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혁은 장하리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가 있나요?”장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켜려고 했다.하지만 물은 이미 오래되어 차가워져 있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서주혁이 이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종업원을 불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했다.장하리의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서주혁을 미워할 기력조차 없었다.서주혁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장하리는 팔을 베개 삼아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잠시 후 서주혁은 부루펜 진통제 한 팩을 들고 돌아왔다.그는 약 포장을 열고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들어 올린 후 약을 하나 입에 넣어 주고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다.장하리는 긴 속눈썹을 떨며 손을 흔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이미 종업원을 불러 의자를 정리하게 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장하리의 허리에 둘렀다.장하리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서주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눈앞이 희미하게 흐릿해진 그녀는 겨우 그의 턱선만을 볼 수 있었다.장하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서주혁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아직 이사를 준비 중이라 서주혁의 집은 장하리의 맞은편 집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소파에 눕혀진 장하리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정신이 조금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서주혁의 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지금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걱정할 게 뻔했고 그렇다면 부모님이 출국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또한 그녀의 옷은 이미 더러워져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장하리는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부루펜의 약효가 서서히 올라오면서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고마워요.”서주혁은 다시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넸다.“좀 더 마셔요.”장하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서주혁은 나지막이 말했다.“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요. 필요한 물건들은 사다 놨으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장하리는
서주혁이 보겸이를 조수석에 내려놓자 장하리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제가 안고 뒷좌석에 앉을게요.”서주혁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서보겸은 그녀의 품 안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기 직전 장하리는 차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서 대표님, 보겸이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이면 유치원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무슨 뜻이죠?”장하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차분히 말했다.“제가 느끼기에 보겸이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아픈데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고가 날 수밖에 없죠. 서 대표님께서 보겸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보다는 집에서 돌보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장하리,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잖아.”“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만약 보겸이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서 대표님이 저를 어떻게 하실지, 유치원에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셨나요? 보겸이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제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보겸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으면 적어도 저한테 먼저 알려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미리 대비할 수 있고요. 아니면 매번 이렇게 되면 결국 힘든 건 보겸이잖아요.”서주혁은 그녀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냉철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자신은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장하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보겸이는 좀 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해요. 보겸이는 서 대표님이 항상 곁에서 돌봐야 할 아이예요. 유치원이 보겸이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서주혁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병원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의 눈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서렸다.“어제 보겸이한테 뭐라고 약속했는지 기억 못 해요?”장하리는 잠시 당황한
장하리의 가슴은 크게 요동쳤고 손바닥은 저릿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서주혁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뭐가 무서워? 내가 손이라도 댈까 봐?”“서 대표님 말이 맞아요. 그런데 혹시 제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서 대표님이 저한테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장하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은 서씨 본가에서 그가 내리친 그 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서주혁의 피를 닦던 손이 멈췄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장하리 역시 그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근처에 앉을 자리를 찾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서주혁은 마치 제자리에 굳어버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에 깊이 찔려 속수무책이었다.이제 장하리는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서주혁이 의도적으로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려고 도발하면 장하리는 더 큰 힘으로 맞받아친다.그러나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서주혁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더욱 잘 알고 있었다.장하리는 서주혁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있다가 곧 의자가 살짝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녀 옆에 앉았다.“하리야.”서주혁이 조용히 불렀다.“우리 친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미안해.”“서 대표님이 제게 미안할 건 없어요. 오늘 보겸이 일은 제 책임입니다.”“아니, 미안할 일이 있어. 정말 미안해.”장하리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소준호의 전화였다.장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서주혁이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여보세요, 준호 씨?”“하리야, 나 일 끝났어. 지금 너희 집으로 가도 될까? 