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이 보겸이를 조수석에 내려놓자 장하리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제가 안고 뒷좌석에 앉을게요.”서주혁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서보겸은 그녀의 품 안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기 직전 장하리는 차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서 대표님, 보겸이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이면 유치원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무슨 뜻이죠?”장하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차분히 말했다.“제가 느끼기에 보겸이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아픈데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고가 날 수밖에 없죠. 서 대표님께서 보겸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장하리,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잖아.”“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만약 보겸이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서 대표님이 저를 어떻게 하실지, 유치원에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셨나요? 보겸이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제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보겸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으면 적어도 저한테 먼저 알려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미리 대비할 수 있고요. 아니면 매번 이렇게 되면 결국 힘든 건 보겸이잖아요.”서주혁은 그녀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냉철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자신은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보겸이는 좀 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해요. 보겸이는 서 대표님이 항상 곁에서 돌봐야 할 아이예요. 유치원이 보겸이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서주혁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병원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의 눈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서렸다.“어제 보겸이한테 뭐라고 약속했는지 기억 못 해요?”장하리는 잠시 당황한
장하리의 가슴은 크게 요동쳤고 손바닥은 저릿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서주혁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뭐가 무서워? 내가 손이라도 댈까 봐?”“서 대표님 말이 맞아요. 그런데 혹시 제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서 대표님이 저한테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장하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은 서씨 본가에서 그가 내리친 그 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서주혁의 피를 닦던 손이 멈췄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장하리 역시 그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근처에 앉을 자리를 찾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서주혁은 마치 제자리에 굳어버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에 깊이 찔려 속수무책이었다.이제 장하리는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서주혁이 의도적으로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려고 도발하면 장하리는 더 큰 힘으로 맞받아친다.그러나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서주혁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더욱 잘 알고 있었다.장하리는 서주혁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곧 의자가 살짝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녀 옆에 앉았다.“하리야.”서주혁이 조용히 불렀다.“우리 친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미안해.”“서 대표님이 제게 미안할 건 없어요. 오늘 보겸이 일은 제 책임입니다.”“아니, 미안할 일이 있어. 정말 미안해.”장하리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소준호의 전화였다.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서주혁이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여보세요, 준호 씨?”“하리야, 나 일 끝났어. 지금 너희 집으로 가도 될까? 가는 중이야. 우리 부모님도 같이 왔어. 아버님, 어머님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지? 잠깐만이라도 인사드리려고.”소준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서보겸의 손가락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서보겸은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한다.그런데 지금 또 다른 남자가 장하리를 좋아하고 있으니 서주혁은 제대로 당황해버린 것이다.물론 이 상황에서 서보겸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결국 진실을 알게 되어도 변하지 않을 엄마의 모습이었다.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보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아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서주혁은 서보겸을 품에 안고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부드럽게 달래주었다.“아들, 착하지. 자고 있어.”서보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들에게 이불을 꼭 덮어준 뒤, 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계단 입구로 이르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장하리를 바라보았다.장하리의 한 손은 옆 선반에 수갑으로 채워져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하리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서주혁은 그렇게 그녀의 옆에 앉아 30분 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하리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서주혁 씨,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목마르진 않아요?”뻔뻔한 서주혁의 얼굴을 보자니 확실히 마음이 부글부글 들끓어 오르긴 했다.씩씩거리는 장하리와는 달리 서주혁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물 두 잔을 떠오고 준비해온 타이레놀을 꺼내 장하리에게 건네주었다.“아직도 아픕니까?”