이 더 커. 차라리 두 사람한테 돈을 주면서 같이 자기 시중을 잘 들라고 할 것 같은데..”“... 네 말도 일리가 있어.”“그래, 난 이 안에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네 말대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성연신이 회사에서 너와의 관계를 공개했는데 바로 뒤에서 임시연과 관계를 가지는 건 말이 안 되는 같아.”“오해가 있더라도 임시연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야. 자기 입으로 직접 인정했어.”진유진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하고 말했다.“혹시... 임시연이 일부러 계획한 건 아닐까?”“그럴 리가, 성연신이 그렇게 똑똑한데...”심지안은 마음이 좀 불확실했다. 임시연도 깊이 감추고 들어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내 말 들어, 너 기회를 봐서 둘이 얘기 좀 해 봐.”“아니, 이미 쏟아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어. 내가 연신 씨를 속인 일은 그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이 지경까지 온 데는 두 사람 모두 책임이 있다. 어쩌면 시작이 잘못되어서 끝이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통화를 마치자, 진유진은 스스로 자책했다.‘지안이가 가까스로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찾았는데 내가 망쳐버렸어...’심지안은 성연신이 나쁜 남자라고 했지만, 진유진은 믿지 않았다.진유진은 침대에서 뒹굴다가 성연신을 찾아가 분명히 말하기로 결심했다.두 사람이 화해할 수 있든 없든 그녀는 지안이를 대신해서 분명히 해명하기로 했다.처음에 사람을 잘못 꼬신 건 사실이지만 후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라고!진유진은 말하면 하는 대로 차를 몰고 보광 중신에 도착했다. 그리고 1층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안녕하세요, 성연신과 볼일이 좀 있어서요.”“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성연신은 계속해서 물었다.“심지안은 지금 후회하고 있나요?”“후회해요, 엄청 후회해요. 며칠을 울면서 미치게 후회하고 있어요. 머릿속에는 온통 성연신 씨, 당신뿐이라니까요.”진유진은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심지안에게 사과했다.‘지안이가 비록 후회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지안이가 이 감정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잘 알아.’가끔은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편이다. 성연신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아냥거리며 물었다.“후회하면 또 어때요?”진유진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럼 당신이 가서 붙잡아야죠.”성연신은 안색이 어두워져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내가 붙잡으라고?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사람은 왜 내가 심지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진유진은 롤스로이스를 몰고 멀어지는 성연신을 보고 머리에 커다란 물음표가 생겼다.‘이게 무슨 뜻이지? 도대체 효과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됐어, 효과가 있든 없든 내 힘은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그 둘이 알아서 하겠지.’...심지안은 회사에서 업무를 끝마치고 심전웅과 집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 심지안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창문을 열었더니 밝은 햇빛이 정신을 맑고 상쾌하게 만들었다.그녀는 거실로 가서 주스 한 잔을 따라 마시려고 했다. 그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엎드려 와인 진열장 밑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심전웅을 발견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는 것을 보고 자신을 가리키다가 또 와인 진열장 아래를 가리키며 어렵게 말했다.“약... 약이 굴러 들어갔어...”심전웅은 심한 천식을 앓고 있어 약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심지안은 그저 “아”하고 대답하고 주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굽혀 와인 진열장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몇 번이고 닿으려고 했지만 닿지 않았다.이때 심전웅은 이미 식은땀을 흘리면서 호흡곤란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심지안은 몇 번 더 해봤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어쩔 수 없었던
한 시간 뒤 성연신은 병원에 도착했다. 뒤에는 정욱이 김희경을 데리고 왔다.성연신이 병실을 보며 말했다.“경찰이 왔나요?”“네, 심전웅도 깼어요. 지금 심문받고 있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안에서 심전웅은 계속 변명만 늘어놓다가 눈앞에 김희경이 나타나자, 온몸에 갑자기 기운이 없어지고 표정이 위축되었다.심전웅은 심지안을 보고 중얼거리듯 물었다.“언제부터 계획한 거니?”“얼마 안 됐어요. 당신과 은옥매가 이혼했을 때부터였어요.”“그 친자확인서도 네가 그랬니?”“그렇다고 볼 수 있죠.”심전웅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심지안이 계속 말했다.“하지만 심연아는 김대휘의 딸이 확실해요. 전 첫 번째 친자 확인서에만 손을 썼고, 두 번째 것은 진짜예요.”이 말에 심전웅의 마지막 희망이 깨졌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두 은옥매가 부추겼다고 실토했다.이건 엄중한 살인 사건이었다. 경찰은 곧 은옥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체포 당시 은옥매는 친구와 함께 미용실에서 마사지를 받던 중, 의기양양하게 심연아가 곧 제경의 대단한 집안에 시집간다고 자랑했다.친구는 깜짝 놀랐다.“성씨 집안 말이야?”“맞아, 성여광이 며칠 후에 우리 연이를 데리고 부모님을 뵈러 가. 아마 곧 혼사가 잡힐 것 같아.”제경이라는 곳에서는 배경이 없으면 정말 자리를 잡을 수 없다. 남진영은 성씨 집안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사람으로 뭐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성여광은 곳곳에 연아를 자기 딸이라고 소개하는 남진영에 대해 꽤 만족하고 있었다. “성여광? 성씨 집안의 둘째, 그 성여광?”“맞아, 연아 남자친구가 바로 그 사람이야.”“이걸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둘째 도련님이 어디 큰 도련님이랑 같겠어? 성씨집안 같은 명문가라면 우선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을 거야.”은옥매는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진작 알아봤지. 성씨네 큰 도련님은 계속 외국에 있어서 가족 기업은 모두 둘째 도련님이 관리해.”“좋네 좋아
