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진서준은 텅 빈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력하게 외쳤다.그는 구지범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곧 죽게 될 자에 대해 진서준이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다.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진요한에 관한 일이었다.구창욱이 과거에 아버지를 가르쳤던 만큼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그러나 구창욱은 진서준에게 진요한에 대해 알아갈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아까 소리 없이 왔던 것처럼 그는 지금 소리 없이 가버렸다.“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야.”진서준은 한숨을 내쉬고 산 아래로 걸어갔다.정상에서 내려와 보니 태성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당신이... 살아서 내려오다니!”태성민은 진서준의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떻게 이럴 수가.‘각주’는 지선 실력자가 아니었는가.그리고 방금 그 불 봉황도 각주가 거의 전력을 다했다는 증거였다.지선의 전력을 막아낼 수 있는 자라면 동급의 지선뿐이다.그렇다면 이 진 마스터도 지선이란 말인가?그런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국안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듯이 진 마스터는 겨우 스무 살 초반에 불과했다.세상에! 대박!대한민국에 드디어 용이 나왔구나!태성민은 진서준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믿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진서준은 그의 앞에 가서 차분하게 말했다.“위에 있는 자는 가짜야. 천기각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나거든.”“네?!”태성민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자가... 가짜라고요? 그럼 그자는요?”진서준 혼자만 내려온 모습을 보며 태성민은 이상함을 느꼈다.혹시 진 마스터가 그를 처치한 건가?지선이 이렇게 죽을 수가?대한민국 전역을 통틀어 지선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판다보다 더 귀할 정도로 말이다.진서준은 태성민의 경악한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안 죽었어. 도망간 거야.”도망을 가?지선을 도망가게 했다고?이건 지선을 죽이
게다가 휴대폰과 같이 편리한 연락 수단을 누가 거부하겠는가?“각주님, 앞으로 어떤 지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칼산과 불바다라 할지라도 저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을 겁니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앞으로 내가 부탁하는 건 정말 칼산과 불바다일 수도 있어.”“괜찮습니다! 제 목숨은 옛 각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옛 각주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태성민은 이 말을 듣고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각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값진 일일 테죠!”태성민의 의리에 진서준은 속으로 기뻤다.구창욱의 안목으로 선택한 천기각의 인재들이니 인품이 나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구지범 그 인간은 왜 그렇게 악랄한 건지 진서준은 알 수 없었다.부친을 살해하는 것은 어떤 시대에도 용서받지 못할 큰 죄였다.하물며 구지범은 자신 아버지의 혈통을 위해 그런 짓을 했다니 너무나 잔인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그럼 먼저 가보겠다. 나중에 일이 생기면 연락하지.”“각주님, 제가 모셔다드릴게요!”태성민은 진서준을 산 아래까지 배웅했다.“참, 각주님. 앞으로 서북에 가시면 저에게 바로 연락하세요! 제가 서북에서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으니 반드시 만족스럽게 모셔드릴 겁니다!”태성민이 서북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진서준은 궁금한 것이 생겼다.“그럼 서북의 유씨 가문을 알아?”유연비에 대해 진서준은 아는 게 너무 적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예전에는 그녀의 손에 꼼짝도 못 했다.“알죠. 서북에서 으뜸가는 세가입니다. 유씨 가문은 대대로 횡련을 수련해온 가문으로 그들 조상이 횡련 지선이라고 들었습니다.”태성민의 표정도 점차 심각해졌다.“유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 이를테면 젊은 세대 말이야.”진서준이 물었다.태성민은 멍해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릅니다. 저도 유씨 가문의 이전 세대와만 접촉해봐서요. 다만 젊은 후배인 유천효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유
“수정 씨, 여행하러 온 거예요?”배수정이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지난 만남 이후로 진서준과 배수정은 4개월 가까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그동안 진서준은 수련에 전념하느라 다른 일에는 시간을 쏟을 수 없었다.그 사이, 배수정은 진서준에게 카톡으로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진서준은 하나도 확인하지 못했고 당연히 답장도 없었다.진서준이 이런 태도를 보이자 배수정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진서준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되었다.날씨가 따뜻해지자 배수정은 산을 오르며 여행을 통해 잠시 진서준을 잊어보려 했다.하지만 진산 기슭에서 진서준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던 배수정이었지만 진서준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통제할 수 없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맞아요, 친구들이랑 진산에 놀러 왔어요.”배수정은 선글라스를 벗고 진서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배수정의 곁에는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 총 네 명의 청년이 함께 있었다.