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너무 크다 보면 같은 학교라도 얼굴을 모르는 사이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네요. 같은 이름, 같은 성씨의 사람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학교까지 같은 속을 나올 수가 있을까요? 정말 믿기 어려운 상황이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자리 한 번 만들어봐야겠어요.”이때, 장학수가 중요한 정보를 포착했다.‘같은 이름, 같은 성씨, 같은 학교? 이건... 성형!’장학수는 갑자기 떠오른 위험한 생각에 술이 확 깼고, 몸 전체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서둘러 성연신에게 이 위함한 생각을 말하고 싶었지만, 돌아보니 성연신은 이미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장학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심지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안 씨의 직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연다빈에게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아요.]5분 후, 심지안이 답장을 보냈다.[학수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선 연신 씨에게 말하지 말고 증거부터 찾아봐요.]...별빛이 반짝이는 밤을 지나 하늘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아직 날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이었지만 심지안은 잠에서 깼다.심지안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게 반신욕 하며, 장학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어났어요? 좀 일찍 만날 수 있어요?]심지안은 어젯밤 장학수와 연다빈을 조사할 방법을 논의한 후,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다가 우연히 임시연의 오래된 SNS 계정을 발견했다.임시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심지안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전율을 느꼈다.연다빈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누구를 닮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바로 임시연을 닮았던 것이었다.얼굴은 완전히 다르지만, 몸매와 분위기,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익숙하고 신경 쓰였다.심지안은 곧바로 무서운 생각이 떠올렸다.‘임시연이 성형 수술로 외모를 바꾸고,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 성원 그룹에 면접을 본 것이 아닐까?’생각만 해도 소름이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 잠깐 회사에 다녀오려고요.”심지안은 집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멈칫했다가 고청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머리가 왜 이렇게 하얗게 변했어요? 치료가 잘 안되고 있는 거예요?”고청민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만지며,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치료 중에는 흔한 일이에요.”“의사 말을 잘 따라야 해요. 지원 씨는요? 병원에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고청민이 성씨 가문으로 이사 온 이후, 아내인 하지원도 당연히 함께 이사 왔다.성동철은 하지원을 매우 예뻐했고, 그녀가 고청민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하지원은 성씨 가문에서 매우 편안하게 지냈으며, 생활도 하씨 가문에서 있을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하지원은 이 성동철과 심지안을 피하려 했기에,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하씨 가문에 다녀온대요. 간만에 오빠를 보러 갔어요.”고청민이 말을 이었다.“이렇게 일찍 회사에 가요? 인터넷에 뜬 표절 사건을 봤는데, 잘 해결했더군요. 이후 회사의 후속 처리는 제가 도와줄 테니, 다음번에는 혼자 대처 잘할 수 있도록 경험을 쌓아요.”“물론 잘 해결됐죠. 하지만 다음번이 없기를 바라요. 그리고 회사로 올 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서 맡기신 일도 잘 처리해야 하니까 회사로 갈게요.”심지안은 잠시 망설였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가볼게요.”“나중에 봐요.”고청민의 갈색 눈동자가 오래간만에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심지안이 차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말이다.집사는 옆에서 잠시 기다리다 시간을 확인하고, 늦을까 봐 조용히 말했다.“고 이사님, 이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고청민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먼 곳을 쳐다보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출발해야겠죠...”“고 이사님, 출발합니다. 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심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남자가 바람피우면 이렇게 되는구나!”“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연신이 바람을 피운다고 해도 두 사람이 재혼하면 그의 재산은 모두 지안 씨 거예요.”심지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 법에 대해 조금 알아요. 결혼 전 재산은 공동소유가 될 수 없잖아요.”장학수는 손짓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연신이가 이미 재산 공증을 해놨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재산이 심지안 씨에게 돌아간다면 믿으시겠어요?”심지안은 깜짝 놀라며 성연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연신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에게도 똑같이 말했었다. 그러나 심지안은 성연신이 이렇게 빨리 행동에 옮길 줄은 몰랐고, 이 사실에 마음이 약간 뭉클해졌다.장학수는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본론으로 돌아가요. 어젯밤에 연다빈에 대한 개인 정보를 조사해 봤는데, 지안 씨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아요.”심지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뭐예요? 연다빈의 정체가 임시연인가요?”장학수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안 씨... 저는 변호사이지 경찰이 아니잖아요? 경찰도 이렇게 빠르게 정체를 밝히지 못할 거예요.”“알았으니까 계속 말해봐요.”“어젯밤에 바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연다빈을 알고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성원 그룹에 입사한 연다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진을 보여주니 두 사람의 외모가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더 조사해 보니 그 여자가 말한 연다빈과 성원 그룹의 신입사원 연다빈은 개인 정보만 일치했어요.”심지안은 충격을 받았지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말했다.“성형했으면 얼굴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럴 수는 있겠죠. 하지만 어젯밤에 그 여자로부터 ‘연다빈'의 전신사진과 재학 당시 건강검진 보고서를 받아봤는데, 키가 달랐어요. 그 여자가 말한 연다빈은 키가 약 155cm였지만, 우리가 본 연다빈은 168cm 정도는 돼 보였잖아요. 성형 수술로 키까지 바
