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도 의도한 행위는 아니었고 자기도 모르게 한 반응이었다.순간 곽아름을 대하던 방법으로 이준혁을 대한 것이다.달래기 어렵다면 제일 간단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랑한다고 표현하면 된다.하지만 볼 뽀뽀를 했는데도 이준혁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윤혜인이 난감해졌다.‘설마 아직도 화난 건가?’어쩔 바를 몰라 하는데 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잠깐 멈칫하던 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안으려는데 아까 떨어질 때 낙석이 이준혁의 등을 명중했던 게 떠올랐다.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쳐내고는 상처를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몸을 꽉 묶여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내가 미우면 밀어내.”윤혜인이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는 가만히 있었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낮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혜인아, 사랑해.”순간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파르르 떨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왜...”그녀는 사실 왜 이때 이 말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이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말해줄 기회가 없을까 봐 겁나. 나 너 많이 사랑해. 사랑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감동해서든 아니면 미안해서든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고마워요.”이준혁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윤혜인이라는 사람을, 그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욕심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그는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앞으로 절대, 다시는 내 옆을 떠나지 마. 알겠지?”오만하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이준혁이 지금은 비굴하게 윤혜인에게 애원하고 있다.윤혜인은 코끝이 찡했다.사실 이준혁이 따라서 뛰어내린 순간 그녀도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전에는 항상 이 남자를 마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건드려서도 시작해서도 안 된다고
“준혁 씨, 등 안 아파요?”돌이 이준혁의 등에 떨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 말이다.“아니. 안 아파.”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네가 무사한게 내게는 제일 좋은 약이야.”이준혁의 표정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윤혜인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렇게 큰 낙석이라면 그 누구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걱정됐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옷을 벗기려 했다.“한번 봐봐요.”단추를 두 개 풀었는데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에 꾹 누르며 웃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니면 으스스한 곳 좋아해? 밖이 더 좋나?”윤혜인은 이준혁의 상처가 걱정되어 얼른 손을 빼려했다.“밖이면 뭐 어때서요?”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밖이면 보는 눈도 많은데 괜찮겠어?”윤혜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네?”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원하면 돌아가서 사람 없는 외딴 시골 하나 통으로 예약할게. 마음껏... 즐기게.”윤혜인은 순간 이준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두 사람은 아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얼굴이 빨개진 윤혜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누가 원한대요? 원하는 건 당신이겠죠.”“응, 난 원해.”이준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근데 곧 구조대가 도착할 거야.”추락할 당시 보디가드가 이미 그들을 찾아냈다.아까 헬리콥터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었으니 아마 이 방향으로 오는 중일 것이다.그는 손으로 윤혜인의 볼을 꼬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 와이프를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 되지.”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정말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이준혁은 씩씩거리는 윤혜인을 보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윤혜인이 무슨 생각하는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숨만 쉬어도 얼굴이 창백해질 만큼 한 고통이 등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음을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그래도 윤혜인이 걱정하는 게 싫어 줄곧 참고 있었다. 헬
갈비뼈 12대라니, 몸에 있는 갈비뼈를 다 세어봐도 고작 24대일 텐데 말이다.윤혜인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이송 차량에 같이 오른 윤혜인은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녀를 구하지만 않았다면 이준혁도 이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그 낙석을 이준혁이 몸으로 받아내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맞았을 것이다.아무리 산골짜기의 깊은 곳에 호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부딪치면 헤엄쳐 올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아까 왜 오랫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윤혜인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준혁이 어떠한 의지력으로 호수 깊은 곳에서 위로 올라왔는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끌고 호숫가로 향했다.이준혁이 그녀를 받쳐 든 동작이 왜 그리 어정쩡했는지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얼마나 아팠을까.’40분 후.이준혁은 상급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주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에서 시병원으로 달려왔다.