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공사 현장에 멈췄고 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황종섭과 주혁구는 발밑에서부터 엄청난 냉기가 전해져오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들어 쨍쨍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았다.햇볕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했지만 이곳만큼은 북극처럼 추웠다.“뭔가 이상하죠?”주혁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황종섭도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승재를 쳐다보았다.“마스터님, 여기... 진짜 귀신 있는 거 아니에요?”이승재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체내에 진기가 있어 주변의 음기를 막을 수는 있지만 아무 도구도 챙기지 않아 귀신이 있어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먼저 가요. 제가 도구를 준비해서 저녁에 다시 올게요.”이승재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황종섭과 주혁구도 감히 더 있지 못하고 부랴부랴 차에 올라탔다.공사 현장을 벗어난 후 이승재가 말했다.“두 분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필요한 물건 좀 사고 저녁에 다시 올게요.”이승재가 떠난 후 황종섭이 주혁구에게 말했다.“혁구야, 저녁에는 네가 승재 마스터님과 같이 와. 난 끼지 않는 게 좋겠어.”주혁구는 황종섭이 겁에 질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는 않았다.“형님은 다른 일 보세요, 그럼. 저와 마스터님이 가볼게요.”...진서준은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를 데려다준 후 바로 떠나지 않고 허씨 가문 별장에 온 오후 머물다가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 떠났다.“오빠, 나 운전면허 기능 시험 넘었어.”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실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진서라가 진서준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서라 대단한데? 도로 주행 시험도 한 번에 넘으면 바로 차 사줄게.”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갖고 싶은 차 있어? 오빠에게 말해봐.”“비싼 거 말고 싼 거면 돼요.”진서라가 말했다. 그런데 아침에 당한 교통사고가 문득 떠오른 진서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안 돼. 싼 차는 질이 안 좋아. 혹시라도 교통사고 나면 어떡해?”
낮에 왔을 때 주혁구는 이상하리만큼 추운 것 외에는 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해가 진 지금 공사 현장에 어둠이 잔뜩 깔렸다. 주혁구는 갑자기 이 웨스트 팰리스가 공동묘지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단지 문 앞에 서 있을 뿐인데도 짙은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이승재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아무래도 이곳의 음산한 기운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스터님, 혼자 들어가실래요?”겁이 덜컥 난 주혁구는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경호원이 귀신을 상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옆에 사람이 더 있으면 덜 무서울 테니까.“안 돼요. 이따가 이 도구들을 쓸 때 혁구 씨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이에요.”이승재가 주혁구를 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혁구 씨는 무사해요.”자신만만한 이승재의 모습에 주혁구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낮에 대문을 지키던 두 경비원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고 공사 현장에 주혁구와 이승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공사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승재는 뭔가가 자신을 덮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승재가 앞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주혁구가 앞에 있었더라면 진작 기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이승재는 가져온 주사와 황지를 꺼내 손으로 황지 위에 몰 구자를 썼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붙였다.뭐가 뭔지 도통 알 리가 없었던 주혁구는 의아한 얼굴로 이승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곧이어 주혁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이승재의 몸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었다.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머리가 쭈뼛 설 것이다.“마... 마스터님, 진... 진짜 귀신이 있어요?”주혁구는 말까지 더듬었다.“조용해요!”이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아무 말 하지 말고 제 뒤에 바짝 붙어요.”안으로 들어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고 날아다니는 것들도 훨씬 많아졌다.다행히 이승재가 두 사람의 몸에 부적을 미리 붙였기에 감히
