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유남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향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순간 박민정은 의문이 더 깊어져 갔다.“그게 아니라면 뭔데요?”“난 너랑 같이 출퇴근하고 싶은 거지 걔랑 하고 싶은 게 아니야.”유남준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다시 덧붙였다.“그리고 향수는... 네가 뿌린 거라고 한다면 참을 수 있어.”불과 3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박민정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흠 하나 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 향수 뿌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두 사람은 30분 동안 이런저런 말을 가끔가다 주고받았다.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호산 그룹 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이윽고 박민정이 차에서 내려왔다.오늘 유남준은 마이바흐를 몰고 나왔다.비록 어제 한정판인 롤스로이스만큼 비싼 차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마이바흐였다.사람들은 마이바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다음번에는 좀 저렴한 차를 몰고 왔으면 좋겠어...’회사 안으로 걸어가는 내내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이 느껴졌다.“너 저 사람 본 적 있어? 회사에 새로 온 고위직 아니야?”“고위직은 좀 그렇고... 바이어 아닐까?”“바이어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반칙이잖아. 내 직감으로는 어느 고위직의 아내거나 첩 같은 그런 ‘분’일 것 같아.”화장을 하지 않은 박민정이지만 오른쪽 얼굴에 흉터만 빼고 본다면 여전히 눈 부시는 존재였다.“예쁘긴... 오른쪽 얼굴 못 봤어? 흉터가 어마어마해.”“그러고 보니 흉터가 있었네.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어.”아래층으로 자료를 가지러 온 여직원들이 속닥속닥했다.보청기를 낀 박민정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 잠시 보청기를 빼버렸다.듣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굳이 그러한 말에 자기 기분까지 망칠 필요는 없다고 정신력이 강한 박민정이다.여직원 중 한 명은 호산 그룹 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의 비서다.비서는 바로
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순간 비서와 함께 이곳에 나타난 최현아를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지금 두 눈에 불쾌함이 가득하다.청아도 여직원들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고 말았다.회사에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악질’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말도 통하지 않고 몹시나 이기적이면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극혐 그 자체가 바로 최현아이다.현재 최현아의 비서는 남자이다.전까지만 해도 모두 여자 비서였는데, 갖은 꼬투리를 잡아서 일일이 쫓아내 버렸다.“최 대표님,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저희는 대표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논하고 있었습니다.”청아는 대표이사실의 비서로서 반응이 꽤 빨랐다.“유남준 대표님 아내분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대표이사실로 와서 비서로 일하고 있으니 참 여러모로 입에 올릴 만한 말들이 많아서 저희끼리 잠깐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청아 역시 고위직의 호불호에 대해서 미리 알아본 바가 있다.그렇지 않고서야 유남우의 비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그 말인즉슨, 최현아가 박민정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실은 특별히 알아보지 않아도 추측만으로도 알 수 있다.다 같은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고 호산 그룹의 상속자로서 앞으로 분명히 경쟁하는 사이로 뒤틀어질 테니 말이다.최현아는 본래 수군거리고 있는 직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었다.하지만 청아의 말을 듣고 난 뒤 화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우리 동서 귀가 좀 멀잖아. 비서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네.”청아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로 대답했다.최현아는 그제야 만족하다는 듯이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최현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청아 일행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때 어느 한 여직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 저승사자가 웬일이래요? 오늘 죽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순히 넘어가네요?”“청아 언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추경은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내가 언제 병가 달라고 했어? 내가 언제 출근하기 힘들다고 했어? 왜 저래!’“새언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 출근할 수 있어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추경은과 눈을 마주쳤다.“경은 씨, 출근 시간만큼은 ‘새언니’가 아니라 ‘박 비서님’이라고 부르시죠. 공과 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지금 경은 씨가 이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이 뭔지 알고 있죠? 제가 하고 있는 업무를 보조해 주고 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따뜻한 물 한 잔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그마저 제대로 보조하지 못한다면 다른 중요한 업무를 제가 무슨 수로 맡기겠어요?”박민정은 이치를 따져가면서 아주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사무실에 있는 다른 비서들마저도 그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처음에는 박민정이 마냥 까탈스럽고 멀게 느껴졌지만, 인정미도 넘치는 것 같았다.추경은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여론’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추경은은 이내 달갑지 않아 하면서 말했다.“물 가져다드렸잖아요.”“제가 부탁한 건 따뜻한 물 한 잔이에요. 근데 경은 씨가 가지고 온 건 뭐죠?”박민정이 물었다.“조금만 식으면 따뜻한 물이 되잖아요. 