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팀.가장 바쁜 시간이 지나고 팀장이 자리를 비우자, 직원들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지금쯤이면 연다빈 씨와 대표님은 목적지에 도착했겠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하지 않아?”“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벽에도 귀가 있어.”“하하하! 팀장님도 대리도 없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어제 너도 나한테 메시지로 이 얘기 했잖아. 우리끼리니까 괜찮아.”“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거로 생각해요?”그 순간, 재무팀 직원이 아닌,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서 권위와 위엄이 느껴졌다.모든 직원은 긴장하며 문 쪽을 바라봤다.서백호가 성수광 회장을 휠체어에 앉혀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성수광의 눈은 아까 대화하던 직원들에게 정확히 꽂혔다.한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회장님, 저는 그냥 농담한 겁니다. 화내지 마세요.”“맞아요. 저희가 말실수했어요.”그들은 성수광을 두려워하며 아부하듯 말했다. 성수광은 천천히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성원 그룹은 항상 직원들에게 품위를 요구해 왔습니다. 잘못된 말을 한 걸 알았으니, 인사부에 사직서를 제출하세요.”“회장님, 저희는 성원 그룹에서 10년 넘게 일해 왔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진심으로 잘못했습니다.”“말이 한 번 나오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안이는 내가 인정한 손주며느리입니다. 그녀를 험담한 대가는 혹독할 것입니다. 성씨 가문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아무나가 아닙니다. 자신을 잘 살펴보고 적합한지 다시 생각하세요.”성수광의 말은 심지안을 향한 편애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번 해고는 사실 연다빈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제발...”성수광은 짜증스럽게 말을 끊었다.“백호야, 나가자.”“네. 어르신.”성수광이 나가자마자 재무팀은 소란스러워졌다.수다에 끼지 않았던 직원들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시기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직원들은 이번 일로 성씨
연다빈의 눈빛이 반짝였다.“같이 식사하게 될 수도 있죠. 대표님도 종종 호텔 아래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걸 봤거든요.”“우선 저희는 먼저 내려가요. 먹고 올 때쯤이면 대표님께서도 일을 마칠 테니, 마무리 작업을 하면 돼요.”“알겠어요.”저녁을 먹고 연다빈은 식당 주인에게서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고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대리는 그녀의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오자, 연다빈은 자연스럽게 대리에게 말했다.“대리님, 하루 종일 고생하셨으니 지금 쉬세요. 제가 대표님께 식사를 가져다드릴게요.”“그래요. 다녀와요.”대리는 연다빈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겉으로는 아무 의도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 하지만 이번에 대표님의 행동은 좀 의아하네. 정말 다빈 씨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연다빈은 방에서 시원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흰색의 긴 끈 민소매 잠옷은 약간 깊게 파인 목선과 정교한 쇄골을 드러내고, 치마는 허벅지까지 내려와 매우 시원했다.그녀는 문에 걸어둔 청재킷을 걸치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섹시한 잠옷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몇 초간 고민했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더 자연스럽게 성연신을 유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성연신의 방 앞에서 외투를 벗고, CCTV에 몇 장의 사진을 찍히게 하기로 계획했다. 그런 다음 그 사진을 퍼뜨려 성연신과 무언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려 했다.그리고 심지안이 이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짧은 시간 내에 성연신을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심지안의 꿈을 깨트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녀가 오해하고 실망하게 만들고, 결국 성연신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고 싶었다.연다빈은 무거운 심지안에 대한 원망을 억누르고, 외투를 벗고 CCTV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똑똑똑... 대표님 계세요?”“들어와
연다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성연신은 생각보다 그렇게 고결하지 않을 수도 있어. 어쩌면 나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걸까?’그녀가 성연신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쓰는 동안, 성연신은 다시 입을 열었다.“포장용기를 열어 주고, 쓰레기는 가져가세요. 나는 방 안에 냄새가 나는 걸 싫어해요.”임시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수축하였고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날 하인 취급하는 건가?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낭만적인 말은커녕 한 번 더 쳐다봐 주지도 않는다니.’하지만 그녀는 반항할 수 없었다. 성원 그룹에 계속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연다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지시대로 행동했다.그녀는 식사 상자의 포장지를 풀면서도 성연신의 동향을 주시했다. 성연신은 의자에서 일어나 컵을 들고 연다빈 뒤쪽에 있는 정수기로 걸어갔다.연다빈은 어깨를 살짝 기울여 외투가 미끄러지도록 하여, 하얀 피부가 드러나도록 했다. 성연신의 시선이 분명히 그쪽으로 향할 거로 생각했다.다음 순간, 그녀는 성연신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뜨거운 물이 그녀의 등에 쏟아졌다.“아!”연다빈은 깜짝 놀라 허리를 곧게 펴며 성연신을 바라보았다. 성연신은 컵을 들고 어깨를 으쓱하며 무심하게 말했다.“미안해요. 컵을 잘못 잡았네요.”뜨거운 물에 덴 화상에도 그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아파서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성연신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연다빈의 작은 행동들을 모두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심지안이 과민 반응을 하는 줄 알았지만, 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은 그의 실수였다.