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란 일가는 배꼽을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진서준, 우리를 웃겨 죽일 셈이야? 심 처장님이 너를 맞으러 나온다고? 이왕이면 더 크게 허풍 떨지 그래!”“심 처장님이 정말 나오면 앞으로 네가 시키는 일은 다 할게.”정민이 코웃음을 쳤고, 조정연도 같이 빈정거렸다.“감옥 갔다 온 사람이 다르긴 다르다. 아무 말이나 내뱉어.”정씨 일가의 말에 허사연은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진서준의 허풍이 좀 지나치긴 했다. 그녀는 진서준을 편들고 싶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진서준은 휴대폰을 켜더니 침착하게 심해윤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그때 룸에서 식사하고 있던 심해윤은 휴대폰 벨 소리를 듣고 꺼내 보았다.진서준에게서 온 전화인 것을 확인한 심해윤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급히 휴대폰을 들고 구석으로 갔다.다른 사람들은 심해윤의 동작을 보고 어느 고위 관료의 전화인 줄 알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심 처장님, 지금 오션호텔에서 식사 중이시죠?”“네, 설마 진 선생님도 여기 계셔요?”진서준의 질문에 심해윤은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이어 반가워하며 물었다.진서준이 서정훈의 목숨을 구했는데, 아직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다.진서준도 지금 오션호텔에서 식사하고 있다면 심해윤은 직접 술잔을 들고 가서 술을 권하고 싶었다.“네, 그리고 제 여자친구가 처장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진서준의 여자친구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에 심해윤은 좀 당황했다.“어느 룸에 계셔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처장님이 계신 룸 밖에 있어요.”“네? 문밖에 있다고요? 그럼 왜 안 들어오세요?”심해윤은 말하고 나서 갑자기 공준호를 돌아다보았다.그녀는 방금 문을 두드린 사람이 호텔 직원이 아니라 진서준과 그의 여자친구였다는 것을 알아챘다.순간 심해윤은 공준호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심해윤의 서늘한 눈빛에 공준호는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는 자기가 어쩌다 또 심해윤을 건드렸는지 전혀 몰랐다.“어떻게 된 건지 알았어요. 잠시만요. 곧 나갈게요.”
모든 사람이 진서준이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심해윤과 아는 사이인 것도 그런데 진서준을 대하는 심해윤의 태도는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심해윤이 누구인가? 서울시 부시장의 부인이고, 본인도 인사처 처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다.대부분 인사 발령이 인사처 책임자인 그녀의 손을 거친다.이렇게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지금 진서준을 이렇게 공손하게 대하고 있다.정란은 자기 팔을 힘껏 꼬집었다. 강렬한 통증은 그녀에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다만 정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진서준은 감옥에 갔다 온 범죄자인데, 어떻게 심해윤한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공민찬이 맨 먼저 정신을 차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처장님,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닙니까? 이 사람은 옥살이한 적이 있습니다.”심해윤은 진서준의 신분을 조사해 본 적이 없어 그가 옥살이한 적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그래서 공민찬의 말을 듣고 그녀도 놀랐다.하지만 반응이 빠른 심해윤은 이내 쌀쌀하게 말했다.“내가 아직 사람을 잘못 볼 정도로 눈이 침침하지 않아요.”이 와중에 아들이 심해윤의 심기를 건드리자, 공준호는 그를 발로 걷어차서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심해윤의 싸늘한 시선을 느낀 공민찬은 옷이 젖을 정도로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방금 너무 놀라 이성을 잃고 그런 쓸개 빠진 소리를 했던 것이다.“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됐어요. 가던 길 가세요.”더 이상 공민찬 일행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심해윤은 진서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진 선생님, 우리 들어가요.”“네.”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사연의 손을 잡고 먼저 룸에 들어갔다.허사연은 그렇게 얼떨떨하게 진서준에게 끌려 룸으로 들어갔고, 의자에 앉은 후에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서준 씨, 심 국장님을 어떻게 알아요? 저는 왜 몰랐죠?”허사연이 놀란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오늘 아침에 알게 돼서 미처 말하지 못했어요.”
