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조정수가 죽는 모습을 본 허준희는 오늘 허씨 일가는 틀림없이 패배할 거라고 확신했다.두 대종사가 진서준의 손에 죽었으니 패배를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그래도 허준희는 똑똑한 편이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허사연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만약 허사연을 잡으려고 했다면 허씨 가문도 이씨 가문처럼 소멸당했을 것이다.“진서준 씨,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허준희는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덜덜 떨었다.어제까지 진서준 앞에서 건방을 떨던 허준석은 겁을 먹어서 말도 하지 못했다.진서준이 이렇게 강할 줄 알았더라면 절대 진서준을 그렇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똑똑하네.”진서준은 허준희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이씨 일가는 이미 망했고 허씨 일가까지 없애버린다면 한씨 일가만 남게 되는데 그건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었다.지금까지 한씨 일가는 조씨 일가와 황씨 일가의 구역도 전부 집어삼키지 못했다.“허씨 일가는 봐줄 수도 있어. 하지만 앞으로 내 명령에 따라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허준희는 서둘러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허씨 일가는 영원히 진서준 씨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진서준의 앞날은 아주 창창했다.진서준은 겨우 20대였다. 만약 그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된다면 7품 이상의 대종사가 될지도 몰랐다.그대가 되면 허씨 일가의 지위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질 것이다.“좋아. 한씨 일가와 연합하여 이씨 일가를 삼키도록 해.”진서준이 분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모든 걸 해결한 뒤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곳을 떠났다.한씨 일가로 돌아간 뒤 진서준은 곧바로 샤워하여 몸에 묻은 피를 전부 씻어냈다.그가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허사연은 그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서준 씨, 조금 전에 다친 것 같던데 얼른 봐봐요.”허사연이 긴장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괜찮아요. 상
진서준은 허사연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사연 씨, 내가 샤워할 때 왔네요. 몰래 훔쳐보지는 않았죠?”허사연은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내가 왜 늑대 같은 서준 씨를 훔쳐보겠어요?”“우리 둘 중에 늑대가 누굴까요? 내가 샤워할 때 몰래 찾아온 건 사연 씨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내 상처를 보겠다면서 옷을 벗으라고 했잖아요!”진서준은 작게 말했다.“아까 이씨 일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죠? 나도 사연 씨가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할래요!”허사연은 진서준의 품에 풀썩 쓰러졌다.심지어 호흡마저 가빠졌다.이 순간, 방 안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고 핑크빛 기류가 감도는 듯했다.허사연의 부드럽고 가녀린 허리에 팔을 두른 진서준은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잘 때도 허사연을 끌어안고 자고 싶었다.“아...”허사연은 엉덩이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자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그 목소리를 들은 진서준은 허사연의 입에 입을 맞췄다.허사연은 처음엔 진서준의 거친 몸짓에 살짝 놀랐지만 진정한 뒤에는 진서준과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몇 분 뒤, 허사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헐떡였다.그녀는 진서준에 의해 상의가 다 벗겨져서 검은색 레이스 속옷만 입고 있었다.가슴이 커서 진서준의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안... 안 돼요. 여긴 한씨 일가예요. 우리 돌아가서...”허사연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가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진서준은 사실 허사연과 스킨십을 할 생각이었지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냉정을 되찾은 진서준은 서둘러 옷을 입혀줬다.그러고는 허사연에게 몇 번 더 입을 맞춘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서라를 구하면 바로 돌아가요!”“네. 난 먼저 방으로 돌아갈게요...”허사연은 자신의 방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그녀는 방으로 돌아온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샤워했다.진서준은 허사연이 떠난 뒤 창문을 전부 열어놓고 통풍시켰다....저녁.김연아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
김연아는 김형섭이 쓸모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건 서씨 일가의 명령이었고 김형섭은 반박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연아야, 이건 정말 내가 원한 게 아니야. 난 그냥 네가 행복하게 크기를 바란 것뿐인데...”김형섭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돌아오지 않았다면 전 행복하게 지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김연아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돌아가세요. 정략 결혼할게요. 당신에게 폐 끼칠 일 없어요.”냉담한 어조에 김형섭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뭐라고 더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돌아갔다.김형섭이 떠난 뒤 김연아는 진서준의 사진을 꺼내더니 혼자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유지수가 준 시간까지 이틀 남았다.만약 이틀 내로 옥선화를 찾지 못한다면 유지수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진서준 씨, 허씨 일가가 오늘 진서준 씨를 위해서 레이 호텔에서 파티를 열 거래요.”