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저녁 11시가 되었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할 때 김성진의 지시로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진서준은 김원을 호락호락하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그중 네 병은 이 두 사람이 주문한 거예요.”그는 김원과 나수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돈 절약 했다고 속으로 좋아하던 김원은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불편한 사이를 보아낸 직원은 눈치껏 김원에게 말했다.“잔돈 빼고 총 4500만 원입니다, 손님.”김원은 곧바로 카드를 꺼냈다. 그의 얼굴 꼴만 봐도 지금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카드에서 돈이 긁혀 나간 순간 그는 가슴에서 피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서준 님,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선물로 드리는 VIP 카드입니다. 이 카드가 있다면 앞으로 마그레라에서의 모든 소비는 무료입니다!”직원은 카드 한 장 꺼내서 진서준에게 공손히 건네줬다. 진서준은 이 카드가 김성준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주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별말 없이 받아서 들었다.곁에서 가태윤 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그레라에서 무료라니, 이런 카드는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그레라에서 나간 다음 가태윤이 진서준이게 말했다.“서준아, 너 택시 타지 마. 내 차 타고 가자, 내가 대리기사 부를게.”“괜찮아, 내 차도 근처에 있어. 조심해서 돌아가.”진서준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러고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마이바흐를 향해 걸어갔다.“서준 씨!”차를 마그레라에 두고 가라는 말에 조성우는 진서준이 술을 마셨으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특별히 대리기사를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산성 별장으로 가주세요.”차에 올라탄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기사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고 그렇게 가태윤 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헐, 최고가 마이바흐?! 저거 족히 4억 원은 하는 차야!”마이바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가태윤은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마연정은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짓이 자꾸만
“수행하는 분들은 보통 일찍 일어나지 않나요?”주혁구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서준 님은 저희와 달라요. 이따가 만난 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죠?”전화를 끊은 다음 주혁구는 또 한 시간 기다렸다. 그러다 이승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 별장으로 오라고 했다.주혁구가 도착했을 때 이승제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들어가죠!”차량은 진서준의 별장 앞에 가서 멈춰 섰다. 대문 앞으로 걸어간 이승재는 직접 초인종을 눌렀다. 진서라는 곧장 문을 열고 밖에 나왔다.“누구 찾으세요?”저희는 진서준 님과 만나러 왔습니다.”진서라를 알아본 이승재는 공손하게 말했다. 진서라는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물었다.“제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요?”“네.”이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들어오세요. 제가 오빠를 부르러 갈게요.”“아닙니다, 저희가 직접 가면 됩니다!”이승재는 주혁구와 함께 진서준이 있는 옆 별장으로 향했다. 주혁구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 님, 방금 전의 그 여자가 서준 님의 동생이에요? 저는 딸인 줄 알았어요!”주혁구는 이승재보다 강한 진서준의 나이가 절대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서라를 동생이 아닌 딸로 본 것이다.“서준 님은 아주 젊으신 분이에요. 들어가서 함부로 입 놀리면 안 돼요.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말을 마친 이승재는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직 방에 돌아가지 않았던 진서라가 그 모습을 보고는 열쇠를 들고 다가왔다.“오빠 아직 안 깨났나 봐요.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불러줄게요.”“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거실에 들어간 다음 이승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주혁구도 덩달아 꼿꼿하게 앉아서 추호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빠, 일어났어?”2층에 올라온 진서라는 진서준의 방문에 노크했다. 수련 중이던 진서준은 진서라의 목소리를 듣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진서라는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이승재는 공지에서 벌어진 일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서준은 주혁구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약 진서준이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이번에 아주 대차게 망할 것이다.지금의 주혁구에게서는 어제의 오만함을 보아낼 수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후회와 공손함 뿐이었다.주혁구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진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돈만 있으면 남한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어제 아침 당신이 신호등을 어겨서 사고를 내놓고 사과하기는커녕 은행 카드나 던져댔죠.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였어요?”진서준의 말을 들은 이승재와 진서라는 이제야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했다. 진서준 뿐만 아니라 그들도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랐을 것이다.“제가 잘못했어요, 서준 님.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하지 않을게요. 화 푸세요.”진서준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주혁구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서준 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준 님만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할게요!”