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유남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향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순간 박민정은 의문이 더 깊어져 갔다.“그게 아니라면 뭔데요?”“난 너랑 같이 출퇴근하고 싶은 거지 걔랑 하고 싶은 게 아니야.”유남준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다시 덧붙였다.“그리고 향수는... 네가 뿌린 거라고 한다면 참을 수 있어.”불과 3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박민정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흠 하나 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 향수 뿌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두 사람은 30분 동안 이런저런 말을 가끔가다 주고받았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호산 그룹 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이윽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려왔다.오늘 유남준은 마이바흐를 몰고 나왔다.비록 어제 한정판인 롤스로이스만큼 비싼 차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마이바흐였다.사람들은 마이바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다음번에는 좀 저렴한 차를 몰고 왔으면 좋겠어...’회사 안으로 걸어가는 내내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이 느껴졌다.“너 저 사람 본 적 있어? 회사에 새로 온 고위직 아니야?”“고위직은 좀 그렇고... 바이어 아닐까?”“바이어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반칙이잖아. 내 직감으로는 어느 고위직의 아내거나 첩 같은 그런 ‘분’일 것 같아.”화장을 하지 않은 박민정이지만 오른쪽 얼굴에 흉터만 빼고 본다면 여전히 눈 부시는 존재였다.“예쁘긴... 오른쪽 얼굴 못 봤어? 흉터가 어마어마해.”“그러고 보니 흉터가 있었네.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어.”아래층으로 자료를 가지러 온 여직원들이 속닥속닥했다.보청기를 낀 박민정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잠시 보청기를 빼버렸다.듣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굳이 그러한 말에 자기 기분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고 정신력이 강한 박민정이다.여직원 중 한 명은 호산 그룹 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의 비서다.비서는 바로
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순간 비서와 함께 이곳에 나타난 최현아를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지금 두 눈에 불쾌함이 가득하다.청아도 여직원들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고 말았다.회사에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악질’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말도 통하지 않고 몹시나 이기적이면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극혐 그 자체가 바로 최현아이다.현재 최현아의 비서는 남자이다.전까지만 해도 모두 여자 비서였는데, 갖은 꼬투리를 잡아서 일일이 쫓아내 버렸다.“최 대표님,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저희는 대표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논하고 있었습니다.”청아는 대표이사실의 비서로서 반응이 꽤 빨랐다.“유남준 대표님 아내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대표이사실로 와서 비서로 일하고 있으니 참 여러모로 입에 올릴 만한 말들이 많아서 저희끼리 잠깐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청아 역시 고위직의 호불호에 대해서 미리 알아본 바가 있다.그렇지 않고서야 유남우의 비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그 말인즉슨, 최현아가 박민정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실은 특별히 알아보지 않아도 추측만으로도 알 수 있다.다 같은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고 호산 그룹의 상속자로서 앞으로 분명히 경쟁하는 사이로 뒤틀어질 테니 말이다.최현아는 본래 수군거리고 있는 직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었다.하지만 청아의 말을 듣고 난 뒤 화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우리 동서 귀가 좀 멀잖아. 비서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네.”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로 대답했다.최현아는 그제야 만족하다는 듯이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최현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청아 일행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때 어느 한 여직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 저승사자가 웬일이래요? 오늘 죽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순히 넘어가네요?”“청아 언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추경은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내가 언제 병가 달라고 했어? 내가 언제 출근하기 힘들다고 했어? 왜 저래!’“새언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 출근할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추경은과 눈을 마주쳤다.“경은 씨, 출근 시간만큼은 ‘새언니’가 아니라 ‘박 비서님’이라고 부르시죠. 공과 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지금 경은 씨가 이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이 뭔지 알고 있죠? 제가 하고 있는 업무를 보조해 주고 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따뜻한 물 한 잔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그마저 제대로 보조하지 못한다면 다른 중요한 업무를 제가 무슨 수로 맡기겠어요?”박민정은 이치를 따져가면서 아주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사무실에 있는 다른 비서들마저도 그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처음에는 박민정이 마냥 까탈스럽고 멀게 느껴졌지만, 인정미도 넘치는 것 같았다.추경은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여론’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추경은은 이내 달갑지 않아 하면서 말했다.“물 가져다드렸잖아요.”“제가 부탁한 건 따뜻한 물 한 잔이에요. 