하지만 장하리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장하리에 서주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단을 내려오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만 막상 그녀의 앞에 서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몰려왔다.확실히 지금 당장 혼인신고서를 꺼내면 그녀에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합법적인 부부이기에 장하리는 현재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할 수도, 약혼할 수도 없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하지만 장하리가 그들이 결혼하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서주혁은 싸늘한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더니 장하리를 다시 끌어오려 손을 뻗었다.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손을 움츠리더니 그를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이제 그녀도 서주혁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돈도 많고 얼굴도 나쁘지 않은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평범한 장하리에게 집착한단 말인가?그리고 같은 시각, 장하리가 피하는 바람에 서주혁의 안색은 더욱 험악해졌다.쓸쓸히 허공에 머무른 손을 거두며 서주혁은 피식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같은 남자로서 그의 도발을 느낀 소준호가 버럭 화를 냈다.“하리야, 저 사람 너한테 해코지한 건 아니지?”장하리가 막 고개를 가로저으려 할 때, 소준호는 대뜸 그녀의 손목을 가로채 가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며 소준호의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져 갔다.“설마 저 사람이 너한테 이런 거야? 학대했어?”그러나 괜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장하리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준호를 다독여주려 안간힘을 썼다.“아뇨, 준호 씨, 우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만하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주혁은 손을 들어 강제로 장하리를 끌어당겼다.그의 야만에 놀란 소준호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갑작스러운 무게감에 고개가 한쪽으로 쏠리고 서주혁 역시 무의식적으로 소준호를 발로 걷어찼다.제원이든 어디든 지금까지 서주혁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물론 성인 남자들 간에도 힘의 차이는 존재했다. 서주혁은 군대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싸움 솜씨가 일품이었고 갖은 역경을 겪으며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준호처럼 곱게 자란 사람이 어떻게 서주혁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한번 차였을 뿐인데 소준호는 순간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냈다.장하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화들짝 놀라 온몸이 뻣뻣해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윽고 경호원이 또 소준호에게 손을 대려는 것을 보고 장하리는 바로 서주혁을 밀어내며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서주혁의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서주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는데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소준호의 폭탄 발언을 들은 장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감동을 한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불안함이 더 컸다.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들 사이의 감정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준호 씨...”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호원을 부르는 서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 서서 뭐합니까? 다 죽었어요?”곧이어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소준호를 끌고 나가버렸다.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장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서주혁 씨,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경고할게요. 지금은 엄연히 법치 사회이고 당신도 법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죠.”그러나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장하리를 강제로 끌고 들어와서는 거실문을 닫아버렸다.장하리는 그제야 비로소 무서울 정도로 서주혁의 흰 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인 그의 상처를 알아챘다.서주혁은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러자 장하리가 즉시 그에게 물었다.“당신 부하들... 소준호 씨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심산이에요?”서주혁의 부상은 여전히 그녀의 관심 밖인듯했다.손발이 점점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주혁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넋을 잃었다.과거 장하리가 죽기 살기로 서주혁을 사랑해줄 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모질게 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모질다 못해 서주혁이 다친 걸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다른 남자 걱정을 하고 있고, 모질다 못해 서주혁의 생사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다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상처가 가슴 속을 파고드는 것마냥 쓰라리고 아팠다.입술을 꾹 깨문 서주혁은 이내 침착하게
거실 안은 조용했고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장하리의 입장에서 그녀는 정말 서주혁에게 호감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의 등장만으로 그녀의 삶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원래 장하리는 평화롭게 지내면서 소준호와 혼사를 잘 상의해 수 있었지만 서주혁이 강성에 오면서 모든 일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애초에 장하리가 원했던 건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그때, 묵묵히 담배만 피우던 서주혁이 손끝으로 담뱃불을 비벼 꺼버렸다. 현재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금 전, 장하리가 소준호는 감싸던 모습뿐이었다.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지고 서주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소준호와 해본 적 있습니까?”장하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네?”“당신들 해 봤냐고요?”무례한 질문에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는 손가락마저 바들바들 떨려 났다.