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가태윤만 알았다. 진서준의 말 중에는 허풍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역시 진서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서울 병원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가태윤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마연정 등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짜고 치고 거짓말한다고만 생각했다.그들이 아무리 차가운 반응을 보여도 아랑곳 하지 않은 진서준은 나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탕두가결을 외울 줄 아나요?”나수진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탕두가결이 뭔데요?”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서울 병원은 쓰레기장이 아니에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지금 날 욕한 거예요?”나수진은 김원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노 서린 눈빛은 진서준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제가요? 그쪽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요?”진서준은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나수진을 바라봤다. 나수진과 김원의 안색은 동시에 어두워졌다.“가태윤 씨, 당신 친구 미친 거 아니에요?”김원은 가태윤에게 화풀이했다. 시비를 건 쪽은 분명히 그들이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있기에 가태윤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사과했다.“제 친구가 성격이 조금 불같아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요.”“하, 불같다고요? 그 지랄맞은 성격을 감당할 능력은 있고요? 능력 없이 지랄만 할 줄 알면 그게 미친놈이지, 뭐에요!”“이 좋은 술도 네 입은 막지 못하는구나.”마연정은 자신의 만든 자리를 김원이 망치는 것을 마냥 보기만 할 수 없었다. 행여 소문이라도 난다면 체면이 깎일 것이기 때문이다.진서준을 힐끗 노려본 김원은 씩씩대며 양주 뚜껑을 땄다. 그대로 한 모금 마시고는 사레에 걸려 한참이나 기침했다.“연정아, 남친이 서울 병원에 들어갔으면 더 좋은 술을 사야 할 거 아니야. 이런 건 거지도 안 마셔!”김원의 말을 듣고 마연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테이블에 놓은 10병의 양주는 개당 16만 원이나 하는 고가였기 때문이다. 10병이면 무려 160만 원이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술을
진서준이 정말 따라 주문한 것을 보고 김원은 피식 웃었다.“그만두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따가 계산할 때 잔액이 부족하다고 해도 대신 내주지 않을 거니까요.”“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요.”이때 마연정이 말을 보탰다.“걱정하지 마, 서준아. 돈이 모자라면 나랑 태윤이 보태줄게.”가태윤의 카드에는 몇억 원 정도 있었다. 그저 술값에 팔 수 있는 돈이 아닐 뿐이다.직원은 금방 진서준과 김원이 주문한 양주를 가져왔다. 김원은 그중 한 병을 나수진에게 밀어줬다.“자기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나수진은 김원을 껴안으며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비싼 술을 처음 받아봤다.마연정과 송예은은 잔뜩 부러운 눈치였다.“이쪽에는 두 병 더 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 비록 그는 마연정과 송예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태윤의 친구들이기에 소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두 사람은 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서준아, 너 미쳤어?”가태윤은 이미 진서준 대신 술값을 내 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오늘 도움 받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진서준이 마그레라의 사장에게 혼나는 모습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그러나 진서준이 윈스턴을 두 병 더 주문한다면 그도 감당할 수 없었다.“둘이 한 병을 마실 수는 없잖아? 난 남이랑 같은 술 안 마셔.”진서준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김원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술을 더 주문하는데 김원이 따르지 않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경쟁이 불붙었고 김원은 절대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이쪽도 두 병 더 줘요!”김원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곧이어 직원이 술을 더 가져오고 진서준은 단호하게 외쳤다.“전부 열어줘요!”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네 개의 술 뚜껑이 전부 열렸다.진서준은 김원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이름이 김원 씨라고 했죠? 술을 좋아하시나 본데 주량은 어때요?”“그쪽보다는 좋을 거예요!”김원은 눈이 새빨개졌다. 윈스턴
상대는 다름 아닌 조금 전 주문 받았던 직원이었다. 그의 뒤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과 얼굴 곳곳에 피멍 든 김원과 나수진이 있었다.이 장면을 보고 가태윤은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직원은 오래 대치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감히 마그레라에서 돈 안 내고 도망치려고 하다니, 너희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김원과 나수진이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을 듣고 가태윤을 눈을 크게 떴다.“야, 너 한 달에 1000만 원씩 번다며? 이 정도 술은 마실 수 있는 거 아니야?”마연정은 이때다 싶어서 김원을 비웃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얼굴에 남은 흉터는 커다란 벌레와 같았다.“난 도망친 거 아니야! 급히 할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오해한 거라고!”김원은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말은 누가 들어도 변명이었다.“헛소리하지 마, 우리한테 잡혀 온 걸 다행으로 알라고. 