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직원은 괜한 걱정을 했고 박민정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에서.천수빈은 박민정이 찾아온 목적을 알고서 두말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박민정에게 손연서와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서 이것저것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일을 마치고 박민정은 떠나기 전에 선물로 가지고 온 마노 팔찌를 천수빈에게 건네주었다.“민정 씨, 이런 거 주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며 언제든지 말만 해요. 연서 친구라고 하면 저한테도 친구예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수빈은 팔찌를 받았다.두 사람이 하도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서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었다.천인 그룹에서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6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호산 그룹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다.같은 시각.호산 그룹에서.박민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추경은한테서 들은 최현아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계약서에 사인받지 못했나 보죠. 돌아오기 민망해서 어디 처박혀 있는 게 아닐까요?”천수빈에게 호되게 당한 최현아는 박민정 역시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럼요. 그깟 곡이나 좀 쓸 줄 알지 지가 얼마나 잘 났다고.”추경은도 덩달아서 폄하하기 시작했다.“올케언니, 혹시 올케언니 쪽에 있는 직원들 이쪽으로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서 여기 비서들 수발들고 있어요.”최현아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결국 유남우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힘들더라도 일단은 이곳에 남아있는 걸 우선으로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박민정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그냥 심부름하는 게 좀 힘들고 짜증 나서 그러는 거예요.”최현아는 어깨를 토닥이면서 계속 희망을 안겨주었다.“남준 도련님과 함께 할 그날만 바라보면서 지내요. 그때가 되면 백배 천배로 갚아줄 수 있잖아요.”“네.”추경은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을 보자마자 추경은이 가장 먼저 다가와서 물었다.“새언니... 박 비서님, 계약서는 어떻게 됐어요?”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직원이 남아 있었다.박민정은 단번에 그 사람들의 속셈을 읽어냈다.계약서 체결 상황이 아니라 호되게 당하고 올 자기의 몰골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두의 기대에 어긋난 말을 내뱉고 말았다.“계약서 체결했습니다.”단 한마디에 모두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천인 그룹 천수빈 대표님의 사인을 받아온 박민정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일개 직원 따위와 얘기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천수빈이라는 것을 호산 그룹 모든 직원이 알고 있다.유남우와 천수빈이 만날 때마다 비서들은 마지못해 따라갔었고 갈 때마다 형언할 수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하고 했었다.“말도 안 돼요.”청아라고 하는 비서가 앞으로 다가가 박민정 손에 있는 계약서를 가져와서 확인했다.계약서 위에는 천인 그룹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천수빈의 친필 사인도 있었다.완벽한 계약서라는 말이다.다른 직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왔다.추경은은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최현아의 말대로라면 천수빈은 성격이 괴벽하고 직원 따위와 말도 섞지 않는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박민정이 건넨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점점 흐려지자, 추경은은 또다시 다른 꿍꿍이를 하기 시작했다.직원들이 일일이 확인하고 난 뒤, 박민정은 계약서를 도로 거두었다.“최 대표님은 퇴근하셨나요? 계약서 드려야 하는데 말이죠.”그때 어느 한 비서가 대답했다.“아직 회사에 계십니다.”“알려줘서 고마워요.”박민정은 계약서를 챙겨서 최현아의 사무실 방향을 묻고서 곧장 걸어갔다.최현아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무실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박민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한바탕 깔아뭉갤 생각이었다.흥얼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호산 그룹 전체가 지금 박민정이 체결해 온 계약서로 떠들썩거리고 있다.유남우 역시 박민정을 사무실로 불러와서 어떻게 해냈는지 물었다.직장 상사의 질문에 박민정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마침 천 대표님 친구분을 제가 알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분을 통해서 천 대표님을 알게 된 거예요.”“그랬구나.”의문도 풀렸고 박민정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유남우는 슬슬 퇴근 준비를 하려고 했다.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말했다.“이제 그만 퇴근하자. 집까지 바래다줄게.”“괜찮아요.”박민정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 버렸다.“너 오늘 혼자 출근한 거 아니었어? 운전기사도 없었잖아.”박민정에게 미행을 붙인 유남우는 당연히 그러한 줄 알았다.천인 그룹으로 갔을 때도 택시를 타고 갔으니 말이다.이때 박민정은 살짝 수줍어하면서 대답했다.“남준 씨가 앞으로 퇴근할 때마다 마중 온다고 했거든요.”순간 유남우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하지만 그 또한 찰나였고 바로 애써 덤덤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일찍 퇴근해. 형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녀가 떠나고 나서 유남우 역시 퇴근하려고 일어났는데, 윤소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남우 씨, 퇴근했어요? 저 지금 회사 앞이에요.”유남우는 멀어져 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유리창 넘어 지켜보면서 대답했다.“퇴근했어. 금방 갈게.”“네. 천천히 오세요.”