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5년 전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박민정과의 결혼식 날에 그녀 혼자 남겨두었던 것과, 박형식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의 집안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것만 생각하며 매정하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도 관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더 많은 걸 상기해 내려 했지만 머리가 더 지끈하게 아파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그는 은정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아주머니, 그건 제가 약속드릴 수 없어요.”은정숙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 약속드릴게요. 예전에 제가 잘못한 것들, 앞으로 다 고칠게요. 민정이한테 잘 하고 다신 상처 안 준다고 약속드릴 수 있어요.”하지만 은정숙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어찌 됐거나 지금 유 대표가 이러는 건 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눈이 멀쩡했으면 민정이한테 잘 해준다 어쩐다 그런 소리를 절대 안 했을 거예요.”유남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은정숙한테 그가 변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믿을 것 같았다.은정숙은 속이 뒤집혀 더는 유남준과 말하려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별장에서 돌아온 후 여태 밥도 먹지 못했다. 박민정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그는 간병인이 그녀가 요새 안 돌아올 거라 했던 말을 떠올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한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진주로 돌아와 장명철부터 찾아가 그를 보석하여 출소시킨 후 조하랑네 집으로 갔다.한창 식사 중인데 유남준한테서 연락이 와 그녀는 대충 둘러대며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너 지금 어디야?”유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한테 말해주고 싶지 않은 박민정은 삐딱하게 대답했다.“내가 어디 있든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이 며칠 동안 당신 자신이나 잘 챙겨요. 아줌마는 내가 간병인 구해서 돌보라고 했으니까. 나 이제 며칠 있다가 돌아갈 거예요.”유남준은 한쪽으로 그녀와 통화하며 한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그녀의 위치를
“그게 뭔데?”조하랑이 궁금해하며 묻자 박민정이 대답했다.“아버지의 유언장.”박형식은 죽기 전 회사가 변변치 못한 아들의 손에 넘어가 전부 말아먹게 될까 봐 따로 유언장을 하나 더 작성했다.그 유언장은 주로 두 가지 내용인데, 하나는 박민정에게 200억을 물려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민정이 아무 때든 바움 그룹을 포함한 그의 유산 전부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져갈지에 대한 여부는 박민정이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박민정은 이 유언장을 계속 손에 쥐고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다. 이걸 꺼내면 한수민이 갖고 있던 유언장은 무효가 된다. 이 유언장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대학에서 갓 졸업한 그녀가 회사 경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엄마와 동생 손에서 재산을 뺏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때 이 유언장을 꺼내놓더라도 아무런 배경도 실력도 없는 그녀였기에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 호락호락하고 마음이 여린 여자애가 아니다. 한수민이 만약 끝까지 몰아붙인다면 그녀도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 의지가 있다.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나서 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된 거구나. 그렇지만 이제 바움 그룹은 없는데...”“내가 굳이 따진다면?”박민정이 묻자 곁에 있던 예찬이가 입을 열었다.“그럼 반드시 돌려줘야지. 돌려줄 수 없다 해도 책임을 져야 하고.”박민정은 예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난 굳이 돌려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겁을 주고 싶은 거지. 너무 설쳐대지 말라고.”조하랑은 예찬이가 자기보다 반응이 더 빠를 줄 몰랐다.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예찬이의 볼을 꼬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예찬이가 요리조리 도망가며 밥상 앞에서 한창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조하랑이 의문에 찬 눈길로 현관을 향해 보며 말했다.“배달 안 시켰는데, 누구지? 잠시만. 내가 가 볼게.”그녀는 슬리퍼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지원은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내다 버리고, 조하랑도 같이 보는 앞에서 박민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민정 씨, 미안해요.”박민정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조하랑은 이지원이 무릎을 꿇자 그녀가 또 무슨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저러는 게 아닐까의심부터 들었다.“이지원 씨, 이건 또 무슨 수작이에요?”이지원은 조하랑을 쳐다보지도 않고 박민정을 향해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민정 씨, 예전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민정 씨가 사람 구한 공로를 가로채고 또 민정 씨를 괴롭혔어요. 죄송해요,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요.”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박민정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이지원이 궁지에 몰리지 않고서야 자기한테 머리를 조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바닥에 꿇어앉은 이지원은 눈시울이 새빨갰다.