만약 오늘 진짜 도망갔다면 몇 대 맞는 거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직원은 김원을 향해 발길질했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사람들의 신경은 김원이 아닌 진서준에게 집중되었다. 진서준은 과연 몇 억 원의 술값을 낼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마연정과 송예은은 이런 자리에 자주 다녔다. 하지만 그녀들이 평생 먹은 술값을 합해도 오늘 진서준의 술값보다는 적었다.김원을 경고하고 난 직원은 진서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어이, 똑같은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돈 내시지.”이 말을 들은 진서준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식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산하는 법이 어디 있죠?”여러 술집을 다녀본 진서준에게 밥 먹다 말고 돈 내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에게 계산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아, 너도 도망갈 생각이라는 말이구나.”직원은 피식 웃으며 경호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쟤도 똑같은 새끼예요. 빨리 때려요!”이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김원
“우리 사장님? 이봐, 너희들이 도망가려고 한 일을 우리 사장님이 알게 된다면 그냥 끝장나는 거야.”직원의 말에 가태윤은 서둘러 말했다.“서준아, 그냥 돈부터 내면 안 될까?”“그럴 돈이 있으면 내고도 남았겠죠! 내가 보기에 저 새끼도 그냥 거지예요!”나수진은 이를 꽉 악문 채 팅팅 부은 눈으로 진서준을 노려봤다. 김원과 나수진은 진서준도 자신들과 똑같은 꼴로 만들고 싶었다.진서준은 고집스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술 마시다 말고 계산하는 법이 어디 있어. 난 절대 안 해.”이 말을 듣고 직원은 목청껏 외쳤다.“그렇다면 내가 새로운 법을 만들어주지!”경호원들은 진작 기다리고 있었다. 진서준이 계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미 슬금슬금 모여들었다.키가 2m에 달하는 경호원들은 체격도 어마어마했다. 반대로 진서준은 근육 하나 없는 것이 한 번 맞으면 픽 쓰러질 것 같았다.눈에 뻔히 보이는 격차에 사람들은 눈을 찔끔 감았다. 경호원 중 한 명은 손을 뻗어 진서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그를 들어 올리려고 말이다.하지만 그가 힘을 주기도 전에 진서준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만으로 그는 추호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호원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 지경으로 힘을 줬는데도 움직일 수는 없었다.“꺼져!”진서준은 빠르게 발을 올려 경호원을 차버렸다. 그 경호원은 벽에 부딪히며 떨어졌다.경호원이 부딪혔던 자리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그것만 봐도 진서준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알 수 있다.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 수많은 경우가 있었지만 진서준이 맞서 싸울 줄은, 심지어 우세를 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이게 어디서 감히... 때려눕혀!”경호원들은 일제히 진서준을 향해 달려갔다.퍽! 퍽! 퍽!룸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은 전부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었다.진서준을 바라보는 마연정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김성진은 인상을 썼다. 옷을 챙겨 입은 그는 분노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누군진 몰라도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의 분노는 사르르 풀렸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를 대체한 것은 당황뿐이었다. 악마를 본 인간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물론 진서준은 그에게 악마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만월호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그는 원래 만원홀에서 만났던 고수들과 자리 한 번 마련할 생각이었다. 근데 그 고수 중 한 사람이 진서준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아무튼 그는 진서준과 자리를 마련하려던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대성 종사까지 손쉽게 상대하는 진서준이라면 그의 형인 김범수도 얌전히 고개를 숙여야 하는 레벨이었다.“사장님, 이 새끼가 술값을 내지도 않고 우리 애들을 팼어요. 아까는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이 새끼가 너무 막무가내예요.”이때 직원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진서준이 했던 일들을 얘기했다. 하지만 직원이 칭찬해달라는 듯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성진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뺨을 맞고 머리가 어지러웠던 직원은 멍한 표정으로 김성진을 바라봤다. 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다.“너 지금 누구한테 새끼라고 하는 거야. 죽고 싶어?!”김성진의 말을 듣고 진서준은 눈썹을 치켜떴다.“자꾸 나를 나쁜 사람 취급하네요. 난 식사가 끝나고 계산하겠다고 했을 뿐인데요.”“아닙니다! 서준 님이 저희 마그레라에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김성진은 굽신거리며 진서준의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값비싼 담배까지 건넸다.그의 모습을 보고 직원은 입을 떡 벌렸다. 뺨을 맞은 고통까지 잊을 정도였다.“담배 안 피워요. 그나저나 이 가게는 직원 인성이 너무 더럽던데요? 밥 먹기도 전에 계산하라고 하질 않나, 깡패들을 데리고 와서 폭력을 쓰질 않나.”진서준의 말을 듣고 김성진은 손을 덜덜 떨었다. 담배마저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의 손 떨림이었다.‘서준 님한테 감히