좋은 사람은 오래 살아야 마땅했다.“아, 서정훈 부시장님께서는 깨셨어요?”진서준이 물었다.“네. 깨셨어요. 아니면 제가 이곳에서 밥 먹고 있을 일도 없겠죠.”심해윤이 말했다.“진 선생님. 처음에는 제가 선생님 의술을 믿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남편이 깨어난 순간 선생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제야 알았습니다.”서정훈의 상태가 호전된 후, 심해윤은 진서준에게 할 말이 많았다.하지만 정작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태어나서 다른 사람을 이 정도로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다.심해윤이 진서준을 존경하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진서준이 서정훈의 생명 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허사연은 진서준이 서정훈을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서 물어보기가 그랬다.하지만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서씨 가문에서 서정훈의 생명 은인한테 무슨 짓을 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이분은 저의 여자친구 허사연 씨입니다. 이 호텔이 바로 저의 여자친구의 것입니다.”진서준은 심해윤에게 허사연을 소개해 주었다.“심 처장님, 안녕하세요.”허사연은 긴장된 모습이었다.허씨 가문이 아무리 돈 많다고 해도 권력 있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렇지 않으면 서현욱이 자꾸 치근덕거릴 때 진작에 사람을 고용하여 혼쭐을 내줬을 것이다.“안녕하세요. 허사연 씨 참 대단한 것 같네요. 젊은 나이에 이렇게 큰 호텔을 경영하시고.”심해윤이 감탄했다.“그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허사연이 말했다.“아버님이 허성태 씨세요?”심해윤이 물었다.“맞습니다.”허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랑 제 남편은 사연 씨 아버님이랑 친구나 다름없습니다. 전에 함께 식사도 했었습니다.”심해윤이 웃으면서 말했다.허성태란 서울의 갑부 중의 한 명이자 서정훈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그때는 허사연이 어려서 이들 부부한테 소개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나중에 허사연이 가업을 물려받고 나서는 허성태의 건강이 악화하여 더욱 소개해 줄 기
정란이 바로 대답했다.“서준이 심 처장님이랑 식사하고 있어요!”조희선은 진서준이 심해연과 아는 사이인지 몰랐는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조정연은 조희선을 보더니 눈을 빙그르르 돌렸다.“언니, 서준이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우리 집안도 좀 도와줘. 친척이잖아.”공민찬 역시 애원하는 눈빛으로 조희선을 쳐다보았다.진서준이 심해윤 앞에서 자신을 조금만 칭찬하기만 해도 앞길이 창창해질 것이 뻔했다.“그래요. 서준이한테 좀 말해주세요. 어차피 심 처장님이랑 아는 사이잖아요.”정태호 역시 덧붙였다.“우리 정민이도 내년이면 졸업인데 처장님께 말 좀 해서 인사처에 일자리 좀 알아봐 주면 안 돼요?”진서준을 무시하던 정란 일가가 이제는 부탁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하지만 부탁한답시고 말하는 말투가 건방지기만 했다.조희선은 진서준이 심해윤과 어떤 사이인지 몰랐기 때문에 난처하기만 했다.“서준이한테 말해봐.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조희선은 고개를 흔들면서 공손하게 거절했다.정란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서준이 엄마잖아. 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정란 일가는 방금 진서준의 태도에서 자기 가족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그렇다면 진서준을 설득할 만한 사람은 조희선뿐이었다.조정연이 순간 표정이 확 변하더니 말했다.“언니, 우리는 물보다도 진한 피를 나눈 자매야. 잘 돼서 나 잊어서는 안 되지. 부모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시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조정연은 조희선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신 부모님을 핑계로 댔다.조희선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아무리 전에는 무시당했다고 해도, 자매 사이에 똑같이 돌려주면 별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때 진서라가 나서서 말했다.“엄마, 이 일은 오빠한테 물어봐야죠!”이 말에 조희선은 갈대 같은 마음을 다시 붙잡게 되었다.“서진이 오면 서진이한테 말해봐.”다 성사된 마당에 진서라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정란 일가는 진서
서로 눈치만 보는 정란 일가 중에서 그래도 정태호의 눈치가 가장 빨랐다.“마음대로 시켜. 얼마 나오든 상관없으니까.”“정말요?”진서준이 물었다.“미리 말씀드리는데 이렇게 하신다고 해도 도와드릴 마음이 없어요.”정태호가 웃으면서 말했다.“오늘은 밥 먹자고 부른 거야. 친척 사이에 도와주고 말고가 어디 있어!”말은 이렇게 했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정태호는 진서준이 그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요.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진서준은 메뉴판을 보면서 가장 비싼 페이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이 페이지에 있는 요리들 다 주세요!”정태호 일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한 페이지를 다 시켰다고? 그러면 얼마야? 천만 원도 모자라겠는데?’더욱이 정란 일가는 이미 배부른 상태라 다 못 먹으면 낭비였다.