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혁 씨, 등 안 아파요?”돌이 이준혁의 등에 떨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준혁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 말이다.“아니. 안 아파.”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네가 무사한게 내게는 제일 좋은 약이야.”이준혁의 표정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윤혜인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렇게 큰 낙석이라면 그 누구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걱정됐던 윤혜인은 바로 이준혁의 옷을 벗기려 했다.“한번 봐봐요.”단추를 두 개 풀었는데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에 꾹 누르며 웃었다.“뭐가 그렇게 급해? 아니면 으스스한 곳 좋아해? 밖이 더 좋나?”윤혜인은 이준혁의 상처가 걱정되어 얼른 손을 빼려했다.“밖이면 뭐 어때서요?”이준혁이 눈썹을 추켜세웠다.“밖이면 보는 눈도 많은데 괜찮겠어?”윤혜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네?”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원하면 돌아가서 사람 없는 외딴 시골 하나 통으로 예약할게. 마음껏... 즐기게.”윤혜인은 순간 이준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두 사람은 아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얼굴이 빨개진 윤혜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누가 원한대요? 원하는 건 당신이겠죠.”“응, 난 원해.”이준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근데 곧 구조대가 도착할 거야.”추락할 당시 보디가드가 이미 그들을 찾아냈다.아까 헬리콥터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었으니 아마 이 방향으로 오는 중일 것이다.그는 손으로 윤혜인의 볼을 꼬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 와이프를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 되지.”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정말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이준혁은 씩씩거리는 윤혜인을 보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윤혜인이 무슨 생각하는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숨만 쉬어도 얼굴이 창백해질 만큼 한 고통이 등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음을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그래도 윤혜인이 걱정하는 게 싫어 줄곧 참고 있었다. 헬
갈비뼈 12대라니, 몸에 있는 갈비뼈를 다 세어봐도 고작 24대일 텐데 말이다.윤혜인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이송 차량에 같이 오른 윤혜인은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녀를 구하지만 않았다면 이준혁도 이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그 낙석을 이준혁이 몸으로 받아내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맞았을 것이다.아무리 산골짜기의 깊은 곳에 호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부딪치면 헤엄쳐 올라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아까 왜 오랫동안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윤혜인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준혁이 어떠한 의지력으로 호수 깊은 곳에서 위로 올라왔는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끌고 호숫가로 향했다.이준혁이 그녀를 받쳐 든 동작이 왜 그리 어정쩡했는지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얼마나 아팠을까.’40분 후.이준혁은 상급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주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서울에서 시병원으로 달려왔다.병실 안.이준혁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링거를 맞았다.상황을 파악한 주훈도 겁이 났다.전에 난 상처도 채 낫지 않았는데 새로운 상처까지 더해진 것이다.아무리 무쇠 같은 몸이라 해도 이렇게 막 굴리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윤혜인은 아까 의사가 이준혁의 몸이 허약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확실히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건 맞지만 의사는 이준혁의 혈액 응집력이 부족하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윤혜인의 기억 속에 이준혁은 늘 건강했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왜 갑자기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진 거지?’주훈이 나가려 하자 윤혜인이 얼른 뒤따라 나갔다.“주 비서님, 아까 의사 선생님이 준혁 씨 혈액 응집력이 안 좋다 그러던데 무슨 원인인지 알아요?”주훈의 안색이 변했다.김성훈은 원래 이준혁에게 주말에 외국에 있는 친구한테 피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혈액 응집력이 안 좋은 문제는 주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준혁이 제일 원하는 게 바로 윤혜인이 무사한 것일 테니 말이다.주훈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윤혜인 씨,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건 경각심을 높여서 자신을 보호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대표님은 윤혜인 씨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매번 모든 걸 다 바치지만 생색내는 걸 싫어하시기도 하고 혹시나 부담될까 봐 비밀로 한 것도 있어요. 하지만 윤혜인 씨한테만큼은 정말 진심이에요.”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구멍이 메어와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약간만 소리를 내도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 같았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해주었고 그녀의 안전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걸로 생색낸 적이 없었다.정말 바보 같은 남자였다.주훈이 자리를 비운 건 김성훈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이준혁은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몸이 눈에 띄게 나빠져서 너무 걱정되었다.‘도대체 그 주사와 관련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김성훈에게 다른 방법을 알아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의사가 서울로 와서 혈액 검사를 해줄 수는 없는지 말이다.병실로 돌아온 윤혜인은 이준혁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저녁이 되자 그녀는 따듯한 수건으로 얼굴을 간단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수건으로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지금까지 이준혁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속눈썹이 매우 길었다. 하여 매번 사람을 쳐다볼 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오뚝한 콧날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 이 남자는 정말 못생긴 데가 없었다.윤혜인은 수건으로 이준혁의 입술을 천천히 닦아줬다. 입술이 얇으면 정이 없다는데 이준혁은 예외였다. 그녀를 향한 애정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이런 바보...”...소원은 일을 끝내자마자 육경한의 별장으로 향했다.여기서 지
