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의 얼굴이 순간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마당을 등지고 있던 심지안도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2주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임시연이 돌연 나타난 것이다. 심지안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성연신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연신아, 우리 오레오가 놀다가 차에 치었어. 방금 동물병원에 다녀왔는데 수혈을 받아야 한대. 원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임시연은 걱정되는 마음에 너무 다급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성연신의 손을 잡았다.성연신이 조용히 손을 빼내고는 말했다.“내가 원이를 데리고 너와 함께 갈게.”성연신은 말을 마친 뒤 정원으로 원이를 찾으러 달려갔다. 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리던 임시연이 그제야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미안한 얼굴로 설명했다.“미안해요. 두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연신이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요.”“괜찮아요.”심지안이 평온한 얼굴로 밥을 먹으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오레오예요?”“네. 오레오와 원이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예요. 당시 연신이가 원이를 데려갔고 전 오레오를 데려갔어요.”“아...”사실 심지안은 임시연의 강아지와 원이가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아니면 혈액형이 일치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성연신은 떠나기 전 심지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곧 돌아올게요.”“그래요. 가요.”심지안의 덤덤한 반응에 임시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숨겼다.심지안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임시연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원이를 보니 그녀를 알 뿐만 아니라 꽤나 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그녀는 마음을 담아 오랫동안 기른 강아지를 하루아침에 주인에게 빼앗겨버린 허탈하고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두 시간 뒤.성연신이 원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원이는 많이 피곤한지 축 늘어져 있었다. 아마 피를 많이 뽑아낸 모양이다.심지안은 마음이 아파 원이를 품에 끌어안고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심지안은 성연신에게 전화를 걸면서 슬그머니 녹음 버튼을 누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내부 인터뷰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대기실에는 왜 왔어요?”한수군은 문을 잠그고 심지안에게 달려들었다.“인터뷰예요, 내부 인터뷰.”심지안은 미리 준비했기에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당황하지 않았다.“경은 씨가 얼마를 주고 설득했어요?”한수군은 어리둥절해진 채, 그녀가 이렇게 빨리 짐작한 것을 의아해하더니 쌀쌀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미 알아챘으니 숨기지 않을게요. 얼마 안 줬어요. 몇백 만 원을 줬죠.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를 도와 당신을 혼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예요.”심지안은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웃으며 순수함과 섹시함이 동시에 보여주며 말했다.“나를 혼내주려고요? 그럼 뭘 더 기다려요, 어서 와요.”한수군은 만났던 여자가 많았음에도, 그녀가 이렇게 일부러 유혹하니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그녀를 짓밟고 싶어졌다.“기다려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혼내 줄지 기대해요.”한수군은 말하면서 급히 옷을 벗었다.마지막 한 벌을 벗자 누군가 문이 걷어찼다.성연신이 빛을 거슬러 서 있었는데 부드러운 빛이 몸을 감쌌다.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늠름한 모습이 온몸을 금빛으로 둘러싼 것 같았으며, 마치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 같았다.미리 계획된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심지안은 잠깐 그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정말 멋졌다.이목구비며 몸매가 정말 기가 막혔다!성연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수군을 노려보며 혐오감이 눈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고 있던 양복을 벗어 심지안의 머리 위를 덮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한수군은 안색이 급변하여 주요부위를 가린 채 옷을 주워 입으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정욱이 발로 땅 위의 옷을 문밖으로 걷어찼다.그는 당황한 나머지 성연신에게 아부하며 웃었다.“성 대표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저와 지안 씨는 서로
한수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문득 아픔을 잊고 놀란 얼굴로 성연신을 바라보다가, 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심지안을 바라보았다.이 두 사람은 단순한 상사와 부하 사이가 아니다!경은 씨 이 바보가 그를 해친 거다. 예전에 보광의 데이터를 훔쳤어도 아무 일 없었는데, 이번에 성연신이 직접 나선 것은, 심지안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이다!한수군은 절망하여, 인생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이 일은 성연신의 힘으로 인해, 박용의 악랄하고 비열한 행위가 금융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회사가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부용의 주식시장도 곤두박질쳐서, 파산에 이를 뻔했다!경은은 이 소식을 들었는지, 며칠째 출근하지 않았다.그동안 김인정이 전화를 걸어와 무슨 상황인지 물었고 심지안은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경은 씨에게 실망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키워낸 사람이니 말이다.이날 심지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료들과 점심을 먹다가 임시연이 손에 가방을 들고 보광 중신의 빌딩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심지안은 그녀가 성연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뒤집었다. 역시 여신은 여신이었다. 성연신이 아무리 변명해도, 그의 마음속에서의 여신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칠 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또 만나기로 했다니.심지안이 성연신을 원망하는 동안 임시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더니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심지안 씨.”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먼저 밥을 먹으라고 했다.“심지안 씨, 이건 제가 직접 만든 간식이에요. 그날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정말 누구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당신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성연신 씨예요.”임시연의 두 눈에 이상한 눈빛이 스쳤다.“연신이랑 결혼한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거리감 있게 들리죠...”그녀의 말에 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나서야 자신의 역할을 바로잡았다.