한보영은 아침에 진서준의 침실로 찾아와서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거절해 줘요. 전 그런 자리에 참석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으니까요.”한보영은 한숨을 쉬었다.“진서준 씨,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 없어요. 유지수 씨는 절대 서준 씨 동생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유지수 씨도 진서준 씨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오면 두려울 거예요. 지금 초조해야 할 사람은 서준 씨가 아니라 유지수 씨예요. 이 파티에는 중부의 모든 가문이 다 올 거예요. 파티하는 와중에 수소문해 보면 옥선화의 소식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진서준은 한보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좋아요. 보영 씨 말대로 할게요.”“일단 옷부터 바꿔입어요. 그 옷은 서준 씨 신분에 너무 어울리지 않아요.”한보영은 진서준이 입은 운동복을 보면서 말했다.진서준은 이곳에 올 때 옷을 한 번만 가져왔다.전의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한제성의 것이었다.“알겠어요.”진서준
차를 세운 뒤 진서준과 한보영은 차에서 내렸다.한보영은 진서준의 손을 잡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잡고 싶어서 잡는 거 아니에요. 우리 둘이 손을 잡지 않으면 저한테 연락처를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 많을 거예요.”진서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한보영이 차에서 내렸을 때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한보영은 한때 아픈 적이 있어서 몸이 아주 허약하고 말랐다.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보호 욕구가 생겼다.그리고 그런 여자들은 남자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았다.“제가 오히려 이득을 본 거네요.”여자인 한보영도 신경 쓰지 않으니 진서준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서 신시아 백화점으로 향했다.한보영은 진서준이 입을 만한 옷을 정성 들여 골랐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오해했을 것이다.“보영아!”진서준의 옷을 골라주고 있던 한보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고개를 돌린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전해찬 씨, 말조심하세요. 당신은 제 이름을 막 부를 자격이 없어요.”한보영은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그녀의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에 전해찬은 흠칫했다.예전에 한보영은 그에게 살갑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냉담하지는 않았다.전해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아쉬워했다.“보영아, 그래도 우리 오랫동안 친구였는데 이름을 부르지 못할 건 없잖아?”전해찬은 웃으며 말했다.한보영은 옆에 있는 진서준을 힐끗 보더니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우리 안 친하잖아요. 친구도 아니고요.”그녀의 말을 들은 전해찬은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이 들어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고양시 갑부의 아들이었기에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그런데 한보영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그래요, 좋아요.”전해찬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려 백화점을 떠났다.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분
매니저 또한 난감한 상황이었다.그는 그저 돈 받고 일하는 직장인일 뿐이었다. 고양시처럼 거물이 가득한 곳에서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진서준도, 한보영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매니저가 진서준을 내쫓으러 온 건 아마도 누군가의 명령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명령을 내린 사람은 조금 전 한보영이 쌀쌀맞게 쫓아낸 전해찬이었다.“제가 블랙리스트에 들어갔다고요?”진서준이 물었다.“그렇습니다.”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매니저를 보더니 덤덤히 말했다.“내가 이 백화점 소유자가 된다면 블랙리스트가 될 일은 없겠죠?”아주 태연자약했다.“당... 당연하죠.”매니저는 어리둥절했다.이 백화점을 사겠다는 뜻인 걸까?백화점 매니저는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신시아 백화점은 이곳의 가장 큰 백화점으로 그 가치가 6,000억에 달했다.엄청난 가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아주 대단한 재벌가 아들이라고 해도 블랙리스트가 되었다는 이유로 6,000억짜리 백화점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대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걸까?한보영 또한 놀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드러냈다.“좋아요. 제가 기억하건대 이 백화점 대표님 이름이 왕석훈이죠?”“맞습니다. 저희... 저희 회장님이세요...”매니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그는 20년 넘게 매니저를 해오면서 이렇게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배포가 이렇게 크다니!왕석훈이 팔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었다. 이 백화점은 항상 흑자였고 몇 년 더 지나면 가치가 더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왕석훈 회장님 맞죠? 전 한보영이라고 합니다. 진서준 씨께서 신시아 백화점을 구매하고 싶어 하십니다. 진서준 씨는 지금 백화점 2층에 있습니다. 오실 때 계약서 들고 오시죠.”한보영은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왕 대표님 곧 계약서 들고 오실 겁니다.”한보영은 웃는 얼굴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전해찬을 위해 새로 온 대표님께 밉보일 생각인가요?”매니저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저 두 사람 무슨 일이지? 왜 경호원들이 와 있지?”“설마 도둑질하다가 잡힌 건 아니겠지?”“조용히 좀 해. 