육경한은 원래도 의심이 많았는데 지금 이 말은 이미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화들짝 놀란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육경한을 쳐다보는 소원의 눈매는 항상 매서웠고 이렇게 억울한 눈빛은 처음이었다. 등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지금 소원은 왠지 모르게 청순하고 매혹적이었다.육경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소원에 대한 갈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저 눈빛...’소원은 저 휠체어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는 그녀위로 올라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원이 눈을 부릅떴다.“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요.”이렇게 말하며 지퍼를 올리려 했지만 중간에 걸려버린 지퍼는 올라가지 않았다.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하는 수 없이 잠옷을 목에 둘렀다.감추려 할수록 드러나는 소원의 행동에 육경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남의 방이라니?”육경한이 휠체어를 돌려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소원 앞에 멈췄다.“여기 내 것이 아닌 게 어디 있어?”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뜻인즉 그녀가 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말로 지기 싫었던 소원은 빨간 입술로 비아냥댔다.“대표님, 망상도 병이에요. 얼른 치료받아요.”육경한은 딱히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거머쥔 듯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그는 어정쩡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내가 안 도와줘도 돼?”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였다.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왔다.“괜찮아요.”소원이 이를 악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당장 나가요. 샤워할 거예요.”“같이 할까?”육경한이 말했다.“...”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낯짝이 저 정도로 두꺼운 사람은 처음이었다.“대표님, 저 좀 존중해주실래요? 다친 곳이 이젠 거의 다 나았나 봐요?”소원은 차가운 말투로 그가 저번에 스킨십하려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었다.육경한은 오늘 예상외로 인내심이 좋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기다릴게.”소
화들짝 놀란 소원이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호들갑을 떠는 소원의 모습에 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 거야.”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심사하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뭘 알고 하는 소리야, 아니면 그냥 해보는 소리야...’소원은 육경한이 그녀의 몸에 레이다라도 달아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온몸으로 경계했다. 그녀는 지금 육경한에게 의심 외의 다른 감정은 없었다.정말 너무 웃픈 상황이었다.어떤 때는 육경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간첩을 옆에 두고 있는 건지 말이다.‘정말 그냥 정신병자인가?’소원이 멍때리고 있는데 육경한은 이미 입고 있던 실크 잠옷을 벗고 튼실한 가슴 근육을 훤히 들어냈다. 정신을 차린 소원이 이 광경을 보고는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야?”“샤워하지.”육경한이 말했다.소원이 짜증스럽게 말했다.“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육경한은 소원이 행동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몸을 닦아준지도 며칠째인데 지금 눈을 가리는 건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나는 샤워할 때 옷 입는 습관 없어.”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누워서 그냥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을 때는 해부학 시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멀쩡하게 욕조에 들어가 누우면 상황이 달랐다.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혼자 일어날 수 있으면 혼자 씻을 수 있다는 거 아니야?”육경한은 동문서답이었다.“뭐야? 내 몸 보면 아직도 쑥스러워?”소원이 얼른 반박했다.“그럴 리가.”말하다 보니 약이 올랐다.“일어나 걸을 수 있는 거 보면 내 임무도 끝난 거지. 내일 바로 집에 갈 거야.”육경한이 덤덤하게 말했다.“상처가 아직 덜 나았는데.”“덜 낫긴 뭘 덜 나아. 지팡이 짚고 걸을 수 있잖아.”소원이 말했다.육경한이 그런 그녀를 보며 비꼬았다.“지팡이 짚고 걸어야 한다는 걸 아네?”그러
소원이 심호흡했다. 목 졸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얼른 타올을 한 장 꺼내 육경한의 뒤로 걸어가 타올을 둘러줬다.손가락이 의도치 않게 육경한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탄탄한 근육과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마치 손난로 같았다.타올을 두른 소원은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시작해 볼까요?”육경한이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끄럼방지 매트를 밟고 욕조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소원은 육경한의 어깨를 아래로 꾹 누르며 열정적으로 말했다.“이제 씻어요. 의사가 물이 따듯하면 건강에 좋다고 했어요.”육경한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따듯하면 몸에 좋다니, 욕조에 담긴 물은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웠다. 찬물을 아예 섞지 않은 것 같았다.‘소원 너 정말.’소원은 육경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힘겨루기에서 이겼다는 성취감을 느꼈다.하여 덤덤하게 되물었다.“왜요? 성에 안 차요?”소원은 약을 올리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지만 육경한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찬물을 넣지 않은 것 육경한의 병이 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물에 샤워했다가 열이 나서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다시 잡혀서 보살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뭘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냥 샤워를 도와주기는 싫고 억울해 뜨거운 물을 받아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어차피 화상 입을 온도는 아니었고 조금 괴롭다가 말 것이다.욕조가 커서 온도가 잘 빠지기도 했고 말하면서 시간을 잡아먹었기에 지금 욕조 물의 온도는 겨우 70, 80도 좌우였다.육경한은 정말 참을성이 좋았다. 물이 너무 뜨거워 온몸이 빨개졌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차지. 네가 직접 받은 물인데 안 찰 게 뭐가 더 있겠어?”육경한은 덤덤한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상처에 난 살은 새살이었기에 뜨거운 물을 만나면 간질거렸고 이에 바짝 약이 오른 육경한은 뭔가를 막 잡아 뜯고 싶은 생각이었다.그는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팔을 내밀어 불난 집에 부채
