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석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박민정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 유남준한테 빼앗긴 그의 자산을 되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지금 유앤케이의 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유남준이 아니니 그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서다희는 연지석이 이 정도로 겁 없이 날뛸 줄 몰랐다.기억을 잃은 유남준에게 연지석이 방금 한 말을 전달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유남준이현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랐다....유남준은 시각 장애인 용 컴퓨터를 사용하며 박민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인데, 저녁 8시가 되어가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때 곁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유남준은 다급히 메시지를 확인하며 음성을 재생했다.“유 대표님, 전 연지석인데요. 미리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민정이가 오늘 저랑 줄곧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좀 늦게 돌아갈 거예요.”다 듣고 난 유남준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더는 일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 집을 나섰다.밖에는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외로이 눈속에 서 있었다.그는 맹인용 휴대전화를 꺼내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었다.전화번호는 그녀가 알지 못한 새에 남몰래 저장해둔 것이다.다른 한 편.박민정은 운전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윤우랑 늦게까지 놀아주느라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못하였다.흩날리는 눈보라에 시선이 가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또 길이 미끄러워 아주 천천히 운전하는 중이었다.전화벨이 울렸다.그녀는 누군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디야?”유남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박민정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그저 묻는 말에 대답했다.“돌아가는 길이요.”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차가 갑자기 미끄러졌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차 머리가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펑!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차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에어백이 터져나왔다.박민정은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듯한 차디찬 손이 유남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유남준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는 느낌 때문이었다.박민정의 다른 한 손은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갈 곳을 찾아 헤매다 그의 뺨에 실수로 닿게 되었는데 유남준의 얼굴은 지금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남준 씨 지금 열 나요.”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 축 처진 채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 추운 날에 얼굴이 불덩이 같으니 당연히 열이 났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붉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목울대는 아래위로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어젯밤 한 얘기는 늘 유효해.”박민정은 그의 입술이 벌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네네.”유남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은정숙이 나와서 둘을 보더니 얼른 수건을 갖다주며 물었다.“왜 인제야 돌아온 거야?”유남준은 그 수건을 건네받아 박민정의 몸에 있는 눈을 털어줬다.몸이 얼어붙어 목각처럼 굳었지만 박민정은 은정숙을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아줌마,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제가 오늘 좀 늦게 돌아왔는데 오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났어요.”그녀는 귀가 안 들린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그래. 이따가 뜨끈한 물에 목욕 좀 하려무나.”은정숙은 쉬러 가지 않고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들어가 박민정한테 줄 생강차를 만들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방으로 데려와 소파에 앉히고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가져다 놓았다.“내가 욕조에 물 준비해 놓을게. 너 옷부터 벗고 이따 목욕 다 하고 나서 이걸로 갈아입어.”박민정은 그의 입 모양을 보고 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겠다는 줄 알았다.“네, 당신도 어서 갈아입으러 가요.”유남준은 약간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그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가운을 가지고 박민정의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박민정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가 제 방에서 씻고 있는 줄도 몰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분위기가 다소 굳어져 있었다.그러는 와중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안 들린다고 말을 안 했어?”박민정은 고개를 숙이고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집에 돌아오면 나을 줄 알았어요.”유남준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박민정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갈 길을 잃은 손이 허공에 뻗어있었다.“민정아, 너 오늘 누구랑 같이 있었어?”박민정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또 날 미행했어요?”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 가장 자주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유남준은 목이 메었다. 