병실 안.이준혁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링거를 맞았다.상황을 파악한 주훈도 겁이 났다.전에 난 상처도 채 낫지 않았는데 새로운 상처까지 더해진 것이다.아무리 무쇠 같은 몸이라 해도 이렇게 막 굴리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윤혜인은 아까 의사가 이준혁의 몸이 허약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확실히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건 맞지만 의사는 이준혁의 혈액 응집력이 부족하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윤혜인의 기억 속에 이준혁은 늘 건강했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왜 갑자기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진 거지?’주훈이 나가려 하자 윤혜인이 얼른 뒤따라 나갔다.“주 비서님, 아까 의사 선생님이 준혁 씨 혈액 응집력이 안 좋다 그러던데 무슨 원인인지 알아요?”주훈의 안색이 변했다.김성훈은 원래 이준혁에게 주말에 외국에 있는 친구한테 피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혈액 응집력이 안 좋은 문제는 주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준혁이 제일 원하는 게 바로 윤혜인이 무사한 것일 테니 말이다.주훈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윤혜인 씨,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건 경각심을 높여서 자신을 보호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대표님은 윤혜인 씨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매번 모든 걸 다 바치지만 생색내는 걸 싫어하시기도 하고 혹시나 부담될까 봐 비밀로 한 것도 있어요. 하지만 윤혜인 씨한테만큼은 정말 진심이에요.”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구멍이 메어와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약간만 소리를 내도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 같았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해주었고 그녀의 안전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걸로 생색낸 적이 없었다.정말 바보 같은 남자였다.주훈이 자리를 비운 건 김성훈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이준혁은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몸이 눈에 띄게 나빠져서 너무 걱정되었다.‘도대체 그 주사와 관련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김성훈에게 다른 방법을 알아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의사가 서울로 와서 혈액 검사를 해줄 수는 없는지 말이다.병실로 돌아온 윤혜인은 이준혁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따듯한 수건으로 얼굴을 간단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수건으로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지금까지 이준혁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속눈썹이 매우 길었다. 하여 매번 사람을 쳐다볼 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오뚝한 콧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 이 남자는 정말 못생긴 데가 없었다.윤혜인은 수건으로 이준혁의 입술을 천천히 닦아줬다. 입술이 얇으면 정이 없다는데 이준혁은 예외였다. 그녀를 향한 애정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이런 바보...”...소원은 일을 끝내자마자 육경한의 별장으로 향했다.여기서 지
육경한은 원래도 의심이 많았는데 지금 이 말은 이미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화들짝 놀란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육경한을 쳐다보는 소원의 눈매는 항상 매서웠고 이렇게 억울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등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지금 소원은 왠지 모르게 청순하고 매혹적이었다.육경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소원에 대한 갈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저 눈빛...’소원은 저 휠체어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는 그녀위로 올라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원이 눈을 부릅떴다.“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요.”이렇게 말하며 지퍼를 올리려 했지만 중간에 걸려버린 지퍼는 올라가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하는 수 없이 잠옷을 목에 둘렀다.감추려 할수록 드러나는 소원의 행동에 육경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남의 방이라니?”육경한이 휠체어를 돌려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소원 앞에 멈췄다.“여기 내 것이 아닌 게 어디 있어?”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뜻인즉 그녀가 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말로 지기 싫었던 소원은 빨간 입술로 비아냥댔다.“대표님, 망상도 병이에요. 얼른 치료받아요.”육경한은 딱히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거머쥔 듯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그는 어정쩡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내가 안 도와줘도 돼?”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왔다.“괜찮아요.”소원이 이를 악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당장 나가요. 샤워할 거예요.”“같이 할까?”육경한이 말했다.“...”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낯짝이 저 정도로 두꺼운 사람은 처음이었다.“대표님, 저 좀 존중해주실래요? 다친 곳이 이젠 거의 다 나았나 봐요?”소원은 차가운 말투로 그가 저번에 스킨십하려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었다.육경한은 오늘 예상외로 인내심이 좋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기다릴게.”소