육경한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더니 두 팔을 욕조에 포갠 채 소원의 보살핌을 만끽하고 있었다.머리를 씻어주려는데 자세가 어정쩡했던 서원은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을 마주하고 앉았다.다행히 육경한도 눈을 감았기에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육경한은 여전히 잘생겼다. 남자다운 오관을 한데 모아놓으니 외모가 정말 눈부셨다.하지만 잘생긴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육경한은 성악설의 대명사였다.그는 이기적이게도 자신의 사악한 생각을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인가했다.소원이 말을 들으면 그는 마치 강아지를 달래듯 고기를 던져주었지만 반항하면 우리에 가둬두고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괴롭혔다.외국에 있는 3년 동안 그는 마지막 남은 인성을 전부 갉아 먹힌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몸뚱아리는 마치 악마의 화신 같았다.소원이 머리를 너무 오래 씻는다는 느낌에 육경한은 갑자기 눈을 떴다.소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육경한은 그녀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를 느꼈다.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버릴 만큼의 증오 말이다.이것이야말로 전혀 위장하지 않은 소원의 본모습이었다.그녀는 그를 뼛속까지 증오했다. 한치의 여지도 없이 그를 죽도록 미워했다.육경한은 소원의 눈동자에 가득 찬 분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매혹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지금 그 눈빛을 보니 나를 어떻게 죽일지 생각하는 모양인데?”소원은 이제 들켰으니 숨길 생각도 없었다.어차피 육경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소원이 차갑게 비아냥댔다.“아니면? 내 눈빛이 너를 사랑하는 걸로 보여?”‘네가 죽었으면 몰라도.’육경한은 손으로 소원의 턱을 살짝 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자꾸 기어오르네. 내가 너를 어떻게 벌주면 될까?”소원은 육경한의 손을 뿌리치며 코웃음 쳤다.“육경한, 나더러 사람도 아닌 짐승 말을 들으라고? 다음 생에도 그럴 일은 없어.”“음…”육경한이 소원의 손목을 낚아채며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목소리는 우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소원아, 나 도발하지
소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육경한은 소원의 마음이 살짝 풀렸다고 생각했다.하여 그렇게 꽉 잡지 않고 그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러고는 게걸스럽게 그에게는 없는 소원의 향기를 탐했다.소원은 육경한에게 마약 같은 존재였다.이렇게 가다간 오장육부가 뒤틀릴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쪽으로 손이 갔다.육경한은 지금 ‘사랑’이란 어떤 맛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소원이 옆에 있어야만 선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죄인이고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마음이 모질뿐더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에 달성하는 그에게는 생사만 있지 포기는 없었다.소원이 평생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소원을 사랑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육경한이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소원아, 과거는 다 잊고 우리 새로 시작하자. 사랑이란 뭔지 깨닫게 해줄게.”육경한은 누구에게 머리를 숙여본 적이 없었다. 외국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한 번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원 앞에서는 그 원칙이 한번 또 한 번 무너졌다. 고개를 숙여서라도 소원의 연민을 받고 싶었다.그녀가 조금만 눈길을 주었다면 이 정도로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육경한이 잊은 게 있었다.지금 육경한 앞에 서 있는 건 기억 속의 그 소원이 아니었다.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던 소원은 이제 죽고 없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경계를 푼 틈을 타 팔꿈치로 빠르고 정확하게 육경한의 상처를 명중했다.그러더니 철렁하는 소리와 함께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고통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욕조에 쓰러진 육경한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육경한, 네가 주는 사랑은 역겹고 싫어. 나는 너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네가 하는 말만 들어도 토가 나와. 앞으로 절대 입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마.”“여생? 네가 나랑 그걸 토론할 자격은 되고?”“다시 시작해? 네가 뭔데?”소원은 육경한에 대한 증오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다짜고짜 소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탁자 위로 내리눌렀다.힘껏 눌러대며 외쳤다.“오늘 반드시 내가 그날 느낀 굴욕과 분노를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하지만 소원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방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우리가 한 대로 이행해주세요.”방민아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될 일을 피하려고 애써 돌려서 말했다.소원은 방민아가 무슨 꾀를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렇지 않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육연주는 샴페인과 맥주를 들고 소원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술 좋아한다며?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 잘 마셔 봐!”알코올이 따갑게 소원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소원은 눈을 꼭 감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육연주는 더욱 흥분하며 소원의 뺨을 두 차례나 세게 때렸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술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까지 했다.그 순간, 방민아가 육연주의 손목을 꽉 잡아 멈췄다.“연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겉으로 티 나는 상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그들의 관심은 소원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벌가 자제 이미지가 더러워질까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육연주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굴러갔다.방민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목숨을 앗아가선 안 되고 모욕하고 짓밟는 건 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육연주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소원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날 결혼식에서 소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는지, 모든 사람들에
