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의 약점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의 감정을 매우 신경 쓴다는 점이다.배남준이 이렇게 말하니 거절하고 싶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거절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아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에 동의한 셈인 것이다.임신한 몸이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공원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었고 윤혜인은 아이스크림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배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북안도는 춥지만 추운 날씨가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답답해져서 아이스크림이 꽤 인기가 있다. 이제 윤혜인은 임신 말기에 접어들어서 음식을 달리 가리지 않고 있었다.배남준이 물었다.“먹고 싶어?”이 말에 윤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그 아이스크림은 서울의 아이스크림과 달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소스가 얹어져 있었다.북안도의 바닐라 소스는 특별히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 터라 이미 맛을 본 적이 있었다.임신한 후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8개월 넘게 윤혜인은 그 맛이 그리웠다.그러나 윤혜인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먹어도 돼요?”입으로는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게 배남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 표정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배남준은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의사 말로는 이제 뭐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된대. 조금만 먹으면 돼. 출산 후엔 또 못 먹을 테니까.”북안도에서는 산후조리를 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윤혜인은 서울의 방식으로 몸을 관리해야 했다.“내가 가서 작은 사이즈로 사 올게. 소스는 조금만 달라고 할게.”배남준의 말 덕분에 윤혜인은 죄책감이 한결 덜어졌다.곧 배남준은 그녀를 옆에 있는 긴 벤치로 데려가 손수건을 꺼내 깔아주고 웃으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기다려.”아이스크림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혹시나 사람들이 윤혜인과 부딪힐까 염려하여 배남준은 그녀를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특권 남용을 선호하지 않았던 배남준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지 않기 위해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입을 열었다. “그날은... 제가 잘 알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사과할게요.”“괜찮아.”이준혁은 이렇게 말을 하며 몸을 약간 움직여 햇빛 한 줄기를 내주었다.그제야 윤혜인은 그가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도 일하러 나온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양국 간의 협력이라 이준혁의 위치에서 직접 나서야 할 일이긴 했다.뒤쪽에 여러 명의 경호원과 북안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걸 보고 이 공원이 그가 지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윤혜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여자친구도 있는 만큼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 거리를 두었다.그러나 이준혁은 떠날 생각 없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이곳 음식에 익숙해졌어?”“네, 괜찮아요.”짧게 대답하고 윤혜인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이준혁에게 말했다.“대표님, 뒤에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이준혁은 그녀가 자신을 떠밀고 있다는 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정유미 씨는...”“대표님...”곧 윤혜인이 단호하게 이준혁의 말을 끊었다.“대표님 일은 저와 상관없으니까 얘기하실 필요 없습니다.”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사실 윤혜인은 그것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현재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하자 이준혁은 약간 무안해졌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던 중 배남준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가왔고 윤혜인의 눈빛은 즉시 반짝였다. 이준혁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오래 기다렸던 아이스크림이 오자 윤혜인은 이준혁이 옆에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받으려 했다.그렇게 배남준이 아이스크림을 윤혜인에게 건네주려는데 다음 순간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이스크림이 손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쳐서 떨어뜨린 것이
두 사람을 비교해보니 윤혜인은 이준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두 남자가 대치하고 있을 때 윤혜인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넣어 다 먹어버렸다.그러자 두 남자는 시선을 돌리더니 잠시 멈칫했다.윤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한 거예요. 혼내실 상대가 잘못된 것 같네요.”게다가 윤혜인은 그가 자신이 해산물을 먹었다는 걸 알 줄 몰랐는지라 따져 물었다.“절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건가요? 지금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라도 있으신 건지... 이건 제 아이고 제가 알아서 잘 보살필 거예요.”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라 방금 먹었던 아이스크림 맛조차 기억나지 않고 속이 울렁거렸다.윤혜인의 날 선 말에 이준혁은 잠시 굳어졌다.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말했다.“미안해. 내 말투가 잘못됐어.”