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5년 전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박민정과의 결혼식 날에 그녀 혼자 남겨두었던 것과, 박형식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의 집안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것만 생각하며 매정하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도 관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더 많은 걸 상기해 내려 했지만 머리가 더 지끈하게 아파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그는 은정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아주머니, 그건 제가 약속드릴 수 없어요.”은정숙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 약속드릴게요. 예전에 제가 잘못한 것들, 앞으로 다 고칠게요. 민정이한테 잘 하고 다신 상처 안 준다고 약속드릴 수 있어요.”하지만 은정숙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어찌 됐거나 지금 유 대표가 이러는 건 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눈이 멀쩡했으면 민정이한테 잘 해준다 어쩐다 그런 소리를 절대 안 했을 거예요.”유남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은정숙한테 그가 변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믿을 것 같았다.은정숙은 속이 뒤집혀 더는 유남준과 말하려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별장에서 돌아온 후 여태 밥도 먹지 못했다. 박민정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그는 간병인이 그녀가 요새 안 돌아올 거라 했던 말을 떠올리며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한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진주로 돌아와 장명철부터 찾아가 그를 보석하여 출소시킨 후 조하랑네 집으로 갔다.한창 식사 중인데 유남준한테서 연락이 와 그녀는 대충 둘러대며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너 지금 어디야?”유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한테 말해주고 싶지 않은 박민정은 삐딱하게 대답했다.“내가 어디 있든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이 며칠 동안 당신 자신이나 잘 챙겨요. 아줌마는 내가 간병인 구해서 돌보라고 했으니까. 나 이제 며칠 있다가 돌아갈 거예요.”유남준은 한쪽으로 그녀와 통화하며 한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그녀의 위치를
“그게 뭔데?”조하랑이 궁금해하며 묻자 박민정이 대답했다.“아버지의 유언장.”박형식은 죽기 전 회사가 변변치 못한 아들의 손에 넘어가 전부 말아먹게 될까 봐 따로 유언장을 하나 더 작성했다.그 유언장은 주로 두 가지 내용인데, 하나는 박민정에게 200억을 물려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민정이 아무 때든 바움 그룹을 포함한 그의 유산 전부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져갈지에 대한 여부는 박민정이 결정하기로 돼 있었다.박민정은 이 유언장을 계속 손에 쥐고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다. 이걸 꺼내면 한수민이 갖고 있던 유언장은 무효가 된다. 이 유언장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대학에서 갓 졸업한 그녀가 회사 경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엄마와 동생 손에서 재산을 뺏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때 이 유언장을 꺼내놓더라도 아무런 배경도 실력도 없는 그녀였기에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 호락호락하고 마음이 여린 여자애가 아니다. 한수민이 만약 끝까지 몰아붙인다면 그녀도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 의지가 있다.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나서 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된 거구나. 그렇지만 이제 바움 그룹은 없는데...”“내가 굳이 따진다면?”박민정이 묻자 곁에 있던 예찬이가 입을 열었다.“그럼 반드시 돌려줘야지. 돌려줄 수 없다 해도 책임을 져야 하고.”박민정은 예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난 굳이 돌려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겁을 주고 싶은 거지. 너무 설쳐대지 말라고.”조하랑은 예찬이가 자기보다 반응이 더 빠를 줄 몰랐다.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예찬이의 볼을 꼬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예찬이가 요리조리 도망가며 밥상 앞에서 한창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조하랑이 의문에 찬 눈길로 현관을 향해 보며 말했다.“배달 안 시켰는데, 누구지? 잠시만. 내가 가 볼게.”그녀는 슬리퍼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지원은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내다 버리고, 조하랑도 같이 보는 앞에서 박민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민정 씨, 미안해요.”박민정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조하랑은 이지원이 무릎을 꿇자 그녀가 또 무슨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저러는 게 아닐까의심부터 들었다.“이지원 씨, 이건 또 무슨 수작이에요?”이지원은 조하랑을 쳐다보지도 않고 박민정을 향해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민정 씨, 예전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민정 씨가 사람 구한 공로를 가로채고 또 민정 씨를 괴롭혔어요. 죄송해요,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요.”