가는 중이야. 우리 부모님도 같이 왔어. 아버님, 어머님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지? 잠깐만이라도 인사드리려고.”소준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서보겸의 손가락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서보겸은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한다.그런데 지금 또 다른 남자가 장하리를 좋아하고 있으니 서주혁은 제대로 당황해버린 것이다.물론 이 상황에서 서보겸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결국 진실을 알게 되어도 변하지 않을 엄마의 모습이었다.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보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아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서주혁은 서보겸을 품에 안고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부드럽게 달래주었다.“아들, 착하지. 자고 있어.”서보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들에게 이불을 꼭 덮어준 뒤, 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계단 입구로 이르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장하리를 바라보았다.장하리의 한 손은 옆 선반에 수갑으로 채워져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하리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서주혁은 그렇게 그녀의 옆에 앉아 30분 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하리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서주혁 씨,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목마르진 않아요?”뻔뻔한 서주혁의 얼굴을 보자니 확실히 마음이 부글부글 들끓어 오르긴 했다.씩씩거리는 장하리와는 달리 서주혁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물 두 잔을 떠오고 준비해온 타이레놀을 꺼내 장하리에게 건네주었다.“아직도 아픕니까?”하지만 장하리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장하리에 서주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단을 내려오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지만 막상 그녀의 앞에 서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몰려왔다.확실히 지금 당장 혼인신고서를 꺼내면 그녀에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합법적인 부부이기에 장하리는 현재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할 수도, 약혼할 수도 없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하지만 장하리가 그들이 결혼하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서주혁은 싸늘한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더니 장하리를 다시 끌어오려 손을 뻗었다.그러자 장하리는 순간 손을 움츠리더니 그를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이제 그녀도 서주혁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돈도 많고 얼굴도 나쁘지 않은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평범한 장하리에게 집착한단 말인가?그리고 같은 시각, 장하리가 피하는 바람에 서주혁의 안색은 더욱 험악해졌다.쓸쓸히 허공에 머무른 손을 거두며 서주혁은 피식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같은 남자로서 그의 도발을 느낀 소준호가 버럭 화를 냈다.“하리야, 저 사람 너한테 해코지한 건 아니지?”장하리가 막 고개를 가로저으려 할 때, 소준호는 대뜸 그녀의 손목을 가로채 가더니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며 소준호의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져 갔다.“설마 저 사람이 너한테 이런 거야? 학대했어?”그러나 괜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장하리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준호를 다독여주려 안간힘을 썼다.“아뇨, 준호 씨, 우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주혁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만하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주혁은 손을 들어 강제로 장하리를 끌어당겼다.그의 야만에 놀란 소준호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갑작스러운 무게감에 고개가 한쪽으로 쏠리고 서주혁 역시 무의식적으로 소준호를 발로 걷어찼다.제원이든 어디든 지금까지 서주혁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물론 성인 남자들 간에도 힘의 차이는 존재했다. 서주혁은 군대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싸움 솜씨가 일품이었고 갖은 역경을 겪으며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준호처럼 곱게 자란 사람이 어떻게 서주혁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한번 차였을 뿐인데 소준호는 순간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냈다.장하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화들짝 놀라 온몸이 뻣뻣해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윽고 경호원이 또 소준호에게 손을 대려는 것을 보고 장하리는 바로 서주혁을 밀어내며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서주혁의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서주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는데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소준호의 폭탄 발언을 들은 장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감동을 한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불안함이 더 컸다.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들 사이의 감정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준호 씨...”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호원을 부르는 서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 서서 뭐합니까? 다 죽었어요?”곧이어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소준호를 끌고 나가버렸다.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장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서주혁 씨,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경고할게요. 지금은 엄연히 법치 사회이고 당신도 법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죠.”그러나 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장하리를 강제로 끌고 들어와서는 거실문을 닫아버렸다.장하리는 그제야 비로소 무서울 정도로 서주혁의 흰 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인 그의 상처를 알아챘다.서주혁은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러자 장하리가 즉시 그에게 물었다.“당신 부하들... 소준호 씨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심산이에요?”서주혁의 부상은 여전히 그녀의 관심 밖인듯했다.손발이 점점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주혁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넋을 잃었다.과거 장하리가 죽기 살기로 서주혁을 사랑해줄 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언젠가 이렇게 모질게 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모질다 못해 서주혁이 다친 걸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다른 남자 걱정을 하고 있고, 모질다 못해 서주혁의 생사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다쳐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상처가 가슴 속을 파고드는 것마냥 쓰라리고 아팠다.입술을 꾹 깨문 서주혁은 이내 침착하게