배남준은 이 말을 듣고 이준혁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에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하고 자존심 상한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표정을 늘 의기양양하던 이준혁의 얼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뭐랄까,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표정이었다.솔직히 그의 이런 모습은 경제 뉴스에서 보던 이준혁의 모습과는 달랐고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마음속으로 배남준은 이준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어쨌든 이준혁의 행동도 아이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태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이준혁의 말에 배남준도 조금은 무리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며 약간 걱정이 들었다.윤혜인은 기분이 나빠졌는지 배남준에게 손을 내밀며 같이 가자고 신호를 보냈다.배남준은 그녀의 손짓이 앞에 있는 이준혁을 의식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잡아주었다.곧 그는 이준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고 떠날 준비를 했다.그러자 이준혁은 무언가 아쉬운 표정으로 윤혜인의 손을 갑자기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이 크게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이준혁은 중심을 잃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눈살을 잠시 찌푸리며 윤혜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웠다.이때 배남준이 물었다.“왜 그런 생각을 해?”“모르겠어.”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그냥 그 사람이 내 아이를 뺏어가려는 것 같아요.”이어 그녀는 단호하게 덧붙였다.“아이 빼앗아가게 두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배남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혜인아, 그건 오해인 것 같아.”배남준의 눈에 이준혁은 아이보다는 윤혜인을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어차피 아이는 이미 상당히 자라 안정적인 상태였고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고생하게 될 건 어른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배남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오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이준혁 씨는 아이를 빼앗으려는 게 아닌 것 같아.”배남준이 말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이틀 내내 유령처럼 나타나기만 하고 내 출산일이 가까워졌을 때 맞춰서 나타났잖아요. 아이를 뺏으려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배남준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윤혜인이 다시 불안에 휩싸일까 봐 걱정이 되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걸지도 몰라.”“걱정한다고요?”윤혜인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준혁 씨가 날 걱정한다고? 근데 지금은 여자친구도 있잖아... 정유미 씨한테도 이건 공평하지 않은 거 아닌가?’정유미의 처지를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윤혜인은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연애를 하든 여자든 확실한 관계인 여자든 그 시기에 다른 여자와 얽히면 안 된다고 여겼다.윤혜인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고 배남준도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그저 차에서 내릴 때 그녀에게 너무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이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서 배남준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이준혁의 행동을 생각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이준혁의 모습은 늘 오만했다. 게다가 그녀가 완강히 거절했는데도 걱정한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
늦은 밤 배씨 가문 저택의 문이 누군가에 의해 두드려졌다.도우미가 곽경천에게 보고한 뒤 문을 열었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러자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양털 코트를 입고 검은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빗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섰다.곽경천은 이제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된 상태였지만 이준혁의 방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죠?”“혜인이는 잠들었습니까?”그러자 곽경천이 의아해하며 다시 말했다.“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당연히 자고 있겠죠.”“혼자요?”이준혁이 묻자 곽경천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죠.”가짜 결혼이라는 사실은 이신우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윤혜인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곧 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럼 가서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곽경천이 다시 물었다.“이 밤에 자고 있는 사람한테 저더러 뭘 확인하라는 거죠?”“방금 혜인이의 핸드폰 신호가 잠깐 움직이더니 그 뒤로 멈췄어요.”“핸드폰 신호요?”깜짝 놀란 곽경천은 이내 깨달았다.“혜인이 핸드폰에 뭐 설치했었나요?”“전 단지 혜인이의 출산 전 안전을 위해 위치만 확인할 수 있게 했을 뿐입니다. 다른 정보는 누설되지 않아요.”이준혁이 해명했다.“그래도 안 되죠!”이준혁이 아무 말도 없이 윤혜인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 장치를 설치한 것에 대해 곽경천은 분노했다.언제 설치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이렇게 늦은 밤에 혜인이의 동향을 알고 있다니... 잠도 안 자고 혜인이를 감시하는 건가?’“당장 없애요!”곽경천은 경고했다.하지만 이준혁은 떼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북안도를 떠나기 전까진 유지하겠습니다. 우선 가서 혜인이가 무사한지 확인해 주세요.”그는 끝까지 곽경천에게 확인을 부탁했다.그러나 화가 난 곽경천은 이를 갈며 말했다.“금방 돌아올 테니 그때는 꼭 없애요!”그는 윤혜인이 있는 방으로 향하며 다시 경고했다.“따라오지 마세요. 방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부부가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