하지만 이미 입 밖에 내뱉은 말이라 되돌릴 수가 없었다.“이렇게 많이 시켜도 괜찮죠?”진서준이 정태호를 보면서 물었다.“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정태호가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한 페이지만 주문했기 다행이지 다른 페이지도 주문했다면 정말 감당이 안 됐을 뻔했다.진서준이 또 한마디 했다.“버거우시면 제가 계산해도 됩니다.”정태호는 그가 심해윤을 안다고 해도 밥값을 계산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정말 돈이 많았다면 조희선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하는 대신 좋은 의사한테 부탁해서 치료했을 것이다.하지만 정태호는 조희선의 다리가 분쇄성 골절이라 신경이 이미 죽은 상태라는 것을 몰랐다. 영골이 없으면 아무리 대단한 의사라고 해도 조희선의 다리를 치료할 수 없었다.권해철과 함께 스승님을 만나러 가기까지 두 날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만 지나면 진서준은 권해철과 출발해야 했다.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나가자 정태호가 웃으면서 말했다.“서준아, 내년이면 정민이도 곧 졸업인데 너 심 처장님이랑 친해? 혹시 우리 정민이 일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하면 안 될까?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모부한테 말해. 2천만 원
정란 일가의 입에서 혈육 간의 정을 들으니 역겹기만 했다.만약 정말 이 관계를 중히 여겼다면 조희선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 병문안 정도는 와야 했다.심지어 조희선이 직접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무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진서준은 이런 냉혈 인간들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려고 했다.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했다.진서준은 그 정도로 마음이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저는 도와드리지 않을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이 한 끼는 제가 살게요.”진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들의 체면을 깎아내렸다.이에 정태호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서준아, 정말 우리를 모른척할 거야?”“친척이라고 할 자격이나 있으세요?”진서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먼 친척보다 이웃이 낫다는 말이 맞는가 보네요.”조희선이 진서준을 급히 말리면서 난처한 표정으로 정태호에게 말했다.“마음에 두지 마. 서준이도 어려운 점이 있어서 그럴 거야.”“됐어. 도와주기 싫으면 말라고 해. 그따위 도움 필요 없어! 처장님과 친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네.”정란은 진서준에게 삿대질하면서 말했다.“내가 말하는데, 넌 우리가 없었으면 이런 밥 한 끼도 먹지 못했어!”허사연이 듣고서 피식 웃고 말았다.그녀는 이 호텔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먹고싶은대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왜 웃는데?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고 서준이를 따라다녀!”정란은 허사연을 향해 소리쳤다.여자는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보면 질투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정란은 자기보다 예쁜 허사연을 보자마자 질투심이 폭발하고 말았다.허사연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이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내가 웃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그 입 좀 닥쳐. 아니면 이 호텔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거니까.”“웃겨. 네가 뭔데 우리를 이 호텔에 잡아두겠다고 하는 거야?”정란은 가소롭기만 했다.“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맞았네. 전과자 주제에 어떤 여자친구를 사귀겠어. 유흥업소에서 몸이나 파는 창년이겠지.”진서준은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조희선이 다급하게 설명했다.“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먼저 사연이를 때리려고 해서 제 아들이 손댔을 뿐이에요.”정란이 허사연을 창년이라고 욕했을 때 조희선도 많이 화났다.허사연을 며느릿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괴롭힘을 받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그래서 아까 진서준이 사람을 때릴 때 별로 말리지도 않았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사람들 우리 내쫓지 못해요.”진서준이 허허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뒤이어 정란 일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경호원들이 허사연에게 허리숙여 인사했다.“사장님!”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정란 일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 년이 이 호텔 사장이었다니!’“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르면 들어와.”허사연이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네!”경호원들은 그대로 뒤돌아 밖으로 나가서 방문을 닫아버렸다.