“네, 괜찮아질 거예요...”잠시 충전한 덕에 상태가 많이 나아진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언니, 이제 가서 일 봐요. 저도 제 일하러 갈게요.”“응.”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소원은 방민아가 말한 그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민아가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고 옆에 육연주가 함께 앉아 있었다.소원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물었다.“방민아 씨, 제가 뭘 하면 되죠?”방민아는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무슨 일이 있어서 그쪽을 부른 게 아니에요. 연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요.”소원은 육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육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소원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며칠 못 봤더니 눈이 멀었나 봐? 나 못 봤어?”소원의 얼굴은 한쪽으로 젖혀졌고 귀가 웅웅거릴 정도로 아팠다.이 뺨 한 대를 때리기 위해 육연주는 며칠 동안이나 참아왔던 것이다.지난번 그녀가 결혼식에 난동을 부렸을 때 이미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당시 육경한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소원은 이미 서씨 가문 사람들에게 반쯤 죽도록 맞았을 것이다.그런데 육경한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소문에 따르면 그는 소원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 북쪽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들은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육연주와 같은 재벌 2세는 그들에게 단지 걸어 다니는 금고와 같았다.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육경한이 앞으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북쪽 사람들은 원한을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결혼식 후, 육연주는 소원을 제대로 혼내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소원이 육경한의 사람들에게 데려가져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그녀는 부모도 두렵지 않고 세상 무엇도 겁내지 않았지만 육경한만큼은 무서웠다.육경한은 냉혹하게 행동할 때 진정으로 냉혹했으며 혈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다행히 방민아가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사실 크게 다친 것도 없었고요.”그러나 사실 그녀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육경한만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녀도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각한 일을 겪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숙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작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영숙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 왜 온 건지 말해봐.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봐도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같은데?”“오늘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제가 아는 단골 손님이 요청해서요.”소원이 답했다.“단골 손님?”영숙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누군데?”소원은 이곳에서 일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녀의 손님은 대부분 영숙이 직접 배정해준 사람들이었다.때문에 소원이 말하는 ‘단골 손님’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영숙은 알 수 없었다.영숙의 걱정은 진심이었다.소원은 왜 영숙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숙이 굳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하지만 소원은 이번 일의 진실을 영숙에게 말할 수 없었다.방민아가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밖에 흘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이를 어기면 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었다.“괜찮아요, 언니. 정말 아는 손님이라니까요.”소원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그러자 영숙은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며 비웃듯 말했다.“넌 이제 네 멋대로 하는구나. 내가 상관할 수 없겠네.”소원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언니가 저를 이 일로 이끌어주셨잖아요. 하루라도 스승이면 영원히 스승인데 제가 언제 영숙 언니 말 안 들은 적 있나요?”이 말을 듣고 영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예전에 이렇게 말재간이 좋은 애인 줄 몰랐네.”“스승이니 뭐니 하지 마. 내 밑에 평생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조금 안정되면 얼른 나가.”사실 영숙은 방민아와 관련된 일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래서 그는 방민아가 나중에 유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유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방민아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그녀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 믿었다.“필요 없어. 임 교수님에게 빨리 수술 일정 잡아달라고 해줘.”육경한이 결혼을 위해 결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임수에 휘말려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그는 다른 사람이 낳지 않은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소종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육경한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그의 마음이 완전히 굳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육경한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다만 소종은 이런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소종조차도 대를 이을 아이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별을 떠나 건강한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었다.