화들짝 놀란 소원이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호들갑을 떠는 소원의 모습에 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 거야.”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심사하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뭘 알고 하는 소리야, 아니면 그냥 해보는 소리야...’소원은 육경한이 그녀의 몸에 레이다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온몸으로 경계했다. 그녀는 지금 육경한에게 의심 외의 다른 감정은 없었다.정말 너무 웃픈 상황이었다.어떤 때는 육경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간첩을 옆에 두고 있는 건지 말이다.‘정말 그냥 정신병자인가?’소원이 멍때리고 있는데 육경한은 이미 입고 있던 실크 잠옷을 벗고 튼실한 가슴 근육을 훤히 들어냈다. 정신을 차린 소원이 이 광경을 보고는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야?”“샤워하지.”육경한이 말했다.소원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육경한은 소원이 행동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몸을 닦아준지도 며칠째인데 지금 눈을 가리는 건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나는 샤워할 때 옷 입는 습관 없어.”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누워서 그냥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을 때는 해부학 시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멀쩡하게 욕조에 들어가 누우면 상황이 달랐다.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혼자 일어날 수 있으면 혼자 씻을 수 있다는 거 아니야?”육경한은 동문서답이었다.“뭐야? 내 몸 보면 아직도 쑥스러워?”소원이 얼른 반박했다.“그럴 리가.”말하다 보니 약이 올랐다.“일어나 걸을 수 있는 거 보면 내 임무도 끝난 거지. 내일 바로 집에 갈 거야.”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상처가 아직 덜 나았는데.”“덜 낫긴 뭘 덜 나아. 지팡이 짚고 걸을 수 있잖아.”소원이 말했다.육경한이 그런 그녀를 보며 비꼬았다.“지팡이 짚고 걸어야 한다는 걸 아네?”그러
소원이 심호흡했다. 목 졸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얼른 타올을 한 장 꺼내 육경한의 뒤로 걸어가 타올을 둘러줬다.손가락이 의도치 않게 육경한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탄탄한 근육과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마치 손난로 같았다.타올을 두른 소원은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시작해 볼까요?”육경한이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끄럼방지 매트를 밟고 욕조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소원은 육경한의 어깨를 아래로 꾹 누르며 열정적으로 말했다.“이제 씻어요. 의사가 물이 따듯하면 건강에 좋다고 했어요.”육경한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따듯하면 몸에 좋다니, 욕조에 담긴 물은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웠다. 찬물을 아예 섞지 않은 것 같았다.‘소원 너 정말.’소원은 육경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힘겨루기에서 이겼다는 성취감을 느꼈다.하여 덤덤하게 되물었다.“왜요? 성에 안 차요?”소원은 약을 올리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지만 육경한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찬물을 넣지 않은 것 육경한의 병이 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물에 샤워했다가 열이 나서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다시 잡혀서 보살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뭘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냥 샤워를 도와주기는 싫고 억울해 뜨거운 물을 받아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어차피 화상 입을 온도는 아니었고 조금 괴롭다가 말 것이다.욕조가 커서 온도가 잘 빠지기도 했고 말하면서 시간을 잡아먹었기에 지금 욕조 물의 온도는 겨우 70, 80도 좌우였다.육경한은 정말 참을성이 좋았다. 물이 너무 뜨거워 온몸이 빨개졌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차지. 네가 직접 받은 물인데 안 찰 게 뭐가 더 있겠어?”육경한은 덤덤한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상처에 난 살은 새살이었기에 뜨거운 물을 만나면 간질거렸고 이에 바짝 약이 오른 육경한은 뭔가를 막 잡아 뜯고 싶은 생각이었다.그는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팔을 내밀어 불난 집에 부채
육경한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더니 두 팔을 욕조에 포갠 채 소원의 보살핌을 만끽하고 있었다.머리를 씻어주려는데 자세가 어정쩡했던 서원은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을 마주하고 앉았다.다행히 육경한도 눈을 감았기에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육경한은 여전히 잘생겼다. 남자다운 오관을 한데 모아놓으니 외모가 정말 눈부셨다.하지만 잘생긴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육경한은 성악설의 대명사였다.그는 이기적이게도 자신의 사악한 생각을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인가했다.소원이 말을 들으면 그는 마치 강아지를 달래듯 고기를 던져주었지만 반항하면 우리에 가둬두고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괴롭혔다.외국에 있는 3년 동안 그는 마지막 남은 인성을 전부 갉아 먹힌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몸뚱아리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소원이 머리를 너무 오래 씻는다는 느낌에 육경한은 갑자기 눈을 떴다.소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육경한은 그녀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를 느꼈다.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버릴 만큼의 증오 말이다.이것이야말로 전혀 위장하지 않은 소원의 본모습이었다.그녀는 그를 뼛속까지 증오했다. 한치의 여지도 없이 그를 죽도록 미워했다.육경한은 소원의 눈동자에 가득 찬 분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매혹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지금 그 눈빛을 보니 나를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는 모양인데?”소원은 이제 들켰으니 숨길 생각도 없었다.어차피 육경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소원이 차갑게 비아냥댔다.“아니면? 내 눈빛이 너를 사랑하는 걸로 보여?”‘네가 죽었으면 몰라도.’육경한은 손으로 소원의 턱을 살짝 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자꾸 기어오르네. 내가 너를 어떻게 벌주면 될까?”소원은 육경한의 손을 뿌리치며 코웃음 쳤다.“육경한, 나더러 사람도 아닌 짐승 말을 들으라고? 다음 생에도 그럴 일은 없어.”“음…”육경한이 소원의 손목을 낚아채며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목소리는 우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소원아, 나 도발하지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