방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정태호는 이 호텔이 허씨 가문의 소유인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서준이 여자친구가 바로 허씨 가문의 따님?’건드린 사람이 허씨 가문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정태호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오해... 오해야...”정태호는 휴지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고 더는 진서준 앞에서 잘난 척할 수가 없었다.돈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는 진서준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은 죽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었다.“오해요? 방금 저보고 이 호텔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거라고 하신 거 아니에요?”진서준이 웃으면서 말했다.“장난친 거였어. 친척끼리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정태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저는 당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연기 그만하세요.”진서준이 냉랭하게 말했다.“앞으로 더는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만 가보셔도 좋아요.”진서준은 더는 이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오늘 조희선과 진서라를 데려온 것은 조정연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정란 일가에게 자신이 더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진서준의 단호한 모
정란 일가는 후회막심했다. 조희선을 매정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진서준의 도움을 받아 잘 나갔을지도 몰랐다.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었다.정란 일가가 떠나자 조희선이 말했다.“서준아, 우리도 이만 가자꾸나.”“네.”진서준은 조희선의 휠체어를 밀면서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어머님, 저는 아직 출근해야 해서 같이 못 갈 것 같아요.”허사연이 말했다.“괜찮아. 저녁에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조희선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허사연을 볼수록 마음에 들어 했다.“아, 서준 씨. 저녁에 윤진이랑 일 끝마치고 같이 밥 먹으러 와요.”허사연이 한마디 타일렀다.한집안 식구가 될 거기 때문에 허윤진이 진서준 가족과 친해졌으면 했다.“네. 윤진 씨랑 일찍 가볼게요.”진서준이 웃으면서 약속했다.차에 앉은 조희선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진서준을 쳐다보았다.“서준아, 사연이랑 언제 결혼할 거야? 엄마는 빨리 손주 보고 싶어!”진서준의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엄마. 저랑 사연 씨는 고작 20대 초반이에요. 올해 결혼한다고 해도 일찍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요.”“너도 이제 스물다섯이야. 엄마가 살면 얼마나 살겠니!”조희선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평생소원이 네가 사연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거야. 그래야 우리 진씨 가문이 대를 이어갈 수 있지 않겠니?”“엄마,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으니 꼭 장수하실 거예요.”진서준이 진지하게 말했다.기사회생 침으로 엄마랑 여동생이 장수할 수 있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런 효심만으로도 족해. 그런데 엄마는 그래도 손주를 보고 싶어.”조희선이 말했다.“그러면 저녁에 사연 씨한테 물어보세요. 사연 씨가 올해 아이를 갖겠다고 하면 저는 상관없어요.”진서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네가 물어봐야지.”조희선이 고개를 흔들었다.“재촉 안 하는 게 낫겠어. 네가 알아서 해.”진서준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옆에 있는 별장에서 수련하기 시작했다....용행 무관.지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성동석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그때, 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성 신의님의 귀문 13침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표면적인 것만 해결한 겁니다.”진서준의 말에 가뜩이나 화가 난 사람들의 불만이 전부 터져 나왔다.“무슨 개소리야! 네가 성 신의님께 훈수 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진짜 주제 파악이 안 되네. 그렇게 재간 있으면 얼른 나와 치료해 봐. 뒤에 비겁하게 숨어 훈수나 두지 말고.”“성 신의님은 한의계에서 거물로 불리는 사람이야. 네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사람들의 공격 폭탄을 받았지만 진서준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했다.“안 믿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진서준은 더 이상 말을 아꼈다.그때, 신수란이 갑자기 놀라며 외쳤다.“안 돼! 아가씨 맥박이 사라졌어!”모두가 다시 조슬기를 보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성 신의님, 서둘러 응급조치를 해 주세요. 우리 슬기를 살려내야죠.”이장로도 초조한 마음에 급히 부탁했다.성동석은 곧바로 침을 놓으며 조슬기의 체내 한기를 끌어내 맥박을 안정시키려고 했다.