어쩌면 대를 잇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육경한의 방식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그럼에도 소종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전화를 걸기 위해 소종이 막 나가려다가 육경한이 불러 세웠다.“잠깐.”“무슨 일이세요?”육경한은 말했다.“이 소식을 민아 씨에게 알려.”소종은 잠시 멍해졌다.‘정관 수술 한다는 걸 예비 신부에게 알리라고? 이건 결혼하기 전에 도망가라고 부추기는 일 아닌가?’그러나 육경한의 목적은 방민아를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다.이전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 말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방민아더러 함께하자고 했다.그러자 방민아는 주저 없이 동의했다.육경한이 방민아에게 난관 수술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건 이것이 신체에 손상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결혼을 약속한 상대라면 충분한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스스로 수술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이번에 소종을 통해 이 소식을 흘린 건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표정조차 변화가 없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소종이 입을 열었다.“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간신히 밝아졌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육경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소종의 말을 묵인하는 듯 말이다.이제 됐다 싶어 소종은 긴 숨을 내쉬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육경한이 이번에 얻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친 그가 이제는 소원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지금과 같이 냉정한 사람은 마음이 다치면 자신을 철저히 닫아버린다.육경한의 모습은 그야말로 심장이 죽은듯한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남자는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이제 마음도 몸도 여기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붙잡는 건 양쪽 모두를 아프게 할 뿐이었다.소원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서현재 역시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육경한이 많이 참은 셈이었다.육경한이 물어보지 않았기에 소종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대신 육경한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여러 번 말을 해봤지만 소원은 전혀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진정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었다.소종은 소원이 방민아가 유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유진의 상태를 더 꼼꼼히 살피고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방민아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다만 소종은 방민아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잠시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다.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방민아 씨가 과연 유진이를 자신의 자식처럼 대할 수 있을까? 자기 아이를 갖게 되면 유진이에 대한 태도가 변하진 않을까?’소종이 이런저런 생
소원은 방민아와 이런 복잡한 말싸움을 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연기를 하듯 감정을 숨기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방민아 씨, 아주머니를 만나볼 수는 없나요?”“그건... 방금 경한 씨한테 전화했잖아요? 경한 씨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정말 미안해요, 소원 씨.”방민아는 곤란하고 미안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사실 소원이 대문 앞에서 보인 모든 행동을 방민아는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소원이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한 모습을 보며 방민아는 확신했다.이제 자신이 육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고.방민아는 속으로 생각했다.‘다행히 연주의 말을 믿고 소원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어. 그냥 현명한 아내이자 자상한 엄마처럼 행동했더니 효과가 좋네. 경한 씨도 이제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어. 소원? 이제 별로 두려워할 존재도 아니지.’소원은 한숨을 삼키며 자세를 낮추어 물었다.“그럼... 유진이랑 통화라도 할 수 있을까요?”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부탁했다.방민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소원 씨, 그건 저도 힘들 것 같네요. 경한 씨가 소원 씨가 유진이와 접촉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거절당한 소원은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했다.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소원 씨, 제가 기회를 드리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오늘 밤 일하러 가세요. 기분이 좋으면 유진이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죠.”이 말에 놀란 소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인가요?”“그럼요.”방민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경한 씨가 없을 땐 이 육씨 가문내 일이 다 제 손에 달려 있으니까요.”소원은 방민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육경한은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내부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좋아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유진이를 반드시 만나게 해줘야 해
