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유성의 말에 각종 카메라와 마이크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어느새 카메라를 돌렸을 땐 짙은 검은 연기만 남아 있었고 불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타오르고 진압되기까지 족히 20분 정도가 걸렸다.20분 만에 불길이 사라진 것이다.심지어 소방대원도 도착하기 전이다.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이 놀라움을 느끼고 있을 때 강하랑의 부축을 받고 있던 정수환이 앞으로 나섰다.잔뜩 엄숙한 표정을 짓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카메라를 마주 보았다.그는 현장을 둘러보더니 이내
“강하랑, 너 미쳤어?”연유성은 그녀가 화재가 벌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바로 무의식적으로 강하랑을 잡아당겼다.강하랑은 연유성에게 잡힌 팔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심지어 그 손이 역겹기도 했다.그녀는 팔을 빼내려고 버둥거렸지만, 남자의 힘을 뿌리치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연유성, 이거 놔! 너야말로 미쳤어?!”그녀는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과 발을 움직이며 연유성을 향해 퍽퍽 찼다. 그가 입은 정장이 얼마나 비싼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여하튼 그녀
병원.지승우가 부리나케 도착했을 때, 연유성은 아직도 응급 수술 중이었다.수술실 앞에는 강하랑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얼굴에 검은 연기의 흔적을 미처 씻어내지 못한 그녀의 몰골은 아주 처량했다.“사랑 씨, 유성이는요? 이번에는 또 어쩌다가 지옥문 두드리러 갔는데요?”강하랑을 발견한 지승우는 숨을 돌릴 새로 없이 헐레벌떡 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강하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침묵에 잠겼다.연유성이 사고를 당한 데는 강하랑의 책임이 컸다. 만약 그녀가 연유성을 말렸다면, 만약 그녀가 직접 정수환을 부축했다면, 지
강하랑은 단씨 가문의 본가로 향하는 길에 눈을 떴다. 본가에 거의 도착했는지 창밖에는 벌써 도심과 다른 시원한 자연 풍경이 펼쳐졌다.잠이 깬 듯 만 듯한 눈빛으로 창밖을 한참 바라본 후에야 그녀는 머리가 재부팅된 것 같음을 느꼈다. 하지만 기억은 병원에 한참 있다가 단원혁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순간에 멈춰 있었다.‘나 어떻게 오빠 차에 탄 거지?’강하랑이 소리 내어 묻기도 전에 그녀가 일어난 것을 발견한 단원혁이 먼저 말했다.“깼어? 앞에 물이랑 간식 있으니까, 배고프면 먼저 꺼내서 먹어.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10분
늘솜가는 이번에 확실히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요리 콘테스트는 몇 개월 전부터 홍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소 문제로 두 개월 늦게 열리는 해프닝이 있었다.늦춰진 두 개월 동안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대단한 것을 준비할지, 사람들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결과물은 그 이상이었다.화려하게 만들어진 콘테스트장만 봐도 늘솜가의 수입을 엿볼 수 있었다. 똑같이 요식업으로 먹고사는 입장에서 늘솜가만 재벌 행세를 하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이 무조건 있었을 것이다.원래도 같은 업계에 있는
“결혼까지 하고 친정을 집이라고 하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괜히 여기서 귀찮게 굴지 말고 네 시집으로 꺼져!”분노에 휩싸인 정하성은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이는 송미현이 평소 자주 하던 말이다. 하지만 정하성은 아내가 안타까우면서도 말조심하라고만 했다. 어찌 됐든 정희연은 그의 동생이었기에 친정에서 지낸다고 해도 안 될 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오늘 여러 가지 일이 한데 쌓이면서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정희연뿐만 아니라 정하성 본인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
2년 전, 늘솜가에서 일손을 돕던 그녀는 스스로를 주방장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만 일할 뿐만 아니라, 직원들은 또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걸 알기나 하는지 정희연은 그녀 없이 늘솜가가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으스대고 있었다.정하성은 아직 젊고 장사도 몇 년 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이나가 스스로 요령을 터득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뒀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의 모든 노력이 헛된 셈이다. 그가 장이나를 ‘후계자’로 대하던 마음은 그들에게 ‘이용’일 뿐이었다.‘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야...’정하성은 생각하
송미현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하지만 이마의 핏줄이 툭툭 뛸 정도로 아파서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수년간 정씨 가문에 바친 노고가 이렇듯 주영숙의 한 마디로 우스워졌으니 말이다. 다행히 정하성과 서로 붙잡고 있는 덕분에 두 사람 다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정하성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자신은 그녀의 편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미현이를 남이라고 생각할 정도면 더 말할 것도 없겠네요. 어머니, 저희 분가하도록 할게요. 자세한 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