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한줄기의 파란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마동철의 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마동철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에 전해졌다. 총상보다도 더 힘든 고통이었는데 마치 누군가 칼로 그의 살을 베는 것만 같았다.“으악!”마동철의 처참한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뒹굴던 마동철은 1초도 채 안 되어 거품 물고 경련을 일으켰다.진서준은 쏜살같이 허사연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묶고 있던 끈을 풀고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냈다.“미안해요, 사연 씨. 내가 늦었어요.”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허사연을 본 진서준은 살짝 의아했다.‘아까 죽은 두 놈 사연 씨 말하는 거 아니었어? 사연 씨가 아니면 누구야?”“다시는 서준 씨를 못 보는 줄 알았어요.”허사연은 진서준을 꼭 끌어안았다. 어찌나 꽉 안았는지 그의 몸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진서준을 사랑하기 전까지 허사연은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언장 작성까지 마친 그녀였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허성태와 허윤진을 해외로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뼛속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눈물을 비 오듯 흘리는 허사연을 보고 있자니 진서준은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인제 괜찮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진서준은 허사연의 등을 토닥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마동철은 아직도 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이러다가 아파서 죽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신이 흐릿해졌다 또렷해졌다 자꾸만 반복했다.조금 전 진서준이 쏜 파란 빛은 장철결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술법이었다. 그 술법을 맞은 사람은 누군가 몸을 칼로 쿡쿡 쑤시는 환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어디도 다치지 않았는데 말이다.진서준은 허사연을 납치한 이놈을 쭉 고통의 환각 속에 살게 할 생각이었다.허사연은 울음을 멈추고 옆방을 가리켰다.“아까 어떤 여자가 왔는데 그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에게 강간당했어요.”진서준은 그제야 아까 두 남자가
며칠 후면 진서준은 권해철과 함께 길을 떠나야 했기에 중요한 시기라 절대 소란스러운 일이 생겨선 안 되었다. 전라도 고양시는 돌아온 후에 가볼 계획이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다리를 고치는 게 급선무였다.“서준 씨, 방에 있던 그 여자 누구예요?”진서준이 나오자 허사연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진서준의 손을 잡으니 마음속의 두려움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우리가 대학로 먹거리에서 만났던 두 여자 기억나요?”진서준의 질문에 허사연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매일 만나야 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기억도 하지 못했다.“까먹었어요.”허사연은 한참을 생각해도 장혜윤과 왕나연을 떠올리지 못했다.“옆방에 있던 여자 장혜윤이에요. 유지수의 절친.”유지수 얘기를 꺼내던 진서준의 두 눈에 냉기가 스쳤다.지난번 이씨 가문에 갔을 때 유지수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아까 마동철이 얘기한 황씨 가문 사모님이 유지수일 가능성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유지수 말고 다른 여자와 이토록 큰 원한이 없으니까.“아 참, 깜빡할 뻔했네요. 서준 씨 전 여자친구는 지금 어디 있어요?”진서준이 유지수 얘기를 꺼내자 허사연도 조금 궁금해졌다.“나도 몰라요. 아까 그 납치범에게 물었더니 전라도 황씨 가문의 사모님이 시킨 거라고 하더라고요.”진서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황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유지수 같아요.”허사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씨 가문의 며느리 아니에요?”허사연은 유지수와 이씨 가문 사이의 일을 알지 못했다. 유지수가 이씨 가문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이씨 가문이 유지수의 손에 아주 제대로 놀아났거든요. 이지성이 그 집 친아들이 아니라 유지수가 어떤 의사와 낳은 아들이었어요.”진서준이 싸늘하게 웃었다. 진서준의 설명을 듣자 허사연도 그녀를 납치하라고 시킨 배후가 유지수일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지수는 속셈이 많았고 뒤끝도 길었다. 더 잘난 남자를 만난다면 무조
‘우리 동생 예뻐한 보람이 있네.’허사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허윤진은 진서준을 보며 물었다.“서준 씨는 괜찮아요? 그 사람들과 싸울 때 다치진 않았죠?”진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난 괜찮아요.”허윤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진서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허윤진이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진서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허씨 가문의 이기적인 아가씨가 먼저 고맙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사연 씨를 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진서준이 허사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허윤진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렸다.“애정행각 그만하고 얼른 집에 가요. 아빠가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허윤진은 두 사람을 제쳐두고 홀로 차에 올라탔다. 