이진우와 장학수의 설명을 들은 후, 성연신은 앞으로 심지안이 하는 말은 다 맞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해...’연다빈은 당황하고 불안한 마음에 말했다.“대... 대표님?”성연신은 감정을 숨기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비록 임시연의 누드 사진도 봤고 그녀의 몸을 보기도 했지만 그는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어떻게든 그녀가 몸을 돌리게 해야 한다.연다빈의 대범한 자태 속에는 또 약간의 청초함을 띄고 있었고 그녀의 요염한 표정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성 대표님이 보기에 제 몸매 어때요? 괜찮아요?”성연신은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이걸로 뭘 보겠어. 어디 한번 돌아봐.”성연신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연다빈은 점점 기뻐졌다. 성연신의 마음속 그녀는 남다른 존재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좋아요. 성 대표님이 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여야죠.”말하는 동안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수줍게 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그리고 같은 시각, 성연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붉은 반점이 없다.순간 성연신은 모든 흥을 잃고 말았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성연신은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기 싫었고 그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내쫓았다.“이만 나가.”연다빈은 깜짝 놀라 몸을 떨며 억울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못 알아듣겠어?”성연신의 눈빛은 칼날같이 날카롭고 차가웠다.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연다빈은 마음속으로 이를 악물고 놀란 흉내를 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이윽고 엘리베이터에 탄 연다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더니 진즉 매수해 놓은 호텔의 감시 요원에게 연락을 넣어 방금 자신이 성연신의 방에서 나오던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내라고 명령했다.----------연다빈이 떠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심지안은 성우주를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그리고 심지안은 한쪽 발을 방안에 들여놓자마자 다급히 물었다.“어때요? 붉은 반점 있었어요? 그 사람 맞아요?”그러나 성연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니요. 연다빈은 아니에요.”그러자 심지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무지 이
“정말 있어요!”심지안의 새하얀 볼이 흥분 어린 감정으로 사랑스러운 복숭아 핑크빛으로 물들었다.“그럼 어디 가서 검사해야죠? 임시연의 DNA도 가져와야 하는데.”이젠 오직 경찰만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따가 제가 오지석에게 연락할게요. 지안 씨는 머리카락을 잘 모아주세요.”“그들이 올까요?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우리를 믿어줄까요?”“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잘못 잡을지언정 놓칠 수는 없다.정말 얻어걸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그러자 심지안은 갑자기 성연신을 끌어안더니 볼에 입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연신 씨 정말 대단하네요. 그럼 연신 씨만 믿을게요.”가슴이 뭉클해지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유쾌함이 가득했다.같은 시각, 옆에 작은 소파에 앉아 패드를 보고 있던 녀석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이 얼마나 좋은가. 엄마 아빠 사이가 좋으면 녀석도 기뻤다.오지석과 연락이 닿은 후, 그는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성연신은 아예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제경으로 돌아와 정욱을 보내 연다빈의 머리카락을 경찰서에 보냈다.다시 한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연다빈이 정녕 연다빈이 맞는지 아니면 사실 임시연인지는 곧 여부가 밝혀질 것이다.그는 오후에 업무상의 일을 마저 처리하고 저녁 7시 정각에 차를 타고 돌아갔다.넓은 승합차는 동시에 다섯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다.심지안은 성우주와 함께 앉았고 연다빈은 재무 경리와 함께 앞에 앉아 있었다.그리고 같은 시각, 성연신은 홀로 맨 뒤에서 해외 측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다.화목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이상한 기운이 불타올랐고 경리는 심지안과 담담해 보이기만 한 연다빈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몰래 흐느꼈다.성연신의 법적 와이프가 왔는데도 이렇게 침착하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니... 정말 인재가 따로 없다.내연녀가 되려면 이 정도의 심리적 자질은 필수인 것 같다.“엄마, 저 목말라요.”성우주가 말을 꺼내고 심지안이 마침 휴대폰을 내려놓고
연다빈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터져 나오는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살살할게요.”그러나 성연신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재무 경리는 머리를 한껏 움츠리고는 존재감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연다빈을 위해 나서주지도 않았다.똑똑한 사람은 절대 그녀를 돕지 않을 것이고 도울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물론 연다빈이 철이 없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성연신의 본처가 엄연히 자리에 있는데 연다빈이 도련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멋대로 나섰으니 총명하고 영리한 도련님이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연다빈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심지안은 차에서 잠자리에 들었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들의 차는 이미 제경 시내에 도착했고 30분도 안 되어 집에 도착했다.