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광은 홍자덕이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성연신도 그를 난감하게 만들게 한 건 사실이었다.비가 그치자 노을이 창문을 통해 성연신의 얼굴에 비췄다.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성수광을 힐끔 쳐다보았다.체면을 살리는 와중에 돈은 잃기 싫다는 건데, 그럼 좋은 일은 할아버지가 쏙 하고 나머지 더러운 뒤처리는 그에게 던져버리겠다는 건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 연신 씨!”이때, 맑고 고운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고 성연신이 고개를 들어보니 심지안이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저 다 씻었어요.”성연신은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자 조금 전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치유되는 듯했으며 점차 평정심을 되찾았다.심지안의 부름에 성수광의 신경은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우리 손자며느리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아무 문제 없다고 하셨어요.”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성연신 곁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 정도만 해요. 홍 씨 가문에서 돌아가신 분까지 들먹였잖아요. 더군다나 사과를 하는 태도도 나쁘지 않으니까 이제 할아버지 체면을 좀 지켜줘요. 이 일 하나로 상대방과 개싸움을 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천천히 해요. 정 안 되면 제가 앞으로 홍교은 저 여자 심기를 더 많이 건들면 되죠. 그렇다고 홍교은이 사고 칠 때마다 홍교은 아버지가 감정을 호소하지는 않겠죠.”위에서 몰래 엿들으면서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성연신은 홍교은이 심지안을 괴롭힌 일로 홍 씨 가문과 사업적으로 완전히 끊으려고 했고 그 첫 단계가 바로 홍성준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그렇게 되면 거액의 모델료를 거절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계약도 해지할 수 있었다.솔직히 심지안은 성연신이 진심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서운하긴 했다. 그녀는 보호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며 걱정이 없는 순수한 어린이가 되고 싶었다. 나중에 이런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지만 그 사람이 성연신은 절대 아닐 것이
”참나, 네놈이 꽤 인기가 있나 보네. 근데 전혀 걱정할 거 없어. 저 여자들은 이놈의 외모만 좋아할 뿐이야. 몇 년 지나서 이놈이 살이 찌고 배가 나오면 아무도 너와 이놈을 빼앗는 사람은 없을 거야.”성수관이 감개무량한 듯 말하자 심지안이 성연신의 팔을 놓으며 깔깔 웃었다.“할아버지, 연신 씨는 절대 살이 찔 리가 없을 거예요. 맨날 아침마다 러닝하고 저녁에는 강아지 산책까지 시켜요. 운동량이 어마어마해요.”저 정도로 철저하게 자아 관리를 하다니. 앞으로 어떤 여자가 저런 저 남자를 길들이게 될지 너무도 궁금했다.한편, 성연신은 허전해진 팔을 보며 기분이 언짢았으며 왠지 이 여자가 홍교은에게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그를 이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수광이 말을 더 하려고 하던 순간, 성연신이 홀로 위층으로 향했다.“너 어디 가?”성수광이 큰소리로 부르자 성연신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심지안이 성수광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연신 씨가 회사에 바쁜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일이나 하라고 해요. 제가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드릴게요.”“그래, 그래. 저놈은 신경 쓰지도 말자고. 맨날 썩은 표정을 누가 보고 싶어 한다고.”한편, 씻고 나온 성연신은 가운을 걸치고 서재로 향했다. 성인이 되어 외국으로 떠난 뒤부터 매년 저택에 오는 횟수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수광은 여전히 매일 하인들에게 그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시켰다. 이걸로 봐서는 성수광이 그의 손자에게도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바로 이때, 정욱이 노크를 하며 서재로 들어섰고 창가에 서서 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던 성연신이 입을 열었다.“조사는 어떻게 됐어?”“유일하게 의심되는 사람이 회사 직원 장흥수입니다. 그날 저녁 야근할 때 장흥수만 심지안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장흥수가 배달 음식을 시키자고 제안했고 심지안 씨는 배달 기사를 가장한 보디가드에게 속아 따라 나간 겁니다.”“해고해.”“알겠습니다. 저기… 대표님, 오늘 밤 심지안 씨
심지안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오 아주머니가 보신탕 한 그릇을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사모님, 올라가서 도련님과 함께 드세요.”“네... 그럴게요.”심지안은 성수광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보신탕을 들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그때 성연신은 이미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었다.심지안은 문 앞에 서서 일찌감치 침대를 선점한 성연신을 멍하니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젠장, 난 바닥에서 자라는 거네. 어쩔 수 없지.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으니 너무 딱딱하진 않을 거야.’“이건 오 아주머니께서 우리한테 마시라고 준 보신탕이에요.”성연신이 이마를 쿡쿡 누르며 말했다.“난 됐어요. 언제 잘 거예요?”“그럼 내가 몇 모금 마실게요. 그러고 나서 자려고요.”심지안은 오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음식을 작은 그릇에 덜었다.오미자, 양고기, 마, 부추... 영양을 가득 함유한 식자재들이 꽉 채워져 있었다...심지안이 화들짝 놀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영양이 너무 지나쳐 코피를 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그녀는 보신탕을 옆쪽으로 밀어놓은 뒤 베개와 소파 위 담요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누웠다.“심지안 씨!”성연신이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쳤다.“네?”“당장 침대 위로 올라와요!”심지안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베개를 성연신의 옆에 내려놓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바닥에서 자려고요?”그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선명하게 서렸다.“같이 침대에서 자요.”심지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만질까 봐 두렵지 않아요?”심지안이 알몸인 채로 눈앞에 서 있을 때에도 무반응이었던 그다.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한 침대에서 동침을 하자고 제안한단 말인가. 설마 정말 어르신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뜻을 따르려고 하는 건가?“내가 언제 두렵다고 했어요. 난 그저 지안 씨가 수치심이 없다고