하지만 침을 놓으면 놓을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했다.아까 성동석의 침이 조슬기의 체내에 쌓여있던 한기를 완전히 폭발시켰기 때문이었다.지금 조슬기는 남극의 빙산처럼 차가워졌고 그녀의 체내에서 나오는 한기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죄송한데 이 병은 내가 치료할 수 없네요.”그 말을 듣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누구도 이 신의가 치료를 포기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성 신의마저 치료할 수 없는 이 병을 과연 치료할 수 있는 신의가 존재할까?“성 신의님. 제발 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 슬기는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슬기는 우리 종주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따님입니다.”이장로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성동석은 한숨을 쉬고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저는 한 사람을 알고
이 한마디에 이장로의 눈이 번뜩였다.“성 신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종주님과 우리 장로들도 사실상 수년간 슬기 체내의 한기를 흡수해 왔습니다.”성동석은 수염을 쓸어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한기는 이미 환자의 몸에 쌓여 한독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귀문 13침을 사용해서 환자 체내에 쌓인 한독을 제거하면 환자는 무사히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곤륜의 모든 제자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역시 성 신의님입니다. 오자마자 바로 치료 방법을 제시하다뇨.”“맞아요, 누군가는 입만 살아서 나불대기만 했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때는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누군가가 진서준을 흘끗 보며 비웃었다.이렇게 진서준을 깎아내리자 성동석의 의술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성 신의님,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지금 바로 침을 놓아 우리 슬기를 구해주세요.”이장로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했다.“문제없습니다. 이제 내가 침을 놓아 환자의 한독을 깔끔하게 제거할 겁니다.”말을 마친 성동석은 은침을 꺼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슬기의 발삼리와 명문 등 13곳의 주요 혈 자리에 침을 놓았다.그 동작은 유려하게 이어졌고 물 마시듯이 자연스러웠다.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전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귀문 13침은 이 세상 99%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었고 성동석은 평생을 이 침 연구에 바쳤다.그러니 성동석의 귀문 13침에 대한 숙련도는 자연스레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13침이 꽂히는 순간, 다들 조슬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빠져나오는 모습을 맨눈으로 확인 수 있었다.한기가 나오자 방 안의 온도도 급격히 내려갔고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떠다녔다.“성 신의님, 대답합니다. 침을 놓는 순간 신의의 풍모가 물씬 나네요.”“이제 우리 후배는 드디어 깨날 수 있겠어.”“후배가 완치되면 우리도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이장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역시 신의님입니다. 이 침법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엄두도 못 내
“성 신의라는 세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말하는 거야? 개뿔도 모르는 녀석이 나대긴 뭘 나대?”“성 신의님이 구할 수 없으면 뭐 네가 구할 수 있다는 거야?”곤륜 종문 제자들이 즉시 반발하며 진서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뭐라고요? 당신 스승은 누구입니까? 말해 보세요, 혹시 내가 알지도 모르죠.”성동석은 진서준을 쳐다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성동석은 수십 년 동안 이 바닥을 누볐지만 그동안 그의 의술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오늘 얼핏 봐도 40대인 남자가 자기 의술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이 나이대의 사람은 성동석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40대 사람은 이 바닥에 몸을 담근 지 10년이 넘었으니 다들 본인이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착각하며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칠 것이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직 배워야 할 게 산처럼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저 녀석은 거만하기 짝이 없는 무지한 놈일 뿐입니다. 성 신의님, 신경 쓰지 마세요.”은청준은 진서준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경고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이장로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까 우리가 내린 결정을 두고 그러는 거라면 지금 당장 나가세요.”