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수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호수 위에 서 있었는데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것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았다.진서준이 차갑게 말했다.“당신과 난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그래. 그런데 내가 너 같은 천재를 죽이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유혁수는 눈알이 벌게진 채로 미친 듯이 웃었다.“진서준, 오늘 넌 반드시 죽어야 해!”미친놈.정신이 나간 듯한 유혁수를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미친놈 세 글자가 떠올랐다.아무런 원한도 없으면서 진서준을 죽이려 하는 이유는 그의 변태적인 취향 때문이었다.“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몰라.”진서준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유혁수를 바라보았다.그에게 있어 유혁수는 이미 죽은 자와 다름없었다.비록 진서준은 체내의 영기를 꽤 많이 소모했지만 만월호의 영기가 워낙 왕성한 탓에 이런 자연적인 영기를 이용하여 유혁수를 죽일 수 있었다.진서준이 천문검을 거두어들이자 유혁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투항하려는 건가? 투항한다고 해도 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진서준이 덤덤히 말했다.“당신을 죽이는 데 검까지 필요 없어.”진서준의 비아냥에 유혁수는 냉소했다. 그는 두 다리를 힘껏 굴렀고, 그 순간 폭탄이 터진 듯 발아래 호숫물이 사방으로 튀었다.기세등등한 유혁수를 본 진서준은 두 손을 서서히 들었다.다음 순간, 호수 전체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흰 안개가 진서준의 앞에 모였다.“농간을 부리는군!”유혁수가 차갑게 말했다.눈 깜짝할 사이, 유혁수가 진서준의 앞에 섰다.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두 주먹을 휘둘렀다.아무도 유혁수가 주먹을 몇 번 휘둘렀는지 보지 못했다. 강건한 기운들로 뭉친 매의 머리와 늑대의 머리가 진서준 앞의 흰 안개를 강타했다.공기가 찢어발겨지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장면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이건 환기권이야!”무인들은 유혁수의 환기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환기권은 유혁수가 20여 년간 열심히 연구하여 만든 권법인데,
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수면이 잠잠해졌을 때야 정신을 차렸다.누군가는 유혁수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끝난 거 아닐까요?”“대성 종사와 술법 천사가 번갈아 싸웠는데도 진서준 씨 상대가 되지 못했네요.”“진서준 씨 정말 대단하네요. 혼자서 둘을 상대했는데도 털끝조차 다치지 않았어요!”진서준의 신과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손승호의 눈동자에는 불만과 증오가 가득했다.“내 복수는 정말 가망이 없는 걸까?”대성 종사마저 진서준을 죽이지 못했으니 누가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감옥에서 3년을 보낸 폐인에게 이런 큰 변화가 있다니, 설마 감옥에서 대단한 사람이라도 만난 걸까?달갑지 않아 하는 손승호와 달리 공규석은 두려움이 더 컸다.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유혁수와 공규석이 함께 온 걸 모두 보았다.유혁수가 진서준을 공격한 건 분명 공규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도망가지 못하게 해!”하규천은 공규석이 도망가려고 하자 곧바로 자신이 데려온 무인들더러 공규석을 막게 했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두 무인에게 붙잡힌 공규석은 겁에 질려서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혈운의 종사를 데려와서 진서준을 기습하다니, 오늘 넌 끝장이야!”하규천은 차가운 눈길로 공규석을 바라보았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말이다.공규석이 낙담에 빠졌을 때 고요하던 호수에 갑자기 폭발이 일었다.“어떻게 된 거죠? 설마 유혁수 씨가 죽지 않은 걸까요?”“그럴 리가요. 조금 전 그가 떨어졌던 곳이 전부 빨간색으로 물들었는데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어요?”호수 위 진서준은 폭발한 곳을 바라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죽지 않은 건가?”유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가슴 쪽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음산한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이때 유혁수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혈운의 대성 종사이자 종사 킬러이며 환기권을 창조한 그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이 패배했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
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덤덤히 웃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처방전이 셀 수 없이 많았다.그중 일부는 아무런 부정적인 영향 없이 단기간에 실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유혁수가 먹은 단약은 진서준에게 있어 가장 낮은 수준의 약이었다.진서준이 유혁수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권해철은 조금 허무했다.“넌 죽었어!”폭원단을 먹은 유혁수는 상반신을 살짝 구부정하게 하고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맹수 같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사람을 불안케 했다.동시에 유혁수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늙어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빠지면서 백발이 되었다.그러나 그의 기세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강했다.예전의 유혁수는 그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와 대적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지금은 아마 일반적인 선천 대종사도 그를 제압하기 어려울 것이다.절망에 빠졌던 공규석은 그 광경을 보자 곧바로 폭소를 터뜨렸다.“유혁수 종사님은 죽지 않았어. 이거 놔. 진서준 저 자식이 죽으면 당신들이 다음 차례가 될 수도 있어.”하규천의 안색이 흐려졌다.