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지가 급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서둘러 옆에 놓인 헬멧을 집어 들었다.“언니, 나도 같이 먹고 싶지만 정말 급한 일이 생겼어. 경기 끝나고 다시 올게. 안녕.”강연지는 항상 바쁘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나타나면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강민지는 지루함을 느꼈다. 성혜인도 바쁘고 강연지도 바쁜데 자신만 이렇게 여유로운 재벌가 아가씨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그녀도 예전에는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두 달 만에 강상원에게 200억 원의 손해를 안겨주었다. 그때 강상원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민지야, 우리 강씨 집안의 재산으로 네가 매일 남자를 만나는 데는 충분하겠지만 창업하면 아마 몇 년 못 버틸 거야.”그 말에 강민지는 화가 나서 발끈했지만 자신에게 사업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 후 다른 회사에서 인턴을 해보려고 했지만 인턴 월급은 1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녀의 하루 식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강상원의 말이 맞았다.“네 통장 잔액에서 나오는 이자만으로 한 달 월급보다 훨씬 많아.”그 충격에 강민지는 밥만 축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날들로 접어들었다.그녀는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강상원은 그녀에게 요구하는 바가 극히 적었다. 절대 다른 제약으로 그녀를 구속하지 않았다.그래서 다른 재벌가에서 큰돈을 투자해 자녀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는 동안, 강민지는 성혜인과 함께 국내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강민지는 어릴 적부터 다섯 개의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영어 전공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통역 일을 할 것도 아니었으니 쓸모가 별로 없었다.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했다. 강민지는 눈앞에 남아 있는 손대지 않은 음식을 보며 방금 그 종업원을 떠올렸다.강민지는 한 번 결심이 서면 절대 망설이지 않았다. 신예준이 마지막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입을
레스토랑이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요하게 일식을 판매했으며 돈 많은 회원의 도움으로 레스토랑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었다.강민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솔직히 알려줘요. 이 레스토랑 식재료가 정말 모두 수입품이에요?”숨결이 귓가에 닿자 신예준은 고개를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강민지 역시 의식하고 고개를 뒤로 뺐다.“아닌가 보네요. 발해 쪽에서 가져온 거겠죠.”신예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민지 씨, 계속 이야기하다간 제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겠어요.”강민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잃으면 그만이죠. 웨이터 일자리 찾기가 어디 어렵겠나요?”말을 꺼내자마자 강민지는 후회했다. 신예준이 입술을 짓씹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를 보아온 바로 이 동작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인 듯했다.게다가 강민지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으므로 마치 고의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렸다.그녀는 황급히 사과했다.“아, 죄송해요. 웨이터님을 말하려던 게 아니라 사실 저도 웨이터거든요. 샤브샤브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5개의 샤브샤브 가게에서 일했고 저는 이 웨이터 일은 찾기가 매우 쉽다고 생각했어요. 제원은 결국 대도시이고 어디든 수요가 많기 때문에요.”신예준은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는 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강민지는 얼른 옆에 있는 공용 젓가락을 가져다가 튀김 하나를 집어주었다.“우리 모두 웨이터가 이런 음식을 자주 먹지 못 하잖아요. 발해에서 온 생선이라도 값이 싸지 않으니 저와 함께 드셔 보실래요?”“좋습니다.”그는 이제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금방 처음 본 두 사람은 이렇게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강민지는 줄곧 조용히 신예준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는 밥을 먹을 때 느릿느릿하게 먹었고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는 소리조차 가벼워 전혀 웨이터로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여느 부잣집 자제처럼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었다.신예준은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그들은 모두 진미경을 알고 있었다. 진미경은 비록 전 남편과 이혼했지만 돈을 많이 나눠 가졌다. 그녀는 지금도 그 주얼리 회사의 주주였으며 매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사람이었다.하여 회사에서도 발언권이 있는, 권력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그 회사는 바로 강씨 가문의 라이벌 회사인 NG 주얼리 회사였다.진미경의 전남편은 여전히 회사의 대표이고 진미경 역시 주주였기에 그의 언행이 지나치더라도 주변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추켜세울 수밖에 없었다.게임은 또 한 번 진행되었고 신예준은 게임에 재능이 없는지 또 져버렸다.이번에 진미경은 새 애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물었다.“여보는 이 사람이 진실 게임을 했으면 좋겠어? 아니면 벌칙을 받았으면 좋겠어?”“벌칙으로 하죠. 계속 술만 마시면 재미가 없잖아요. 이번엔 반드시 벌칙이어야 해요.”“음, 아무 여자나 찾아서 10초 동안 키스하는 걸로 하죠.”현장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집에 남편이 있거나 혹은 누군가 스폰으로 데려온 여자였다. 신예준이 누구를 벌칙 상대로 뽑든 모두 미움을 살 수 있는 것이었다.만약 진미경을 벌칙 상대로 한다 해도 굴욕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멀찌감치서 보고 있던 강민지는 신예준이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그녀를 등지고 있었어도 강민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또다시 입술을 짓씹었을 거란 것이라는 걸.벌칙을 말하는 남자는 진미경이 옆에 앉아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고결한 척했었잖아. 스폰을 받는 사람을 업신여겼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키스하고 비위 맞춰 봐.현장에서 순간 야유가 터져 나왔고 스폰으로 온 여자들은 모두 신예준이 자기를 고를까 봐 뒤로 숨었다.강민지는 신예순이 걱정되어 그쪽으로 걸어가려 했다.그런데 간 지 몇 걸음 되지 않아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예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뒤통수를 받쳐 들었다.이렇게 가벼운 키