임시연은 표정이 굳어있지만, 뼛속까지 수양이 넘치는 사람이라 곧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돌아왔다."연신이는 위장이 안 좋아요, 당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은 당신의 요리 솜씨가 높다는 것을 의미해요. 앞으로 연신이를 잘 돌봐주세요.”그녀의 어투는 공손하지만, 자세히 들으면 마치 성연신을 돌볼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복이니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심지안은 그녀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요.”이 남자를 3년 동안 돌봤을 뿐이다. 그녀도 계약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임시연은 싱긋 웃으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예술가였는데 이미지가 말할 것도 없이 온화하고 우아했다. 이렇게 조용히 있어도 여기에서 많은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게 했다.심지안은 배가 몹시 고팠다.“그럼 맘대로 하세요, 저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가 떠나려고 발걸음을 돌리자 임시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심지안 씨, 저와 연신이는 이미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의 감정에 영향을 줄 이유가 없어요. 다만 금관성에 아는 친구가 연신이 한 명뿐이라서 가끔 연신이를 찾아가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심지안 씨도 그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그리고 저는 연신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가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심지연 씨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물어보세요.”처음엔 남몰래 도발했다면 지금은 아예 불을 지르고 있는 격이었다.심지안은 화를 내지 않고,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직감적으로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순수하고 해맑은 어조로 대답했다.“네, 고마워요.”“콜록... 심지안 씨, 왜 이렇게 공격적이세요? 저는 단지 연신이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지, 당신들의 감정을 깨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꼭 이렇게 듣기 싫은 말을
성연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친구인데 괜찮아요?”"가족이면 좋을 텐데요.”“그녀는 금관성에 가족이 없어요.”“좋아요, 따라오세요.”“당신도 함께 와요, 와서 요금을 내세요.”간호사는 몇 장의 명세서를 가지고 심지안에게 말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명세서를 받아들고 대답했다.“알았어요.”“1층에 가서 계산하시면 돼요.”의사는 성연신에게 진단서를 건네주며 말했다.“환자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치료 시기를 놓쳤어요.”성연신의 눈동자가 움찔했다.“네?”“최근 이 병원에서 병을 본 기록이 있는데 말씀 안 드렸어요?”“아니요...”“환자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몸 전체에 감염이 발생하기 쉬우므로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는 게 좋아요. 감정 기복이 너무 크면 안 돼요. 기분이 좋아야 치료에 적극적으로 따라줄 거니깐요.”병실 안.임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온화한 얼굴이 창백하고 불쌍했다.그녀는 성연신이 진단서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눈빛으로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말했다.“너... 다 알았어?”“그래.”그는 복잡한 감정을 누그러뜨렸다.“언제 발견했어?”“반년 전에...”임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은 분명 환자인데 굳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외국 쪽 의사는 속수무책이라고 금관성에 가보라고 했어. 난 그냥 포기하려고 했어. 금관성에 가서 너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네가 심지안 씨와 이미... 미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그리고 방금은 내 탓이야, 심지안 씨를 탓하지 마. 그녀는 너를 좋아하니,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성연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 짜증을 냈다.“먼저 몸조리 잘해. 도움이 필요하면 정욱에게 말하고.”그는 당연히 어리석은 이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심지어 다른 이성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것에 대해 상관없었지만, 단지 어리석은 이 여자가 임시연을 기절시켰을 때,
심지안이 목소리를 따라 보니 임시연이 성연신의 손을 꼭 잡고 눈가에 반짝이며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성연신이 승낙한 걸까?그녀는 손바닥을 힘껏 꼬집으며 날카로운 통증으로 마음속으로 해서는 안 될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두 사람의 꼭 잡은 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그녀는 눈앞이 흐릿해져서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허겁지겁 도망쳤다.손남영도 이때 이곳에 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 먼저 갈게요, 계속하세요?”임시연은 문을 열 때 갑자기 손을 잡은 것이다. 성연신은 다른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손을 빼며 말했다.“너 쉬어, 나 먼저 갈게.”손남영은 눈짓하며 그를 끌어당겼다.“좀 더 얘기하죠? 방금 얘기 잘 나눴잖아요, 제가 여기 잘못 온 거 같아요.”성연신은 담담하게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큼 떠났다.손남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시선을 임시연에게 돌리고 물었다.