멀지 않은 곳에 하얀 허영이 나타났는데 마치 안개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이건 살귀예요!”이승재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음기가 오랫동안 있은 곳에는 살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음산한 기운이 짙은 곳에 살귀라는 귀신이 존재하는데 사람을 보면 바로 죽여버린다고 했다.이승재의 실력으로 살귀를 만난다면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살귀인지 뭔지 주혁구는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이승재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바로 눈치챘다.“빨리 도망쳐요!”이승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사 현장 밖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주혁구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승재와 함께 미친 듯이 도망쳤다.살귀의 두 눈에 시뻘건 피가 가득했고 검은 눈동자가 핏속에 담겨 있었다. 살귀가 내는 울부짖음은 마치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귀청이 째질 듯한 그런 소리였다.두 사람은 혹시라도 살귀의 얼굴을 봤다가 잠을 못 잘까 두려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그런데 살귀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이승재를 거의 따라잡았다.살귀의 무서운 모습을 본 이승재는 도목검을 들고 살귀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다. 하지만 살귀는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승재가 도목검으로 머리를 내려쳐도 전혀 끄떡없었다.퍽!이승재가 들고 있던 도목검이 마치 산이 쪼개지듯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러자 살귀는 마치 사람처럼 그들을 비웃었다.“이 살귀가 사람이 다 됐네?”이승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옷 주머니에서 엽전으로 만든 검 한 자루를 꺼냈다.이 엽전검은 권해철이 준 것이었는데 일반 원귀라면 일격에 바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귀에게 통할지는 이승재도 알지 못했다.이승재가 들고 있는 엽전검을 본 살귀의 얼굴에 두려움이 살짝 스쳤다.바로 그때 이승재와 살귀가 동시에 손을 들어 서로의 요해를 찌르려 했다.찌직!이승재의 옷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졌고 살가죽도 함께 벗겨졌다. 그리고 이승재의 엽전검은 정확히 살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오후 마연정이 가태윤을 만났을 때 가태윤은 진서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여 마연정도 진서준에게 많은 관심이 생겼다.그런데 진서준이 택시를 타고 마그레라에 온 걸 보고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택시를 타고 온 사람이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어?’이젠 진서준이 서울 병원에 들어갔다는 것조차 진짜인지 의심이 갔다.가태윤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거나 오후에 진서준의 자랑을 하도 많이 했으니까. 다행히 이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고 그와 마연정 둘뿐이었다.만약 진서준이 택시를 타고 온 걸 다른 친구들이 봤더라면 엄청나게 창피했을 것이다.“태윤아, 나한테 거짓말했어?”마연정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거짓말 아니야. 차가 고장 나서 택시 타고 왔겠지.”가태윤이 진서준을 대신하여 변명했다.“차가 고장 났다고?”그러자 되레 마연정의 비웃음만 샀다.“정말 돈이 많다면 집에 차 한 대뿐이겠어?”마연정은 그대로 마그레라 안으로 휙 들어갔다. 가태윤의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진서준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권력 있는 사람에게만 아부하고 빌붙는 마연정의 모습에 진서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미안해, 서준아. 연정이가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대.”가태윤이 재빨리 다가와 대충 둘러댔다. 진서준은 뭐라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태윤아, 여기 엄청 비싼 곳인데 너 오늘 이러다 거덜 나겠어.”진서준이 가태윤에게 말했다.“연정이 친구들도 온다잖아. 연정이가 체면을 좀 중시하거든...”가태윤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사실 가태윤도 처음에는 마그레라로 오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너무 비싼 건 사실이니까.가장 저렴한 룸도 200만 원 이상이었다. 다른 술집은 술 한 병에 몇천 원이지만 여긴 가장 싼 맥주도 몇만 원 정도 했다. 그리고 양주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싼 것도 몇십만 원을 호가했다.평소였더라면 가태윤은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연정의 애교에
“연정아, 너 왜 혼자 돌아와? 남친은?”“폐물 친구 뒤에 있어.”마연정은 빈정대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폐물 친구? 전에는 엄청 대단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민머리 청년은 약간 비웃음 담긴 눈빛이었다.“가태윤한테 속았다, 왜!”마연정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김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지. 걔는 대단한 사람과 알고 지낼 레벨이 아니라니까.”마연정의 자랑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김원 등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마연정이 자신들보다 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때 김원의 무릎에 앉아 있던 여자도 함께 비웃었다.“연정아, 사치스럽게 살고 싶으면 믿을 만한 남자를 만나야 해. 가태윤 같은 졸부는 그럴 능력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저녁 식사만 해도 두 사람 일 년 생활비가 나올걸.”“됐어, 수진아. 연정이도 속상할 텐데 그만해.”제일 먼저 마연정과 얘기했던 송예은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수진은 송예은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연기 그만하지. 너도 속으로 고소해 하는 거 다 알거든!”송예은은 말문이 막혔다. 속으로 고소해 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녀의 인성이 대놓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마연정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세 사람은 평소 같이 술이나 마시는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한 번 제대로 자랑하려고 불러 모은 것인데, 자랑은커녕 체면이나 깎이고 말았다.이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진서준과 가태윤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가태윤이 마연정 등에게 소개해 줬다.“이쪽은 내 친구 진서준이야. 서준이가 아니었더라면 난 오늘 무조건 병원에서 까였을걸.”조금 전 마연정이 진서준은 폐물이라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들은 진서준에게 아주 공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구경꾼의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너한테 그런 친구가 있었어? 널 서울 병원에 들어가게 해줄 친구?”김