소원은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렸지만 두 명의 건장한 보안요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보안요원은 그녀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저희도 이러고 싶진 않습니다. 저희는 월급 받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누구도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제발 좀 협조해 주세요.”소원은 필사적으로 외쳤다.“제 아이가 위험해요! 경찰 부를 거예요, 경찰 부를 거라고요!”그러자 보안요원은 피식 비웃었다.“지금 농담하세요? 작은 도련님은 매일 베란다에서 뛰어놀 만큼 건강해 보이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혹시 망상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에요?”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안도했지만 마음속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보안요원은 이어서 말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경찰이 이런 걸 받아주지도 않을 겁니다. 신고해 보세요. 아마 처음에 잡혀갈 사람은 그쪽일 겁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도련님은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방민아 씨는 정말 좋은 새엄마예요. 얼마나 세심한지 매일 작은 도련님을 돌보러 오신다니까요.”소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방민아는 결혼 전까지는 유진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라면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지금 아주머니를 건드린 것도 육경한의 반응을 떠보는 일환이라 확신했다.육경한이 아주머니의 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유진이의 위험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아니, 육경한이 아주머니를 걱정하더라도 방민아의 속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이 모든 것은 소원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사란 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만약의 가능성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갑자기 소원이 크게 외쳤다.“방민아 씨! 나와요! 방민아 씨, 당장 나와요!”보안요원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소원은 두 보안요원의 손길을 뿌리치며 대문 앞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리며 계속 외쳤다.“방민아 씨! 방민아 씨!”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소원은 일부러 유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혹여 유진이가 자극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유진이는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소원은 아이의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신중했다.소원은 입을 열어 크게 외쳤다.“백씨 아주머니! 백씨 아주머니, 계세요?”몇 번 부르지 않았는데 보안요원이 달려와 그녀를 막았다.“여기서 이렇게 소리치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주거 지역이에요. 계속 그러시면 강제로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보안요원의 말투는 점점 공손함을 잃어가고 있었다.상대가 까다로운 사람이든 아니든 겁낼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행동을 보니 그녀가 육 대표님과 친분이 깊을 리는 없어 보였다.만약 친분이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테고 육경한이 이미 문을 열어줬을 것이다.그러나 소원은 보안요원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말했다.“오늘은 반드시 아주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아주머니 이름 부르는 게 싫다면 백해란 아주머니가 여기 계신지만 확인해 주시면 돼요. 확인만 해 주면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보안요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런 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는 저택 안에 들어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렇게 계속 소리 지르시면 지금 당장 내보낼 겁니다.”보안요원의 태도는 한층 강경해졌고 소원은 이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아주머니와 연락이 끊겼어요. 걱정돼서 왔습니다. 오늘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하면 저는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쪽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이렇게 하죠. 아주머니가 계신지 확인하고 그분이 저에게 전화만 주시면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어때요?”소원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타협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보안요원들은 상황을 재빨리 판단해야 했다.안으로 들어가 관리인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건 큰일이 아니었지만 이 여자를 억지로 끌어내렸다가 경찰에 신고라도
소원이 침묵할수록 소종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그에게 소원은 냉혹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입장이 다르니 소종은 당연히 소원의 관점에서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일은 내가 했습니다. 대표님은 저에게 너무 폭력적이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사업 세계는 깊은 수렁 같아서 독하지 않으면 발붙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전 자발적으로 대표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군가 칼로 저를 찔러도 대표님의 미래를 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갑자기 소종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제가 소원 씨가 대표님을 해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리라고 생각합니까?”소원은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소 비서님, 제가 육경한을 찾는 건 유진이 때문이에요.”지금 그녀는 육경한을 무너뜨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유진이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이 말을 듣고도 비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이제 와서 아들을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아들을 위한다면 아이의 친아버지를 그렇게 대했으면 안 됐죠.”“우리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다른 남자였으면 그쪽은 벌써 백번은 죽었을 겁니다.”소원은 다급히 물었다.“소 비서님, 요즘 유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그녀는 소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개의치 않았다.소종이 육경한에게 충성하는 만큼 유진이에게 해를 끼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소종은 잠시 찡그리며 대답했다.“방민아 씨가 돌보고 있습니다.”이 말에 소원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저는 유진이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저 경원 저택 앞에 있습니다. 육경한에게 연락해서 제가 유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유진이가 걱정돼요.”소종은 콧방귀를 뀌었다.“뭐가 걱정된다는 거죠? 방민아 씨가 아주 잘 돌보고 있어요. 어제는 유진이를 데리고 대표님을 보러 오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