거실 안은 조용했고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장하리의 입장에서 그녀는 정말 서주혁에게 호감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의 등장만으로 그녀의 삶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원래 장하리는 평화롭게 지내면서 소준호와 혼사를 잘 상의해 수 있었지만 서주혁이 강성에 오면서 모든 일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애초에 장하리가 원했던 건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그때, 묵묵히 담배만 피우던 서주혁이 손끝으로 담뱃불을 비벼 꺼버렸다. 현재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금 전, 장하리가 소준호는 감싸던 모습뿐이었다.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지고 서주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소준호와 해본 적 있습니까?”장하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네?”“당신들 해 봤냐고요?”무례한 질문에 화가 치밀어오른 장하리는 손가락마저 바들바들 떨려 났다.이 남자 정말 미친 거 아냐?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장하리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답했다.“했든 안 했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그렇다면 서주혁 씨는 또 어떤 신분으로 저에게 그런걸 묻는 겁니까?”“그렇다면 했다는 거네.”그 말 한마디에는 너무나도 깊은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그 순간, 장하리는 덜컥 겁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사실 방금 서주혁이 다쳤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겁을 먹고 있었다.서주혁의 얼굴은 깊은 어둠 속에 잠긴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좋지 않은 예감에 입술을 꾹 깨물고 탈출하기 위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막상 거실문을 열어보니 별장 밖에는 경호원이 대문을 지키며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서주혁은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원래도 라인이 선명했던 근육은 현재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마치 그 속에 무서운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허무하게 탈출에 실패한 장하리는 서주혁의 손에 이끌려 다시금 집안으로 끌려갔고 거대한 거실문은 다시금 무거운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곧이어 장하리는 다른 한쪽의 벽에 부딪혀
그러나 서주혁은 장하리를 상대하지 않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위층으로 향했다.위층 가장자리에 있는 방문을 열어보니 내부는 전부 새로운 가구로 다시 배치되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은은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는데 아마 고급 소독수 냄새인 것 같았다.보아하니 서주혁은 결벽이 매우 심한 모양이다.그런데 장하리는 거미줄에 걸려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먹잇감처럼 두려운 동시에 자포자기한 듯 반항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침대에 등이 닿음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하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그러나 서주혁은 장하리를 꾹 억누른 채 계속하여 입술을 포개고 키스를 이어나갔다.그 시각, 장하리의 머릿속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 거대한 파도가 온 세상을 삼켜버렸고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깊은 파도 속에서 익사할 것만 같았다.손을 들어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두 손은 너무나도 쉽게 잡히고 말았다.장하리는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입술이 벌어지고 타액이 뒤섞이며 장하리는 너무나도 화가 나 순간 서주혁의 혀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하여 그녀에게 매달렸다.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반항할 힘도 나지 않았다.곧이어 입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장하리에게 있어 이 키스는 벌을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런데 서주혁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대체 무슨 근거로 장하리를 벌주고 있단 말인가?엉망이다. 장하리의 세상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바로 서주혁, 이 남자가 나타나고서부터.눈시울이 붉어지고 그대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서주혁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장하리를 침대에 꽉 누른 채 서로의 입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키스를 퍼부은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한편, 장하리는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부릅뜨고 서주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하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는 아무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아도 조금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러자 서주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
지금 공지민은 사실상 온시환에게 감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온시환은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지는 않았다.오하윤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공지민은 별다른 감정 없이 받았다. 사실 그녀는 이 사람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하윤의 첫 마디가 공지민을 놀라게 했다.“지민아,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누가 은우를 죽음으로 몰았는지 알아냈어.”공지민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발견했다.온시환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오하윤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전화 속에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널 정말 싫어했어. 왜냐하면 나도 은우를 좋아했거든.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어. 그때 내 계부가 자주 날 때렸고 난 늘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어. 그런데 은우는 그런 나를 마치 천사처럼 도와줬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나를 위로해 줬거든. 신고하자고 말했지만 난 너무 겁쟁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후로 난 계속 은우를 지켜봤어. 은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니,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 너도 알잖아? 은우는 그 자체로 모든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은우를 찍은 사진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예전에 난 계속 널 질투했어. 은우는 언제나 널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동안 난 네가 돈 때문에 온시환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이제야 알았어. 지민아, 오늘 밤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됐어. 이걸 너한테 알려주는 게 내 사과가 될 거야. 잠깐 나올 수 있어?”“알겠어.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공지민은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은 마침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공지민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조금 의아했다.