물 많이 마셔도 몸에 좋지 않아요.”추경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박에 나섰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추경은의 말과 행동 그리고 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또 혹은 이미 해고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박민정은 덤덤한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다른 비서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했다.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을 이탈하기 시작했다.추경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새언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잠깐 일이 있어서 좀 나갔다 오려고요.”박민정이 대답했다.“무슨 일인데요? 저도 같이 갈게요.”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감독하러 가는 속셈이었다.“대표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 가는 건데, 그래도 같이 갈래
일개 비서 주제에 자기 이름을 부르니 추경은은 몹시나 불쾌했다.오피스룩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홍주영은 오늘따라 유난히 엄숙해 보였다.“그쪽 말고 추경은이라고 하는 사람 여기 또 있나요?”추경은은 단번에 안색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마지못해 일어서서 홍주영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무슨 일인데요?”처음에는 홍주영에게 잘 보이려고 했으나 다른 직원과 달리 홍주영에게는 아부 따위가 먹히지 않았다.따라서 추경은은 더 이상 홍주영에게 시간을 팔지 않기로 했다.“앞으로 비서 부문의 행정 관리 작업을 추경은 씨께서 도맡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표이사실 모든 비서의 보조로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디 팀 전체에 폐를 끼치지 말고 제때 임무를 완성했으면 하는 바입니다.”홍주영은 추경은에게 당부를 하고서 기타 4명의 비서에게 말했다.“앞으로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하면 추경은 씨에게 맡기면 됩니다. 퀵을 부르고 퀵을 찾고 배달 음식을 찾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도 마음 편히 시키면 됩니다.”그 말을 듣게 된 비서들은 하나같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저희한테도 보조가 있다는 거예요?”지금 가장 당황한 사람은 추경은이다.“그게 무슨 말씀이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새언니를 챙겨주려고 온 것이지 저 사람들을 챙겨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요!”발끈하는 추경은의 말에 홍주영은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달마다 임금을 꼬박꼬박 받으시면 응당 회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만약 받아들이기 힘드시다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추경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박민정 앞으로 걸어갔다.“새언니, 뭐라고 좀 해 봐요.”“저 사람들까지 제가 다 보조하면 새언니를 챙겨줄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럴 시간도 그럴 정력도 없다고요!”그러자 박민정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지가 멀쩡한데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돼요.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말 문이 턱 막힌 추경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따라서 추경은은 보다 더 바쁜 오후 근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마침내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박민정은 자기 업무에 정신을 몰두할 수 있었다.회사에서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대표이사실에 오게 되었다.청아라고 하는 비서가 바로 일어서서 손님을 맞이했다.“최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희 대표님과 약속이 있으신가요?”꼬리를 흔들고 있는 청아를 최현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오히려 주위를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이윽고 최현아의 시선은 박민정의 사무실에 멈추게 되었고 바로 다가갔다.노크도 하지 않은 채 최현아는 바로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박민정은 최현아가 오고 있는 줄도 몰랐었다.인기척이 나고 고개를 들어보니 최현아는 이미 코 앞까지 와 있었다.“숙모도 참 매정하시지... 어떻게 큰 며느리를 고작 비서 자리에 앉혀 놓을 수가 있어?”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도 박민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형님, 무슨 일로 오신 거죠?”유치원 사건으로 박민정에 대한 증오가 한 층 더 깊어진 최현아이다.유치원 학부모 위원회 회장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체면을 목숨으로 생각하고 있는 최현아에게는 중요한 자리였다.유치원에서 아들의 지위도 연관되어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일 뒤로 유치원에서 유지훈과 함께 노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이러한 국면을 초래한 사람이 바로 박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최혀아이다.“별건 아니고 그냥 여기서 뭐 하나 보러 왔어.”최현아는 말하면서 양손으로 박민정의 사무실 책상을 짚고서 손이 가는 대로 서류 하나를 펼쳤다.얼마 보지도 않고 최현아는 바로 그 서류를 휴지통에 버렸다.“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최현아는 개의치 않아 하면서 말했다.자기한테 시비를 걸려고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덤덤하게 대처했다.“별일 없으시면 그만 일 보겠습니다.”하지만 최현