지금은 과연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되었다. 진서준이 돈을 내지 못하면 가태윤의 얼마 남지 않은 돈이 탈탈 털리게 된다.“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진서준 그 자식은 쫄보야. 해외에서 싸움질 좀 배웠다고 이 세상이 자기 거라도 되는 줄 알아?”마연정은 사정없이 말했다.“제기랄, 내가 여기에서 나가기만 해봐.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 거야!”김원은 표독한 눈빛으로 말했다.이때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의 시선 끝에 진서준이 태연하게 걸어들어왔다. 몸에는 상처는커녕 생채기 하나도 없었다.“서준아, 너 왜 괜찮아?”마연정이 물었다.“내가 안 괜찮아야 하는 건가?”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너 여기 사장 만나러 갔다며?”“응.”자리에 앉은 진서준은 자신이 산 양주를 태연하게 마셨다.“그럴 리가! 마그레라의 사장은 널 가만히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야!”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래요? 근데 가만히 내버려뒀을 뿐만 아니라 선물까지 주던데요?”진서준은 차갑게 웃었다. 그가 말하는 새로 섹시한 드레스를 입은 여직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녀들이 품에 안은 술은 하나같이 2000만 원을 넘기는 것이었다.“서준 님,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드리는 서비스입니다.”예쁘게 생긴 여직원 한 명이 진서준의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말했다.“전부 따줘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게 다섯 개의 술 뚜껑은 전부 따졌다.“서준 님, 저희가 노래를 불러드릴까요?”여직원은 교태롭게 말하면서 윙크까지 했다. 다른 여직원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들을 보내기 전 김성진은 수도 없이 당부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서준을 기분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됐어요. 필요할 때 부를 테니까 이만 나가요.”진서준은 그녀들을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네!”여직원들이 떠난 다음 룸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
술자리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저녁 11시가 되었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할 때 김성진의 지시로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진서준은 김원을 호락호락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그중 네 병은 이 두 사람이 주문한 거예요.”그는 김원과 나수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돈 절약 했다고 속으로 좋아하던 김원은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불편한 사이를 보아낸 직원은 눈치껏 김원에게 말했다.“잔돈 빼고 총 4500만 원입니다, 손님.”김원은 곧바로 카드를 꺼냈다. 그의 얼굴 꼴만 봐도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카드에서 돈이 긁혀 나간 순간 그는 가슴에서 피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서준 님,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선물로 드리는 VIP 카드입니다. 이 카드가 있다면 앞으로 마그레라에서의 모든 소비는 무료입니다!”직원은 카드 한 장 꺼내서 진서준에게 공손히 건네줬다. 진서준은 이 카드가 김성준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주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별말 없이 받아서 들었다.곁에서 가태윤 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그레라에서 무료라니, 이런 카드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그레라에서 나간 다음 가태윤이 진서준이게 말했다.“서준아, 너 택시 타지 마. 내 차 타고 가자, 내가 대리기사 부를게.”“괜찮아, 내 차도 근처에 있어. 조심해서 돌아가.”진서준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러고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마이바흐를 향해 걸어갔다.“서준 씨!”차를 마그레라에 두고 가라는 말에 조성우는 진서준이 술을 마셨으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특별히 대리기사를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산성 별장으로 가주세요.”차에 올라탄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기사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고 그렇게 가태윤 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헐, 최고가 마이바흐?! 저거 족히 4억 원은 하는 차야!”마이바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가태윤은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마연정은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짓이 자꾸만
“수행하는 분들은 보통 일찍 일어나지 않나요?”주혁구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서준 님은 저희와 달라요. 이따가 만난 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죠?”전화를 끊은 다음 주혁구는 또 한 시간 기다렸다. 그러다 이승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 별장으로 오라고 했다.주혁구가 도착했을 때 이승제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들어가죠!”차량은 진서준의 별장 앞에 가서 멈춰 섰다. 대문 앞으로 걸어간 이승재는 직접 초인종을 눌렀다. 진서라는 곧장 문을 열고 밖에 나왔다.“누구 찾으세요?”저희는 진서준 님과 만나러 왔습니다.”진서라를 알아본 이승재는 공손하게 말했다. 진서라는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물었다.“제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요?”“네.”이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들어오세요. 제가 오빠를 부르러 갈게요.”“아닙니다, 저희가 직접 가면 됩니다!”이승재는 주혁구와 함께 진서준이 있는 옆 별장으로 향했다. 주혁구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 님, 방금 전의 그 여자가 서준 님의 동생이에요? 저는 딸인 줄 알았어요!”주혁구는 이승재보다 강한 진서준의 나이가 절대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서라를 동생이 아닌 딸로 본 것이다.“서준 님은 아주 젊으신 분이에요. 들어가서 함부로 입 놀리면 안 돼요.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말을 마친 이승재는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직 방에 돌아가지 않았던 진서라가 그 모습을 보고는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오빠 아직 안 깨났나 봐요.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불러줄게요.”“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거실에 들어간 다음 이승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주혁구도 덩달아 꼿꼿하게 앉아서 추호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빠, 일어났어?”2층에 올라온 진서라는 진서준의 방문에 노크했다. 수련 중이던 진서준은 진서라의 목소리를 듣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진서라는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