“무슨 일이에요, 지민 씨?”“혜인 씨, 나 잠깐 밖에 좀 나가고 싶어요. 시환 씨에게 전화해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원아정의 얼굴에는 잠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오하윤이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서둘러 표정을 감췄다.오하윤은 아직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문득, 공지민이 왜 그렇게 앨범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구은우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진이 거의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게 아닐까...오하윤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원아정은 다시 말을 꺼냈다.“하윤아, 지민이 지금 제원에 있지?”원아정이 평생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공지민이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여자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있어. 근데 내가 따로 만나진 않았어. 너 온시환 알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온시환이라고?’원아정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연승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만간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원진이 원씨 가문을 장악한 이후 원아정은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하지만 누려야 할 대접은 빠짐없이 받았다. 원진이 돈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하윤아, 나 곧 결혼해. 상대는 연승혁이야. 넌 잘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온시환과 같은 무리야. 앞으로는 지민이를 만날 일도 많겠지.”고등학교 시절 원아정은 공지민을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구은우가 공지민을 지켜주며 이 괴롭힘은 끝이 났으나 원아정의 마음속 공지민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원아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한편 오하윤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한때 그녀도 공지민을 질투했다. 공지민이 구은우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은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은 뒤 오하윤은 갑자기 공지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예전의 공지민은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구은우 앞에서는 유일하게 환하게 웃곤 했다.그녀가 지금처럼 타락하고 온시환 같은 남자에게 기대고 있는 이유는 구은
룸 안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원아정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악랄한 표정이 스쳤다.그녀는 얼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오하윤이었다.원아정은 고등학교 시절 오하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구은우는 학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만 보였다.이 사실에 분노한 원아정은 연씨 가문 사람을 알게 되면서 구은우의 외모가 연씨 가문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 정보를 연씨 가문에 흘렸다.‘내가 못 가지는 건, 공지민 그년도 가지지 못하게 할 거야.’“하윤아, 나 제원에 왔어. 나올 수 있어? 얼굴 좀 보자.”오하윤은 원아정이 무서웠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겉으로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척했지만 뒤로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 일에서도 아무런 손해를 입지 않았다.게다가 구은우를 향한 그녀의 집착은 누구나 알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보며 모두가 의아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다.구은우와 공지민이 졸업할 때까지 원아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오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요즘 심심했던 오하윤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에 곧장 약속 장소를 정했다.약속 장소에서 만났을 때 오하윤은 자신이 너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깨달았다. 온몸을 명품으로 둘러싼 그녀와 달리, 원아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이 천박한 졸부처럼 느껴졌다.“하윤아, 오랜만이야.”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오하윤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모두가 알다시피 원아정은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돈을 아낌없이 쓰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아정아, 갑자기 제원에 웬일이야? 너희 집 사업은 여기가 아니었잖아.”당시 원아정 집안이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고 대학 입시조차 필요 없이 앞길이 보장된 그녀를 부러워하며 줄을 서서 비위를 맞추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지민이 잘 지켜. 괜히 나가서 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온시환은 속이 상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술집으로 발길을 옮겨 한잔하려 했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원아정을 마주쳤다.‘원아정이 제원에 왔다고?’그녀 곁에는 원진이 서 있었다. 원진은 시선을 앞만 향한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온시환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온시환도 마침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옆에 있는 룸의 문을 열며 말했다.“같이 한 잔 할래?”원진은 망설임 없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원아정도 서둘러 뒤따랐다. 얼굴에는 상류층 특유의 오만함과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원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과거 원진은 원씨 가문을 철저한 강경책으로 정리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은밀한 거래를 했고 가문 내 반대 세력들은 대부분 사라졌다.그런 원진 앞에서 원아정은 잔뜩 움츠린 채 룸 안의 의자에 앉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원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연승혁과의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손을 꽉 움켜쥔 원아정은 연승혁을 떠올리니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얼마 전 연승혁을 만나러 연씨 가문에 갔다가 그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익숙해 보였다.겁이 많은 원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연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연승혁, 그 끔찍한 인간!’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승혁이 비록 잔혹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 구은우의 존재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원아정은 원씨 가문에서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원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활에 지친 지 오래였다.연승혁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그의 아내가 된다면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