호숫가에 있던 사람들은 호수 위 유혁수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똑똑히 느꼈다.진서준에게 여력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우선 놔줘.”하규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풀려난 공규석은 냉소했다.“진서준, 넌 오늘 틀림없이 죽을 거야!”짐승 같은 유혁수의 모습에도 진서준은 평온했다. 유혁수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후!”유혁수는 소리를 지르더니 수면을 밟으며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르게 움직였다.그가 지나간 곳에는 20미터 높이의 물기둥이 솟구쳤다.진서준은 유혁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딴 약으로 날 죽이려 하다니, 날 너무 얕본 거 아니야?”유혁수가 다가오자 진서준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다음 순간, 진서준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때 권해철에게 진서준은 신처럼 보였다.진서준의 손바닥이 파랗게 변했고 자주색의 번개 빛이
진서준이 그렇게 말하자 하규천은 부하에게 공규석을 끌고 가라고 했다.애원하는 공규석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승자만이 정의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만약 조금 전 유혁수가 습격에 성공했더라면 상황은 또 달랐을 것이다.“내가 걱정시켰네요.”진서준은 허사연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았다.“서준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허사연은 애틋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황보식은 허성태의 곁으로 걸어가더니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성태 씨, 성태 씨 딸 출세했네요.”허성태 또한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연이가 복이 많죠.”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진서준과 허사연을 칭찬했다.주위에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은 허사연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손을 거두어들일 생각이었지만 진서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얼른 놔요. 보는 사람도 많은데!”허사연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왜 쑥스러워해요? 사연 씨는 내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 손 좀 잡는 게 뭐 어때서요?”진서준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와 반대로 허사연은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진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공원 바깥쪽으로 향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손을 잡고 떠나자 다른 가문의 가주들은 허성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축하드립니다, 허성태 씨. 정말 훌륭한 사위를 얻으셨네요!”“휴, 제 딸이 조금 더 일찍 진서준 씨를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앞으로 허씨 집안은 틀림없이 승승장구할 겁니다. 어쩌면 서울 최고의 가문이 될지도 몰라요!”누군가는 허성태를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그를 질투했다.그러나 아무리 질투가 심해도 감히 허씨 일가 사업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저 최대한 허씨 일가와 협력하여 진서준 앞에서 좋은 얘기라도 몇 마디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러면 앞으로 그들의 가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이때 만월호는 아직도 기관에서 통제 중이라 누구도 함부로
“눈 똑바로 뜨고 봐요!”나지혜의 무례한 말투에 진서준과 허사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사람이 참 무례하군요.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죠? 제가 그쪽 부모님 대신 예의가 뭔지 가르쳐줄까요?”나지혜는 팔짱을 두른 채로 같잖다는 듯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날 가르치겠다고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요? 경고하는데 내 남자 친구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에요!”옆에 있던 황성윤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허사연을 훑어보았다.황성윤은 고등학교 때 가족들에 의해 해외로 보내졌고 귀국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올해 해외에서 졸업하고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아직 허사연을 알지 못했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려다.“당장 꺼져요.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봐주는 거예요.”“자기야, 저 사람 나한테 막 소리 질러. 심지어 나한테 꺼지라고 했어!”나지혜는 황성윤의 손을 잡더니 그의 팔에 자신의 가슴을 가져다 댔다.팔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정신을 차린 황성윤은 오만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이 자식, 지금 당장 내 여자 친구에게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아!”진서준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내 남자 친구가 전화 한 통 하면 경호원 몇십 명을 불러올 수 있거든요!”나지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지난번에 누군가 나지혜를 희롱했을 때, 황성윤은 전화 한 통으로 20여 명의 경호원을 불러왔다. 나지혜를 희롱한 그 남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지혜에게 사죄했다.진서준은 두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기에 허사연과 데이트할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놀이공원에 갔다가 저녁쯤 금영사에 가볼 생각이었다.허사연은 금영사에 아주 신통한 나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어요. 하나는 지금 당장 꺼지든가, 아니면 나한테 맞고 꺼지든가 해요.