그녀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그러나 신예준은 그녀를 밀어내고 바닥에 놓여 있던 생수를 들어 보였다.“물 많이 마셔요.”혹시 취한 줄 아는 건가?강민지는 순간 우스워 피식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아, 진심이라니까요. 예준 씨 여자 친구 없죠?”“하루에 알바는 몇 개 해요? 제가 시간 나면 찾아갈게요. 먹을 것 가져다줄게요.”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그저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신예준은 보기에 단순한 사람이므로 아마 며칠 안에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는 강민지의 착각일 뿐이었다.신예준은 생수를 강민지의 손에 쥐여준 뒤 돌아섰다.그의 의외의 반응에 강민지가 쫓아가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신예준은 그녀를 전혀 상대하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 후에야 멈춰 섰다.그의 뒤에 멈춰 선 강민지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예준 씨, 번호 좀 줘요. 저 제원에서 친척도 없고, 집에는 남동생 하나뿐인데 가족들은 제가 알바한 돈으로 동생 뒷바라지 해주길 바라고 있어요.”그녀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이에 신예준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민지의 휴대전화에 번호를 타자하기 시작했다.그가 버스를 타고 가자 강민지는 이번에는 쫓아가지 않았고 작은 아파트 하나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가난한 척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끝까지 연기해야 했다.곧 그녀는 별장에 있는 수영장보다도 작은 아파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흐뭇해했다.새벽 3시, 그녀는 성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좋은 소식. 나 곧 연애할 것 같아.]성혜인의 답장은 빠르게 돌아왔다. 최근 회사에 몇 가지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기에 설계를 책임진 그녀는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했다.[축하해. 이번엔 어느 연예인이야?]강민지는 종래로 남자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번 이런 말 했을 때 그 상대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부잣집 아가씨인 강민지는 상대에게 60억을 던져주었고, 성혜인이 두 사람이 연애하고 있을 거로 생각할 때쯤
그녀는 신예준에게 메시지를 보내 밥은 먹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하지만 신예준은 아주 간결하게 답장을 보냈고 이는 강민지에게 관심이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하지만 상대의 관심이 없을수록 강민지는 그에게 더욱 신경을 썼다.그녀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신예준은 굳건하게 자신을 소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강민지의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강민지는 즉시 사람을 시켜 신예준이 알바하는 가게를 알아본 후 우연히 만난 척하려 했다.그러나 신예준의 스케줄은 너무 규칙적이었다. 매일 4가지 알바를 하고, 일이 끝나면 집에 가고 다시 나오지 않았으며 1주일에 한 번 슈퍼마켓을 갔다.강민지에 비하면 무서울 정도로 규칙적인 스케줄이었다.강민지는 자신의 아버지 강상원마저도 신예준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고 느꼈다.그는 알바 외에 별다른 유흥을 하지 않았고 항상 돈을 벌고 있었다.이렇게 매일 기다리다가는 언제 우연히 만날 수 있겠는가.강민지는 결국 또 참지 못하고 이내 강연지를 불렀다. 두 사람은 다시 신예준의 아르바이트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들어오기 전 강민지는 신신당부했다.“사촌 언니 말고 언니라고 불러.”강민지는 연지가 해야 할 역할을 몇 번이나 중복해서 말했다.강연지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언니 지금 사기 치러 가는 거예요?”“연애하려고 하는 일들이 어떻게 사기겠어.”강연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두 사람은 가게로 들어가 주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신예준이 아닌 다른 종업원이 나왔다.2시간이나 기다렸으나 신예준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 신예준이 다른 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손님과 말다툼이 생긴 듯했다.가장 앞자리에 앉은 남성이 술 1잔을 신예준의 얼굴에 뿌려버렸고 그의 머리카락은 술에 흠뻑 젖게 되었다.강민지가 연지에게 눈짓을 하자 연기를 시작했다.“언니 이런 거 안 먹어봤지? 촌뜨기 같으니라고. 지금 내가 언니 데리고 나와준 덕분에 언니가 세상