주혁구의 진심 어린 표정을 보고 진서라가 말했다.“오빠, 저 사람한테 기회를 한 번만 더 줘봐.”진서준은 진서라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넌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야.”만약 진서라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주혁구를 쫓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사고를 내고도 사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살려준 사람에게도 오만하게 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진서준이 흔들린 것을 보고 이승재는 말을 보탰다.“서준 님, 주 사장 공지의 살귀가 벌써 사람을 둘이나 죽였어요! 만약 서준 님이 나서주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거예요.”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감옥에서 장철결을 전수 받을 때부터 그는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하는 위치에 처했기 때문이다.사부의 당부가 떠오른 그는 바로 대답했다.“그래, 그럼 오늘밤 같이 다녀오지.”진서준이 허락한 것을 듣고 이승재와 주혁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만큼 귀신도 사람을 무서워했다. 특히 사람이 많은 곳에는 귀신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주혁구의 공지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도 살귀가 나타난 걸 보면 누군가 일부러 키웠다는 것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오빠, 나 오후에 시간 있는데 같이 구경해도 돼?”진서라는 얌전히 진서준의 곁에 앉아서 말했다. 예상 밖의 질문에 진서준은 눈썹을 찌푸렸다.“안 무서워?”“무서워, 근데 오빠가 있잖아.”진서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생의 애교에 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래, 같이 가자.”말을 마친 진서준은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이만 몸을 일으켰다.“오빠, 어디가?”“살 물건이 있어서.”별장을 나선 진서준은 마이바흐를 타고 골동품 거리로 향했다.그는 원래 도구를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진서라와 함께 가야 한다면 부적 정도는 써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귀신들이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끔 말이다.골동품 거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난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몇 가게 사장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자신들이 구한 물건들을 보여줬다.“손님, 이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봐줄 수 있을까요?”“어이, 내가 먼저 왔거든? 이것부터 봐주세요!”“이건 제가 4000만 원이나 주고 산 것인데 꼭 좀 봐주세요!”진서준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들을 훑어봤다. 그중에는 진짜도 있고 가짜도 있었다.“이상하네. 저 사람들 왜 젊은이한테 저런 부탁을 하죠?”자초지종을 몰랐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아직 모르죠? 저분이 보기에는 젊어도 실력이 아주 출중해요.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능력이 황보식 대가님 못지않다니까요!”한 가게의 사장이 설명했다.“그뿐만 아니라 성철 어르신도 저분께는 아주 공손해요.”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허풍이라고 생각했다.오늘 단지 물건을 사러 왔을 뿐인 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비켜요, 검증은 전문가한테 맡기고요.”진서준
가게의 문 앞에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있었다. 그의 피부는 천 년 묵은 나무껍질과 같았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온 혈관은 꿈틀대는 벌레와 같았다.그중에서도 가장 불쾌한 것은 독사와 같은 그의 눈이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일반인이라면 진작 피해 갔을 것이다.조금 전에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도 노인이 낸 목소리였다. 가게 직원은 왜 두 사람 다 쓰레기 반지에 관심을 가지는지 몰랐던지라 약간 어리둥절해 보였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사장님을 불러올게요.”말을 마친 직원은 곧장 사장을 찾으러 갔다.노인이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 진서준은 곧바로 기온이 떨어진 것을 느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인을 훑어봤다.사악한 기운은 노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삼켰다. 만약 어둠 속에서 만났다면 분명히 귀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그는 노인에게서 묘한 영기를 느꼈다. 신기하게도 그 영기는 권해철보다 얼마 약하지도 않았다.권해철은 남주성의 모두에게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만큼 명성도 자자했다. 눈앞의 노인은 권해철 정도는 아니지만 명성이 자자해야 마땅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진서준은 이런 사람의 존재를 듣도 보도 못했다.진서준이 노인을 훑어보고 있을 때 노인도 관찰하듯 그를 훑어봤다. 예리한 빛은 노인의 눈에서 번뜩이고 있었다.“어른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미덕일세. 그 반지 나한테 양보하면 안 되겠나?”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는 칼이 숨겨져 있었다.“제가 먼저 발견한 물건을 왜 양보해야 하죠?”진서준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꼈다.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노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아직 계산도 하지 않은 물건 아닌가. 누구의 것이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네. 지금은 내 200만 원을 줄 테니 양보하게나.”노인이 돈 얘기를 꺼냈는데도 진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싫어요.”200만 원은커녕 2000만 원, 2억 원이 된다고 해도 그는 양보할 생각이