그때 허사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준 씨, 요즘 윤진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요.”“나도 그렇게 느꼈어요.”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허윤진은 손승호의 본색을 알게 된 이후로 전보다 많이 점잖아졌다.“변했다는 건 좋은 거죠. 앞으로 사연 씨도 걱정 덜 할 수 있고요.”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두 사람이 차에 올라탄 후 차는 허씨 가문 별장으로 곧장 달려갔다....교외의 어느 한 별장.주혁구의 찌그러진 허머가 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별장 거실 안, 주혁구의 오만방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를 쳐다보았다.이 중년 남자가 바로 주혁구가 전에 찾았던 남자였다. 이름은 황종섭, 황정식의 아들이자 서울시 황씨 가문의 차세대 가주였다.주혁구도 돈이 많긴 했지만 황씨 가문에 비교하면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형님, 전화해서 물어봐 주시겠어요? 권해철 마스터님이 다친 데는 다 회복하셨는지?”어제 만월호 전투에서 권해철은 꽤 심한 내상을 입었다. 하여 어제부터 권해철은 두문불출하면서 회복에 전념하느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황종섭은 초조해하는 주혁구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승재의 말에 황종섭은 뭔가 번쩍 떠올랐다. 진서준과 권해철의 신분이 하도 범상치 않은 바람에 저도 모르게 이승재의 존재를 무시해버렸다.다른 건 몰라도 서울시에서 이승재에게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이 없었다. 권해철의 제자인 이승재도 어느 정도 실력을 지녔다.“마스터님이 시간이 되신다면 그럼 마스터님께 부탁 좀 할게요.”황종섭이 말했다.“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이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제 별장에 있어요.”전화를 끊은 후 황종섭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거실로 나왔다.“형님, 얘기됐나요?”우쭐거리며 웃는 황종섭을 본 주혁구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역시 종섭 형님이 나선다면 권해철 마스터님을 모실 수 있을 줄 알았어요.”그러자 황종섭이 손사래 쳤다.“권해철 마스터님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인 이승재 마스터님을 모셨어.”주혁구의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이승재 마스터님이요?”주혁구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황종섭이 설명했다.“그래, 황보식 어르신과 오래 알고 지낸 이승재 마스터님 말이야.”황보식이 이승재에게 사기당한 일을 진서준과 그들 두 사람만 알고 있었고 대외적으로 공개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황보식에게는 엄청나게 창피한 일이니 말이다.“이승재 마스터님이 권해철 마스터님의 제자이긴 하지만 그분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황종섭은 주혁구를 안심하게 하려고 이승재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거푸 쏟아진 칭찬에 주혁구도 드디어 시름을 놓았다.“형님이 찾은 분이니 당연히 믿을 만 하겠죠.”두 사람은 십여 분 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이승재 마스터님이 오셨나 봐.”황종섭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혁구도 이승재의 얼굴을 보려고 그의 뒤를 따랐다.이승재는 검은 한복을 입고 있었고 오만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마치 재야의 고수 같은 느낌도 들었다.“마스터님.”황종섭은 이승재를 보자마자 깍듯하게 인사했다. 굽신거리는 황종섭의 모습에
차가 공사 현장에 멈췄고 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황종섭과 주혁구는 발밑에서부터 엄청난 냉기가 전해져오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들어 쨍쨍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았다.햇볕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했지만 이곳만큼은 북극처럼 추웠다.“뭔가 이상하죠?”주혁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황종섭도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승재를 쳐다보았다.“마스터님, 여기... 진짜 귀신 있는 거 아니에요?”이승재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체내에 진기가 있어 주변의 음기를 막을 수는 있지만 아무 도구도 챙기지 않아 귀신이 있어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먼저 가요. 제가 도구를 준비해서 저녁에 다시 올게요.”이승재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황종섭과 주혁구도 감히 더 있지 못하고 부랴부랴 차에 올라탔다.공사 현장을 벗어난 후 이승재가 말했다.“두 분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필요한 물건 좀 사고 저녁에 다시 올게요.”이승재가 떠난 후 황종섭이 주혁구에게 말했다.“혁구야, 저녁에는 네가 승재 마스터님과 같이 와. 난 끼지 않는 게 좋겠어.”주혁구는 황종섭이 겁에 질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는 않았다.“형님은 다른 일 보세요, 그럼. 저와 마스터님이 가볼게요.”...진서준은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를 데려다준 후 바로 떠나지 않고 허씨 가문 별장에 온 오후 머물다가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 떠났다.“오빠, 나 운전면허 기능 시험 넘었어.”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실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진서라가 진서준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서라 대단한데? 도로 주행 시험도 한 번에 넘으면 바로 차 사줄게.”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갖고 싶은 차 있어? 오빠에게 말해봐.”“비싼 거 말고 싼 거면 돼요.”진서라가 말했다. 그런데 아침에 당한 교통사고가 문득 떠오른 진서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안 돼. 싼 차는 질이 안 좋아. 혹시라도 교통사고 나면 어떡해?”
