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야, 이건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야. 놓치고 싶지 않아.”이 말을 듣고 장하리는 모든 상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소준호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저 그녀에게 통보하는 것에 불과했다.둘 다 어른이었다. 서로가 각자의 일과 커리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감정은 아직 깊지 않았다.소준호가 이 기회를 그녀 때문에 포기할 리가 없었다.장하리는 조금 씁쓸해졌고 그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너 나랑 같이 해외로 나갈래?”“미안해요.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준호 씨, 솔직히 말해주세요. 우리 헤어지자는 뜻인가요?”소준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하리야, 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네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정말로 널 좋아해. 하지만 내가 너 때문에 이 기회를 포기하게 된다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그게 우리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거야. 우리는 서로의 연인이 되기 전에 먼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장하리의 손을 잡았다.“아카데미에서 내일모레까지 대답을 달라고 해. 네가 같이 가기 싫다면 우리 먼저 약혼이라도 하자.”그는 관계를 확실히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야 서로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장하리는 잠시 망설이며 소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부정할 수 없었다. 소준호 같은 사람은 분명 훌륭한 배우자가 될 수 있었다. 따뜻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는 사람.하지만 이렇게 빨리 결혼을 확정 짓는 건 그녀에게 아직 이른 결정처럼 느껴졌다.부모님이 떠오르자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준호 씨, 오늘 밤에 한 번 더 생각해 볼게요. 내일 대답해 줄게요.”소준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그래. 내일 답해줘. 하리야, 기다릴게.”장하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장민철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우리 딸 무슨 일이야? 감정 문제야, 아니면 학교에
장하리는 쉬고 싶었지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어보니 맞은편의 집에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한밤중에 이사를 하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맞은편 집이 이사를 가는 건가? 하지만 그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그러다 갑자기 몇몇 인부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소독을 하고 고급 가구들을 들여놓는 모습을 보았다.장하리는 베란다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지만 누가 이사를 오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그대로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1층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추미현이 말했다.“맞은편에 새 입주자가 왔더라. 내가 알아보니까, 그 집은 매물로 나와 있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돈이 그렇게 많았는지, 8억 원이나 주고 샀대. 원래 가격의 네 배나 더 주고 산 거야. 그 집 사람들 완전 기뻐서 밤새 이사 나갔어. 그런데 누가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어.”사천만 원?누가 그렇게 큰돈을 주고 그 집을 산 거지?밤을 새워서 이사할 만하네,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졌구나.추미현은 부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그 집이 우리 집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어휴, 우린 그런 행운이 없나 봐.”장하리는 엄마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말했다.“엄마, 반찬 드세요.”추미현은 그제야 마음이 누그러지며 말했다.“하리야, 아버지랑 어머니는 이제 준비가 다 됐어. 은행에서 오늘 밤에 출발해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게 빨리요?”“응. 호텔 예약 정보 확인을 미리 해야 한다나 봐. 하루만 늦어져도 십만 원 손해래.”장하리는 더 마음이 허전해졌다.“그래요. 그럼 이따가 짐 싸는 거 도와드릴게요.”“괜찮아. 넌 출근해야지. 늦으면 안 돼.”유치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소준호를 발견했다.소준호는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장하리는 바로 차를 세웠다.“준호 씨?”“하리야.”소준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경
장하리는 교실에서 한 시간을 보낸 후 뭔가 중요한 일을 깜빡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젯밤 부모님의 당첨 소식에 정신이 없었고 소준호가 해외로 나가는 문제까지 고민하느라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어수선했다.점심때는 두 집안이 만나기로 했기에 잠시 시간을 내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를 부탁한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반을 책임지고 있지만 강성 유치원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 교사들이 돌아가며 일정을 맡기에 점심시간에 잠시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사무실에 들어서자 자신의 자리에는 서주혁이 앉아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서주혁은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준 후 거의 떠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이런 재벌은 늘 바쁠 텐데 어쩐 일로 이렇게 여유로운지 의아했다.어제 그와 불편한 대화를 나눈 장하리는 오늘도 그를 반가워할 리 없었다.“서 대표님, 여긴 제 사무실이에요.”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하트 모양의 박스에 머물렀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포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런 나이를 지났다고 생각했다.서주혁은 처음으로 이런 걸 사 본 듯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선물이에요.”장하리는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사양할게요. 선생님으로서 보겸이를 돌보는 건 제 일입니다. 전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더는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어요.”서주혁은 무선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남자 친구랑 약속했어요?”장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걸까?“맞아요.”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애써 무시하며 복도를 걸었지만 발소리는 여전히 그녀 뒤를 따랐다.유치원 밖으로 나왔을 때도 여전히 발소리가 들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서 대표님, 대체 뭐 하시는 거죠?”그녀가 물었다.“나도 점심 먹