저 청년이 백화점 블랙리스트에 등록됐다잖아. 그런데 조금 전에 들어보니까 두 사람 이 백화점을 살 생각인 것 같던데?”사람들은 진서준이 어떻게 될지 수군대기 시작했다.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을 때 전해찬은 갑자기 아버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아버지, 무슨 일이에요?”얼른 돌아와. 너 오늘 저녁 나랑 같이 파티에 가야 해. 지각하면 안 돼!”“아직 이르잖아요.”“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얼른 돌아와!”전해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한보영이 좋아하는 남자가 어떻게 쫓겨나는지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이젠 볼 수 없게 되었다.전해찬은 백화점을 떠날 때 왕석훈을 보았다.왕석훈은 신시아 백화점 회장으로 고양시에서 꽤 잘 나갔다. 전해찬도 그를 만나면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야 했다.하지만 전해찬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빠르게 떠났다.왕석훈은 빠르게 남성 정장 매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보영과 매니저를 보았다.“회장님...”매니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양시 최고 백화점을 소유한 왕석훈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겨우 50세인 왕석훈은 얼굴이 초췌했고, 마른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면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진 마스터님을 뵙습니다! 제 부하가 진 마스터님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들었는데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그 순간 다들 넋이 나가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왕석훈을 바라보았다.왕석훈을 알아본 사람들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몸값이 엄청난 왕석훈이 젊은이를 향해 무릎을 꿇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그건 왕석훈만이 알았다.눈앞의 진서준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서울의 진 마스터, 이 일곱 글자가 모든 걸 의미했다.어제 진서준이 인의방에 이름을 올린 두 명의 2품 선천 대종사를 죽였을 때, 왕석훈은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그는 진서
양도 계약이지 거래 계약이 아니었다.왕석훈은 6,000억 가치의 백화점을 진서준에게 그냥 주려고 했고 그 박력에 한보영은 깜짝 놀랐다.왕석훈은 아주 똑똑했다. 그는 진서준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진서준에게 왕석훈을 죽이고 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정말로 그런다고 해도 국안부에서는 그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굽히고 들어가서 백화점을 그냥 줘버리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자기 목숨과 다른 사업들은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옆에 있던 매니저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그는 어떻게 진서준과 왕석훈을 대해야 할지 몰랐다.게다가 왕석훈은 이제 더는 그의 상사가 아니었다.매니저는 진서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죄송합니다. 모든 건 전해찬 씨께서 시킨 일입니다.”전해찬이 시킨 일이라는 말에 진서준과 한보영 모두 놀라지 않았다.“그냥 날 블랙리스트에 넣으라고 한 건가요?”진서준이 물었다.“아... 아뇨. 진서준 씨를 백화점에서 내쫓은 뒤 경호원들을 시켜 흠씬 두들겨 패라고 했습니다.”매니저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경호원을 시켜 진서준을 패라고 했다는 말을 듣자 왕석훈은 전해찬이 죽도록 미웠다.선천 2품 대종사마저 진서준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 일개 경호원들이라면 진서준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전부 목숨을 잃을 것이다.“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도, 멍청한 사람도 있는 법이죠.”진서준은 피식 웃었다.“일어나요. 이 백화점은 이제부터 제 겁니다. 계속 매니저 하세요.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매니저는 그 말을 듣더니 연신 고개를 조아리면서 진서준에게 고마워했다.먼저 매를 든 뒤 당근을 준다면 상대방은 더욱 고마워할 것이다.진서준은 이제 더 이상 무턱대고 앞으로 돌진하던 단순한 청년이 아니었다.왕석훈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진서준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제 딸은 진 마스터님을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진 마스터님을 한 번 뵙고 싶어 하는데 혹시...”“전 여자 친구가 있으니 그
게다가 진 마스터는 최근에 고양시의 가장 강한 대종사를 죽였다.하지만 전해찬은 진 마스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아버지, 진 마스터에게 돈을 줘서 절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면 안 돼요?”전해찬이 흥분해서 물었다.“겨우 그까짓 돈을 진 마스터님께서 원하겠어?”전홍석이 차갑게 말했다.진서준에게 소멸당한 세 가문의 자산을 더해도 전시 일가와 비슷할 것이다.진서준에게 부족한 건 돈 따위가 아니었다.“그렇다면 뭘 줘야 할까요? 미녀? 아니면 골동품?”전해찬은 떠오르는 걸 다 얘기했다.“너는 머리 좀 쓰면 안 되겠니?”전홍석은 본인은 똑똑한데 아들이 너무 멍청해서 무척 화가 났다.갑자기 전홍석은 호흡이 가빠지더니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약... 약...”전해찬은 서둘러 전홍석의 약을 가지러 갔다.약을 먹은 뒤 전홍석은 숨 쉬는 게 한결 쉬워졌다.그는 잠깐 숨을 돌린 뒤 말했다.“그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면 부족한 게 없을 거야. 부족한 게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앞다투어 선물로 주겠지. 우리는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걸 줘야 해.”전홍석이 말했다.“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거라면 어떤 거예요?”전해찬은 서둘러 물었다.“바로 이거야!”전홍석은 자신이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예쁘게 꾸며진 박스를 본 전해찬은 궁금한 듯 물었다.“아버지,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죠?”“영약!”전홍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영약이요? 그게 뭔데요? 영성이 있는 약은 아니겠죠?”“맞아.”“설마 다리가 달려서 도망치는 건 아니에요?”전홍석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멍청한 것, 그런 영약이 어디 있어? 내가 말한 영약이란 풍수 좋은 곳에서 수백 년간 자라서 대량의 영기를 띤 약이야.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중한 거라고!”전홍석의 말을 들은 전해찬은 무척 흥분했다.“아버지, 이 약이 있다면 진 마스터님께서 절 제자로 받아주시겠죠?”“몰라. 제자로 받아주지는 않더라도 몇 수 가르쳐주기는 할 거야.”전홍석은 미소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