유기명은 집사가 말한 성약당 장로가 왔다는 소식에 다시 방에서 나왔다.“내일 아침에나 온다고 하지 않았어?”유기명이 집사에게 물었다.“다 우연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성약당 산 아래로 갔을 때, 마침 막 산에서 내려온 성 신의님을 만났습니다.”집사가 대답했다.성약당에 가려면 산을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큰 문제였다.하지만 비행기로 산 아래까지 가면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그렇군.”유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곧 방에 들어갔다.방에 들어가자마자 유기명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무슨 일이죠?”유기명은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가주님, 가주님이 초빙한 이 경호원이 너무 건방지네요
성약당의 장로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은청준은 얼굴에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가 진서준을 밀쳐냈다.“비켜! 이제 너 같은 쓸모없는 놈은 필요 없어.”진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확인했다.“확실해? 잘 생각해. 나중에 다시 사람을 구해달라고 내게 빌면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만큼 간단하진 않을 거야.”은청준은 콧방귀를 끼며 차갑게 웃었다.“성약당 장로가 여기 있는데 너 같은 쓰레기가 나설 필요가 있겠어?”성약당의 명성은 대한민국에서 자자했다.그 당시 은청준은 아직 은씨 가문에 있었고 그 후 진서준이 성약당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그 소란 때문에 성약당 장로들이 전부 바뀌었지만 그들의 의술은 여전히 뛰어났고 이전 장로들보다 훨씬 더 비범했다.곤륜의 이장로도 성약당 장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청준아, 얼른 장로님을 맞이하러 가.”“알겠습니다.”은청준은 서둘러 대답하고 바로 돌아서서 장로를 맞이하러 갔다.“정말 내가 치료할 필요 없겠습니까?”진서준이 이장로를 보며 묻자 이장로가 에둘러 대답했다.“하나는 누구도 모르는 작은 인물,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성약당 장로. 김평안 씨라면 어떻게 선택할 겁니까?”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어넘겼다.“적어도 난 이 무명의 인물한테 먼저 시도해 보라고 할 겁니다. 그게 적어도 말에 믿음이 없다고 떠들어대는 소리 듣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니까요.”이장로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이봐요,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인데 어떻게 함부로 시도하게 하겠습니까? 만약 당신 가족이 저렇게 누워 있다면 당신도 아무나 함부로 시도하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그럼 장로님은 어떻게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겁니까?”진서준이 다시 되묻자 이장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면박을 줬다.“그만하세요. 입 다물고 그냥 한쪽에 서서 구경만 하세요.”진서준은 이장로의 태도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한쪽에 서서 기다렸다.잠시 후, 은청준은 머리가 하얀 노
“이장로님, 부탁은 했지만 이놈이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방금 내가 이놈을 존중하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더군요.”은청준은 여전히 진서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하지만 이장로는 은청준을 잘 알고 있었다.이장로는 은청준이 거만한 태도로 행패를 부려서 진서준이 대답하지 않은 거라고 추측했다.“은청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장로는 살기가 섞인 표정으로 최종 통보를 내렸다.그 말을 듣자 은청준은 순간 멈칫하며 마음속에서 불만이 피어올랐다.“제가 방금 말투가 좀 거칠긴 했지만 이놈의 태도도 별로였습니다. 심지어 주동적으로 나가서 나랑 한 판 붙자고 하더군요.”은청준은 여전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기고 있었다.“은청준, 이젠 하다 하다 장로인 나까지 속일 거야?”이장로는 분노를 터뜨렸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지금 당장 김평안 씨에게 사과해!”은청준은 얼굴이 굳어졌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사과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우리 후배를 치료할 수 없다면 어떡하죠? 그럼 내가 당한 망신을 이 사람에게 그대로 돌려줘도 됩니까?”잠자코 지켜보던 진서준이 손을 들어 올리며 끼어들었다.“부탁이고 나발이고 그냥 없던 일로 해. 내가 뭐 하늘의 신이라도 돼? 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만병을 고치는 능력도 없어.”이장로는 진서준이 은청준을 일부러 괴롭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은청준이 무슨 말을 하던 진서준은 반대로 대답하며 그를 괴롭히는 중이었다.물론 은청준을 괴롭히는 건 조금 전에 당했던 말도 안 되는 행패에 대한 복수였다.“김평안 씨, 걱정 마세요. 설령 슬기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이 자식이 김평안 씨와 따지지 않도록 약속하겠습니다.”이장로가 진심을 담아 진서준과 약속하자 진서준은 이장로를 흘끗 보고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말한 대로 하길 바랍니다.”“얼른 사과 안 해?