얼굴에 행복이 가득 적혀 있는 윤소현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회사 문 앞에 롤스로이스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지금 롤스로이스 안에는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는 유남준과 서다희가 있다.“오늘 왜 이렇게 늦는 거야?”유남준의 질문에 서다희가 바로 대답했다.“사모님께서 오늘 천인 그룹으로 직접 가셔서 계약서를 체결하셨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퇴근 시간이 좀 미뤄진 것 같습니다.”물론 서다희도 경호원에게서 듣게 된 정보였다.납치 사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다고?윤소현의 말 한마디에 퇴근하고 있던 호산 그룹 직원들이 삼삼오오 ‘사건 현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롤스로이스 앞에서 젊은 여자가 흐느끼면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윤소현까지 합세하자 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윤소현 씨, 제대로 알고 말하시는 건 어때요?”“제 남편이 저를 데리러 왔는데, 기어이 타겠다고 이렇게 우기고 있는 거잖아요. 택시 타고 가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기어이 이 차에 타겠다고 고집부리고 있잖아요. 그래도 제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것 같아요?”박민정은 덤덤한 목소리로 단번에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주위에 구경꾼도 있고 추경은이 막무가내로 우기고 있는 틈을 타서 박민정을 바닥으로 깔아뭉갤 생각이었다.“그렇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저렇게 눈물까지 뚝뚝 떨구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좀 태워준다고 해서 어디 덧나기라도 나는 거예요?”오늘 유난히 피곤했던 박민정이다.그뿐만 아니라 임신한 뒤로 호르몬 변화로 졸음도 자주 밀려오곤 한다.지금 박민정은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면서 이를 악물고 있다.“뭐라고 했어요?”“좀 태워준다고 해서 어디 덧나냐고요!”윤소현은 일부러 더 자극하려고 소리까지 높였다.“그래요? 그럼, 가시는 길에 좀 바래다 주지 그래요?”박민정은 속으로 ‘옳거니’ 하면서 바로 받은 대로 돌려주었다.순간 말 문이 탁 막힌 윤소현이다.“형님 댁으로 온 손님이잖아요. 그러니 형님 쪽에서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래요? 그럼, 우리가 알아서 우리 식대로 챙길 테니 신경 좀 꺼줄래요?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가는 길에 좀 바래다주던가요.”자기 할 말을 마친 박민정은 두 사람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차 문을 막고 있던 추경은을 옆으로 밀쳐버리고 바로 차에 올랐다.“윤소현 씨께서 경은 씨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윤소현 씨한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해보세요.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박민정은 웃
한수민을 본 순간 박민정은 얼이 빠져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다.“한 여사님, 누가 당신더러 여기에 오라 한 거죠?” 박민정의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한수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난...”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추경은이 입을 열었다. “새언니, 아주머니는 새언니의 친엄마 아닌가요? 왜 최 여사님이라고 불러요? 너무 버릇없는 것 아닌가요?”추경은은 박민정과 한수민 사이에 불쾌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고 고의로 물었다. 한수민은 그 말을 듣고는 이내 추경은한테 말했다. “그런 말 말아요. 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내버려두어요.”그녀는 애당초 박민정의 친엄마가 아니다. 박민정은 주먹을 다잡고 추경은의 말을 무시한 채 한수민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거든 우리 나가서 말해요.” “그래.”한수민은 일어나서 박민정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추경은은 그 모습을 보고 그 둘의 뒤를 조용히 뒤따라갔다. 밖으로 나온 뒤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 아래서 박민정이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돈을 원해요? 아니면 다른 거?”지금 한수민의 친딸과 아들 심지어 남편마저 그녀를 외면하고 있으니 또 뭔 일을 꾸미려 온 것이 분명하였다. 한수민은 목구멍이 막혀오는 듯하였다. “돈 때문이 아니야. 그저 너와 너의 아이를 보러 온 것뿐이야.”이 말에 박민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또 감성팔이 하시려고요? 잊지 마세요. 우리 둘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란 걸.”한수민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다 늦었음을 알았다. 오늘 그녀는 두원별장의 부근에 왔다. 원래는 그저 멀리서 박민정의 모습 한번 보고 가려 했는데 마침 추경은과 마주쳤다. 추경은은 그녀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도 알아.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진짜야, 진짜.”한수민은 중얼거렸다. “나 지금 갈게.”구부정한 허리와 함께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 떠나갔다. 박민정은 왜소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남준아, 나 이제 확신할 수 있어. 그 유리 파편이 원인이야.” 김인우가 앉으면서 말했다. “이제 수술 시간을 정해야 하는데, 이 수술은 큰 위험이 생길 수도 있어.” 유남준이 듣고는 물었다. “어떤 위험?” “그 유리 파편의 위치가 좀 특수해. 주변에 많은 뇌신경이 있어서 수술이 잘못되면 지적 장애자가 될 수도 있어.” 김인우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이것이 그가 유남준의 상처를 봉합하기 전에 이물질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제거하지 못했던 이유다. 뇌 수술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조금의 실수에도 환자가 평생 고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지?” “50%도 안 돼.” 김인우는 한숨을 쉬었다. 김인우의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국내의 외과 의사들도 수술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유남준은 즉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지적 장애자는 간단히 말하면 바보이다.