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분노와 질투 때문이었다.자신이 왜 박민정한테 사과해야 하는지... 언젠가는 박민정을 발밑에 깔아뭉개겠다고 다짐했다.박민정은 일어나서 이지원의 앞에 섰다.“무슨 이유로 나한테 와서 사과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난 용서 안 해요. 이제 그만 꺼져요.”그녀는 지금 이 광경을 예찬이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의 말을 듣자 이지원은 얼른 일어나서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조하랑의 집을 나섰다.“그냥 저렇게 가는 거야?”조하랑은 조금 얼떨떨해서 물었다.“저 여자 진짜로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가?”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지. 딱 봐도 진심이 아닌 게 느껴졌어. 무슨 이유에서 저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이지원은 집을 나서며 손끝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한 검은색 벤틀리를 향해 걸어갔다.“이제 됐어요?”차창이 내려지며 홍주영의 싸늘한 얼굴이 드러났다.“얼굴에 내키지 않는다고 쓰여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유 대표님이 시킨 일을 완성했다고 내가 가서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했다.하지만 그때 이지원이 잠깐, 하며 떠나려는 그
공관 밖에서 사용인이 그녀한테 문을 열어주었는데 박민정의 수수한 옷차림을 보자 눈동자에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박민정 씨인가요?”“네. 한 여사님과 박인호를 찾아왔어요.”사용인은 박민정을 거실로 안내하며 얘기했다.“저희 사모님은 밖에 차 마시러 나가셨고, 도련님만 집에 계십니다.”사모님과 도련님이라...이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였다.거실에 들어서자 박민호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비싼 명품 정장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 그는 팔목에 몇억짜리 파테크 필리프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고, 소매에는 한 개에 몇천만 원 하는 커프스단추를 부착했다.방금 거실에 들어설 때 보니 손에 세계 명화를 들고 감상하고 있었다.분명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문외한 임이 틀림없는 그는 그림을 가져온 사람한테 대놓고 물었다. “이 그림 얼마에요?”“저희 사장님이 200억에 낙찰받은 건데요.”그림을 가져온 사람은 비위를 맞추며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200억? 좋아요. 이건 내가 받을 게요. 사장님한테 전해요, 손에 있는 물건들 내가 다 처리해 줄 거라고.”“네네네.”원하는 대답을 얻은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떠났다.박민호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림을 사용인한테 툭 건네며 말했다.“내 보물창고에 갖다 넣어요.”그러는 동안 박민호는 박민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박민정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박민호가 지금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유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정민기는 거실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부터 박민호는 사용인한테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볼일을 다 보고 나서야 눈길을 누나인 박민정한테 돌렸다. 박민정한테 건들건들 다가오는 그의 눈빛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너 설마, 저 밖에 서있는 저 남자 때문에 유남준이랑 이혼하겠다고 한 건 아니지?”박민정과 유남준의 이혼 스캔들은 전 세계에 파다하게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박민호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그와 한수민 모
박민정은 아픈 목을 주무르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박민호는 아파서 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너… 사람을 데리고 와 나를 때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모르지, 너?”박민정이 정민기한테 눈길을 주자 정민기는 박민호의 가슴팍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했다.“소송 취하해!”정민기의 우렁찬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박민호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구둣발을 떼어내려고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숨이 콱콱 막혀오고 뼈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그는 황급히 사정했다.“알았어, 알았어. 취하할게, 취하한다고.”하지만 발은 미동도 없었다.공관 내 사용인들은 도련님이 남의 발밑에 깔려있는걸 보고도 무서워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오장육부 어디 한 군데라도 안 아픈데가 없었다. 박민호는 눈물을 글썽였다.“누나, 내가 잘못했어. 누나, 제발 그만하라고 해줘. 나 죽을 거 같아.”맞고 혼나야 그는 누나라고 불렀다.박민정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박민호가 처음 때릴 때 그녀도 같이 때렸다. 박민호가 그 당시에는 아주 어려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얻어맞고 나면 그는 울면서 ‘누나, 잘못 했어’ 하고 반성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한수민은 박민호의 편을 들며 손에 잡히는 물건을 그게 뭐든 간에 박민정한테 뿌리곤 했다.한번은 꽃병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온통 피로 물든 것만 같았었다.그 후로 그녀는 얻어맞기만 하고 무서워 같이 때리지 않았다.박민정은 한참 뒤에야 상념에서 깨어나 정민기한테 말했다.“이제 가요.”“네.”…그 시각 공관 밖에는 마이바흐 한 대가 큰 나무 밑에 세워져 있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휴대전화로 위치를 파악한 후 즉시 아랫사람한테 조사해 보라고 하여 여기에 박민정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공관 내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게 했는데, 얼마 후 경호원이 상황 보고를 하며박민호가 박민정의 목을 조르고 또 박민정의 보디가드에 의해 얻어맞고 피를 토했다는 내
