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은 강하랑은 사실 이젠 무덤덤해졌다.그녀는 심지어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일이란 사람 하기에 달렸다.오늘 이 상황도 도박이 될 것이다.연바다에게 끌려가 남은 평생 시어스에서 살면서 매일 그와 말다툼을 벌여 어떻게든 도망칠 궁리를 하게 되거나, 경찰에게 체포되어 앞으로 더는 악몽처럼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전부 다 했다. 선심이든 무엇이든 어차피 선택권은 그녀의 손에 없었다.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이미 밥을 먹은 상태고 배를 곯는 사람은 그녀가
강하랑은 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하얀 백지장이었다. 애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며 밖을 향해 달렸다.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녀보다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밖을 향해 달리기도 전에 두 발이 허공에 들렸다.다시 한번 총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녀의 귓가에서 울려 퍼진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의 눈앞에 쓰러진 온서애가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지만, 미약한 힘은 보는 사람마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둘러메고 있는 남
남자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다시 몸을 틀어 길을 안내했다.어두운 방에서 나오자 눈 부신 햇살이 강하랑의 눈에 들어와 한참 지나서야 적응할 수 있었다.주위엔 무성한 나무뿐이었다. 고개를 드니 나무 위에 핀 진달래가 보였다.바닥엔 이끼가 나무의 밑동까지 올라왔다. 그 위로 달팽이가 느릿하게 나무로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나뭇잎에서 떨어진 물방울에 달팽이는 머리를 쏙 넣어버렸다.산길이 험한 것이 아니었다면 강하랑은 이곳이 동화 속에 나오는 원더랜드가 아닐까 생각했다.역시나 사람이 발을 디디지 않은 곳엔 아름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다가 연바다의 복부로 시선이 향했다.안에 입은 셔츠는 겉옷에 가려져 있었고 심지어 검은 셔츠였다. 설령 상처가 벌어졌다고 해도 별장에서 갈아입었던 흰 셔츠보다 잘 알리지 않았다.그저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만 보였다. 강하랑은 다른 곳에서 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하랑이 뭐 보는 거야?”연바다는 자신을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입꼬리를 올렸다.강하랑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어딜 다쳤나 해서. 심각하
평소의 연바다라면 어떻게든 참으며 걸었을 것이다.남자가 멀리 가기도 전에 연바다가 그를 불러세웠다.연바다의 목소리엔 다소 힘이 없었다. 아까처럼 장난스레 비웃는 목소리가 아니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돌아가는 길 알죠? 그냥 돌아가세요.”“연바다 님!”남자는 당황했다.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연바다가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기 때문이다.연바다는 자신이 이 산을 벗어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물론이고 그가 죽길 바란다며 저주했던 강하랑도 멍한 표정을
연바다는 심하게 다쳤다. 강하랑이 마음만 먹으면 열쇠를 찾아서 도망갈 수 있다는 말이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그녀가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도망가는 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나뭇가지 하나 찾아서 상처에 찔러도 되었다. 그런데도 남자가 강하랑에게 부탁하는 것은 4년이라는 시간이 쌓은 정과 그녀의 인간성을 믿었기 때문이다.강하랑의 말을 들은 남자는 연바다를 힐끗 봤다. 그리고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꾹 감았다. 이제는 약을 찾으러 갈지, 서둘러 하산할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뭐가 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연바다는 강하랑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그래, 아주 잘 살았네.”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의 허약한 모습은 거짓인 듯 예리한 눈빛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강하랑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단하랑, 네가 진짜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면 왜 날 용서해 주지 않아? 지난 4년 동안 난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잘만 용서해 주면서 나는 안 되는 거야? 왜?”갑자기 흥분을 해서 그런지 연바다는 피를 토해냈다. 이런 상황에
강하랑은 방전된 로봇처럼 멍하니 있었다. 연바다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자기 몸에 칼을 꽂은 것은 느껴졌지만 벗어날 힘이 없었다.그는 지금도 힘을 쓰고 있었고 몸속에 꽂힌 칼을 좌우로 비틀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는 그녀의 손을 타고 주르륵 흘러나왔다.“연바다...”강하랑은 잠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웃음소리는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하랑아... 내가 그동안 너한테 많은 걸 가르쳐줬지. 이제 마지막 하나를 가르쳐줄게. 복수는 이렇게 직접 하는 거야.”“...”“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