그리고 연다빈과 재무 경리는 일찍이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다.이윽고 운전기사가 차를 길가에 천천히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이곳은 택시 잡기 쉽고 사람이 많으니 여자들에게 더 안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는 것을 잊지 마세요.”어차피 회사에서 정산하니까 돈을 아끼기 위해 불법 차를 타는 것은 가치가 없다.재무 경리는 차에서 내려 짐을 들고 매우 공손한 태도로 심지안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럼 성 대표님, 그리고 사모님, 안녕히 계십시오.”“안녕히 계세요.”연다빈도 따라서 한마디 했고 심지안도 인사치레로 대충 대응했다.밖에 나가면 그녀의 행동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세움 주얼리, 성원 그룹, 그리고 보광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는 매우 쉬운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왜 기꺼이 하지 않겠는가?누가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그런데 차에서 내리려던 연다빈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한편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에서 물건을 뒤적이며 한편으로 입을 열었다.“방금 성
심지안은 아침 식탁에 앉아 잠이 덜 깬 듯 중얼거렸다.“이틀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네요.”그렇다면 이틀만 더 놀아주도록 하지.“토스트에 잼 바를 건데 딸기가 좋아요, 아니면 블루베리가 좋아요?”감색 실내복을 입은 성연신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라 아직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어 나른한 이완 감이 감돌았고 온몸을 맴돌던 싸늘한 기운도 한결 부드러워 이웃집 오빠처럼 다정했다.심지안은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토스트를 보며 답했다.“딸기요.”새콤달콤한 딸기가 식욕을 돋우어준다.“알겠어요.”성연신이 딸기잼을 천천히, 구석구석 듬뿍 발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자 심지안이 작은 입을 벌려 빵조각을 깨물었다.딸기의 새콤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행복감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행복해하는 심지안의 모습에 성연신은 접시에 담긴 식빵 조각을 전부 딸기잼으로 발라 버렸고 한편, 딸기잼을 싫어하는 성우주는 어이가 없었다.그는 이리 고르고 저리 고르다 결국 아무도 마시지 않는 좁쌀 죽 한 그릇을 골라 묵묵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비록 아침을 잘 먹지는 못했지만 엄마 아빠의 애틋한 모습을 보니 마음은 매우 즐거웠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먼저 성우주를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성우주는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교실로 돌아갔다.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을 뻗어 책상에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문득 두꺼운 사진첩에 손이 닿았다.성우주는 잠깐 멍해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러나 밖에 성연신의 차는 이미 멀리 떠났고 성우주는 다시 사진첩을 내려다보며 그냥 저녁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말하리라 다짐했다.성연신이 심지안을 세움 주얼리로 데려다주는 길에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웬 낡은 옷을 입은 소녀가 엿으로 만든 막대사탕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언니, 아저씨, 사탕 사실래요? 엄청나게 달고 맛있어요.”그 순간 말 속의 포인트를 잡아낸 성연신이 미간을 찌푸렸다.언니, 아저씨?왜 심지안은 언니라고 부르고 그는 아저씨라
심지안은 눈썹을 추켜올리고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지만 낯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상속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사무실은 줄곧 변동이 없었다.영업 부서는 인력이 가장 많은 부서로 이동성이 높고 대인 관계가 복잡하며 말 많은 사람이 있어 사건·사고가 잦았다.현재로서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심지안은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고청민의 모습이 불쑥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그는 순백색 셔츠에 은백발을 하고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 얼굴의 가는 솜털마저 촘촘히 보였다. 게다가 고청민은 마치 천사 소년처럼 밝은 미소를 머금고 맑은 갈색 눈동자에 반짝반짝 빛나는 빛깔을 띠고 있었다.심지안을 발견한 고청민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마치 그들은 결코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 듯 말이다.“드디어 왔군요.”말없이 살짝 틀어진 미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심지안은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할아버지께서 저에게 회사 상황을 좀 보라고 하셔서요.”고청민은 턱을 치켜들고 앞에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뭉치를 보며 무고한 눈을 구부렸다. 그러고는 마치 선생님이 아이를 칭찬하듯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역시나 당신은 제가 예상했던 대로 아주 훌륭합니다. 세움 주얼리를 맡아줄 수 있겠어요.”“정말 단순히 제 일을 시찰하러 온 겁니까?”심지안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그러자 고청민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그래요. 지안 씨가 감시당하는 기분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제 선에서 여러 번 밀어냈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할아버지 성격이 워낙 당신처럼 고집이 세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왔죠.”그러나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세움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직접 말하세요. 원래 당신의 몫이 절반 있으니까요.”솔직히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것이 맞다.결론적으로 세움 그룹은 성동철과 고청민의 할아버지가 함께 창립한 것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