근데 경은 씨가 가지고 온 건 뭐죠?”박민정이 물었다.“조금만 식으면 따뜻한 물이 되잖아요. 물 많이 마셔도 몸에 좋지 않아요.”추경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박에 나섰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추경은의 말과 행동 그리고 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또 혹은 이미 해고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박민정은 덤덤한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다른 비서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했다.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을 이탈하기 시작했다.추경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새언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잠깐 일이 있어서 좀 나갔다 오려고요.”박민정이 대답했다.“무슨 일인데요? 저도 같이 갈게요.”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감독하러 가는 속셈이었다.“대표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 가는 건데, 그래도 같이 갈래
일개 비서 주제에 자기 이름을 부르니 추경은은 몹시나 불쾌했다.오피스룩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홍주영은 오늘따라 유난히 엄숙해 보였다.“그쪽 말고 추경은이라고 하는 사람 여기 또 있나요?”추경은은 단번에 안색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마지못해 일어서서 홍주영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무슨 일인데요?”처음에는 홍주영에게 잘 보이려고 했으나 다른 직원과 달리 홍주영에게는 아부 따위가 먹히지 않았다.따라서 추경은은 더 이상 홍주영에게 시간을 팔지 않기로 했다.“앞으로 비서 부문의 행정 관리 작업을 추경은 씨께서 도맡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표이사실 모든 비서의 보조로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디 팀 전체에 폐를 끼치지 말고 제때 임무를 완성했으면 하는 바입니다.”홍주영은 추경은에게 당부를 하고서 기타 4명의 비서에게 말했다.“앞으로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하면 추경은 씨에게 맡기면 됩니다. 퀵을 부르고 퀵을 찾고 배달 음식을 찾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도 마음 편히 시키면 됩니다.”그 말을 듣게 된 비서들은 하나같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저희한테도 보조가 있다는 거예요?”지금 가장 당황한 사람은 추경은이다.“그게 무슨 말씀이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새언니를 챙겨주려고 온 것이지 저 사람들을 챙겨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요!”발끈하는 추경은의 말에 홍주영은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달마다 임금을 꼬박꼬박 받으시면 응당 회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만약 받아들이기 힘드시다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추경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박민정 앞으로 걸어갔다.“새언니, 뭐라고 좀 해 봐요.”“저 사람들까지 제가 다 보조하면 새언니를 챙겨줄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럴 시간도 그럴 정력도 없다고요!”그러자 박민정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지가 멀쩡한데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돼요.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말 문이 턱 막힌 추경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따라서 추경은은 보다 더 바쁜 오후 근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마침내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박민정은 자기 업무에 정신을 몰두할 수 있었다.회사에서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대표이사실에 오게 되었다.청아라고 하는 비서가 바로 일어서서 손님을 맞이했다.“최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희 대표님과 약속이 있으신가요?”꼬리를 흔들고 있는 청아를 최현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오히려 주위를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이윽고 최현아의 시선은 박민정의 사무실에 멈추게 되었고 바로 다가갔다.노크도 하지 않은 채 최현아는 바로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박민정은 최현아가 오고 있는 줄도 몰랐었다.인기척이 나고 고개를 들어보니 최현아는 이미 코 앞까지 와 있었다.“숙모도 참 매정하시지... 어떻게 큰 며느리를 고작 비서 자리에 앉혀 놓을 수가 있어?”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도 박민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형님, 무슨 일로 오신 거죠?”유치원 사건으로 박민정에 대한 증오가 한 층 더 깊어진 최현아이다.유치원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체면을 목숨으로 생각하고 있는 최현아에게는 중요한 자리였다.유치원에서 아들의 지위도 연관되어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일 뒤로 유치원에서 유지훈과 함께 노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이러한 국면을 초래한 사람이 바로 박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최혀아이다.“별건 아니고 그냥 여기서 뭐 하나 보러 왔어.”최현아는 말하면서 양손으로 박민정의 사무실 책상을 짚고서 손이 가는 대로 서류 하나를 펼쳤다.얼마 보지도 않고 최현아는 바로 그 서류를 휴지통에 버렸다.“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최현아는 개의치 않아 하면서 말했다.자기한테 시비를 걸려고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덤덤하게 대처했다.“별일 없으시면 그만 일 보겠습니다.”하지만 최현