연윤우?박예찬은 살짝 혼란스러웠다.그러나 이 사람들이 자기를 자기 동생인 박윤우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연윤우라는 이름은 동생이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박예찬은 서다희가 아빠의 옆에 있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분명 엄마를 많이 괴롭혔을 것이다.“날 잡아서 뭘 하려는 거예요?”박예찬은 서다희에게 침착하게 물었다.서다희는 조금 놀라며 연윤우가 왜 이렇게 얌전한 아이처럼 행동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예전에는 조금만 놀려도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였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보디가드의 손에 박예찬을 넘겼다.“대표님 만나러 가자.”나쁜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박예찬은 반항하지 않고 서다희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다.박예찬도 왜 아빠가 신림현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궁금했다.마침 저택의 밖에 나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걸 보니 설마 아빠가 계속 엄마를 스토킹하고 있었던 걸까?이런 가능성 까지 생각하니 박예찬은 등에 소름이 끼쳤다.너무 교활했다.유남준은 차 밖에서 스며드는 한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대표님,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박예찬은 차에 오르자마자 유남준을 살폈다.‘아빠 눈이 정말 안 보이는 걸까?’박예찬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왜 날 납치해 온 거예요? 또 엄마를 협박하려고요?”유남준은 박예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다희에게 말했다.“먼저 아이를 데리고 신림현으로 가.”하예찬은 신림현이라는 말에 바로 가기 싫다고 했다.“싫어요. 신림현으로 가기 싫어요. 빨리 날 풀어줘요.”박예찬이 다시 신림현으로 돌아가면 엄마는 또 난감해질 것이다. 엄마는 유남준과의 관계를 어떻게 그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유남준의 어두운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이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가기 싫으면 널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박예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박예찬은 비록 아빠는 눈도 안 보이고 기억도 잃었지
박민호는 너무 겁이 나서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로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어댔다.“매형 화내지 마세요. 제가 왜 우리 누나를 다치게 하겠어요? 지금 바로 소송 취하하라고 할게요.”유남준의 차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박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다시는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1조 6천억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유남준이 별 볼 일 없는 누나를 위해 이렇게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에 박민정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바로 유남준이었기 때문이다.한수민은 돌아와서 자기 아들이 다친 것을 보고 분노했다.“민정이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걔 아니에요.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그랬어요.”박민호가 말했다.하수민이 뭔가 더 말할 때 박민호는 그녀에게 유남준이 이 일에 개입했으니 소송을 취하해야 한다고 말했다.하수민은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유남준이 민정이한테 정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박민정은 돌아오는 길에 장명철 변호사로부터 하수민이 소송을 취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제야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반면 조하랑은 박예찬이 계속 돌아오지 않자 다급하게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그녀는 아직 친아빠인 유남준이 박예찬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예찬아 너 도대체 어디 있어?”조하랑은 갑자기 박예찬이 예전에 박민정과 함께 하수민을 만나러 갔었다는 말이 떠올라 바로 택시를 타고 저택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저택의 밖에 도착 해도 박예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사진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조하랑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찾으러 떠났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가 겁이 났다.신림현.서다희는 박예찬을 데리고 이미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 앉아 유남준을 기다렸다.차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니 서다희는 박예찬이 배가 고프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니?”박예