이때의 조슬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조금만 가까이 가도 조슬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신수란은 조슬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바로 옆방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로 자기 체온을 되찾으려 했다.조슬기를 업고 오는 내내 신수란 또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조슬기의 체온은 거의 0도에 가까웠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통에 신음하는 조슬기를 보며 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내가 일단 치료할게. 성약당 장로가 도착하려면 최소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해.”“네가 치료한다고? 경호원 주제에 뭘 안다고 사람을 살린다고 지껄여?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네가 뭔데 이렇게 나대?”은청준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가 경호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못 구한다고 했죠?”유정이 즉각 반박했다.은청준이 지속적으로 진서준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 영 거슬렸는데 이제는 대놓고 모욕까지 하니 유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유 아가씨, 경호원이 사람을 못 구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전 그냥 저 사람이 자격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은청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유정이 유 가주의 딸만 아니었다면 유정에게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아까 진서준과 대련하려고 할 때에도 유정 때문에 망신당했는데 지금은 또 저 하찮은 경호원 따위를 위해 유정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니, 이러다간 정말 곤륜 차세대 천재 일인자인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유씨 가문의 경호원이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니 기막힌 일이었다.“김평안 오빠는 우리 유씨 가문을 여러 번 구한 의술이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 목숨도 이분이 살리셨죠. 그런 분이 왜 자격이 없다는 거죠?”유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은청준과 눈을 맞추며 쏘아붙였다.은청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유 아가씨, 아가씨는 제 후배 신분을 아나요? 제 후배는 우리 종문 문주의 따님입니다.
하지만 두 검의 차이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컸고 이건 진서준에게 손해 보는 장사였다.“이봐요, 은청준 씨, 곤륜 제자로서 이런 요구를 하는 건 곤륜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요?”유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은청준도 유정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유 아가씨,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제 검도 희귀한 명검 중 하나입니다.”은청준은 굳은 얼굴로 즉시 반박했다.“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바로 시작하자.”은청준은 진서준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유정이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이 참선검은 반드시 자기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규칙은 간단해. 검이 먼저 상대의 몸에 닿는 쪽이 승리야, 어때?”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오직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었다.“문제 없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막 대련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갑자기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왔다.“가주님! 조슬기 아가씨의 소식을 받았습니다!”“뭐라고? 아가씨가 어디 있어?”유기명이 즉시 반응하자 이장로가 손을 내저었다.“이 대련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먼저 슬기부터 찾자.”그 말을 듣자 은청준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지만 이장로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김평안, 그 검 잘 보관해 둬라. 내가 반드시 가져갈 거니까.”은청준은 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조슬기 아가씨가 이미 금도에 도착해서 우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즉시 날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이장로가 급히 말하자 유기명이 서둘러 제안했다.“이장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여기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이장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절했다.조슬기가 과연 무사한지 이장로는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알겠습니다. 이봐, 즉시 이장로님을 모시고 출발해.”