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자아의식이 있어서 돈을 벌고 박민정과 아이가 부족한 것 없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바보가 된다면 그 후의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좀 더 생각해 볼게.” 유남준이 대답했다. “빨리 결정해야 해. 유리 파편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술 성공 확률이 낮아져.” 김인우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알았어.” 유남준은 잠시 멈추고 다시 말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응.” 김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남준은 그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 서다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남준이 나온 것을 보고는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대표님, 상처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유남준은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응, 완전히 다 나았어.” “다행입니다.” 서다희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제 회사로 돌아갈까요?” “응.” 병원을 나서면서 서다희는 유남준과 몇 마디를 나눴다. 유남준이 차에 타면서부터 회사에 도착하기까지
박민정은 말을 마친 후 약간의 고민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다면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하면서 그녀는 유남준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갑자기 정서가 하락하였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남준 씨와 나는 분명 다를 거예요. 남준 씨가 지금 보지는 못해도 많은 정상인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남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응, 계속 일하도록 해.”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박민정은 그가 헛된 걱정을 하지 않도록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요,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착하지.”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유남준은 여전히 휴대전화를 꽉 쥐고 있었다. 박민정이 장난스럽게 말한 ‘착하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착하지?' 유남준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다른 쪽에서는 박민정이 휴대전화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남준이 시각을 잃은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번처럼 유남준의 입으로부터 완곡한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박민정은 오늘 일찍 퇴근하여 유남준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가 볼 수 있든 아니든 자신과 두 아이는 그를 절대 멀리하지 않을 거다. 결정을 내린 후 박민정은 오늘의 임무를 신속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최현아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회의를 진행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위층에게 말했다. “어제의 계약은 박민정 비서의 공헌이 큽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우리와 천인 그룹의 합작이 이토록 순조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감탄하는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최현아가 말을 꺼냈다. “박민정 비서,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러는데, IM 그룹 본사를 한 번 방문해 줄 수 있을까요?” IM 그룹...이 몇 글자가 나오자, 모든 사람의 얼굴색이 어두워졌고 유남우의 눈 밑에도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한때 유엔 케이 그룹은 진주시에서 적수가 없었지만, IM
최현아는 박민정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디스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무슨 뜻이죠? 내가 당신을 IM 그룹에 보내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나요? 난 당신 보고 상대 회사에 가서 두 회사 간의 협력 의향을 말하라는 거예요.”최현아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주변의 다른 고위층들은 그녀의 신경질적인 상태에 익숙해져 있어 아무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신입 비서의 처지에 동정을 표했다. 이때 유남우가 입을 열었다. “최 대표, 박민정 씨는 제 개인 비서로 경쟁 회사와의 조정을 담당하지 않습니다. 인원이 필요하다면 홍보부나 영업부에서 찾아보세요. 그쪽이 더 적합할 겁니다.”회사의 사장이 말을 하자 최현아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참고 또 참다 한마디 뱉었다. “방금 박민정 비서와 농담한 것뿐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녀가 대표님의 비서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죠.”그러곤 박민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서에게 영업과 홍보 업무를 맡기는 것은 확실히 무리이긴 하죠.”그 뜻인즉슨 박민정이 영업부와 홍보부 직원에 비해 부족하다는 거다. 박민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유남준을 만나러 가야 했기에 최현아한테 낭비할 시간 따윈 없었다. 회의는 이렇게 끝났다. 회의실을 나서면서 최현아는 박민정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남우 도련님이 도와준다고 해서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것 같은데. 알려줄게, 능력이 없으면 호산 그룹에서 오래 못 버텨.”말을 마친 후, 최현아는 박민정의 옆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민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제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이 영원히 대표 비서로만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현아는 현재 영업부를 담당하는 부장 중 한 명으로서 그녀보다 직위와 권한이 높다는 것을 안다. 같은 유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자신이 최현아보다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