“화해했어요?”임시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많이 같이 있어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손남영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아까 그렇게 즐겁게 울었던 이유가 뭐예요?”“연신이는 그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나를 용서해 주었어요. 그래서 가슴을 짓누르던 큰 돌멩이를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그렇군요... 난 또...”그는 말끝을 흐리며 임시연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임시연은 온화한 눈매로 허탈한 기색을 지었는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손남영은 성연신이 심지안을 선택한 것을 의외라고 생각했다.심지안은 회사로 돌아가 오후 내내 임시연에 관한 일을 생각했다.퇴근할 때가 되자 그녀는 성연신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지하 차고.정욱이 앞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백미러에 비친 남자를 힐끗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성 대표님, 제가 오늘 돌아가서 보광 빌딩 밖 CCTV를 한 번 봤
“임시연 씨는 자기가 항암하고 있을 때 연신 씨랑 같이 있고 싶은 거겠죠.”심지안은 조용하게 얘기했다. 속으로 오후 내내 연습하던 말을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또박또박 얘기했다. “우리 앞으로 조금 떨어져서 거리를 둬요. 할아버지 앞에서는 잘 연기하도록 하고요. 만약 중정원을 떠나라고 하면 떠나줄게요. 하지만 갑자기 떠나라고 할 때면 제가 묵을 곳도 알아봐 줘야 해요.”심지안의 뜻을 이해한 성연신은 미간을 팍 찌푸리며 얘기했다. “임시연이 원한다면 나를 아예 놔주겠다는 뜻입니까?”전혀 빼앗으려고 하지도 않고? ‘심지안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가?’한숨을 푹 내쉰 심지안이 곧이곧대로 얘기했다.“난 구질구질해지고 싶지 않아요.”그에게 뻔뻔하게 굴었다가 오히려 외면당할까 봐 무서웠다. 전에는 전남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차량 내부는 갑자기 조용해졌고 차가운 공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쌌다.성연신이 심지안의 어깨를 잡았던 손의 힘을 풀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사랑한다더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랑이네요.”그 말에 심지안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정욱은 놀라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밖에서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보며 조용히 집에 도착할 수 있기를 빌었다.심지안이 말했다.“그럼, 저 중정원에 계속 있을까요... 아니면 밖에서 세를 맡을까요?”중정원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임시연이 자주 성연신을 찾으러 오게 된다면 여러모로 어색해질 것이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물었다.“나갈 생각까지 해요?”“아니, 전 그냥 제가 불청객이 될까 봐...”화가 난 성연신은 마치 털을 곤두세운 짐승과도 같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을 박찬 성연신이 얘기했다.“그렇게 이사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가요.”밖의 하늘은 이미 검은 구름이 몰려왔고 보슬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가운 빗물이 차 안으로 튀어들어 와 심지안의
밤은 점점 깊어지는데 비는 전혀 그칠 생각이 없었다.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두 시간 동안 서 있었던 심지안은 이미 추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택시를 잡지 못하리라 생각한 심지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성 대표님, 지안 아가씨가 걸어서 돌아가려는 모양입니다.”잘생긴 성연신의 얼굴이 무섭게 구겨졌다. 그에게 돌아와 빌 바에는 차라리 걸어가겠다? “따라가.”정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한다. 이 길은 제경으로 향하는 길인데 지나가는 차들의 속도가 빨라서 물보라를 맞기 쉬웠다. 유독 한 흰 자동차가 매너 있게 속도를 줄여 심지안의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심지안 본인은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추위에 떨고 있어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흰색 자동차가 그녀의 옆에서 멈추더니 차 창문을 내렸다. 한 남자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개울물처럼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목적지까지 데려다줄게요.”빗물에 젖은 심지안의 속눈썹이 눈앞을 막아 시야를 가렸다. 눈앞의 남자는 주원재의 또래 같아 보였다. 깨끗한 피부와 부드러운 얼굴은 딱 봐도 잘사는 집의 도련님이었다.심지안은 갑자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낯선 사람도 자기를 걱정해 주는데 성연신은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다.숨을 들이쉰 심지안이 거절을 하기도 전에 쿨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남자가 더욱 걱정하며 얘기했다.“차에 타요. 데려다줄게요. 나쁜 사람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아니에요, 괜찮습니다.”겨우 기침이 멎은 심지안이 감사를 전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잠깐 고민하는 눈빛으로 성연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기사에게 얘기했다.“가서 우산이라도 줘요.”기사는 놀라서 멈칫하다가 명령을 따랐다.“아가씨, 이건 우리 도련님께서 드리는 우산입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잠시라도 비를 피할 곳을 찾으세요.”기사는 우산은 심지안의 품속으로 넣어주고 총총걸음으로 차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