식사도 아직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이미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유정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쭉 진서준에게 머물렀다.진서준이 이따가 대련 중에 다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유씨 가문에 머무르는 동안, 유정은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면 곤륜을 비롯한 4대 은세 종문에 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가장 오래 유지되어 온 은세 세력이었다.심지어 경성의 4대 가문조차도 이 4대 종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게다가 종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천재였다.은청준이 곤륜의 차세대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손꼽힌다면 그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컸다.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반면 진서준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진서준의 여유로운 태도에 은청준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흥, 대련이 시작되면 네놈이 나와의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은청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저녁 식사 내내 유기명과 이장로만 가끔 대화를 나눴다.곧 식사가 끝나자 곤륜의 다른 제자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몰려왔다.다들 유씨 가문 저택 뒤편의 넓은 공터에 모여 구경하기 시작했다.“저 녀석 미친 거 아냐? 감히 은 선배와 대련하겠다고? 살고 싶지 않은 건가?”“은 선배는 이미 사급 대종사야. 선배의 실력은 끔찍할 정도로 강해. 웬만한 사람은 상대도 안 되지.”“내기나 해볼까? 저 자식이 선배의 검을 몇 번이나 막아낼 수 있을지?”“난 한 방도 못 버틴다고 봐. 선배는 이미 검의를 깨우쳤잖아.”곤륜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진서준을 과소평가했다.다들 은청준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또래 중에서 아무도 은청준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반면, 진서준은 겉보기에는 40대로 보였지만 전혀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이런 사람이 실력자라고 한다
“김평안 씨는 내가 엄청난 공을 들여서 모셔 온 분입니다.”유기명이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진서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겉보기엔 4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어마어마하다고? 그럼 나랑 한번 붙어볼래?”은청준이 비웃으며 말했다.은청준은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급 대종사가 되었는데 반면 이 경호원은 체내에 강기가 거의 없었다.아무래도 겨우 종사의 문턱을 밟은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세속에서는 강자로 불리는 건가?유기명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은청준 씨와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김평안 씨 검술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실력입니다.”“마침 나도 검술이 특기인데, 한 번 겨뤄볼까?”은청준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청준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무도는 남과 다투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이장로가 차분하게 말하자 은청준은 곧바로 태도를 고쳐잡고 공손하게 말했다.“이장로님, 저는 그냥 세속 무인과 가볍게 한 수 겨뤄볼 생각이었습니다.”이장로는 은청준을 흘긋 보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은청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종문 사람이니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진서준이 다시 강조하자 은청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쏘아봤다.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혹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가?“은범은 내 사촌 동생이야. 네가 그 못난 동생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은청준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신농산에서 만난 적이 있어.”“뭐라고? 걔가 신농산에 갔다고?”이 말에 은청준은 흥미가 동했다.“그 녀석 실력으로는 신농산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텐데?”은청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은범이 어떤 인물인지 은청준은 잘 알고 있었다.애매한 실력과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은범이 은씨 가문에서 빛을 볼 일은 없었다.은청준과 은범의 격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컸다.“그 녀석은 테
진서준은 아버지 진요한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렇게 닮은 꼴로 곤륜 사람들을 만나면 곤륜 장로가 진서준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서준은 곤륜에 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피면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목소리까지 완전히 변해버린 진서준을 보고 유정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진서준이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알겠어요, 진서준 오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름 잘못 불렀어. 지금 난 김평안이야.”진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그냥 김평안이라고 부르면 돼.”“알았어요.”그렇게 진서준은 유정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인피면구를 쓴 진서준을 본 유기명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진서준이 슬쩍 보낸 눈짓을 보고 유기명은 즉시 이 사람이 진서준이란 걸 깨달았다.“유정아, 이리 와 앉아.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유기명이 유정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이때, 곤륜의 이장로가 진서준을 흘끗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주님, 따님 건강이 막 회복된 것 같은데, 맞나요?”이장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이장로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유기명은 깜짝 놀랐다.유기명은 아직 딸의 병에 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장로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큰 병을 앓았다는 걸 눈치챘다.이건 거의 신의 영역 아닌가?“따님께서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지만 눈에 피곤한 기운이 남아 있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불안정합니다.”이장로가 천천히 해명했다.“역시 곤륜 장로님이십니다.”유기명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딸은 최근 큰 병에서 막 회복된 참입니다.”“따님을 치료한 의사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이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큰 병인데도 이 정도로 빠르게 완치하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닐 텐데... 