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박민정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이지원이 궁지에 몰리지 않고서야 자기한테 머리를 조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바닥에 꿇어앉은 이지원은 눈시울이 새빨갰다.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분노와 질투 때문이었다.자신이 왜 박민정한테 사과해야 하는지... 언젠가는 박민정을 발밑에 깔아뭉개겠다고 다짐했다.박민정은 일어나서 이지원의 앞에 섰다.“무슨 이유로 나한테 와서 사과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난 용서 안 해요. 이제 그만 꺼져요.”그녀는 지금 이 광경을 예찬이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의 말을 듣자 이지원은 얼른 일어나서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조하랑의 집을 나섰다.“그냥 저렇게 가는 거야?”조하랑은 조금 얼떨떨해서 물었다.“저 여자 진짜로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가?”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지. 딱 봐도 진심이 아닌 게 느껴졌어. 무슨 이유에서 저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이지원은 집을 나서며 손끝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한 검은색 벤틀리를 향해 걸어갔다.“이제 됐어요?”차창이 내려지며 홍주영의 싸늘한 얼굴이 드러났다.“얼굴에 내키지 않는다고 쓰여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유 대표님이 시킨 일을 완성했다고 내가 가서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기사한테 출발하라고 했다.하지만 그때 이지원이 잠깐, 하며 떠나려는 그
공관 밖에서 사용인이 그녀한테 문을 열어주었는데 박민정의 수수한 옷차림을 보자 눈동자에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박민정 씨인가요?”“네. 한 여사님과 박인호를 찾아왔어요.”사용인은 박민정을 거실로 안내하며 얘기했다.“저희 사모님은 밖에 차 마시러 나가셨고, 도련님만 집에 계십니다.”사모님과 도련님이라...이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였다.거실에 들어서자 박민호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비싼 명품 정장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 그는 팔목에 몇억짜리 파테크 필리프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고, 소매에는 한 개에 몇천만 원 하는 커프스단추를 부착했다.방금 거실에 들어설 때 보니 손에 세계 명화를 들고 감상하고 있었다.분명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문외한 임이 틀림없는 그는 그림을 가져온 사람한테 대놓고 물었다. “이 그림 얼마에요?”“저희 사장님이 200억에 낙찰받은 건데요.”그림을 가져온 사람은 비위를 맞추며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200억? 좋아요. 이건 내가 받을 게요. 사장님한테 전해요, 손에 있는 물건들 내가 다 처리해 줄 거라고.”“네네네.”원하는 대답을 얻은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떠났다.박민호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림을 사용인한테 툭 건네며 말했다.“내 보물창고에 갖다 넣어요.”그러는 동안 박민호는 박민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박민정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박민호가 지금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유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정민기는 거실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부터 박민호는 사용인한테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볼일을 다 보고 나서야 눈길을 누나인 박민정한테 돌렸다. 박민정한테 건들건들 다가오는 그의 눈빛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너 설마, 저 밖에 서있는 저 남자 때문에 유남준이랑 이혼하겠다고 한 건 아니지?”박민정과 유남준의 이혼 스캔들은 전 세계에 파다하게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박민호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그와 한수민 모
박민정은 아픈 목을 주무르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박민호는 아파서 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도 못했다. “너… 사람을 데리고 와 나를 때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모르지, 너?”박민정이 정민기한테 눈길을 주자 정민기는 박민호의 가슴팍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했다.“소송 취하해!”정민기의 우렁찬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박민호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구둣발을 떼어내려고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숨이 콱콱 막혀오고 뼈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그는 황급히 사정했다.“알았어, 알았어. 취하할게, 취하한다고.”하지만 발은 미동도 없었다.공관 내 사용인들은 도련님이 남의 발밑에 깔려있는걸 보고도 무서워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오장육부 어디 한 군데라도 안 아픈데가 없었다. 박민호는 눈물을 글썽였다.“누나, 내가 잘못했어. 누나, 제발 그만하라고 해줘. 나 죽을 거 같아.”맞고 혼나야 그는 누나라고 불렀다.박민정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박민호가 처음 때릴 때 그녀도 같이 때렸다. 박민호가 그 당시에는 아주 어려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얻어맞고 나면 그는 울면서 ‘누나, 잘못 했어’ 하고 반성을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한수민은 박민호의 편을 들며 손에 잡히는 물건을 그게 뭐든 간에 박민정한테 뿌리곤 했다.한번은 꽃병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온통 피로 물든 것만 같았었다.그 후로 그녀는 얻어맞기만 하고 무서워 같이 때리지 않았다.박민정은 한참 뒤에야 상념에서 깨어나 정민기한테 말했다.“이제 가요.”“네.”…그 시각 공관 밖에는 마이바흐 한 대가 큰 나무 밑에 세워져 있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휴대전화로 위치를 파악한 후 즉시 아랫사람한테 조사해 보라고 하여 여기에 박민정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공관 내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게 했는데, 얼마 후 경호원이 상황 보고를 하며박민호가 박민정의 목을 조르고 또 박민정의 보디가드에 의해 얻어맞고 피를 토했다는 내