심지안은 몸이 굳어지며 멀지 않은 곳에서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중년 여사원과 안색이 어두운 성연신을 바라보았다.경비는 심지안의 눈치를 보다가 상황을 설명했다.“사모님, 지금 대표님과 이야기 중인 분은 그룹 재무팀의 부장, 안미경 씨입니다.”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생각했다.‘재무팀? 그럼 연다빈의 상사인가?’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몰래 엿들어 보기로 했다.성연신은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머리가 아팠는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연다빈 씨에게 사직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재무팀 부장은 당황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감히 이 문제를 언급할 자격이 없는 걸 알지만, 연다빈 씨는 비록 그룹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매우 성실합니다. 우리가 제출한 보고서에서 여러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연다빈 씨였고요... 그런데 어젯밤에 저에게 메일로 사모님과의 갈등 때문에 사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어요. 아직 어려서 부적절한 언행으로 사모님을 화나게 한 것 같습니다...”“이 모든 이야기를 연다빈 씨가 안 부장에게 했습니까?”성연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아닙니다. 어젯밤 사직을 논하길래 상황이 이상해서 제가 몇 가지 캐물었던 것입니다.”“정말인가요?”안미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인격을 걸고 맹세합니다. 사실입니다.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성연신의 표정이 조금 풀리며, 옷에 묻은 주름을 가볍게 털어냈다.“우선, 저는 연다빈을 해고한 적이 없고, 두 번째로 안 부장은 연다빈 씨의 직속 상사로서 연다빈 씨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안미경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제가 결정할 수 있다고요?”“네.”성연신이 귀찮아하며 대답하던 그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그룹 로비로 향했다. 재무팀 부장은 성연신의 말을 곱씹으며 혼자 남아 있었다.‘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연다빈을 남겨둘 수 있는 거야... 만약 대표님이 정말로 연다빈을 내보내
정욱은 심지안을 보자마자 말문이 막혔고, 하려던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다시 삼켰다. 정욱은 헛기침하며 심지안을 맞이했다.“엣헴... 사...사모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심지안은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왜요? 오면 안 되는 상황인가요? 사무실에 지금 벌거벗은 여자가 숨어 있기라도 한 거예요?”정욱은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사모님,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무섭습니다.”심지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정욱 씨, 요즘 유진이와는 어떻게 지내요?”진유진 이야기가 나오자, 정욱의 눈에서 갑자기 꿀이 뚝뚝 떨어졌다.“지난주에 집에 데려가서 어머니께 인사드렸고, 이번 주에는 유진 씨의 집에 가서 인사드리려고 해요.”“전에 유진이 부모님을 만나 뵌 적이 있으니, 쉬운 분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마음의 준비는 했어요?”심지안은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며 물었다.진유진의 부모는 지나치게 아들을 편애해서 심지안은 그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정욱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럼요. 그래도 두 사람이 평생 함께할 거라면, 두 집안이 엮일 수밖에 없잖아요.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죠.”“유진이는 좋은 여자예요. 다만, 그녀의 부모가 너무 아들만 편애해서 문제죠. 나중에라도 귀찮다고 회피하면 저한테 혼날 줄 알아요!”결혼 후에는 배우자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남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결혼 전에는 잘 보이려고 노력하다가도 결혼 후에는 무관심해지곤 하는 케이스 말이다.진유진의 가족 문제가 결혼 후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심지안은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정욱의 마음이 식을까 걱정이었다.정욱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혼 가정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남의 시선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니 제가 유진 씨의 가정문제로 유진 씨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정욱은 어머니와 의지하며 살아왔고, 대학 졸업 후 우연히 성연신의 눈