청년들의 분위기와 외모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하긴, 국내 최고 핫한 연예인 배수정의 친구들이 평범할 리는 없을 터였다.배수정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한 청년이 배수정이 진서준을 바라보는 시선을 감지하자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그 청년의 이름은 양지천이었다. 양지천은 배수정의 추종자일 뿐만 아니라 경성 양씨 가문의 직계 자손이었다.양지천은 배수정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며 추구해 왔지만 배수정이 이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양지천이 눈앞의 이 진서준이라는 남자가 배수정과 각별한 사이임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배수정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진서준은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여러 여자의 관심을 받아본 적 있는 진서준이었기에 배수정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진서준은 허사연과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친구들이랑 잘 놀아요, 난 이만 가볼게요.”진서
그런데 배수정의 결연하고 슬픈 표정을 보자 진서준의 마음도 괴로워졌다.“수정아, 좀 천천히 가, 같이 가자.”양지천 일행은 곧장 배수정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배수정은 점점 더 빨리 걸었고 한 손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양지천과 일행에게 들키지 않으려 했다.그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었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배수정의 신음에 떠나려던 진서준은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배수정이 바닥에 주저앉은 것을 본 진서준은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갔다.“수정아, 괜찮아? 혹시 너무 빨리 걸어서 발목을 삐었어?”양지천 일행도 서둘러 배수정의 곁으로 달려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배수정은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괜찮긴 뭐가 괜찮아? 눈물까지 흘리면서.”배수정이 흘리는 눈물이 발목 때문이라고 착각한 양지천은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랐다.“무슨 일이죠?”진서준도 이때 다가와 배수정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발목을 다친 거예요? 내가 좀 볼게요.”진서준이 다가오자 양지천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이봐요, 당신은 그냥 당신 갈 길이나 가세요. 수정은 우리가 돌보면 됩니다.”배수정도 냉담하게 한마디 보탰다.“그냥 발목을 삔 거예요. 서준 씨, 얼른 가보세요. 괜히 이런 사소한 걸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요.”진서준은 배수정이 자기에게 단단히 화난 걸 눈치채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어쨌든, 지난번 김연아 사건 때 배수정이 정보를 주며 도와준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그 은혜를 갚지 못한 채 이렇게 떠나자니 내키지 않았다.그래서 배수정이 아무리 자기를 원망하더라도 진서준은 배수정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괜찮아요. 아직 경성행 비행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어요.”진서준은 태연하게 양지천과 일행을 밀어내고 배수정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양지천은 진서준의 행동을 보고 몹시 불쾌해하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당연히 발목을 치료해 주려는 거
여자가 생각하는 가장 얄미운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바로 갖은 수단을 동원해 여자를 유혹해 은밀한 부위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마음과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야릇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갑자기 여자의 몸에서 일어나 이런 멘트를 던지는 남자였다.“아차,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각났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이어서 하자.”진서준이 바로 배수정에게 그런 남자였다.물론 진서준은 배수정의 진심을 갖고 논 것이지 신체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장면은 흔한 클리셰지만 여자의 마음을 얻기엔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었다.예전에 진서준이 절에서 배수정을 구해줬을 때, 진서준의 당당하고 든든한 모습은 배수정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만약 두 사람의 인연이 그 정도에서 끝났다면 배수정도 더 깊이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후에도 몇 차례 진서준과 마주치며 진서준은 매번 배수정에게 새로운 느낌을 안겨주었다.그래서 배수정은 진서준에게 점점 더 마음이 끌렸다.특히 진서준이 혼자서 진씨 가문과 서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섰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김연아를 구해낸 그날의 장면은 배수정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그 장면 이후, 배수정은 진서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더욱 확실해졌다.하지만 진서준이 운대산에 들어가 수련에 몰두한 이후, 진서준은 세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듯 연락이 뚝 끊겼다.배수정은 매일 진서준에게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배수정의 불처럼 뜨거웠던 마음은 조금씩 식어갔다.배수정이 진서준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반응 없는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수정은 진서준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로 결심했다.진서준이 자기에게 주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한, 자신도 더 이상 진서준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다음번에 또 우연히 만나더라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처럼 대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진서준이