그 질문에 어둠 속 성연신의 얼굴에 어색함이 스쳐 지나갔다.“으흠. 지안 씨가 하는 걸 봐서요.”“흥.”심지안이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혹시 날 좋아하게 된 거예요?”이 가능성을 제외하곤 성연신이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성연신은 화들짝 놀라며 반박했다.“아니에요.”그는 그저 심지안에게 기회를 한번 주고 싶었을 뿐이다.“그럼 왜 갑자기 나와 가까워지려는 건데요?”“닥치고 잠이나 자요!”“...”심지안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두 사람의 첫 동침이었지만 심지안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너무 피곤했던 탓에 곧바로 잠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알고 보니 심지안은 얌전히 누워 자는 타입이 아니었다. 한동안은 곰처럼 성연신의 몸에 엎드려 자다가 한동안은 팔다리를 그의 몸에 척 올려놓기도 했다. 급기야 곤히 잠들어있던 성연신을 잠에서 깨웠다.성연신의 뜨거운 시선이 아무것도 모른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심지안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한차례의 격렬한 투쟁을 벌인 끝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품 안에서 심지안을 밀어냈다.심지어 중간에 베개를 세워놓기도 했다.다음 날 아침.심지안이 깨어났을 때 그녀의 옆자리는 이미 텅 비어있었고 대신 베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이건 그녀가 싫단 뜻인가?그럼 왜 어젯밤엔 그녀를 끌어안고 그런 말을 내뱉었단 말인가.심지안은 고민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려 곧바로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다.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심지안은 잠을 푹 잘 잤는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반면 성연신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코끝까지 내려와 있었다.1층에서 새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던 성수광이 그 모습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역시 내 손자야. 설마 밤새 한 건가?’심지안은 그런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오 아주머니로부터 따뜻한 우유를 받은 뒤 할아버지에게 건넸다.“할아버지, 아침 식사하셨어요?”“난 이미 먹었으니까 너희들끼리 먹어. 몸보신 해야지.”“푸
심지안이 환히 웃음을 지었다.“알았어요. 퇴근 후에 선물을 사러 갈게요. 생일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에요? 할아버지한테 갈 거예요?”“우리 둘이서만 보내요.”그녀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네. 알겠어요.”내일은 성연신의 생일이고 이틀만 더 지나면 월말이 된다.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어느덧 곧 재판 날짜가 다가오니 말이다....보광 중신 계획팀.매일 아침 열리는 부서 회의가 시작되었다.오늘 김인정이 엄숙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장흥수의 해고 사실을 알렸다.“왜 그렇게 된 거예요?”“어젯밤에도 야근하는 걸 봤는데 이렇게 갑자기요?”“최근 프로젝트도 장흥수 씨가 맡았잖아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렇게 심각한 거예요?”김인정이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몰라요. 상부에서 내린 결정이에요.”오늘 아침 경비원이 올라와 장흥수의 물건을 정리해 가져가기도 했다.심지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성연신에게 문자를 보냈다.「장흥수 씨 말이에요. 홍교은의 사람이에요?」얼마 지나지 않아 성연신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네.」어쩐지...어젯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절묘하게 맞추더라니.홍교은은 성연신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으니 보광 그룹에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을 매수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심지안은 더이상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일에 집중했다.그때 김인정이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상부에서 건월 쪽과의 협력을 중지하라는 통보가 내려왔음을 전했다.심지안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말했다.“그럼 위약금은 누가 내는 거예요?”김인정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내 생각엔 연설아예요.”“... 아마도 그렇겠네요.”잘 진행되어가던 사업을 망쳐버렸으니 연설아는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심지안은 오후 한가해지자 반차를 내고 진유진과 함께 성연신의 선물을 사러 가기로 결정했다.두 사람은 고급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진유진은 꽤 많이 좋아진 듯한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운동복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성연신은 회의가 시작된 지 20분이 지난 뒤 간결하게 몇 마디 말하고는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그 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뒷문으로 나가 회의장을 떠났다.그는 차에 오른 뒤 손목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심지안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그는 심지안이 오후 반차를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선물을 사 올까.“정욱, 중정원으로 가.”“네. 대표님.”정욱이 엑셀을 밟았다가 곧바로 돌연 브레이크를 밟았다.홍교은이 두 팔을 벌리고 차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내려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정욱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성연신을 힐끗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며 차 창문을 내렸다.