낮에 왔을 때 주혁구는 이상하리만큼 추운 것 외에는 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해가 진 지금 공사 현장에 어둠이 잔뜩 깔렸다. 주혁구는 갑자기 이 웨스트 팰리스가 공동묘지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단지 문 앞에 서 있을 뿐인데도 짙은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이승재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아무래도 이곳의 음산한 기운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스터님, 혼자 들어가실래요?”겁이 덜컥 난 주혁구는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경호원이 귀신을 상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옆에 사람이 더 있으면 덜 무서울 테니까.“안 돼요. 이따가 이 도구들을 쓸 때 혁구 씨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에요.”이승재가 주혁구를 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혁구 씨는 무사해요.”자신만만한 이승재의 모습에 주혁구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낮에 대문을 지키던 두 경비원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고 공사 현장에 주혁구와 이승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공사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승재는 뭔가가 자신을 덮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승재가 앞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주혁구가 앞에 있었더라면 진작 기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이승재는 가져온 주사와 황지를 꺼내 손으로 황지 위에 몰 구자를 썼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붙였다.뭐가 뭔지 도통 알 리가 없었던 주혁구는 의아한 얼굴로 이승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곧이어 주혁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이승재의 몸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었다.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머리가 쭈뼛 설 것이다.“마... 마스터님, 진... 진짜 귀신이 있어요?”주혁구는 말까지 더듬었다.“조용해요!”이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아무 말 하지 말고 제 뒤에 바짝 붙어요.”안으로 들어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고 날아다니는 것들도 훨씬 많아졌다.다행히 이승재가 두 사람의 몸에 부적을 미리 붙였기에 감히
멀지 않은 곳에 하얀 허영이 나타났는데 마치 안개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이건 살귀예요!”이승재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음기가 오랫동안 있은 곳에는 살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음산한 기운이 짙은 곳에 살귀라는 귀신이 존재하는데 사람을 보면 바로 죽여버린다고 했다.이승재의 실력으로 살귀를 만난다면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살귀인지 뭔지 주혁구는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이승재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바로 눈치챘다.“빨리 도망쳐요!”이승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사 현장 밖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주혁구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승재와 함께 미친 듯이 도망쳤다.살귀의 두 눈에 시뻘건 피가 가득했고 검은 눈동자가 핏속에 담겨 있었다. 살귀가 내는 울부짖음은 마치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귀청이 째질 듯한 그런 소리였다.두 사람은 혹시라도 살귀의 얼굴을 봤다가 잠을 못 잘까 두려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그런데 살귀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이승재를 거의 따라잡았다.살귀의 무서운 모습을 본 이승재는 도목검을 들고 살귀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하지만 살귀는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승재가 도목검으로 머리를 내려쳐도 전혀 끄떡없었다.퍽!이승재가 들고 있던 도목검이 마치 산이 쪼개지듯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러자 살귀는 마치 사람처럼 그들을 비웃었다.“이 살귀가 사람이 다 됐네?”이승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옷 주머니에서 엽전으로 만든 검 한 자루를 꺼냈다.이 엽전검은 권해철이 준 것이었는데 일반 원귀라면 일격에 바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귀에게 통할지는 이승재도 알지 못했다.이승재가 들고 있는 엽전검을 본 살귀의 얼굴에 두려움이 살짝 스쳤다.바로 그때 이승재와 살귀가 동시에 손을 들어 서로의 요해를 찌르려 했다.찌직!이승재의 옷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살가죽도 함께 벗겨졌다. 그리고 이승재의 엽전검은 정확히 살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오후 마연정이 가태윤을 만났을 때 가태윤은 진서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여 마연정도 진서준에게 많은 관심이 생겼다.그런데 진서준이 택시를 타고 마그레라에 온 걸 보고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택시를 타고 온 사람이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이젠 진서준이 서울 병원에 들어갔다는 것조차 진짜인지 의심이 갔다.가태윤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거나 오후에 진서준의 자랑을 하도 많이 했으니까. 다행히 이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고 그와 마연정 둘뿐이었다.만약 진서준이 택시를 타고 온 걸 다른 친구들이 봤더라면 엄청나게 창피했을 것이다.“태윤아, 나한테 거짓말했어?”마연정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거짓말 아니야. 차가 고장 나서 택시 타고 왔겠지.”가태윤이 진서준을 대신하여 변명했다.“차가 고장 났다고?”그러자 되레 마연정의 비웃음만 샀다.“정말 돈이 많다면 집에 차 한 대뿐이겠어?”마연정은 그대로 마그레라 안으로 휙 들어갔다. 가태윤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진서준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권력 있는 사람에게만 아부하고 빌붙는 마연정의 모습에 진서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미안해, 서준아. 연정이가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대.”가태윤이 재빨리 다가와 대충 둘러댔다. 진서준은 뭐라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태윤아, 여기 엄청 비싼 곳인데 너 오늘 이러다 거덜 나겠어.”진서준이 가태윤에게 말했다.“연정이 친구들도 온다잖아. 연정이가 체면을 좀 중시하거든...”가태윤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사실 가태윤도 처음에는 마그레라로 오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너무 비싼 건 사실이니까.가장 저렴한 룸도 200만 원 이상이었다. 다른 술집은 술 한 병에 몇천 원이지만 여긴 가장 싼 맥주도 몇만 원 정도 했다. 그리고 양주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싼 것도 몇십만 원을 호가했다.평소였더라면 가태윤은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연정의 애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