가게 사장은 무엇보다 강성철이 무서웠다. 만약 그가 진서준에게서 2억 원이나 받고 반지 하나 판 것을 들킨다면 아마 그날로 비명횡사할 것이다.노인은 진서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이건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세. 작은 이익으로 목숨 잃는 일은 하지 말게.”노인이 급기야 목숨으로 위협하는 것을 듣고 진서준은 콧방귀를 뀌었다.“저도 같은 말을 돌려주고 싶네요. 어르신도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진서준과 노인이 반지 하나 때문에 원수지는 것을 보고 사장은 더욱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여전히 별 볼 것 없는 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주 멍청한 녀석이었군.”말을 마친 노인의 눈빛은 표독하게 빛났다. 그리고 곧장 이 가게를 나섰다.진서준은 반지를 낀 채 사장이 준비해 놓은 물건은 받아서 들었다. 그러고는 골동품 거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별장에서 그는 자신의 영기를 반지 속에 주입했다. 그다음에는 10개 정도의 술법을 더 풀어야 했다. 그제야 이 반지는 완전히 그의 것이 된다.반지를 열어보자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서준은 원래 진귀한 약재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이 반지의 전 주인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잠깐의 실망 끝에 그는 자신의 물건을 반지 안에 넣었다. 천문검도 그 속에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끝낸 다음에야 그는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마그레라의 VIP 휴게실, 김성진은 낮은 자세로 한 사람 앞에 서 있었다. 만약 진서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번에 상대를 알아봤을 것이다.그 상대는 다름 아닌 진서준과 반지를 두고 다투던 노인이었다.“태산 어르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은태산의 안색이 나쁜 것을 보고 진서준이 조심스레 물었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 때문에 그러네.”은태산은 차갑게 대답했다.“무엇을 하는 젊은이입니까? 제가 금방 잡아 와서 어르신 앞에 데려다 놓겠습니다.”“됐어.”은태산을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흔적을 남겨 놓았으니 오늘 밤
부적을 그리고 난 진서준은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때가 되어서야 밥 먹으러 내려갔다.“서라야, 이거 네 주머니에 꼭 넣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꺼내면 안 돼.”진서준은 진서라에게 부적을 건네줬다.“응!”진서라는 조심스레 부적을 받아서 들더니 주머니 속에 넣었다.두 사람이 밥 먹으러 별장에 들어갔을 때 마침 유정과 고한영도 있었다.“오빠, 오늘은 유정 언니가 밥 해줬어. 빨리 먹어봐!”진서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손님한테 그런 걸 맡기면 어떡해.”진서준은 약간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에 유정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서라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제가 하겠다고 고집부린 거예요.”유정이 황급히 말했다. 조희선도 말을 보탰다.“서준아, 난 이미 정이를 내 딸이라고 생각했어. 남처럼 자꾸 선을 그으면 어떡하니.”이 말을 들은 진서준은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집에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에 유정이가 어머니 딸과 같은 존재가 됐다고?’유정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서준 씨, 혹시 화났어요?”“괜찮아! 내가 정이랑 친해지고 싶다는데, 쟤가 참견할 건 뭐니?”조희선이 말했다. 진서준은 당연히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참견이라니요, 어머니가 원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응원할게요. 저야 좋죠, 동생 한 명 더 생기고.”진서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유정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그러면 저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그럼요.”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식사가 시작된 다음 진서준은 유정의 요리 솜씨가 장난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진서라보다도 대단했다.“술 좀 마실래요?”밥을 먹다 말고 진서라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가 술을 찾는 이유는 용기 좀 내기 위해서이다. 식사가 끝나면 진서준과 함께 귀신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래, 그럼 조금만 마시자.”조희선이 대답했다. 이토록 화기애애한 장면은 또 오랜만이었기
조희선은 한참이나 침묵에 잠겼다. 그녀가 고민 끝에 한 말을 듣고 진서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서준아, 사실 네 아버지 아직 살아 있어...”“네?”진서준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네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내가 평범한 사람이지. 우리는 애초부터 함께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어.”조희선을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라. 네 아버지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아니에요, 어떤 사정이 있든 얼굴 한 번 보러 오지 않는 건 너무 했어요. 제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랑 서라가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잖아요.”진서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지를 말이다.“서준아, 너도 이제 다 컸구나. 네가 한 노력은 내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얘기도 꺼내는 거야. 하지만 절대 서라한테 얘기해서는 안 된다.”조희선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서라한테는 비밀로 할게요.”이건 진서준도 약간 감당하기 버거운 사실이었다. 그러니 진서라에게는 절대 알려줄 수 없었다.“네 실력은 아직 너무 약해. 네가 일정한 실력을 갖춘 다음 내가 네 아버지에 관한 비밀을 전부 얘기해주마.”조희선의 말을 듣고 진서준은 흠칫 놀랐다. 그는 이미 남주성이 명성을 날린 대가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에게 공손히 대하는데 실력이 약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조희선을 별장에 돌려보낸 다음 이승재와 주혁구의 차도 대문 앞에 도착했다.“이건 부적이에요. 주머니 안에 넣고 절대 꺼내지 말아요.”진서준은 두 사람에게도 부적을 나눠줬다.“감사합니다!”이승재는 기쁜 눈치였다. 그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부적인지 한 눈에 보아냈다. 이 부적만 있다면 아무리 살귀라고 해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서라야, 가자.”“오빠, 두 사람 어디 가요?”유정이 물었다.“귀신 잡으러 가요, 유정 씨도 같이 갈래요?”진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