박예찬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어렸을 때 이후로 누군가가 엉덩이를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이 나쁜 놈.”“죽여버릴 거야.”박예찬은 집으로 가는 길에서 유남준을 죽여버리겠다고 아우성쳤다.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박민정은 조하랑에게서 박예찬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그런데 유남준이 박예찬을 한 마리의 강아지처럼 집어 들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박예찬은 아직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내가 죽여버릴 거야.”박민정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뒤 유남준의 손에서 아이를 뺏어왔다.박예찬은 그녀의 품에 돌아가니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고 아주 살갑게 딱 붙어 있었다. 전에 유남준이 박윤우도 데려갔던 것이 떠올라 박민정은 박예찬을 꼭 껴안으며 바로 유남준에게 물었다.“유남준 씨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이에요?”박예찬은 박민정의 품에 안긴 뒤 천천히 진정되었고 박민정에게 더 꼭 붙으려고 했다.유남준이 말하기도 전에 박예찬은 바로 박민정에게 고자질했다.“오늘 내가 가서 택배를 가지고 오는데 저 나쁜 아저씨가 잡아갔어. 그리고 이제 부터 내 새아빠라고 했어.”새아빠...박민정은 가슴이 철렁했다.유남준도 부정하지 않았다.“민정아. 나도 윤우가 너와 연지석의 아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데려왔잖아.”“우리 이제 같이 살자.”말을 마친 뒤 유남준은 또 박예찬에게 말했다.“연윤우. 넌 싫어도 참아. 이제 커서 능력이 생기면 그때 가서 날 죽여.”“지금 네 엄마는 내 와이프니까 법적으로 내가 네 새아빠야.”연윤우...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다급하게 박예찬의 입을 막으며 유남준에 말했다.“연우는 지석 씨가 돌봐줘도 괜찮아요. 우리가 함께 살 필요는 없어요.”“돌봐준다고?”유남준은 오늘 길가에서 혼자있는 박예찬을 만난 일을 박민정에게 말했다.“그게 아버지로서 아이를 돌보는 거야?”박민정의 품에 입이 막힌 채로 안겨 있던 박예찬은 그 말을 듣고 까만 눈동자가 복잡하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준수의 엄마, 차현영이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울먹거리며 물었다.“준수야, 대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업체들이 갑자기 우리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데?”오준수는 하룻밤 사이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엄마, 우리 이제 끝난 것 같아요.”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이천애도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아무리 눈치 없다고 해도 오씨 집안이 진짜 큰일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차현영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울부짖지도 않았을 것이다.집에는 오직 오성훈만 아무 걱정도 없이 쿨쿨 자고 있었다.차현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차현영에게 말해줬다.그러자 그녀는 대뜸 오준수를 꾸짖기 시작했다.“이 멍청한 놈, 그때 그렇게 이혼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는데도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더니. 손씨 가문 딸이면 우리 가문에도 얼마나 득이 되고 좋아?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모델을 데려와서는.”“이천애는 그냥 우리 집안이랑 안 맞는 여자야.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회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는 것 좀 봐, 이제 어떡하면 좋지?”“지금 당장 연서한테 가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보니 이천애가 구석에서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여우 같은 계집애, 우리 집에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이천애는 오랜만에 집에 온 거라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기 싫었다.“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성훈이 친엄마인데 아이 앞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해야겠어요?”“그나마 성훈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작에 널 밖으로 끌어냈어.”그러다가 차현영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오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따 사과하러 갈 때 천애도 같이 데려가. 어
오준수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설마요? 혹시 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게 맞아요? 전 오현웅 씨의 아들, 오준수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 대표님과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젊은 사람이 능력까지 갖췄다고 칭찬도 했었다고요.”순간 경호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졌다.“계속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쩔 수 없이 저희가 손을 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나 오준수는 이대로 가기 싫었다. 막무가내로 병실 안을 향해 달려던 이때, 그와 그의 비서는 몇 명의 경호원에 의해 보기 좋게 쫓겨났다.그렇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모습을 본 이천애가 깜짝 놀라 물었다.“오빠,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누가 감히 오빠를 때렸는데?”이천애의 쏟아지는 물음에 오준수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꺼져!”그러자 이천애도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예전 같았으면 금방에라도 달려가 그녀를 달래줬을 텐데 지금 이천애를 보면 자꾸 손연서만 생각났다.“나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쓸데없이 연서한테 시비 걸었어? 안 그랬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없었잖아!”이혼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정씨 가문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말에 이천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연서랑 이혼하길 잘했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말이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가 다시 차분하게 되묻자 오준수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모조리 말해줬다.이천애는 그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연서 씨가 어떻게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일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박 대표라는 사람은 고작 친구 하나 때문에 회사의 이익도 고려하지 않는대요? 우리가 어떤 가문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게 분명해요.”그러나 오준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엔 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오씨 가문과 계약해도 그만, 안 해도 아무 손해가 없었기 때문이