오직 가태윤만 알았다. 진서준의 말 중에는 허풍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역시 진서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서울 병원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가태윤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마연정 등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짜고 치고 거짓말한다고만 생각했다.그들이 아무리 차가운 반응을 보여도 아랑곳 하지 않은 진서준은 나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탕두가결을 외울 줄 아나요?”나수진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탕두가결이 뭔데요?”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서울 병원은 쓰레기장이 아니에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지금 날 욕한 거예요?”나수진은 김원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노 서린 눈빛은 진서준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제가요? 그쪽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요?”진서준은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나수진을 바라봤다. 나수진과 김원의 안색은 동시에 어두워졌다.“가태윤 씨, 당신 친구 미친 거 아니에요?”김원은 가태윤에게 화풀이했다. 시비를 건 쪽은 분명히 그들이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있기에 가태윤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사과했다.“제 친구가 성격이 조금 불같아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요.”“하, 불같다고요? 그 지랄맞은 성격을 감당할 능력은 있고요? 능력 없이 지랄만 할 줄 알면 그게 미친놈이지, 뭐에요!”“이 좋은 술도 네 입은 막지 못하는구나.”마연정은 자신의 만든 자리를 김원이 망치는 것을 마냥 보기만 할 수 없었다. 행여 소문이라도 난다면 체면이 깎일 것이기 때문이다.진서준을 힐끗 노려본 김원은 씩씩대며 양주 뚜껑을 땄다. 그대로 한 모금 마시고는 사레에 걸려 한참이나 기침했다.“연정아, 남친이 서울 병원에 들어갔으면 더 좋은 술을 사야 할 거 아니야. 이런 건 거지도 안 마셔!”김원의 말을 듣고 마연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테이블에 놓은 10병의 양주는 개당 16만 원이나 하는 고가였기 때문이다. 10병이면 무려 160만 원이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술을
진서준이 정말 따라 주문한 것을 보고 김원은 피식 웃었다.“그만두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따가 계산할 때 잔액이 부족하다고 해도 대신 내주지 않을 거니까요.”“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요.”이때 마연정이 말을 보탰다.“걱정하지 마, 서준아. 돈이 모자라면 나랑 태윤이 보태줄게.”가태윤의 카드에는 몇억 원 정도 있었다. 그저 술값에 팔 수 있는 돈이 아닐 뿐이다.직원은 금방 진서준과 김원이 주문한 양주를 가져왔다. 김원은 그중 한 병을 나수진에게 밀어줬다.“자기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나수진은 김원을 껴안으며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비싼 술을 처음 받아봤다.마연정과 송예은은 잔뜩 부러운 눈치였다.“이쪽에는 두 병 더 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 비록 그는 마연정과 송예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태윤의 친구들이기에 소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은 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서준아, 너 미쳤어?”가태윤은 이미 진서준 대신 술값을 내 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오늘 도움 받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진서준이 마그레라의 사장에게 혼나는 모습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그러나 진서준이 윈스턴을 두 병 더 주문한다면 그도 감당할 수 없었다.“둘이 한 병을 마실 수는 없잖아? 난 남이랑 같은 술 안 마셔.”진서준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김원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술을 더 주문하는데 김원이 따르지 않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경쟁이 불붙었고 김원은 절대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이쪽도 두 병 더 줘요!”김원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곧이어 직원이 술을 더 가져오고 진서준은 단호하게 외쳤다.“전부 열어줘요!”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네 개의 술 뚜껑이 전부 열렸다.진서준은 김원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이름이 김원 씨라고 했죠? 술을 좋아하시나 본데 주량은 어때요?”“그쪽보다는 좋을 거예요!”김원은 눈이 새빨개졌다. 윈스턴