이 남자 정말 미친 거 아냐?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장하리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답했다.“했든 안 했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그렇다면 서주혁 씨는 또 어떤 신분으로 저에게 그런걸 묻는 겁니까?”“그렇다면 했다는 거네.”그 말 한마디에는 너무나도 깊은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그 순간, 장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방금 서주혁이 다쳤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서주혁의 얼굴은 깊은 어둠 속에 잠긴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좋지 않은 예감에 입술을 꾹 깨물고 탈출하기 위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막상 거실문을 열어보니 별장 밖에는 경호원이 대문을 지키며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서주혁은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원래도 라인이 선명했던 근육은 현재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마치 그 속에 무서운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허무하게 탈출에 실패한 장하리는 서주혁의 손에 이끌려 다시금 집안으로 끌려갔고 거대한 거실문은 다시금 무거운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곧이어 장하리는 다른 한쪽의 벽에 부딪혀
그러나 서주혁은 장하리를 상대하지 않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위층으로 향했다.위층 가장자리에 있는 방문을 열어보니 내부는 전부 새로운 가구로 다시 배치되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은은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는데 아마 고급 소독수 냄새인 것 같았다.보아하니 서주혁은 결벽이 매우 심한 모양이다.그런데 장하리는 거미줄에 걸려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먹잇감처럼 두려운 동시에 자포자기한 듯 반항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침대에 등이 닿음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하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그러나 서주혁은 장하리를 꾹 억누른 채 계속하여 입술을 포개고 키스를 이어나갔다.그 시각, 장하리의 머릿속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 거대한 파도가 온 세상을 삼켜버렸고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깊은 파도 속에서 익사할 것만 같았다.손을 들어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두 손은 너무나도 쉽게 잡히고 말았다.장하리는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입술이 벌어지고 타액이 뒤섞이며 장하리는 너무나도 화가 나 순간 서주혁의 혀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하여 그녀에게 매달렸다.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반항할 힘도 나지 않았다.곧이어 입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장하리에게 있어 이 키스는 벌을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런데 서주혁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대체 무슨 근거로 장하리를 벌주고 있단 말인가?엉망이다. 장하리의 세상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바로 서주혁, 이 남자가 나타나고서부터.눈시울이 붉어지고 그대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서주혁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장하리를 침대에 꽉 누른 채 서로의 입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키스를 퍼부은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한편, 장하리는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부릅뜨고 서주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하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는 아무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아도 조금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러자 서주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
한편, 대성통곡을 하는 장하리의 얼굴을 보다 보니 서주혁은 조금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아마 장하리가 그의 앞에서 이렇게 대성통곡을 하는 건 처음이라지?장하리는 대부분의 고통을 묵묵히 홀로 삼켜내는 편이었다. 서주혁이 아무리 상처를 줘도 단지 예쁜 두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사랑, 슬픔, 모든 감정이 그 눈에 숨겨져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거의 울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침대에 누워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울고 있는 장하리의 모습을 보니 서주혁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동시에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비열함을 느꼈다.오직 서주혁만이 그녀를 이렇게 울릴 수 있다.과거에도, 지금도.몸 안의 무서운 기세가 사그라들고 서주혁의 손가락은 끝내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장하리가 막 한숨 돌리려는데 곧이어 서주혁이 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꾹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순간 머릿속은 팡 터져버렸고 얼굴은 활활 불타오르는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변태! 미친놈! 이거 놔! 나가 죽어버려!”마음속 가장 소중한 곳을 짓밟힌 듯 장하리는 생각나는 대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그런데도 장하리가 끊임없이 되뇌는 것은 미친놈이라는 세글자뿐이었다.더러운 욕이 그토록 많은데 막상 하려니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장하리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었다.장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서주혁이 또다시 그녀의 몸을 짓누르자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인재인 법이다.그녀의 외투는 이미 벗겨진 상태였고 신발도 걷어차여 애먼 곳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그때, 서주혁이 침대 위의 이불을 잡아당겨 두 사람을 덮어씌웠다.장하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손을 대지 않아도 그녀를 모욕할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다.너무나도 다행이지만 만약 서주혁이 정말 스킨쉽을 이어나갔더라면 장하리는 아마 내일 아침 벽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렸을 것이다.서주혁은 장하리의 옆에 누워 어둠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