혹시 성약당 장로가 아닙니까?”유기명은 순간 멈칫하더니 곁눈질로 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도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정도였다.“가주님, 이번에 찾아온 건 부탁할 일이 따로 있어서입니다.”이장로가 용건을 말하자 유기명이 시원하게 대답했다.“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유씨 가문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곤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곧 곤륜이 유씨 가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강 종문 중 하나였다.곤륜이 유씨 가문에 빚을 진다면 훗날 유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 종주님 따님도 이번에 곤륜에서 내려왔습니다.”이장로가 말문을 열었다.“네? 조슬기 아가씨도 왔습니까? 근데 아가씨는 어디에...”유기명이 멈칫하더니 이장로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어제 하산할 때 슬기와 경호원 두 사람이 따로 움직였고 밤에 저희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나중에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슬기를 찾아주신다면 이 늙은 몸이 신세를 지는 셈 치겠습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장로님, 과한 말씀입니다. 제가 즉시 서남 지역 전체에 조슬기 아가씨를 찾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유기명은 망설일 틈도 없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서남에서 유씨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명령이 내려가자 서남의 크고 작은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까지도 조슬기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모두가 조슬기를 찾기 위해 분주한 사이, 진서준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오빠!”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정이 반갑게 소리쳤다.“유정아, 몸은 좀 어때?”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많이 좋아졌어요.”유정은 대답하며 진서준을 위아래로 살폈고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혹시라도 진서준이 자기를 위해 묘강에 가서 복수라도 했던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진서준이 앞으로 다가가 유정의 맥을 짚었다.“확실히 거의 다 나았네. 이틀만 더 쉬면 원래 상태로 돌
“가주님! 대문 앞에 중요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유씨 가문의 집사가 황급히 유기명을 찾아 소리쳤다.“중요한 손님이라고?”유기명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서남 지역에서 유씨 가문을 찾아 올 만한 중요한 손님이라면 꽤 오랜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씨 가문에서 중요한 손님으로 인정할 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설령 그것이 경성의 4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방문해야만 중요한 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누가 왔어?”유기명이 물었다.“곤륜의 이장로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유기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안으로 모셔 와야지!”유기명은 집사를 따라 급히 장원 입구로 향했다.그곳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이었고 등에는 검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도 비범했다.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극단에서 뛰쳐나온 배우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이장로님, 이 유씨 가문이란 곳,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습니까?”무리의 맨 앞에 선 잘생긴 청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우리 곤륜이 오랫동안 여기를 찾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잖아요.”그들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이전에도 곤륜산에서 내려와 세속의 여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 귀빈처럼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하지만 유씨 가문이 이들을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니, 그 격차가 너무 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다 떠들었으면 이제 조용히 해.”그 순간, 백발의 이장로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종주님의 따님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지금 대접 타령이나 하고 있어? 이번에도 슬기를 못
진서라는 재빨리 움직여 유정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고마워, 서라야.”유정은 물컵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다.“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제 괜찮아.”유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참 다행이네요.”진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진서준 오빠는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유정이 문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유정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진서준이었다.진서라는 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나갔다고? 혹시 묘강으로 간 건 아니겠지?”유정도 바보는 아닌지라 진서라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아, 아니에요. 묘강은 워낙 위험한 곳이라 우리 오빠도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서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벌써 하루가 지나도록 진서준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점심때 국제 뉴스를 본 진서라는 배논국의 묘강 지역에서 큰 소란이 있어 배논국이 결국 묘강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다.그러니 자연스레 진서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기명이 방으로 들어왔다.딸이 깨어난 걸 보자 유기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격동한 말투로 말했다.“유정아, 드디어 깨어났구나!”“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유정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절반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바보 같은 소리 마. 사과할 사람은 나야.”유기명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내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그 자식을 죽였더라면 네가 중독될 일도 없었을 거야.”“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하세요.”진서라가 서둘러 다독였다.“그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야. 더 이상 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