또라니?그가 언제 또 미행을 했었다고?무어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방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의사는 환자가 과도하게 흥분하여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니 앞으로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고 병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서다희도 방 안에서 나오며 박민정을 쳐다봤다.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로 인해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그러나 유남준이 있는 자리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그럼 저흰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어.”서다희는 의사를 데리고 떠나갔다. 이제 진짜로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오늘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아줌마한테 의사를 찾아 준 것도.”박민정이 운을 뗐다. 어쨌든 미행과 이번 건은 서로 다른 일이니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린 부부야. 고마워할 거 없어.”유남준이 말하며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그리고 나, 사람 붙여서 너 미행한 적 없어.”박민정은 믿지 않았다.“다음 달이면 설날인데, 내가 내일 데려다줄 테니 남준 씨는 두원 별장으로 가 있어요.”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저 그리 하라는 거였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꽉 붙잡았다.“그럼 넌?”“난 집에서 아줌마를 돌봐야 돼요.”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민정아, 네가 나랑 결혼한 이유가 날 사랑해서였어?”그의 기억에 그
살길을 열어준다고?박민정의 입가에 냉소가 흘러나왔다. 이런 말이 친어머니란 사람이 할 소리가 맞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그 돈은 내 능력으로 번 거니까 갖고 싶으면 어디 능력껏 해보세요. 그딴 말로 나를 겁 줄 생각이나 하지 마시고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장명철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보아하니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진주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서 은정숙의 방으로 갔다.은정숙은 깨어있었고 어젯밤의 일이 오해였다는 걸 알리자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유남준이 진짜 변한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아줌마는 푹 쉬어요, 다른 걱정 하지 마시고요.”“응, 그래.”은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박민정은 은정숙에게 친구한테 일이 좀 생겨서 돌봐 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그래, 어서 가봐.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그러나 은정숙과 유남준만 집에 남겨 두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내가 간병인 아주머니 한 분 모셔 올게요.”싫다고 하면 박민정이 시름을 놓지 못할 걸 알고 은정숙은 고개를 주억거렸다.“그래, 알았다.”박민정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주방 내 식탁에는 이미 아침이 놓여있었고 그 밑에 쪽지가 한 장 깔려있었다.쪽지에는 유남준의 멋진 손 글씨가 쓰여 있었다.“나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하지만 사실 유남준은 병원에 간 게 아니라 서다희의 차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간 것이었다.두원 별장 내에 일부 기밀문서들이 있다고 서다희가 얘기했다....다른 한편, 공관에는 한수민과 이지원이 거실에 앉아있었다.현재의 한수민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망한 재벌 집의 사모님이 아니었다.5년 전, 그녀는 아들 박민호를 데리고 해외로 도주한 후 무슨 수를 부렸는지 현지에 있는 한 교포 재벌과 결혼하게 되어, 지금은 진주시 부유층 사모님들이 친분을 쌓으려고 애를 쓰는 인물이
밤새 큰 눈이 내려 두원 별장 안팎에는 눈을 쓸고 있는 사용인들로 가득했다. 유남준이 앉은 차는 별장밖에 세워져 있었다. 한참 뒤, 서다희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그는 유남우였다.서다희는 즉시 그 사실을 유남준한테 알리며 물었다.“지금 들어갈까요?”별장밖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유남준이 이때 들어가면 유남우의 신분은 단번에 들통날 것이다.며칠 전부터 유남우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잠시 유씨 가문 옛 저택에 머물렀었는데 이렇게 금방 두원 별장으로 들어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남준의 신분을 대체하고 회사를 차지하더니 이젠 별장까지. 다음엔 가족과 와이프까지 뺏을 셈인가.“급할 거 없어.”유남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서다희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그는 차를 우선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유남준의 곁에 오래 있었지만 그도 동생이 있단 얘기를 듣기만 했지, 직접 두 눈으로 실물을 보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유남우는 정말로 유남준과 똑같이 생겼다. 옷차림마저 똑같다면 아마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필경 유남준의 친동생이고, 그가 회사를 맡는 것이 그 무능한 사촌 형 유성혁이 맡는 것보다 열 배는 나았다.기다리고 있는 동안, 승합차 한 대가 앞을 지나갔다.그 안에 앉은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걸 서다희는 보지 못했다....두원 별장 안에서 유남우는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박민정이 쓰던 방에 들어와서 침대맡에 덮어 놓은 사진 액자를 발견했다. 가늘고 긴 손으로 그 액자를 돌려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이건 박민정과 유남준이 같이 찍은 사진인데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박민정이 정장 차림의 유남준의 곁에서 조심스러운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이 사진은 두 사람이 약혼식을 올릴 때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둘은 웨딩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박민정은 줄곧 이 사진을 웨딩사진처럼 고이 간직해왔다.그러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 이 사진을 여기에 남겨둔 것이다.