이때의 조슬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조금만 가까이 가도 조슬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신수란은 조슬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바로 옆방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로 자기 체온을 되찾으려 했다.조슬기를 업고 오는 내내 신수란 또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조슬기의 체온은 거의 0도에 가까웠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통에 신음하는 조슬기를 보며 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내가 일단 치료할게. 성약당 장로가 도착하려면 최소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해.”“네가 치료한다고? 경호원 주제에 뭘 안다고 사람을 살린다고 지껄여?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네가 뭔데 이렇게 나대?”은청준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가 경호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못 구한다고 했죠?”유정이 즉각 반박했다.은청준이 지속적으로 진서준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 영 거슬렸는데 이제는 대놓고 모욕까지 하니 유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유 아가씨, 경호원이 사람을 못 구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전 그냥 저 사람이 자격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은청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유정이 유 가주의 딸만 아니었다면 유정에게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아까 진서준과 대련하려고 할 때에도 유정 때문에 망신당했는데 지금은 또 저 하찮은 경호원 따위를 위해 유정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니, 이러다간 정말 곤륜 차세대 천재 일인자인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유씨 가문의 경호원이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니 기막힌 일이었다.“김평안 오빠는 우리 유씨 가문을 여러 번 구한 의술이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 목숨도 이분이 살리셨죠. 그런 분이 왜 자격이 없다는 거죠?”유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은청준과 눈을 맞추며 쏘아붙였다.은청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유 아가씨, 아가씨는 제 후배 신분을 아나요? 제 후배는 우리 종문 문주의 따님입니다.
하지만 두 검의 차이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컸고 이건 진서준에게 손해 보는 장사였다.“이봐요, 은청준 씨, 곤륜 제자로서 이런 요구를 하는 건 곤륜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요?”유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은청준도 유정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유 아가씨,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제 검도 희귀한 명검 중 하나입니다.”은청준은 굳은 얼굴로 즉시 반박했다.“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바로 시작하자.”은청준은 진서준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유정이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이 참선검은 반드시 자기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규칙은 간단해. 검이 먼저 상대의 몸에 닿는 쪽이 승리야, 어때?”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오직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었다.“문제 없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막 대련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갑자기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왔다.“가주님! 조슬기 아가씨의 소식을 받았습니다!”“뭐라고? 아가씨가 어디 있어?”유기명이 즉시 반응하자 이장로가 손을 내저었다.“이 대련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먼저 슬기부터 찾자.”그 말을 듣자 은청준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지만 이장로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김평안, 그 검 잘 보관해 둬라. 내가 반드시 가져갈 거니까.”은청준은 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조슬기 아가씨가 이미 금도에 도착해서 우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즉시 날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이장로가 급히 말하자 유기명이 서둘러 제안했다.“이장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여기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이장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절했다.조슬기가 과연 무사한지 이장로는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알겠습니다. 이봐, 즉시 이장로님을 모시고 출발해.”