서주혁은 장하리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가 있나요?”장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켜려고 했다.하지만 물은 이미 오래되어 차가워져 있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서주혁이 이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종업원을 불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했다.장하리의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서주혁을 미워할 기력조차 없었다.서주혁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장하리는 팔을 베개 삼아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잠시 후 서주혁은 부루펜 진통제 한 팩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약 포장을 열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들어 올린 후 약을 하나 입에 넣어 주고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다.장하리는 긴 속눈썹을 떨며 손을 흔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이미 종업원을 불러 의자를 정리하게 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장하리의 허리에 둘렀다.장하리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서주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눈앞이 희미하게 흐릿해진 그녀는 겨우 그의 턱선만을 볼 수 있었다.장하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아직 이사를 준비 중이라 서주혁의 집은 장하리의 맞은편 집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소파에 눕혀진 장하리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정신이 조금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서주혁의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지금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걱정할 게 뻔했고 그렇다면 부모님이 출국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또한 그녀의 옷은 이미 더러워져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장하리는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부루펜의 약효가 서서히 올라오면서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고마워요.”서주혁은 다시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좀 더 마셔요.”장하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서주혁은 나지막이 말했다.“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요. 필요한 물건들은 사다 놨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장하리는
서주혁이 보겸이를 조수석에 내려놓자 장하리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제가 안고 뒷좌석에 앉을게요.”서주혁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서보겸은 그녀의 품 안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기 직전 장하리는 차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서 대표님, 보겸이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이면 유치원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무슨 뜻이죠?”장하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차분히 말했다.“제가 느끼기에 보겸이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아픈데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고가 날 수밖에 없죠. 서 대표님께서 보겸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장하리,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잖아.”“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만약 보겸이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서 대표님이 저를 어떻게 하실지, 유치원에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셨나요? 보겸이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제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보겸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으면 적어도 저한테 먼저 알려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미리 대비할 수 있고요. 아니면 매번 이렇게 되면 결국 힘든 건 보겸이잖아요.”서주혁은 그녀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냉철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자신은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보겸이는 좀 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해요. 보겸이는 서 대표님이 항상 곁에서 돌봐야 할 아이예요. 유치원이 보겸이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서주혁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병원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의 눈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서렸다.“어제 보겸이한테 뭐라고 약속했는지 기억 못 해요?”장하리는 잠시 당황한