유남우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이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두 손은 꼭 그러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박민정이 임수호와 같이 라이브 영상을 발표하여 그녀의 명예를 완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그런데 도리어 박민정한테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내키지 않았지만 유남준의 가차 없는 수단을 생각하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가서 사과할게요.”이지원은 두원 별장에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얼이 빠져서 떠나갔다.그녀가 떠나자 홍주영은 의문을 내비쳤다.“도련님, 왜 저 여자한테 사과를 강요하셨어요? 큰 도련님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으신거 아닌가요? 왜 그의 아내를 감싸는 거죠?”말을 끝내자마자 홍주영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항상 온화한 얼굴만 보이던 유남우가 그녀를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주영아, 네가 모르는 게 있어.”홍주영은 유남우와 박민정의 과거에 대해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더 캐물으면 안 될 거 같은 육감이 들었다.“그럼 제가 사람을 붙여 이지원이 박민정 씨한테 사과하는 걸 감시하도록 할게요.”“응.”두 사람은 두원 별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그들이 떠나자 유남준과 서다희는 비밀통로를 거쳐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이 만들라고 한 이 비밀통로가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기억을 잃었지만 두원 별장에 들어오고 나서 마치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기밀문서를 숨겨둔 장소를 대번에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금세 문서를 찾게 되었다.돌아가는 길에 그는 그것을 서다희한테 넘겨주었다.서다희는 깜짝 놀라하며 말했다.“이건 대표님이 직접 열어보시는 게 좋겠어요.”“난 네가 날 배신 안 할 거라 믿어.”“네.”서다희는 그제야 서류를 열어보았다.몇 페이지 대충 봤을 뿐인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로 갖고 있는 유남준의 개인 자산은 겉에 드러난 것보다 비교할 수 없게 많았고
집으로 돌아온 유남준은 사방을 찾아다녀도 박민정이 없자 약간 화가 났다.자신은 외출할 때마다 쪽지를 남기는데, 그녀는 어딜 가든지 자신한테 말하는 법이 없었다.박민정이 고용한 은정숙을 돌봐줄 간병인이 한창 주방에서 음식을 하다가 때때로 밖을 내다보며 답답하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남준을 힐끔거렸다. 그가 자꾸 박민정의 이름을 부르자 간병인은 참지 못하고 그한테 말했다.“박민정 씨는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나한테 노인을 돌봐달라고 부탁했거든요.”낯선 소리가 들리자 유남준이 물었다.“누구세요?”“아, 저... 난 박민정 씨가 노인을 돌봐달라고 해서 온 간병인이에요.”간병인은 주방에서 걸어 나오며 유남준이 맹인인 걸 발견하고 대뜸 한마디 덧붙였다.“저기, 두 사람 돌보는 건 돈을 더 지불해야 하는 거 알죠? 나랑은 노인만 돌보면 된다고 했는데, 눈먼 소경이 하나 더 있다고 얘길 안 했어요.”그놈의 눈먼 소경.유남준은 안색이 확 가라앉았다.“난 돌봐줄 사람 필요 없어요.”“소경을 돌보지 않으면 어떡해요? 아, 몰라, 몰라. 돈 추가해야 돼요. 알았죠?”유남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당장 나가요, 여기서!”그가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간병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난 박민정 씨가 불러서 온 거라고요. 박민정 씨가가라고 해야 갈 거예요. 그리고 날 자르면 노인은 누가 돌봐요?!”그 후 10분 뒤, 근처에 잠복해 있던 경호원 몇 명이 들어와서 간병인을 메고 밖으로 내보냈다.소란스러운 기척에 놀란 은정숙이 일어나 방문을 나서니 바깥에서부터 간병인이 욕을 퍼붓고 있는 것이 들렸다.“돈을 더 안 주면 말라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몰아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야. 당신들 고소할 거라고! 흑흑흑...”어려서부터 유남준의 앞에서 감히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이런 막무가내의 시골 아줌마는 처음 상대하는지라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밖으로 나와 경호원한테 명령했
문어귀에 선 유남준은 밖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귀뿌리가 빨개져 있었다.“너희들한테 물어보잖아.”그는 경호원들한테 얘기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이윽고 이웃 아줌마들이 그들한테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난리법석들이었다.은정숙이 살고 있는 이 신림현은 도시와 매우 떨어진 곳이다. 여기 사람들은 그저 박민정이 은정숙의 사장님 딸이고 사고가 나서 죽었다고 들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죽은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은정숙네와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은 5년 전에 유남준이 사람을 잔뜩 몰고 여기로 와서 이웃 몇 명을 데려가 조사한다고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다들 은정숙네가 무슨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줄 알고 그들이 다시 여기 돌아온 후부터는 접촉을 삼갔다.예전에 유남준이 이웃들을 데려가 박민정과 은정숙의 행방을 물을 때 무서워 고개도 감히 들지 못하는 바람에 지금 유남준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은정숙과 박민정의 눈먼 남편을 보고, 모두 희한하게 잘생긴 얼굴이 신기하여 자꾸만 힐끔거렸다.처음에는 박민정의 남편이 눈이 멀었다고 들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유남준의 모습을 보더니 하나둘씩 박민정이 남편을 잘 만났다고 감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 눈이 먼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나가서 바람은 피우지 않겠으니.한바탕 소동 후, 유남준과 은정숙은 집안에 들어왔다.방금 은정숙이 저를 사위라고 불렀던 것이 기억나 유남준은 아직도 귓불이 빨갰다.은정숙은 큰 기업 대표라는 사람이 시골 여편네한테 괴롭힘을 당할 줄 몰랐다. 그녀가 더더욱 몰랐던 것은 자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 간병인 여자한테 남은 인생이란 없을 거란 것이었다.“제가 이미 사람을 보내 새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어요.”유남준이 말했다.“그래요.”방금 화를 낸 탓에 은정숙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아픈 몸을 겨우 버텨가며 그녀는 유남준한테 말했다.“내가 방금 유 대표님을 도와줬다 해서 용서한 줄로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