“다음에 얘기하자.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배수정은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알았어, 그럼 넌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양지천은 나머지 세 사람을 한쪽으로 불러 모았다.“너희들은 방금 저 녀석의 정체와 배경을 알아봐.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저렇게 울린 대가를 반드시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양지천의 눈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스쳤다....진서준은 바로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전에 임배가 알려준 묘지를 들렀다.묘지에 도착한 진서준은 임배가 그려준 지도를 따라 묘지 안에서 그 보검을 찾을 수 있었다.7척 길이의 보검은 매미의 날개처럼 얇았다.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살짝 검의 윗부분을 튕겨 먼지를 털어내자 보검은 본래의 광채를 드러냈다.옅은 청색의 보검은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고 오직 검 손잡이 끝부분에 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참선...”짧은 두 글자였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패기가 깃들어 있었다.진서준은 참선검을 손에 쥐고 체내의 영기를 끌어모아 천천히 검 속으로 흘려보냈다.그러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옅은 청색이었던 참선검이 갑자기 청광을 내뿜으며 빛나기 시작했다.그 빛이 허공에 퍼지더니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화려한 화면이 나타났다.그 화면 속에는 한 남자가 참선검을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구름 위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서 있었고 그들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이 화면을 본 진서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설마 이 검의 주인이 옛날에 혼자서 수십 명의 신선들과 싸웠다는 건가?”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도무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진서준은 과거 스승님께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수사가 번개를 극복하고 승천에 성공하면 신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선이 된 이후로는 인간계로 내려오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하늘로 오르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했다.그 이유는 스승님도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참선검, 네 주인은 이제 없으니 앞으로는 내가 널 잘 돌봐줄게
그 귀싸대기 소리를 듣는 순간, 진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진서라는 바로 여기 살고 있었고 이 저택은 임씨 가문의 것이었다.진서준이 그동안 접해왔던 무례한 청년들을 생각해 볼 때, 임씨 가문의 후손들이 진서라를 괴롭힐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귀싸대기 소리를 듣자마자 진서준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하지만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진서준은 자기 추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맞은 사람은 진서라가 아니라 진서라 또래인 다른 여자였다.게다가 때린 사람은 손을 허공에 들어 올린 채 서 있는 진서라였다.동생이 맞지 않은 것을 확인한 진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항상 얌전하고 착하기만 했던 동생이 누군가의 따귀를 때리다니,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방 안에는 진서라와 맞은 여자 외에도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하지만 이 세 사람은 진서준의 등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다들 진서라를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이 망할 년이 감히 내 뺨을 때려? 오늘 넌 내 손에 죽어야겠어!”맞은 여자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진서라는 차가운 얼굴로 그 여자를 바라보며 쌀쌀하게 말했다.“먼저 욕한 건 너잖아.”“내가 욕하면 어쩔 건데? 넌 길바닥에서 주워 온 아이잖아. 말도 못 하게 할 거야?”여자가 거의 6cm 길이에 달하는 손톱을 쫙 펴며 진서라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손톱이 곧 얼굴에 닿는 순간, 허공에서 손이 나타나 그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넌 누구야? 이거 당장 안 놔?”진서준이 갑자기 자기 손목을 잡자 분노가 폭발한 여자는 진서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오빠.”진서준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진서라는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서라야, 오빠 왔어. 이제 넌 아무런 억울한 일도 당하지 않을 거야.”진서준은 진서라를 안심하게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주워 온 년 오빠야? 역시 한 가족이라 수준이 똑같네, 당장 날 놓지 못해?”여