상대는 다름 아닌 조금 전 주문 받았던 직원이었다. 그의 뒤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과 얼굴 곳곳에 피멍 든 김원과 나수진이 있었다.이 장면을 보고 가태윤은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직원은 오래 대치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감히 마그레라에서 돈 안 내고 도망치려고 하다니, 너희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김원과 나수진이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을 듣고 가태윤을 눈을 크게 떴다.“야, 너 한 달에 1000만 원씩 번다며? 이 정도 술은 마실 수 있는 거 아니야?”마연정은 이때다 싶어서 김원을 비웃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얼굴에 남은 흉터는 커다란 벌레와 같았다.“난 도망친 거 아니야! 급히 할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오해한 거라고!”김원은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말은 누가 들어도 변명이었다.“헛소리하지 마, 우리한테 잡혀 온 걸 다행으로 알라고. 만약 오늘 진짜 도망갔다면 몇 대 맞는 거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직원은 김원을 향해 발길질했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사람들의 신경은 김원이 아닌 진서준에게 집중되었다. 진서준은 과연 몇 억 원의 술값을 낼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마연정과 송예은은 이런 자리에 자주 다녔다. 하지만 그녀들이 평생 먹은 술값을 합해도 오늘 진서준의 술값보다는 적었다.김원을 경고하고 난 직원은 진서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어이, 똑같은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돈 내시지.”이 말을 들은 진서준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식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산하는 법이 어디 있죠?”여러 술집을 다녀본 진서준에게 밥 먹다 말고 돈 내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게 계산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아, 너도 도망갈 생각이라는 말이구나.”직원은 피식 웃으며 경호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쟤도 똑같은 새끼예요. 빨리 때려요!”이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김원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정장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자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들먹거리던 엄승현은 정장 남자의 따귀를 맞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그 이유는 단 하나, 정장 남자의 아버지가 바로 호랑이였기 때문이었다.호랑이는 르벨 동부 지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엄승현의 집이 좀 잘사는 건 맞지만 호랑이 앞에서는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지금 이 순간, 이렇게 공개적으로 뺨을 맞았음에도 엄승현은 감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저 비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조 도련님, 방금은 제가 많이 실례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엄승현은 황급히 와인 한 병을 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술이 모두 넘어가자 엄승현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조 도련님, 우리 아버지와 도련님 아버지는 오랜 사업 파트너입니다. 제 아버지를 봐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가 나중에 호텔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죄하겠습니다.”그러나 정장 남자는 엄승현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내가 네 술 한 잔 얻어먹자고 이러는 줄 알아?”엄승현은 그 말에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조 도련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간단하지. 네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가 아는 사이니까 네가 와인 한 병 더 마시면 그냥 보내주지. 하지만 이놈들은 여기 남아야 해.”정장 남자는 도지아를 비롯한 일행을 가리키며 비열하게 웃었다.그 말을 듣자 모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여자들은 공포에 질려 몸을 벌벌 떨며 엄승현 뒤로 숨었다.“승현 오빠, 제발 구해주세요.”여자들은 울먹이며 엄승현에게 도움을 청했다.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들이 엄승현의 동정을 자아냈다.엄승현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정장 남자에게 부탁했다.“조 도련님, 제발 이 애들은 봐주십시오. 다들 제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이 한 잔씩 올리는 걸로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없겠습니까?”말이 끝나자마자 정장 남자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그
“나도 너 같은 외지인들 많이 봤거든. 기를 쓰고 우리 도시에 자리 잡으려 하는 놈들 말이야.”갑자기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하는 엄승현을 보며 진서준은 질린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이놈 정신 상태가 이상하네.'그때, 도민수가 나서서 말했다.“형, 우리 그냥 딴 데로 갈까요?”“왜 딴 데로 가려고 해?”조금 전 진서준에게 밀린 탓인지 엄승현의 말투가 사뭇 날카로웠다.“여긴 귀도파 구역인지라 싸움이 금지되어 있잖아요. 아까 그놈 패버렸는데 혹시 그놈이 귀도파에 일러바치면 우리도 곤란해질 수 있어요.”도민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띔했다.이 말을 들은 도민수 일행도 슬슬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르벨은 동서남북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동부 지역을 장악한 최대 조직이 바로 귀도파였다.귀도파 조직원은 수천 명이었고 하나같이 잔혹한 놈뿐이라 감히 건드릴 자가 없었다.