“홍교은 씨, 다음날 얘기하세요.”“안 돼요. 난 지금 말해야 해요.”“하지만 대표님께선 오늘 바쁘십니다...”“일보다 내가 더 중요해요.”“... 홍교은 씨, 저와 장난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대표님도 집에 돌아가셔야 해요.”홍교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집에 가도 아무도 없을 텐데 가서 뭘 해요.”그때 성연신이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 내가 차에 타는 걸 허락해 주면 그 멍청한 년을 만나게 해줄게.”“올라와.”홍교은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차에 올라타 그의 옆에 앉았다.“심지안 씨는 어디에 있어?”“일단 나랑 술 마시러 가자. 그럼 알려줄게.”성연신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정욱에게 명령을 내렸다.“그 사람한테 전화해.”그 사람이란, 당연히 심지안을 가리켰다.정욱이 핸드폰을 찾아 몇 번이나 전화를 해보았지만 모두 상대의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신호음만 들려올 뿐이었다.“대표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성연신이 손가락 관절을 뒤틀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마지막 기회니까 말해. 어디에 있어?”“알 생각하지 마. 하루 동안 나와 함께
끝났다. 이제 그녀는 곧 죽는다.틀림없이 홍교은일 것이다.그야말로 미친 여자다.남자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다니.물이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몸이 아직 얼어붙지 않은 걸 보니 물 안에 묶인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이미 가슴까지 잠겼고 물이 차오르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만약 성연신이 빠른 시간 안에 그녀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알게 된다면 한 가닥의 살 희망이 생기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심의 여지 없이 목숨을 잃게 된다.심지안은 한동안 울고 난 뒤 자신에게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애써 다그쳤다.마지막 순간이 오기까지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더 살고 싶었다.심지안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저 물 안에 있어요. 이 소리가 들린다면 절 구해주세요!”“...”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흘렀다.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공허한 메아리 소리만 커다란 저수지에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심지안은 고개를 숙이고 밑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갑자기 물 안에서 무서운 괴물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그녀는 체온이 떨어져 얼굴이 창백해졌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그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멈추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짧디짧은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수위는 이미 목까지 차올랐다. 이따금 튀어 오르는 물보라는 숨까지 턱턱 막혀오게 만들었다.심지안은 이제 입술이 진보라색으로 물들었고 몸은 이미 얼어붙어 감각까지 사라져버렸다. 조금 전 깨어났던 의식이 또다시 짙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정말 이렇게 죽는 걸까?하지만... 그녀는 이틀 뒤면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그녀는 아직 엄마가 남겨준 혼수를 가져오지 못했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심씨 집안이 이득을 보게 할 수는 없다.그리고 성연신이 그녀에게 찾아준 변호사... 그 드높은 변호사 비용을 아직 돌려주지도 못했다...그녀는 죽어서까지 그에게 빚지고
성연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온몸이 흠뻑 젖어버린 심지안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준수한 눈썹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엔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청초함을 더 가미시켰다.성연신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온몸을 경직시켰던 긴장의 끈이 드디어 느슨해졌고 심장을 파고들었던 공포감이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살아있으면 됐어...그가 외투를 벗어 그녀를 감싸고는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도망쳐 나온 거예요?”심지안이 옆에 서 있는 홍자덕을 가리켰다.“저분이 절 구해줬어요.”홍교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쳤다.“아빠, 대체 왜 제 계획을 망가뜨린 거예요!”“너 네가 무슨 한 건지나 알아?!”홍자덕이 분노했다.“저 사람이 오늘 정말 죽었다면 넌 살인범이 돼. 그럼 네 인생은 끝나는 거야!”그는 어젯밤 자신의 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녀가 심지안을 익사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저년도 죽잖아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죠.”“네가 죽으면 나더러 어떻게 네 엄마한테 말하라는 거야? 그만하고 빨리 와서 심지안 씨한테 사과해!”“살인미수를 저질렀는데 사과만 하라니요. 아저씨, 제 아내의 목숨이 아저씨에겐 그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성연신의 두 눈에서 뼛속 깊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험악한 분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다.홍자덕은 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 역시 물론 사건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그가 홍교은에게 소리쳤다.“무릎 꿇어!”존엄이란 때론 천금으로도 바꾸지 않을 만큼 중요하지만 때로는 만두 하나보다도 못할 정도로 그 가치가 형편없다.애석하게도 홍교은은 그 간단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다.“싫어요. 죽지도 않았는데 제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사랑하는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두둔하고 보호하고 있다. 이 순간 가장 괴로운 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