연윤우?박예찬은 살짝 혼란스러웠다.그러나 이 사람들이 자기를 자기 동생인 박윤우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연윤우라는 이름은 동생이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박예찬은 서다희가 아빠의 옆에 있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분명 엄마를 많이 괴롭혔을 것이다.“날 잡아서 뭘 하려는 거예요?”박예찬은 서다희에게 침착하게 물었다.서다희는 조금 놀라며 연윤우가 왜 이렇게 얌전한 아이처럼 행동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예전에는 조금만 놀려도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였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보디가드의 손에 박예찬을 넘겼다.“대표님 만나러 가자.”나쁜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박예찬은 반항하지 않고 서다희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다.박예찬도 왜 아빠가 신림현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궁금했다.마침 저택의 밖에 나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걸 보니 설마 아빠가 계속 엄마를 스토킹하고 있었던 걸까?이런 가능성 까지 생각하니 박예찬은 등에 소름이 끼쳤다.너무 교활했다.유남준은 차 밖에서 스며드는 한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대표님,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박예찬은 차에 오르자마자 유남준을 살폈다.‘아빠 눈이 정말 안 보이는 걸까?’박예찬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왜 날 납치해 온 거예요? 또 엄마를 협박하려고요?”유남준은 박예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서다희에게 말했다.“먼저 아이를 데리고 신림현으로 가.”하예찬은 신림현이라는 말에 바로 가기 싫다고 했다.“싫어요. 신림현으로 가기 싫어요. 빨리 날 풀어줘요.”박예찬이 다시 신림현으로 돌아가면 엄마는 또 난감해질 것이다. 엄마는 유남준과의 관계를 어떻게 그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유남준의 어두운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이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가기 싫으면 널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박예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박예찬은 비록 아빠는 눈도 안 보이고 기억도 잃었지
박민호는 너무 겁이 나서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로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어댔다.“매형 화내지 마세요. 제가 왜 우리 누나를 다치게 하겠어요? 지금 바로 소송 취하하라고 할게요.”유남준의 차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박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다시는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그리고 1조 6천억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유남준이 별 볼 일 없는 누나를 위해 이렇게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에 박민정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바로 유남준이었기 때문이다.한수민은 돌아와서 자기 아들이 다친 것을 보고 분노했다.“민정이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걔 아니에요.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그랬어요.”박민호가 말했다.하수민이 뭔가 더 말할 때 박민호는 그녀에게 유남준이 이 일에 개입했으니 소송을 취하해야 한다고 말했다.하수민은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유남준이 민정이한테 정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박민정은 돌아오는 길에 장명철 변호사로부터 하수민이 소송을 취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제야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반면 조하랑은 박예찬이 계속 돌아오지 않자 다급하게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그녀는 아직 친아빠인 유남준이 박예찬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예찬아 너 도대체 어디 있어?”조하랑은 갑자기 박예찬이 예전에 박민정과 함께 하수민을 만나러 갔었다는 말이 떠올라 바로 택시를 타고 저택으로 달려갔다.하지만 저택의 밖에 도착 해도 박예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사진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조하랑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찾으러 떠났다. 그녀는 박민정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가 겁이 났다.신림현.서다희는 박예찬을 데리고 이미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 앉아 유남준을 기다렸다.차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니 서다희는 박예찬이 배가 고프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니?”박예