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엄마도 오신다고?”진서라는 조희선이 온다는 소식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진서라의 인생에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존재는 바로 진서준과 조희선이었다.비록 임씨 가문의 사람들이 진서라와 혈연관계가 있긴 하지만 진서라는 그들에게 전혀 애정을 느끼지 않았다.“가서 짐 좀 챙겨. 우리 바로 떠나자.”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진서준이 진서라를 재촉했다.“알았어, 바로 가서 짐 챙길게.”진서라는 서둘러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진서라가 방으로 올라가자 진서준의 얼굴은 즉시 차갑게 굳어졌고 눈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진서준의 서늘한 시선이 닿자 임세희와 두 청년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움에 휩싸였다.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서라는 내 동생이야. 누구든 내 동생을 괴롭히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 안 나?”진서준의 목소리에는 얼음 같은 살기가 서려 있어 거실이 순식간에 엄동설한에 들어선 듯했다.임세희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저... 저희는 서라를 괴롭힌 게 아니라 그냥 장난친 거예요.”임세희는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키고 변명했다.“우린 그냥 장난쳤어요. 서라랑 우리는 혈연관계도 있는데 우리가 왜 괴롭힐 리가 없죠.”“맞아요, 맞습니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절대 괴롭힌 게 아니에요.”나머지 두 청년도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주워 온 아이라고 부르는 게 장난이냐?”진서준은 냉랭한 시선으로 세 사람을 보며 따졌다.“그건... 그게 아니라... 흑흑...”임세희는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저도 서라를 욕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서라가 오고 나서 큰할아버지든 작은할아버지든 다들 진서라만 신경 쓰잖아요. 우린 똑같은 손녀인데 왜 다들 진서라만 관심해 주고 이뻐해 주는 건가요?”임세희는 감정이 격해지자 울분을 토하며 자기가 진서라를 괴롭힌 진짜 이유를 토로했다.임세희는 진서
황예은이 옷을 다 갈아입자 서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찾으러 갔다.“서준아, 예은 언니가 좀 화난 것 같으니까 이따가 해명할 때 되도록 조심해.”서지은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알았어.”진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은 조심하라는 말을 다시 되새겼다.만약 상대가 너무 무례하게 굴면 진서준도 결코 양보하며 자세를 낮추지 않을 예정이었다.문제는 자기가 일부러 실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들어간 게 아니었다.게다가 진서준은 황예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진서준 씨, 아까 지은한테서 들었는데, 진서준 씨가 저를 구했다고 하던데요.”황예은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 눈빛과 태도는 마치 왕좌에 앉은 여왕처럼 고압적이었다.이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지키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황경영이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황예은은 회사 업무의 일부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회사의 지도자, 그것도 여성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그러니 황예은의 성격도 강인하고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황예은이 이사장으로 올라간 후, 회사 내에서 황예은의 이름만 들어도 직원들이 벌벌 떨곤 했다.“맞아요. 제가 구했습니다.”진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황예은 맞은편에 앉았다.그런데 앉고 나서야 진서준은 후회했다.황예은이 입은 옷은 목선이 매우 낮았다.비록 황예은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앉아 있었지만 풍만한 가슴이 살짝 드러나 있었고 그 모습이 진서준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당혹한 모습을 감추려고 진서준은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하지만 이 자세는 상대방에게 매우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황예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이런 태도로 임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진서준이 소파에 기대 누운 모습을 보자 황예은의 마음속에서 잠잠했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진서준 씨는 다른 사람
별장에서 황예은은 이미 깨어난 상태였다.다만 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상반신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이 속옷은 서지은이 가져온 속옷이었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이었다.그리고 하반신에는 아까 진서준이 마사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두 여자는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황예은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황예은의 차가운 눈빛만으로도 지금 심정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황예은은 자기 알몸을 보고 있는 이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황예은은 사실 이번이 진서준에게 두 번째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이란 걸 몰랐다.“서준아,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어...”서지은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서지은은 진서준이 약왕 이용진과 저녁 식사를 오래 하고 밤늦게나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서준이 너무 일찍 돌아온 것이다.“언제까지 더 볼 생각이야?”황예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진서준은 정신을 차리고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게.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날 불러.”