홍주영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곧바로 유남우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 노크하고 들어갔다.인기척을 듣고서 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보았다.“형수 왔다 갔다면서? 너 괜찮아? 난처하게 하지 않았어?”사인을 받아오라는 최현아의 지시를 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우에게 알려주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최현아가 좋은 일로 왔을 리가 없다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유남우이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계약서 여기 두고 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돼.”박민정은 문뜩 오늘 자기를 바라보면서 한참이나 수군거렸던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만약 유남우의 말대로 이번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면 앞으로 직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엔 힘들지도 모른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꼭 사인받아 올 겁니다!”박민정에게 완성하기 힘든 임무를 맡긴 최현아의 본심을 그녀가 모를까 봐 유남우는 거듭 일깨워주었다.“천 대표 보통 사람 아니야. 사인은커녕 어쩜 도려 호되게 당하고 올지도 몰라.”“조금 전에 알아보기는 했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천 대표님 사인 꼭 받아 오겠습니다.”기어이 직접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면서 유남우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가고 나서 유남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홍주영에게 말했다.“주영아, 민정 뒤에 사람 좀 붙여. 절대 그 어떠한 사고가 나서도 안 돼.”“네.”홍주영은 바로 경호원 한 명을 박민정 뒤에 붙였다.준비를 마친 박민정은 회사에서 나왔고 그때 추경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새... 박 비서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일하러 가는 데 같이 갈래요?”박민정이 물었다.“아니요.”혼자서 여러 명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추경은은 이미 지친 대로 지쳤다.그뿐만 아니라 박민정에게 호되게 당하는 중이라 따라나섰다가 또다시 봉변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더 이상 추경은을 신경 쓰지 않고 회사 건물을 나서서 택시에 올랐다.천인
프런트 직원을 통해 답장을 듣게 된 박민정은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만약 천수빈과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계약서를 체결할 자신이 있으나 지금은 만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이래서 날 보낸 거였어?’이때 프런트 직원이 다가와서 박민정을 타일렀다.“그만 돌아가세요. 우리 대표님께서 어느 한 회사의 일반 직원을 따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호산 그룹에서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인데, 왜 그쪽을 보내신 거죠?”“예외가 있다고 근거 없이 보내신 게 아닌가 싶어요.”프런트 직원은 돈을 받고 입을 싹 닫을 수 없어서 박민정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지난번에 호산 그룹의 최현아 대표님께서도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우리 대표님 뵙지 못하시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하지만 우리 대표님과 일단 만나게 되면 대표님께서 최현아 대표님을 아주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히고 그러셨어요. 보고 들은 제가 다 수치스러울 정도라니까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싶었다.‘너도 이런 대우 당했었구나...’“알려줘서 고마워요.”“그냥 그쪽 꽤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알려주는 것뿐이에요. 그만하고 얼른 돌아가요.”“그럴 수 없어요. 계약서에 사인도 못 받고 이대로 돌아가면 저 무조건 해고될 거예요.”박민정은 무척이나 불쌍한 척을 했다.프런트 직원은 그런 박민정이 순간 안쓰러워서 함께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그럼, 어떡하죠? 고위직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그 말에 박민정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고맙다고 인사를 하고서 바로 천수빈의 인맥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이름 석 자가 시야로 들어왔다.손연서.박예찬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성훈의 ‘큰엄마’가 바로 손연서이다.‘큰엄마’라고 하는 건 성훈은 손연서의 남편이 다른 여자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그때 간접적으로 진주시에서 그 제삼자를 쫓아내 버렸었다.그 일로 박민정은 손연서와 친구가 되면서 서로
프런트 직원은 괜한 걱정을 했고 박민정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에서.천수빈은 박민정이 찾아온 목적을 알고서 두말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박민정에게 손연서와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서 이것저것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일을 마치고 박민정은 떠나기 전에 선물로 가지고 온 마노 팔찌를 천수빈에게 건네주었다.“민정 씨, 이런 거 주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며 언제든지 말만 해요. 연서 친구라고 하면 저한테도 친구예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수빈은 팔찌를 받았다.두 사람이 하도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서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었다.천인 그룹에서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6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호산 그룹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다.같은 시각.호산 그룹에서.박민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추경은한테서 들은 최현아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계약서에 사인받지 못했나 보죠. 돌아오기 민망해서 어디 처박혀 있는 게 아닐까요?”천수빈에게 호되게 당한 최현아는 박민정 역시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럼요. 그깟 곡이나 좀 쓸 줄 알지 지가 얼마나 잘 났다고.”추경은도 덩달아서 폄하하기 시작했다.“올케언니, 혹시 올케언니 쪽에 있는 직원들 이쪽으로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서 여기 비서들 수발들고 있어요.”최현아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결국 유남우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힘들더라도 일단은 이곳에 남아있는 걸 우선으로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박민정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그냥 심부름하는 게 좀 힘들고 짜증 나서 그러는 거예요.”최현아는 어깨를 토닥이면서 계속 희망을 안겨주었다.“남준 도련님과 함께 할 그날만 바라보면서 지내요. 그때가 되면 백배 천배로 갚아줄 수 있잖아요.”“네.”추경은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