몇 초 후에야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좋아요.”“혹시 손님과 술자리를 한다고 월급이 깎이는 건 아니겠죠?”“아닙니다. 이미 퇴근한 시간이라서.”강민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누군가 당신에게 술을 뿌리는 걸 보았어요. 갑자기 우리가 정말 동병상련이라고 느껴졌어요. 당신 가족들은요?”“다 죽었습니다.”이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천천히 술잔을 돌리며 평온한 표정이었다.강민지가 순간 멈칫하며 되물었다.“다 죽었다고요?”“네.”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강민지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는 장난이 섞인 말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진지해졌다.“아, 고의가 아니었어요. 한잔하실래요?”그녀가 술잔을 들어 신예준에게 가득 따랐다.신예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강민지는 문득 이런 착각이 들었다. 마치 그녀의 오늘 밤 계획이 모두 간파된 것 같은 느낌.그러나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은 다시 평온하고 순해 보였다. 두 사람이 잔이 부딪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강민지 자신이 주량이 꽤 좋다고 생각했으므로 신예준을 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끝까지 마셨을 때 먼저 눈앞이 흔들린 것은 그녀였다.강민지는 천천히 한쪽의 책상을 짚고 일어섰는데 머릿속에는 아주 조금의 이성만 남아 있었다.“늦었으니 집에 가죠.”“갑시다.”신예준 역시 취기가 가득했고 그는 강민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집이 어디예요?”강민지는 여전히 자신의 오늘 밤 목적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신예준과 잠을 자기 위해 이 일련의 일들을 벌인 것이었다.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에 완전히 취한 척 연기한 것이다.신예준은 그녀를 길가로 부축한 뒤 또 물었다.“몇 번 버스를 타야 해요? 집은 어느 쪽인데요?”강민지는 잠자코 조용히 있었고, 신예준은 결국 그녀를 멀지 않은 호텔 입구로 데려갔다.강민지는 그가 자신을 부축해 걸어갈 때 걸음걸이가 온전치 않다는 것
신예준이 호텔을 나선 직후 서민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 어젯밤 집에 안 갔지?”“응.”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 신예준은 능숙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내가 안 간 건 어떻게 알았어?”“어젯밤 집에 찾아갔었어. 퇴근하고 야식까지 사 갔는데 네가 없어서 혼자 먹었잖아. 꼬시는 건 성공했어?”서민규는 신예준에게 최근 목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강씨 가문의 아가씨였다.돈이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은 사람이다. 만일 나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된다면 강 씨 가문 전체가 신예준의 것이 될 것이다.강씨 가문의 대표에게는 외동딸이 있었고 매우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들었다.“안 잤어.”신예준이 직설적으로 대답한 뒤 날이 밝아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나중에 말할게.”토요일이었으므로 서민규는 출근하지 않았고 그저 집에서 신예준이 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빠르게 도착한 신예준은 분리수거 지점에서 서민규와 맞닥뜨렸다.서민규는 마침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중이었다. 쓰레기통 주변에는 몇 개의 오물이 있었기에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밟을 수도 있었다.그가 오는 것을 본 서민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호텔에서 바로 오는 거야? 이 자식아, 솔직히 말해봐. 정말 안 잤어? 그걸 어떻게 참아? 강씨 가문 아가씨 가벼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확실히 가벼워. 신예준이 강민지가 자신에게 먼저 키스한 것을 떠올리며 미간을 다시 한번 찌푸렸다.”서민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큰둥해졌다.“어떻게 그걸 참지? 내가 네 얼굴이었으면 여자 친구도 몇 명이나 사귀었겠다.”서민규는 평범한 외모에 키는 175센티미터로 남자들 사이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예준과 친구였다.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두 사람은 함께 골목의 집으로 향했는데 이 집은 매우 외지고 넓지도 않았지만 발 디딜 곳은 있었다.이곳은 서민규 본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신예준처럼 집세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신예준
서민규가 그이 어깨를 톡톡 치며 위로했다.“잠시만 참으면 되잖아. 잠깐만 눈 딱 감고 잠자리에 들면 되는 거야. 난 정말 질투나.”“됐어. 속이 쓰릴 정도로 아프니까 인제 그만 말하자. 강민지가 내 앞에 있었다면 3초 망설이는 것조차 그 사람에게 미안했을 거야.”그는 강민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가장 번화한 쇼핑몰에서 경호원을 거느리고 사치품을 살 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신예준은 무언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혹시 강제적으로라도 흥분하게 하는 약이 있을까?”방금까지 물을 마시고 있던 서민규는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했다.“그런 것도 필요해? 너 혹시 무슨 숨겨진 병이 있는 건 아니지?”“아니 그 사람을 앞에 두고선 절대 흥분하지 못하겠어.”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민지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이는 듯한 웃음이었다.강민지가 예쁘든 예쁘지 않든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있어. 내 여동생의 일로 많은 의사를 알게 되었는데 네가 원한다면, 구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몸에 부작용이 있을지도 몰라. 정말 필요해? 그렇게 예쁜 사람을 만나면서 흥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심지어 강씨 집안 아가씨인데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얼마나 슬퍼할까.”신예준은 이번에는 대답하기조차 귀찮아졌다. 조희서를 위해서가 아니었더라면...신예준은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나한테 한 병만 보내줘. 비타민 약병에.”서민규는 계속 물을 마시며 참지 못하고 꾸중했다.“내가 만약 강민지였다면 진실을 알고 죽고 싶을지도 몰라. 그분은 지금 오로지 널 붙잡기 위해 애를 쓰는데. 너 지금 이거 사기 치는 거야.”신예준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서민규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조희서랑은 한 적 없어?”“걔는 아까워서 못 건드리겠어.”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서민규는 이제는 정말 입을 떡 벌렸다 그를 쓰레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사랑에 미친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아쉽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