진서준이 나간 뒤, 황예은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진서준이에요. 제 남자친구거든요.”서지은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한마디 보탰다.“예은 언니, 사실 언니 목숨도 진서준이 구한 거예요.”그 말을 듣자 황예은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냉기가 다소 누그러졌다.어쨌든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너무 차가운 태도로 대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황예은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내 옷은 네가 벗긴 거야?”서지은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서준이 언니를 치료할 때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 먼저 언니를 여기 데려온 거예요. 나도 여기 들어와 치료 과정을 볼 때 서준이 언니를 추행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도 진서준은 박씨 가문의 의도가 오리무중이었다.하지만 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진서준의 우선순위는 약재를 구하고 모든 정력을 간첩을 잡는 데 쏟아부어야 했다.호텔을 떠난 진서준은 이용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30여 분을 달린 끝에 진서준 일행은 마침내 이용진의 장원에 도착했다.이용진의 장원 면적은 서씨 가문 것만큼 크지 않았지만 화려함만큼은 서씨 가문을 능가할 기세였다.각종 명인의 고화와 진귀한 보물들이 온 사방에 진열되어 있었다.이 모든 보물은 하나하나가 최소 10억 이상의 진품이었고 적어도 진서준이 자세히 살펴본 결과 위조품은 하나도 없었다.이 보물들만 해도 자산 가치가 조 단위를 뛰어넘을 될 터였다.“용존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이용진이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난 이런 것들에는 관심 없습니다.”진서준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군요...”이용진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돈을 통해 진서준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만들고자 했던 이용진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진서준과 친분이 두터워지면 나중에 치료를 부탁하기도 훨씬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서준은 이용진의 속셈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약왕님 체내 내상이 다 나으면 매주 두 번씩 무도를 연마하고 한 달에 다른 사람과 한 번 실력을 겨루는 수준으로 수련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왕님 무도 실력도 늘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알겠습니다. 앞으로 꼭 용존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이용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수많은 별장을 지나 진서준은 이용진을 따라 규모가 어마어마한 냉장실로 들어갔다.냉장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각 기둥 위에는 희귀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방탄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진서준이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에 진열된 약재는 성약당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희귀성만큼은 성약당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 사람은 바로 어제 서울시에서 체포되었던 박운기였다.진서준 역시 이렇게 빨리 박운기를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운기야, 저 사람 알아?”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박운기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바로 저놈이 사람들을 이끌고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박운기가 이를 갈며 말했다.만약 진서준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박운기의 계획은 이미 성공했을 것이다.그랬다면 박씨 가문으로 돌아갈 때는 차가운 시선 대신 온갖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이번에 서울시에서의 임무를 맡기 위해 박운기는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경쟁했다.모두가 보기에 이 임무는 그야말로 공을 세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렇게 쉬운 임무를 박운기가 망쳐버렸다.망친 것도 모자라 박씨 가문은 관계를 동원해 박운기를 구출해야만 했다.공을 세워야 할 장사가 완전히 손해만 본 장사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씨 가문의 계획을 망친 장본인이 진서준이라는 사실을 알자 중년 남자는 진서준을 쓱 훑어보고는 냉랭하게 비웃었다.“전설 속의 용존님, 역시 이름값 제대로 하시는군요.”진서준은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진서준이 자기를 무시하자 중년 남자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약왕님은 언제부터 용존님과 친구가 되셨습니까?”중년 남자는 이용진을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박재명, 분명히 말해두지. 용존님 일은 바로 내 일이야. 감히 용존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한다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이용진이 싸늘하게 대응했다.박재명은 박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그는 단지 박서명의 넷째 동생일 뿐이었다.그래서 이용진은 굳이 박재명을 깍듯하게 모시며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이용진의 말에 박재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약왕님, 굳이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박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이용진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