박예찬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어렸을 때 이후로 누군가가 엉덩이를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이 나쁜 놈.”“죽여버릴 거야.”박예찬은 집으로 가는 길에서 유남준을 죽여버리겠다고 아우성쳤다.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박민정은 조하랑에게서 박예찬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그런데 유남준이 박예찬을 한 마리의 강아지처럼 집어 들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박예찬은 아직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내가 죽여버릴 거야.”박민정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뒤 유남준의 손에서 아이를 뺏어왔다.박예찬은 그녀의 품에 돌아가니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고 아주 살갑게 딱 붙어 있었다. 전에 유남준이 박윤우도 데려갔던 것이 떠올라 박민정은 박예찬을 꼭 껴안으며 바로 유남준에게 물었다.“유남준 씨 내 아들한테 무슨 짓이에요?”박예찬은 박민정의 품에 안긴 뒤 천천히 진정되었고 박민정에게 더 꼭 붙으려고 했다.유남준이 말하기도 전에 박예찬은 바로 박민정에게 고자질했다.“오늘 내가 가서 택배를 가지고 오는데 저 나쁜 아저씨가 잡아갔어. 그리고 이제 부터 내 새아빠라고 했어.”새아빠...박민정은 가슴이 철렁했다.유남준도 부정하지 않았다.“민정아. 나도 윤우가 너와 연지석의 아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데려왔잖아.”“우리 이제 같이 살자.”말을 마친 뒤 유남준은 또 박예찬에게 말했다.“연윤우. 넌 싫어도 참아. 이제 커서 능력이 생기면 그때 가서 날 죽여.”“지금 네 엄마는 내 와이프니까 법적으로 내가 네 새아빠야.”연윤우...박민정은 그제야 유남준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다급하게 박예찬의 입을 막으며 유남준에 말했다.“연우는 지석 씨가 돌봐줘도 괜찮아요. 우리가 함께 살 필요는 없어요.”“돌봐준다고?”유남준은 오늘 길가에서 혼자있는 박예찬을 만난 일을 박민정에게 말했다.“그게 아버지로서 아이를 돌보는 거야?”박민정의 품에 입이 막힌 채로 안겨 있던 박예찬은 그 말을 듣고 까만 눈동자가 복잡하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
정수미는 돌아간 뒤 박민정이 조산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윤소현이 계속 세뇌를 시도했다. “엄마, 박민정이 회사 일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인 것 같아요.”“지원이가 엄마 딸이잖아요. 박민정도 엄마 딸이라면 쌍둥이라도 낳으셨단 말이에요?”정수미는 귓가가 윙윙거렸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정말 딸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박민정에게 했던 모든 일들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엄마,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절대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럼 지원이는 어떻게 해요?” 이 말에 정수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좀 조용히 있어 줄래?”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고 몰래 이지원에게 박민정이 모든 걸 알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지원도 소름이 돋았다. [정수미가 믿었어요?][아직은요. 하지만 엄마 성격상 분명 조사할 거예요.]이 메시지에 이지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소식 들었는데 박민정이 너무 흥분해서 지금 출산한대요. 소현 씨,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도와주셔야 해요.]혼자서는 박민정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정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윤소현은 이지원을 찾아갔고 정수미는 모든 걸 지켜보며 사람을 시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게 했다.이지원은 방에서 계획을 세우다가 윤소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적으로는 언니라고 부르지 마요. 무슨 일이겠어요, 박민정 일로 의논하려고 왔죠.”이지원은 윤소현이 악랄하면서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를 찾아오다니, 정수미가 뭐라고 생각할까?“아...”이지원이 목소리를 낮춰 이해관계를 설명한 후에야 윤소현은 깨달았다. “내가 너무 급했네요.”“괜찮아요, 언니. 진실은 밝혀질 테니 일단 쉬세요.”이지원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다른 방에서 대화
박민정은 정수미가 검사 결과를 보고 기뻐할 줄 알았다. 이지원이 가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정수미가 제일 먼저 위조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박민정은 목구멍이 바늘에 찔린 듯했다.“이건 진짜예요. 위조된 게 아니에요. 믿지 못 하시다면 직접 확인해보세요.” 윤소현이 비웃듯 말했다.“사기꾼 말 믿고 우리 엄마가 세상 모든 여자랑 친자 검사라도 해야 하나?”그녀는 정수미 손에서 검사서를 뺏어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엄마, 가요. 이런 사기꾼이랑 말할 가치도 없어요.”정수미는 일어서지 못한 채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내 친딸 얘기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평생의 아픔이에요!”박민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절대 용서 못 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요!” 정수미의 마지막 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박민정은 찢어진 검사서를 바라보았고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바보같아.”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식당을 나섰다. 