그러자 손연서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답했다.“응,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오준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다시 설득했다.“연서야, 만약 네가 박민정 씨한테 우리랑 재계약할 수 있도록 한 마디만 말해주면 내가 당장 너랑 재혼해 줄게.”그 말에 손연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자 오준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왜 웃어?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손연서는 한참 웃다가 겨우 멈추고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저기요, 오준수 씨? 설마 지금 내가 그쪽이랑 재혼하고 싶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히 말하는데 난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고 재혼도 하기 싫어. 난 그저 당신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기대해 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손연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오준수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대화가 단절되자 화도 나는 한편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러면서 예전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손연서와 이혼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누가 손연서한테 이런 황금 동아줄과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오 대표님, 사모님께서 뭐라고 하나요?”비서가 조심스레 묻자 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모님은 무슨, 이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사모님이야.”“내가 고작 이런 여자한테 당할 줄 알아? 지금 당장 박민정 씨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겠어.”“네.”말을 마치자마자 비서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리고 손쉽게 박민정은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그렇게 오준수는 여러 가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 뒤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안.박민정은 마침 손연서와 통화 중이었다.“민정 씨,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제대로 그 사람 골탕 먹였거든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저랑 재혼하자는 거 있죠?”그러자 박민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그래도 아주 멍청한 사람은 아니
오준수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엔 그룹 부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부사장님, 여태껏 저희랑 잘 지내왔으면서 이번 건은 왜 갑자기 취소한다는 걸까요?”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굴 건드렸는지 아직도 몰라요?”오준수는 당연히 몰랐다.“저는 건드린 적이 없는데요?”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는 전혀 오준수답지 않았다.부사장도 이처럼 멍청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지엔 그룹의 새 대표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나요?”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느라 회사 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한때, 그의 아버지 오현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던 사람이라 오준수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부담이 오준수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오준수가 다급히 비서에게 묻자 비서는 현재 신임 대표는 정수미의 딸인 박민정이라고 알려줬다.“박민정...”오준수는 왠지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을 계속 곱씹어 봤지만 정확하게 그녀가 누구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손연서 씨 친구입니다.”순간 오준수는 온몸이 굳어졌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수화기에 대고 대답하려고 보니 상대방 쪽에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지엔 그룹 부사장은 지금 오준수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오준수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그러면서 머리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서가 지엔 그룹의 대표랑 친구 사이라고? 어쩐지 우리랑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더니 외부에도 우리랑 계약하지 말라고 했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오 대표님, 사모님한테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아까까지 손연서라고 이름을 부르던 비서도 눈치껏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그 의미를 눈치챈 오준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연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