식사도 아직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이미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유정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쭉 진서준에게 머물렀다.진서준이 이따가 대련 중에 다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유씨 가문에 머무르는 동안, 유정은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면 곤륜을 비롯한 4대 은세 종문에 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가장 오래 유지되어 온 은세 세력이었다.심지어 경성의 4대 가문조차도 이 4대 종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게다가 종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천재였다.은청준이 곤륜의 차세대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손꼽힌다면 그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컸다.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반면 진서준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진서준의 여유로운 태도에 은청준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흥, 대련이 시작되면 네놈이 나와의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은청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저녁 식사 내내 유기명과 이장로만 가끔 대화를 나눴다.곧 식사가 끝나자 곤륜의 다른 제자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몰려왔다.다들 유씨 가문 저택 뒤편의 넓은 공터에 모여 구경하기 시작했다.“저 녀석 미친 거 아냐? 감히 은 선배와 대련하겠다고? 살고 싶지 않은 건가?”“은 선배는 이미 사급 대종사야. 선배의 실력은 끔찍할 정도로 강해. 웬만한 사람은 상대도 안 되지.”“내기나 해볼까? 저 자식이 선배의 검을 몇 번이나 막아낼 수 있을지?”“난 한 방도 못 버틴다고 봐. 선배는 이미 검의를 깨우쳤잖아.”곤륜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진서준을 과소평가했다.다들 은청준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또래 중에서 아무도 은청준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반면, 진서준은 겉보기에는 40대로 보였지만 전혀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이런 사람이 실력자라고 한다
“김평안 씨는 내가 엄청난 공을 들여서 모셔 온 분입니다.”유기명이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진서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겉보기엔 4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어마어마하다고? 그럼 나랑 한번 붙어볼래?”은청준이 비웃으며 말했다.은청준은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급 대종사가 되었는데 반면 이 경호원은 체내에 강기가 거의 없었다.아무래도 겨우 종사의 문턱을 밟은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세속에서는 강자로 불리는 건가?유기명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은청준 씨와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김평안 씨 검술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실력입니다.”“마침 나도 검술이 특기인데, 한 번 겨뤄볼까?”은청준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청준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무도는 남과 다투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이장로가 차분하게 말하자 은청준은 곧바로 태도를 고쳐잡고 공손하게 말했다.“이장로님, 저는 그냥 세속 무인과 가볍게 한 수 겨뤄볼 생각이었습니다.”이장로는 은청준을 흘긋 보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은청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종문 사람이니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진서준이 다시 강조하자 은청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쏘아봤다.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혹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가?“은범은 내 사촌 동생이야. 네가 그 못난 동생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은청준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신농산에서 만난 적이 있어.”“뭐라고? 걔가 신농산에 갔다고?”이 말에 은청준은 흥미가 동했다.“그 녀석 실력으로는 신농산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텐데?”은청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은범이 어떤 인물인지 은청준은 잘 알고 있었다.애매한 실력과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은범이 은씨 가문에서 빛을 볼 일은 없었다.은청준과 은범의 격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컸다.“그 녀석은 테
진서준은 아버지 진요한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렇게 닮은 꼴로 곤륜 사람들을 만나면 곤륜 장로가 진서준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서준은 곤륜에 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피면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목소리까지 완전히 변해버린 진서준을 보고 유정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진서준이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알겠어요, 진서준 오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름 잘못 불렀어. 지금 난 김평안이야.”진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그냥 김평안이라고 부르면 돼.”“알았어요.”그렇게 진서준은 유정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인피면구를 쓴 진서준을 본 유기명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진서준이 슬쩍 보낸 눈짓을 보고 유기명은 즉시 이 사람이 진서준이란 걸 깨달았다.“유정아, 이리 와 앉아.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유기명이 유정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이때, 곤륜의 이장로가 진서준을 흘끗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주님, 따님 건강이 막 회복된 것 같은데, 맞나요?”이장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이장로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유기명은 깜짝 놀랐다.유기명은 아직 딸의 병에 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장로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큰 병을 앓았다는 걸 눈치챘다.이건 거의 신의 영역 아닌가?“따님께서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지만 눈에 피곤한 기운이 남아 있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불안정합니다.”이장로가 천천히 해명했다.“역시 곤륜 장로님이십니다.”유기명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딸은 최근 큰 병에서 막 회복된 참입니다.”“따님을 치료한 의사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이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큰 병인데도 이 정도로 빠르게 완치하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닐 텐데... 