밖에 나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슴 한켠을 누르는 거대한 바위같은 무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전화벨이 울리자 박민정은 정수미가 마음을 돌려 자신과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유남준이 건 전화였다.“남준 씨.”“일어났어?”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눈물이 났다. “진작 일어났어요.”“그럼 전화하지 그랬어? 지금 갈게.” 유남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꼭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나 정수미 씨 만나고 왔어요.” 유남준은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그래서?”“그 사람이 내가 보여준 유전자 검사를 믿지 않았어요. 나더러 사기꾼이래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요.”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어디야? 내가 갈게. 울지 마.” 유남준이 차에 타며 말했고 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병원 근처
윤소현은 정수미가 박민정과 만난다는 걸 알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진짜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는 순간 급해졌다.“엄마, 제가 같이 갈게요. 박민정이 엄마를 만나자고 한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닐 거예요. 지난번에 칼을 들고 엄마를 협박했던 일을 잊으셨어요?”정수미는 그 말을 듣고 경계심이 들었다. “네가 말하니 기억나네. 걱정 마, 이번엔 경호원을 데리고 갈 거야. 그러면 못할 거야.”“엄마, 무서워요. 제가 꼭 같이 가야겠어요.” 윤소현은 이미 차에 탄 상태였다. “엄마, 주소 보내주세요. 엄마는 제 전부예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알았어.”주소를 보내고 나서 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비서도 대화를 대충 들었다. “소현 아가씨가 냉철해도 대표님을 많이 생각하시네요.”정수미는 미소 지었다. “그 애는 내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난 정말 걱정이야. 내가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나...”“대표님, 분명 오래 사실 거예요.” 비서가 아부했다.정수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몸은 내가 알지. 젊을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육칠십까지만 살아도 만족해.”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민정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윤소현이 오기 전에 정수미는 비서 겸 경호원과 함께 올라갔다.룸의 고급 방에서 박민정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을 달랬다.마침내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자 정장 차림의 정수미가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민정 씨, 무슨 얘기하실 건가요?”정수미는 들어오자마자 앉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함미현 일 때문 아닌가요? 박민정 씨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요.”예전 같았으면 박민정은 바로 받아쳤을 테지만 지금은 정수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정수미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죠.”박민정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아무 반응 없이
병실에서 퇴원할 생각 없이 늦게까지 떠나지 않는 진서연 일행. 남자인 유남준은 당연히 그들과 할 얘기가 없어 다른 방에서 계속 일했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밖으로 나왔다. 박윤우는 이미 피곤함에 지쳐 잠들어 있었고 그걸 본 유남준이 박민정 곁으로 다가왔다. “피곤하지 않아? 좀 누워있을래?” 박민정은 매번 누울 때마다 그가 이것저것 장난치는 걸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안 피곤해요, 좀 더 앉아있고 싶어요.”“출산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가서 좀 누워있자. 응?” 유남준이 다정하게 달랬고 결국 박민정은 그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함께 누웠다.불을 끄자 밖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함미현네는 괜찮아요?” 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내가 몰래 사람을 붙여뒀어.” “네...”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정수미는 왜 저렇게 잔인한 걸까요?” 박민정은 자신과 박예찬이 그녀 손에 죽을 뻔했던 걸 떠올렸다. 또 함미현네 일을 생각하니 그 사람이 무서워졌다. 함미현의 일은 자업자득이지만, 자신은? 그저 윤소현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친어머니라니!“여자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수단은 필요하지.” 유남준이 대답했다. 박민정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민이에요. 그분을 엄마로 받아들여야 할지...”“사실 진실을 말해도 좋을 것 같아. 그 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 되고.”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결심이 선 듯했다. “좋아요, 내일 가서 얘기해 볼게요.” 어차피 이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해야 했다.“응.” 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박민정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준 씨!” 유남준은 또 ‘응’하고 대답했는데 목소리가 쉰 듯했다.좋아하는 여자가 곁에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