황성윤은 난생처음 이렇게 비참하게 맞았다.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그를 이렇게 때린 적이 없었다.피투성이가 된 황성윤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면서 흉악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노려봤다.전화가 통하자 황성윤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5분 내로 만월호 입구로 와. 5분 내로 못 오면 다들 잘릴 줄 알아!”전화를 끊은 뒤 나지혜는 진서준에게 맞아 빨개진 얼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자기야, 저 자식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때려줘!”문가에 서 있던 공무원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서둘러 그들에게 경고했다.“원한이 있으면 다른 곳에 가서 해결해요. 여기서 싸우지 말고!”만약 이들이 만월호 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면, 그저 문지기인 그들은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내가 여기서 싸우겠다면 당신이 뭘 어쩔 수 있는데? 난 황정식 손자야!”황성윤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황씨 집안은 정계 쪽에도 인맥이 있었고 황정식은 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황정식 손자라는 말에 공무원의 미간이 좁혀졌다.“황정식 어르신은 지금 공원에 계십니다.”할아버지가 만월호 공원에 있다는 말에 황성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지금 당장 우리 할아버지를 불러줘!”공무원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고 그중 한 명이 빠르게 만월호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할아버지가 공원에 있다는 생각에 황성윤은 더욱더 자신만만해졌다.그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이 자식, 넌 오늘 죽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네가 날 때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넌 물고기 밥이 될 거야!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여자는...”황성윤은 허사연을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였다.“네가 죽으면 내가 대신 돌봐줄게.”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성윤의 발밑에서 갑자기 한기가 솟아올랐다.그의 앞에 서 있던 진서준이 갑자기 무섭게 변했다. 죽음의 기운이 황성윤을 감쌌고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목을 졸랐다.“죽으려고!”진서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는 황성윤이라는 청년에게 살의가 생겼
옆에 있던 황은비가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가볼게요. 성윤이는 귀국한 지 얼마 안돼서 아직 정신 못 차렸을 거예요.”“그래, 네가 가보거라.”황정식은 고개를 끄덕였다.입구로 가던 길에 황은비가 물었다.“제 사촌 동생이랑 시비가 붙은 사람은 누구죠?”“모르겠습니다. 막 공원에서 나온 것 같았어요.”‘공원에서 나왔다고?’황은비는 움찔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조금 전 만월호를 떠난 사람은 진서준과 허사연 두 사람뿐이었다.“여자 한 명이랑 남자 한 명인가요?”“네.”“망했네!”황은비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미친 듯이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그녀가 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경호원들이 진서준을 에워싸고 있었다.“멈춰!”분노에 찬 황은비는 사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그녀의 목소리에 경호원과 황성윤 모두 당황했다.사촌 누나인 황은비를 본 황성윤은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헐레벌떡 그녀에게 달려갔다.“누나, 이 자식이 내 뺨을 때렸어!”진서준과 허사연은 황은비를 보자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황은비는 몇 번 심호흡하며 마음속의 분노와 두려움을 내리눌렀다.나지혜도 황은비에게 달려가서 호소했다.“언니, 제 얼굴 좀 보세요. 저 빌어먹을 놈에게 뺨을 맞아서 얼굴이 부었어요!”나지혜가 진서준을 욕하자 황은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넌 뭐야?”“저... 전 성윤 씨 여자 친구예요.”나지혜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 저 사람이 네 뺨을 때렸다고?”“네, 네!”나지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황은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얼굴 좀 가까이 대봐.”나지혜는 고민 없이 황은비 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짝 소리와 함께 나지혜의 뺨 위로 붉은 손바닥 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원래도 빨갛게 부었던 얼굴이 더욱 심하게 부었다.황은비는 뺨 한 대에서 그치지 않고 넋이 나간 나지혜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짝짝짝...나지혜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돼서야 멈췄다.“누나... 왜
황성윤은 누나가 왜 진서준에게 존칭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비록 황성윤은 황은비와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황은비가 매우 도도한 여자라는 건 알았다.황성윤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도 황은비는 자신을 너무 낮추지 않았다.그러나 황성윤은 현재 분노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누나, 나이 먹더니 멍청해지기라도 한 거야? 기껏해야 누나 또래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깍듯이 대해?”황성윤은 노발대발했다.황성윤이 눈치 없이 고함을 지르자 황은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넌 죽었어.’진서준이 덤덤히 말했다.“할아버지라면 그를 다룰 수 있나요?”“네, 지금 할아버지께 연락드릴게요.”황은비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황정식에게 연락했다.황은비는 황정식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할아버지, 지금 바로 공원으로 오셔야겠어요.”“왜? 네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냐?”황정식이 물었다.황은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할아버지 손자가 진서준 씨의 심기를 건드렸어요.”황정식은 침묵했다. 무려 3분이 지난 뒤에야 황정식은 정신을 차렸다.“그 자식 죽고 싶어 환장했다니? 은비야, 걔 잘 감시하고 있어. 내가 지금 당장 가마.”말을 마친 뒤 황정식은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사람들을 데리고 공원 입구로 달려갔다.황은비는 험악한 표정의 황성윤을 바라보면서 평온하게 말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너 스스로 무덤을 판 거야.”“내가 내 무덤을 팠다고?”황성윤은 크게 웃었다.“누나, 누나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황씨 일가에서 황성윤은 황은비보다도 더 많이 사랑을 받았다. 황성윤이 황씨 일가의 장손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황성윤이 오만방자한 성격이 된 것이다.“할아버지께서 곧 오실 거야.”황은비는 차갑게 한 마디 던진 뒤 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할아버지가 오시면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왜 다른 사람의 편을 들면서 날 때렸는지 말이야!”황성윤은 팔짱을 끼면서 냉소했다.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