게다가 여기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대학생 신분인지라 괜히 귀도파를 건드렸다가 진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하지만 엄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걱정 마. 우리 아버지가 귀도파 두목 호랑이와 친구거든.”“대박, 승현 오빠 인맥이 대단하네요.”“역시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남자다워요. 귀도파 두목이랑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우리 다 함께 승현 오빠를 위해 한잔하자.”모두가 잔을 들며 엄승현에게 한 잔을 권하자 엄승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엄승현은 이때다 싶어 슬쩍 도지아를 바라봤다.자기를 보고 감탄하는 줄 알았는데 도지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바로 이때, 누군가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곧이어 아까 엄승현에게 얻어맞았던 정장 남자가 불같이 뛰어들었다.그리고 남자 뒤에는 칼을 든 건장한 사내들이 잔뜩 따라왔다.이 광경에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순식간에 엄승현 뒤로 숨어들었다.“너 진짜 지원군 데려왔네?”엄승현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군자는 복수를 하루라도 미루지 않는 법이야. 네가 아까 날 때린
“승현 오빠, 시원하게 잘 팼어요. 저 개자식 확실하게 밟아버리세요.”“우리 승현 오빠 앞에서 감히 까불어?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흥, 승현 오빠는 우리 헬스팀 에이스야. 감히 이런 분을 건드려? 주제 파악이 안 돼?”도민수 일행은 정장 남자가 피범벅이 된 걸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이 분위기에 엄승현도 한껏 고무되었다.“지금 당장 꺼져. 안 그럼 넌 오늘 병원 중환자실 예약이야.”엄승현이 또 술병을 들어 정장 남자를 협박했다.“너 독한 건 인정하지.”정장 남자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를 악물고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말 똑바로 해. 그리고 우리 친구들한테 제대로 사과해.”엄승현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차기를 날렸고 정장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미안해.”정장 남자가 이를 갈며 억지로 사과했다.“성의가 없잖아, 다시 제대로 해.”엄승현이 또다시 발차기를 날렸다.“죄송합니다!”정장 남자가 억지로 분을 삭이며 다시 외쳤다.“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엄승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이제 꺼져. 다음에 또 마주치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 또 쓸데없이 까불다간 진짜 뼈를 바스러뜨릴 줄 알아.”정장 남자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더니 떠나기 전 엄승현을 빤히 쏘아봤다.“승현 오빠 최고예요!”“승현 오빠는 저놈 사과를 받아낼 정도로 대단하네요.”“승현 오빠 아직 여자친구 없다면서요? 혹시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요?”몇몇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며 설레는 마음으로 엄승현을 바라봤다.팽팽한 분위기가 풀리자 도지아가 다가와 도민수를 설득했다.“민수야, 이제 누나랑 같이 집에 가자.”“나 안 가. 갈 거면 누나 혼자 가. 나 귀찮게 하지 마.”도민수가 짜증 섞인 말투로 도지아를 밀쳐냈다.“야, 너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엄승현이 곧바로 다가와 얼굴을 굳히며 도민수를 꾸짖었다.그러곤 다시 다정한 눈빛으로 도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 누나, 괜찮아요?”“응, 난 괜찮아.”도지아가 예의 바르게
“그만해!”도지아가 황급히 외치며 도민수의 앞을 막아섰다.“이봐요, 말로 해결합시다. 손찌검은 하지 말고요.”“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도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누나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어이쿠, 여기 또 미녀 한 분이 오셨네? 이런 풍경은 흔치 않은데?”정장 남자가 도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도지아는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역겨움을 억누르며 말했다.“이봐요, 제 동생이 당신한테 어떤 짓을 했나요?”“이놈이 내 얼굴을 때렸거든. 이걸 어쩌면 좋을까?”양복남이 쌀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내 친구 엉덩이를 만졌잖아. 한 대 맞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도민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반박했다.“내가 그년 엉덩이를 만진 건 영광인 줄 알아야지. 게다가 그년은 왜 그렇게 야하게 입고 다니는데? 남자 꼬시겠다는 거 아니야?”정장 남자가 억지 논리를 내세웠다.그 말을 듣자마자 도지아는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이 인간이 도민수의 친구를 성추행했고 도민수가 그걸 못 참아 주먹을 날린 거였다.“이봐요, 당신이 먼저 잘못했으니까 제 동생이 참지 못한 거죠.”도지아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뭘 잘못했는데?”양복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가씨, 이놈 누나 맞지? 그럼 내가 화해할 방법을 알려 줄게. 오늘 밤 아가씨가 나랑 즐겁게 놀아주면 아가씨 동생이 날 때린 일은 없던 일로 해주지.”그 순간, 도민수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이 개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 그 입 다시 놀려 봐? 진짜 네 머리 터지고 싶어?”정장 남자의 선을 넘는 말에 도지아의 얼굴도 차갑게 식었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누가 옳고 그른지 경찰이 판단하게 하자.”“경찰?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알고 개소리하는 거야? 그놈들이 감히 날 잡아갈 수 있을 것 같아?”양복남은 코웃음을 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내 일은 내가 해결해. 넌 빠져.”도민수가 도지아를 옆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