심지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재무 보고 표에서 시선을 떼고 심연아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걸 몰라?”어떤 일들은 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수작 부리지 마! 그 당시 우리 엄마야말로 아빠의 첫사랑이었어, 네 엄마가 후자였다고. 결국 병든 몸을 이끌고 남자 하나 지키지 못해서 우리 엄마는 그저 하루빨리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줬을 뿐이야!”심지안은 이내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고 옆에 있던 뜨거운 커피를 들어 그녀의 얼굴에 뿌렸다.심연아는 뜨거운 커피에 데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심지안에게 달려들었다.심지안은 날렵하게 몸을 피해 심연아가 허탕을 치게 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심연아는 커피 세례를 받은 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빨리 경찰과 얘기해서 우리 엄마를 풀어줘! 아니면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거야!”“그래? 어떻게?”“내 남자는 제경 명문가 도련님, 성여광이야. 그 사람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널 죽일 수 있어!” 심지안의 눈빛이 반짝였다.‘성여광은 성연신의 동생 아닌가? 아닐텐데..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는 허영심만 가득 차 부자인 척하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던데? 어떻게 심연아 같이 별 배경 없는 여자와 함께 있을 수 있지? 설마... 남진영 때문에?”심연아는 심지안이 말하지 않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하게 땅에서 일어났다.“눈치가 있다면 빨리 경찰서로 가서 똑똑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엄마를 놓아줘. 내 기분을 봐서, 너랑 따지고 들지 않을게.”심지안은 웃으며 말했다.“너는 경찰이 놀고먹는 줄 알아? 이럴 시간에 날 찾아오지 말고 김희경이나 찾아가는 게 어때? 그녀한테 증언하지 말라고 해봐.”심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나한테 일일이 가르칠 필요 없어!”심연아는 당연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김희경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김희경은 이미 구금되어 있어 전혀 만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심지안을 찾아왔다.
심전웅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회사는 심지안 혼자서 지탱하였다.예전에 심전웅은 그저 심지안에게 임무만 맡겼고, 내부 일은 심지안이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요즘엔 다 그녀가 해야만 했지만, 그녀는 신경 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병원에서 돌아온 심지안은 사무실에 자신을 가두고 회사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후 은근히 놀랐다.알고 보니 심전웅은 심지안을 속이지 않았다. 회사는 이미 2분기 연속 적자여서 이대로 계속하면 파산할 위험이 컸다.이제 회사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주헌그룹과 합작하는 것이다.심지안은 머리가 아파졌다. 금방 일을 인수하게 됐는데 중요한 건 주헌그룹 같은 큰 회사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예전 같다면 심지안과 성연신이 이혼하지 않아 어쩌면 심씨 집안을 도와줄 수 있는데...그런데 지금은...심지안은 밤이 샐 때까지 바삐 돌아쳤다. 심전웅이 이전에 세운 계획은 실행할 수 없어서 뒤엎었고 머리를 쥐어짜며 회사를 되돌릴 방법을 궁리했다.책상 모서리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려서 심지안은 깜짝 놀랐다.“나를 얼마나 더 기다리게 할 겁니까?”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 성연신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미안해요, 잊어버렸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통화를 마친 심지안은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타고 중정원으로 향했다.도착했을 때 성연신은 뜰에 서서 원이의 털을 빗겨 주고 있었다.달빛 아래 그의 모습은 맑고 얼굴은 차갑고 깨끗하며 도도하여,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세상 하나뿐인 완벽한 그림 같았다.심지안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성연신은 곁눈질로 보더니 말했다.“멍하니 서서 뭘 해요?”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일하러 갈게요.”심지안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빗을 받아 원이의 털을 빗어 넘겼다.원이는 심지안을 보고 기뻐하며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이따금 끙끙거렸는데, 마치 왜 이틀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는지 원망하는 것 같았다.심지안은 저도
성연신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심지안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꿈 깨요! 나는 진현수에게 이 일을 말하고 처음에 지안 씨가 나를 어떻게 유혹했는지 낱낱이 다 알게 할 겁니다.”심지안은 씁쓸하게 말했다.“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이미 헤어졌는데 왜 이렇게 나를 헐뜯어요...”“난 좋은데요?”“그렇지만 난 좋지 않아요!”성연신은 마음속으로 불길이 치솟아 몸을 굽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마치 입을 막으면 듣기 싫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가 자신을 잊으려고 하다니... ‘꿈도 꾸지 마!’심지안은 눈을 부릅뜨고 힘껏 그를 밀쳤다.의외로 이번에 그가 쉽게 밀렸다.그녀는 숨을 쉬기도 전에 성연신의 허리에 안겨 침실로 향했다.심지안은 당황하여 허우적거리며 내려오려 하였다.“당신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 이러다 임시연이 눈치채면 어떡해요?”성연신은 한바탕 비아냥거렸다.“당연히 같이 자려는 거지. 이거 말고 또 있나?”심지안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신은 안쓰러운 듯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내려놓고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시 가르쳐 줄 필요 없잖아요?”심지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호흡했다.“불 꺼줄 수 있어요?”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을 들어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방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심지안은 에어컨의 냉기를 참으며 옷을 벗으면서 속으로 욕을 했다.‘시발, 정말 나쁜 놈이네... 그래도 함께 지낸 세월이 있는데. 도와주면 뭐 어때서, 꼭 이렇게 보상이 있어야 해? 쪼잔해!’마지막 한 벌을 벗고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이름 모를 차가운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성연신만의 독특한 냄새였다.성연신은 이미 자리에 누워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아 품에 안았다.손끝이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에 닿자,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성연신 같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그녀의 이런 모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