홍주영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곧바로 유남우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 노크하고 들어갔다.인기척을 듣고서 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보았다.“형수 왔다 갔다면서? 너 괜찮아? 난처하게 하지 않았어?”사인을 받아오라는 최현아의 지시를 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우에게 알려주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최현아가 좋은 일로 왔을 리가 없다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유남우이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계약서 여기 두고 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돼.”박민정은 문뜩 오늘 자기를 바라보면서 한참이나 수군거렸던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만약 유남우의 말대로 이번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면 앞으로 직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엔 힘들지도 모른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꼭 사인받아 올 겁니다!”박민정에게 완성하기 힘든 임무를 맡긴 최현아의 본심을 그녀가 모를까 봐 유남우는 거듭 일깨워주었다.“천 대표 보통 사람 아니야. 사인은커녕 어쩜 도려 호되게 당하고 올지도 몰라.”“조금 전에 알아보기는 했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천 대표님 사인 꼭 받아 오겠습니다.”기어이 직접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면서 유남우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가고 나서 유남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홍주영에게 말했다.“주영아, 민정 뒤에 사람 좀 붙여. 절대 그 어떠한 사고가 나서도 안 돼.”“네.”홍주영은 바로 경호원 한 명을 박민정 뒤에 붙였다.준비를 마친 박민정은 회사에서 나왔고 그때 추경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새... 박 비서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일하러 가는 데 같이 갈래요?”박민정이 물었다.“아니요.”혼자서 여러 명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추경은은 이미 지친 대로 지쳤다.그뿐만 아니라 박민정에게 호되게 당하는 중이라 따라나섰다가 또다시 봉변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더 이상 추경은을 신경 쓰지 않고 회사 건물을 나서서 택시에 올랐다.천인
프런트 직원을 통해 답장을 듣게 된 박민정은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만약 천수빈과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계약서를 체결할 자신이 있으나 지금은 만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이래서 날 보낸 거였어?’이때 프런트 직원이 다가와서 박민정을 타일렀다.“그만 돌아가세요. 우리 대표님께서 어느 한 회사의 일반 직원을 따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호산 그룹에서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인데, 왜 그쪽을 보내신 거죠?”“예외가 있다고 근거 없이 보내신 게 아닌가 싶어요.”프런트 직원은 돈을 받고 입을 싹 닫을 수 없어서 박민정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지난번에 호산 그룹의 최현아 대표님께서도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우리 대표님 뵙지 못하시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하지만 우리 대표님과 일단 만나게 되면 대표님께서 최현아 대표님을 아주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히고 그러셨어요. 보고 들은 제가 다 수치스러울 정도라니까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싶었다.‘너도 이런 대우 당했었구나...’“알려줘서 고마워요.”“그냥 그쪽 꽤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알려주는 것뿐이에요. 그만하고 얼른 돌아가요.”“그럴 수 없어요. 계약서에 사인도 못 받고 이대로 돌아가면 저 무조건 해고될 거예요.”박민정은 무척이나 불쌍한 척을 했다.프런트 직원은 그런 박민정이 순간 안쓰러워서 함께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그럼, 어떡하죠? 고위직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그 말에 박민정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고맙다고 인사를 하고서 바로 천수빈의 인맥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이름 석 자가 시야로 들어왔다.손연서.박예찬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성훈의 ‘큰엄마’가 바로 손연서이다.‘큰엄마’라고 하는 건 성훈은 손연서의 남편이 다른 여자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그때 간접적으로 진주시에서 그 제삼자를 쫓아내 버렸었다.그 일로 박민정은 손연서와 친구가 되면서 서로
프런트 직원은 괜한 걱정을 했고 박민정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에서.천수빈은 박민정이 찾아온 목적을 알고서 두말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박민정에게 손연서와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서 이것저것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일을 마치고 박민정은 떠나기 전에 선물로 가지고 온 마노 팔찌를 천수빈에게 건네주었다.“민정 씨, 이런 거 주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며 언제든지 말만 해요. 연서 친구라고 하면 저한테도 친구예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수빈은 팔찌를 받았다.두 사람이 하도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서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었다.천인 그룹에서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6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호산 그룹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다.같은 시각.호산 그룹에서.박민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추경은한테서 들은 최현아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계약서에 사인받지 못했나 보죠. 돌아오기 민망해서 어디 처박혀 있는 게 아닐까요?”천수빈에게 호되게 당한 최현아는 박민정 역시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럼요. 그깟 곡이나 좀 쓸 줄 알지 지가 얼마나 잘 났다고.”추경은도 덩달아서 폄하하기 시작했다.“올케언니, 혹시 올케언니 쪽에 있는 직원들 이쪽으로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서 여기 비서들 수발들고 있어요.”최현아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결국 유남우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힘들더라도 일단은 이곳에 남아있는 걸 우선으로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박민정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그냥 심부름하는 게 좀 힘들고 짜증 나서 그러는 거예요.”최현아는 어깨를 토닥이면서 계속 희망을 안겨주었다.“남준 도련님과 함께 할 그날만 바라보면서 지내요. 그때가 되면 백배 천배로 갚아줄 수 있잖아요.”“네.”추경은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