“그럼 그 여자를 구하고 싶은 사람에게 맡겨.”진서준은 이 말을 끝으로 바로 문을 닫았다.그 행동에 은청준 일행은 분노가 치솟았다.“당장 문 열어! 안 열면 후회할 줄 알아!”은청준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은청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다시 열렸다.진서준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빛으로 은청준을 바라봤다.“너희가 어떤 불손한 짓을 하는지 한번 보자. 여기는 유씨 가문이지 너희 곤륜이 아니야. 너희가 멋대로 막 날뛸 수 있을 것 같아?”“유씨 가문이 뭐 어때? 사람 구하라고 하면 고분고분 구하기나 해. 이제 우리 종주님이 책임을 묻는다면 유씨 가문 가주라도 감당 못 할 거야.”은청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서준과 눈을 맞추었다.은청준의 배후에는 곤륜이 있었기에 하찮은 서남 유씨 가문을 은청준이 공손한 태도로 대할 수 없었다.게다가 은청준은 경성 은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했다.어느 쪽 신분이든 모두 유씨 가문보다는 훨씬 더 고귀했기에 당연히 유씨 가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반면, 진서준의 신분은 단지 유씨 가문의 하찮은 경호원일 뿐이었다.은청준의 고함에 유기명이 놀라 달려왔다.“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유기명이 급하게 소리 지르며 다가왔다.유기명은 진서준과 곤륜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왜냐하면 두 쪽 다 유기명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가주님, 저는 이 집의 경호원에게 후배의 병을 부탁하려고 왔는데 이놈이 자존심을 세우며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방귀 낀 놈이 화낸다고 은청준은 먼저 이번 소란의 모든 책임을 진서준에게 떠넘겼다.그 말에 진서준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곤륜에서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라고 배웠어?”은청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처음에는 좋게 좋게 말했잖아? 네가 괜한 자존심을 세우며 자초한 일이지.”“됐어요, 다들 그만합시다.”유기명이 끼어들며 중재했다.“은청준 씨가 직접 와서 모시는 걸 보면 조 아가씨가
이장로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참지 못하고 욕을 날렸다.“젠장!”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상황이 결국 발생했다.“이장로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신수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공을 써서 슬기 체내 차가운 기운을 빨아낼 수밖에 없어.”이장로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이 방법은 전에 곤륜산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내공을 많이 소모하는 방식이었다.다행히도 그들 곤륜의 장로들과 종주는 내공이 꽤 깊었다.그렇지 않으면 슬기 목에 걸린 그 옥패 하나만으로는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저택에 이장로 하나만 있는지라 이 방법을 쓰는 게 별로 자신이 없었다.“이제 운에 맡길 수밖에 없어.”이장로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앉아 두 손을 펼쳐 선천강기를 모은 후, 조슬기의 옆에 놓고 조슬기 체내 한독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그러나 막 시작하자마자 이장로의 얼굴은 빨려 나온 한독에 얼어붙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이 차가운 기운은 곤륜산이 내뿜는 기운보다 몇 배나 더 차가워 깊은 내공을 자랑하는 이장로조차 견디기 힘들어했다.그러니 지금 조슬기 같은 연약한 여자가 겪는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1분이 지나자마자 이장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즉시 한독 제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안 되겠어.”이장로는 바로 일어나서 강기로 흡입된 한독을 체외로 밀어냈고 작은 얼음 조각 몇 개가 이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차가운 기운이 얼음처럼 결빙된 것이다.조슬기의 상태는 이제 조금도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한 상태였다.“이장로님, 그 건방진 경호원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요?”은청준의 제안에 신수란은 순간 당황했다.“너 그 경호원이 치료하는 걸 결사코 반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냐?”그러자 은청준은 천천히 자기 계획을 밝혔다.“우리 후배가 지금 위독한 상태인데 이제는 그놈에게 맡길 수밖에 없잖아. 그놈이 우리 후배를 기적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아무 문제 없이 이
은청준은 조금 짜증이 났다.유기명 딸이 이해 못 한다고 쳐도 유씨 가문 가주인 사람이 상황을 파악할 줄 모르다니, 너무나 어이없었다.경호원이 사람을 치료하게 허락하는 건 금시초문이었다.“가주님, 지금 하신 말, 설마 진심입니까?”은청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이장로도 미간을 찌푸리며 심기가 불편한 티를 냈다.“제 목숨은 바로 김평안 씨가 구해준 겁니다. 그러니 김평안 씨 의술을 믿지 않을 수 없죠.”유기명은 곤륜 사람들의 표정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가주님이 믿지만 우리는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은청준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들은 절대 진서준이 나서서 치료하게 놔둘 수 없었다.조슬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장로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터였다.현재로서는 성약당 장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정 못 믿겠다면 저도 방법이 없네요. 조 아가씨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다 당신들 책임일 겁니다.”유기명은 말을 끝내고 손을 휘저으며 나갔다.이장로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너희는 여기서 슬기를 지켜.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나에게 알려.”이장로도 말을 마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은청준은 유기명의 말에 냉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하룻밤뿐인데, 하룻밤 동안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나?”“너희 남자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얼른 다 나가!”신수란은 모두를 밖으로 내쫓았고 혼자서 조슬기 곁을 지켰다.진서준이 나오자 유기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동했고 유기명이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 조 아가씨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어?”“저 여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체내에 찬 한독이 너무 많아서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하려면 하늘의 신이 내려와야 할 겁니다.”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오늘 밤 조 아가씨 병이 악화할 확률이 높을 것 같아?”유기명이 다시 물었다.유기명은 조슬기에게 자기 집에서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