혹시 성약당 장로가 아닙니까?”유기명은 순간 멈칫하더니 곁눈질로 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도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정도였다.“가주님, 이번에 찾아온 건 부탁할 일이 따로 있어서입니다.”이장로가 용건을 말하자 유기명이 시원하게 대답했다.“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유씨 가문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곤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곧 곤륜이 유씨 가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강 종문 중 하나였다.곤륜이 유씨 가문에 빚을 진다면 훗날 유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 종주님 따님도 이번에 곤륜에서 내려왔습니다.”이장로가 말문을 열었다.“네? 조슬기 아가씨도 왔습니까? 근데 아가씨는 어디에...”유기명이 멈칫하더니 이장로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어제 하산할 때 슬기와 경호원 두 사람이 따로 움직였고 밤에 저희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나중에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슬기를 찾아주신다면 이 늙은 몸이 신세를 지는 셈 치겠습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장로님, 과한 말씀입니다. 제가 즉시 서남 지역 전체에 조슬기 아가씨를 찾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유기명은 망설일 틈도 없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서남에서 유씨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명령이 내려가자 서남의 크고 작은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까지도 조슬기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모두가 조슬기를 찾기 위해 분주한 사이, 진서준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오빠!”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정이 반갑게 소리쳤다.“유정아, 몸은 좀 어때?”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많이 좋아졌어요.”유정은 대답하며 진서준을 위아래로 살폈고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혹시라도 진서준이 자기를 위해 묘강에 가서 복수라도 했던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진서준이 앞으로 다가가 유정의 맥을 짚었다.“확실히 거의 다 나았네. 이틀만 더 쉬면 원래 상태로 돌
“가주님! 대문 앞에 중요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유씨 가문의 집사가 황급히 유기명을 찾아 소리쳤다.“중요한 손님이라고?”유기명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서남 지역에서 유씨 가문을 찾아 올 만한 중요한 손님이라면 꽤 오랜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씨 가문에서 중요한 손님으로 인정할 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설령 그것이 경성의 4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방문해야만 중요한 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누가 왔어?”유기명이 물었다.“곤륜의 이장로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유기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안으로 모셔 와야지!”유기명은 집사를 따라 급히 장원 입구로 향했다.그곳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이었고 등에는 검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도 비범했다.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극단에서 뛰쳐나온 배우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이장로님, 이 유씨 가문이란 곳,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습니까?”무리의 맨 앞에 선 잘생긴 청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우리 곤륜이 오랫동안 여기를 찾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잖아요.”그들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이전에도 곤륜산에서 내려와 세속의 여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 귀빈처럼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하지만 유씨 가문이 이들을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니, 그 격차가 너무 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다 떠들었으면 이제 조용히 해.”그 순간, 백발의 이장로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종주님의 따님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지금 대접 타령이나 하고 있어? 이번에도 슬기를 못
진서라는 재빨리 움직여 유정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고마워, 서라야.”유정은 물컵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다.“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제 괜찮아.”유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참 다행이네요.”진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진서준 오빠는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유정이 문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유정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진서준이었다.진서라는 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나갔다고? 혹시 묘강으로 간 건 아니겠지?”유정도 바보는 아닌지라 진서라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아, 아니에요. 묘강은 워낙 위험한 곳이라 우리 오빠도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서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벌써 하루가 지나도록 진서준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점심때 국제 뉴스를 본 진서라는 배논국의 묘강 지역에서 큰 소란이 있어 배논국이 결국 묘강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다.그러니 자연스레 진서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기명이 방으로 들어왔다.딸이 깨어난 걸 보자 유기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격동한 말투로 말했다.“유정아, 드디어 깨어났구나!”“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유정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절반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바보 같은 소리 마. 사과할 사람은 나야.”유기명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내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그 자식을 죽였더라면 네가 중독될 일도 없었을 거야.”“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하세요.”진서라가 서둘러 다독였다.“그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야. 더 이상 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