키스가 끝나자, 심지안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마치 탐스러운 복숭아 같아 보였다.성연신은 심지안을 내려다보며, 검은 눈동자가 활활 불타오르는 듯했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지안 씨...”성연신이 말 다 하지 못했을 때,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사무실 밖에서 들려왔다.성연신은 짜증스럽게 문 쪽으로 쳐다보며 물었다.“누구지?”“대표님, 저예요. 바쁘신가요?”심지안은 순간 눈빛이 흔들렸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성연신의 셔츠 소매를 세게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연다빈이에요!”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들어오지 말라고 할게요.”“안 돼요. 들어오게 해요. 이번에는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보고 싶어요!”심지안은 말하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성연신의 집무실 한쪽에 있는 화장실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빠르게 들어가 문을 살짝 열어 두었다.“들어와요!”심지안은 연다빈이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했다. 그녀가 있으면 상황이 다르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성연신은 이마를 짚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 쪽을 향해 말했다.“들어와.”연다빈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성연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연다빈은 눈가가 붉어진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성연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부장님께서 오늘 아침에 대표님을 찾아오셨다면서요?”심지안은 눈을 굴리며 속으로 비웃었다.‘배우 납셨네.’성연신은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보고서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심지안과의 스킨쉽 때문에 목소리는 평소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연다빈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목소리는 연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드러운데, 얼굴은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연다빈은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하고,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대표님, 저를 해고하지 않아 주셔서
성연신의 눈동자에 슬픔이 번졌고, 목소리가 거칠어졌다.“어머니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서 거의 외출하지 않으셨어요. 친구도 많지 않았기에 한두 명의 친한 친구들 말고는 어머니의 원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어요. 사진도 별로 없고, 집에 남아 있는 것도 몇 장뿐이니까요.”방매향의 행적은 꽤 신비로워서, 몇몇 친한 친구들 외에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방매향은 일반적인 부잣집 부인과 달리, 남편 중심이 아닌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고,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독립성을 지녔었다. 이는 송석훈이 그녀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심지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성연신이 자기 물음의 요점을 잡지 못한 것 같아 직접 물었다.“내 말은 임시연이 어머님 옛날 사진을 본 적이 있냐는 거예요.”성연신은 몇 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본 적 없어요.”“그럴 리가요?”심지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럴 리가 없는데...”“연다빈이 어머니의 얼굴을 따라 성형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네...”“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의 얼굴을 따라 성형할 수 있겠어요?”심지안과 민채린이 연다빈에게 적대감을 보였지만, 성연신은 단순히 우연으로만 여겼다.심지안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하다가, 갑자기 눈이 반짝이며 성연신을 바라보았다.“임시연이 송석훈 쪽에서 어머님의 사진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불가능해요.”성연신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송석훈은 어머니를 감금한 몇 년 동안 먹고 자고 하는 모든 것을 직접 책임졌어요. 송준조차도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 임시연은 더 말할 것도 없죠...”심지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죽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만약 어머니가 성형 전에 그렇게 신비롭게 지내셨다면, 임시연이 사진을 얻을 기회는 정말 없었을 텐데... 정말 우연일까? 믿을 수 없어.’심지안은 주먹을 꽉 쥐고, 성연신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
심지안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됐어요. 너그럽게 봐줄테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연다빈이 그 점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요. 아니면 연신 씨가 유혹해 볼래요?”성연신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가 눈가에 애정 어린 미소를 띠며 물었다.“질투 안 할 자신 있어요?”“질투하겠죠.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심지안은 비밀스럽게 성연신을 손짓하며 말했다.“좋은 계획이 떠올랐어요.”성연신은 처음에는 협조하기 싫었지만, 그녀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심지안의 은은한 체향이 성연신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성연신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 끊이지 않는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사무실을 채운 심지안의 향기와 함께 그의 마음은 차츰 차분해졌고, 두통도 덜해졌다.성연신은 가까이서 심지안이 속삭이는 말을 듣는 것, 그리고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그날 오후, 정욱은 개인적인 일로 며칠 휴가를 떠나기에 앞서, 성원 그룹의 각 부서 기획 담당자 그룹 채팅방에서 재무팀 대리에게 한가지 사항을 당부했다.[재무팀 대리님, 내일 대표님께서 출장을 가시는데 재무팀 소속 인원 두 명과 함께 가야 합니다. 같이 갈 인원 두 명을 선발하고 알려주세요.][재무팀 인원 두 명이요? 제가 부장님과 다녀오겠습니다. 부장님은 성원 그룹에 오래 계산만큼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납니다.][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출장은 꽤 피곤할 겁니다. 장거리 출장은 아니지만 체력이 좋은 젊은 사원이 낫겠어요. 제가 없으니...]10분 후.[재무팀에 소속된 직원들은 거의 35세 이상입니다. 최근에 새로 입사한 신입이 한 명 있는데, 그럼 신입사원을 데려가겠습니다.][알겠습니다. 보고드리겠습니다.]퇴근 1시간 전.재무팀 대리가 재무팀에 들어와서 이 내용을 발표했다.“연다빈 씨, 오늘 일찍 퇴근해서 준비하세요. 내일 대표님과 함께 출장 가게 되었습니다.”순식간에 주변 직원들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