장하리의 가슴은 크게 요동쳤고 손바닥은 저릿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서주혁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뭐가 무서워? 내가 손이라도 댈까 봐?”“서 대표님 말이 맞아요. 그런데 혹시 제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서 대표님이 저한테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장하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은 서씨 본가에서 그가 내리친 그 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서주혁의 피를 닦던 손이 멈췄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장하리 역시 그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근처에 앉을 자리를 찾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서주혁은 마치 제자리에 굳어버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에 깊이 찔려 속수무책이었다.이제 장하리는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서주혁이 의도적으로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려고 도발하면 장하리는 더 큰 힘으로 맞받아친다.그러나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서주혁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더욱 잘 알고 있었다.장하리는 서주혁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곧 의자가 살짝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녀 옆에 앉았다.“하리야.”서주혁이 조용히 불렀다.“우리 친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미안해.”“서 대표님이 제게 미안할 건 없어요. 오늘 보겸이 일은 제 책임입니다.”“아니, 미안할 일이 있어. 정말 미안해.”장하리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소준호의 전화였다.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서주혁이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여보세요, 준호 씨?”“하리야, 나 일 끝났어. 지금 너희 집으로 가도 될까? 가는 중이야. 우리 부모님도 같이 왔어. 아버님, 어머님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지? 잠깐만이라도 인사드리려고.”소준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서보겸의 손가락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서보겸은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한다.그런데 지금 또 다른 남자가 장하리를 좋아하고 있으니 서주혁은 제대로 당황해버린 것이다.물론 이 상황에서 서보겸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결국 진실을 알게 되어도 변하지 않을 엄마의 모습이었다.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보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아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서주혁은 서보겸을 품에 안고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부드럽게 달래주었다.“아들, 착하지. 자고 있어.”서보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들에게 이불을 꼭 덮어준 뒤, 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계단 입구로 이르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장하리를 바라보았다.장하리의 한 손은 옆 선반에 수갑으로 채워져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하리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서주혁은 그렇게 그녀의 옆에 앉아 30분 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하리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서주혁 씨,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목마르진 않아요?”뻔뻔한 서주혁의 얼굴을 보자니 확실히 마음이 부글부글 들끓어 오르긴 했다.씩씩거리는 장하리와는 달리 서주혁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물 두 잔을 떠오고 준비해온 타이레놀을 꺼내 장하리에게 건네주었다.“아직도 아픕니까?”하지만 장하리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장하리에 서주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단을 내려오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만 막상 그녀의 앞에 서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몰려왔다.확실히 지금 당장 혼인신고서를 꺼내면 그녀에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합법적인 부부이기에 장하리는 현재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할 수도, 약혼할 수도 없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하지만 장하리가 그들이 결혼하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서주혁은 싸늘한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더니 장하리를 다시 끌어오려 손을 뻗었다.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손을 움츠리더니 그를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이제 그녀도 서주혁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돈도 많고 얼굴도 나쁘지 않은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평범한 장하리에게 집착한단 말인가?그리고 같은 시각, 장하리가 피하는 바람에 서주혁의 안색은 더욱 험악해졌다.쓸쓸히 허공에 머무른 손을 거두며 서주혁은 피식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같은 남자로서 그의 도발을 느낀 소준호가 버럭 화를 냈다.“하리야, 저 사람 너한테 해코지한 건 아니지?”장하리가 막 고개를 가로저으려 할 때, 소준호는 대뜸 그녀의 손목을 가로채 가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며 소준호의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져 갔다.“설마 저 사람이 너한테 이런 거야? 학대했어?”그러나 괜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장하리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준호를 다독여주려 안간힘을 썼다.“아뇨, 준호 씨, 우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만하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주혁은 손을 들어 강제로 장하리를 끌어당겼다.그의 야만에 놀란 소준호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갑작스러운 무게감에 고개가 한쪽으로 쏠리고 서주혁 역시 무의식적으로 소준호를 발로 걷어찼다.제원이든 어디든 지금까지 서주혁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물론 성인 남자들 간에도 힘의 차이는 존재했다. 서주혁은 군대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싸움 솜씨가 일품이었고 갖은 역경을 겪으며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준호처럼 곱게 자란 사람이 어떻게 서주혁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한번 차였을 뿐인데 소준호는 순간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냈다.장하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화들짝 놀라 온몸이 뻣뻣해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윽고 경호원이 또 소준호에게 손을 대려는 것을 보고 장하리는 바로 서주혁을 밀어내며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