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웠다.이때 배남준이 물었다.“왜 그런 생각을 해?”“모르겠어.”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그냥 그 사람이 내 아이를 뺏어가려는 것 같아요.”이어 그녀는 단호하게 덧붙였다.“아이 빼앗아가게 두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배남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혜인아, 그건 오해인 것 같아.”배남준의 눈에 이준혁은 아이보다는 윤혜인을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어차피 아이는 이미 상당히 자라 안정적인 상태였고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고생하게 될 건 어른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고개를 들어 배남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오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이준혁 씨는 아이를 빼앗으려는 게 아닌 것 같아.”배남준이 말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이틀 내내 유령처럼 나타나기만 하고 내 출산일이 가까워졌을 때 맞춰서 나타났잖아요. 아이를 뺏으려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배남준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윤혜인이 다시 불안에 휩싸일까 봐 걱정이 되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걸지도 몰라.”“걱정한다고요?”윤혜인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준혁 씨가 날 걱정한다고? 근데 지금은 여자친구도 있잖아... 정유미 씨한테도 이건 공평하지 않은 거 아닌가?’정유미의 처지를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윤혜인은 남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연애를 하든 여자든 확실한 관계인 여자든 그 시기에 다른 여자와 얽히면 안 된다고 여겼다.윤혜인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고 배남준도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그저 차에서 내릴 때 그녀에게 너무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이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서 배남준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이준혁의 행동을 생각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이준혁의 모습은 늘 오만했다. 게다가 그녀가 완강히 거절했는데도 걱정한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
늦은 밤 배씨 가문 저택의 문이 누군가에 의해 두드려졌다.도우미가 곽경천에게 보고한 뒤 문을 열었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그러자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양털 코트를 입고 검은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빗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섰다.곽경천은 이제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된 상태였지만 이준혁의 방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죠?”“혜인이는 잠들었습니까?”그러자 곽경천이 의아해하며 다시 말했다.“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당연히 자고 있겠죠.”“혼자요?”이준혁이 묻자 곽경천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죠.”가짜 결혼이라는 사실은 이신우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윤혜인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곧 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럼 가서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곽경천이 다시 물었다.“이 밤에 자고 있는 사람한테 저더러 뭘 확인하라는 거죠?”“방금 혜인이의 핸드폰 신호가 잠깐 움직이더니 그 뒤로 멈췄어요.”“핸드폰 신호요?”깜짝 놀란 곽경천은 이내 깨달았다.“혜인이 핸드폰에 뭐 설치했었나요?”“전 단지 혜인이의 출산 전 안전을 위해 위치만 확인할 수 있게 했을 뿐입니다. 다른 정보는 누설되지 않아요.”이준혁이 해명했다.“그래도 안 되죠!”이준혁이 아무 말도 없이 윤혜인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 장치를 설치한 것에 대해 곽경천은 분노했다.언제 설치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이렇게 늦은 밤에 혜인이의 동향을 알고 있다니... 잠도 안 자고 혜인이를 감시하는 건가?’“당장 없애요!”곽경천은 경고했다.하지만 이준혁은 떼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북안도를 떠나기 전까진 유지하겠습니다. 우선 가서 혜인이가 무사한지 확인해 주세요.”그는 끝까지 곽경천에게 확인을 부탁했다.그러나 화가 난 곽경천은 이를 갈며 말했다.“금방 돌아올 테니 그때는 꼭 없애요!”그는 윤혜인이 있는 방으로 향하며 다시 경고했다.“따라오지 마세요. 방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부부가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급히 달려 나온 여은을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열쇠 가져와!”열쇠가 오자 문을 열었지만 가볍게 밀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곽경천은 문 틈새로 보이는 손을 보자마자 놀라서 소리쳤다.“혜인아!”이준혁의 표정도 굳어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이럴 때일수록 당황하지 않아야 했다.그는 틈새를 살짝 밀어 몸을 구겨 넣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바닥에 젖은 물 자국이 크게 남아 있었다.분명 윤혜인의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이준혁은 의식을 잃은 윤혜인을 안아 급히 밖으로 나왔고 그 뒤를 따라 나오던 곽경천은 이준혁의 다리가 불편해 보이자 다가가 말했다.“제가 안고 가겠습니다.”하지만 이준혁이 냉랭하게 그를 한번 쳐다보자 곽경천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이준혁은 다리가 불편했으나 자신은 팔이 불편했기에 만약 놓쳐버리면 큰일이었다.게다가 이준혁의 표정을 보니 넘어진다 해도 윤혜인만큼은 무사히 보호할 각오인 듯했다.곧 이준혁은 차에 오르면서 곽경천을 부르지도 않고 문을 닫은 채 떠나버렸다.“이봐요!”당황한 곽경천은 급히 운전 기사에게 차를 준비시켜 병원으로 따라갔다.차 안에서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기댄 채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의식이 없으면서도 극도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는 꿈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배가 아파... 너무 아파...’두려운 나머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윤혜인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우리 아이... 우리 아이 구해줘요...”그때 누군가가 팔을 꼭 잡아주자 추락하는 듯한 불안감이 그나마 조금 누그러졌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이준혁은 젖어버린 코트를 벗어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얇은 셔츠와 안에 입은 검은 스웨터 차림으로 윤혜인을 부드럽게 안고 있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불렀다.“혜인아... 혜인아...”가면서 이준혁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혜인아, 잠들면 안 돼... 조금만 참아. 곧 병원에 도착해... 내가 널 아무 일 없
문밖에는 이제 이준혁과 곽경천만 남았다.독이 서린 눈빛으로 곧 이준혁이 곽경천을 바라보며 말했다.“배남준 씨는 어디 있죠? 이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짓입니까?”그러자 곽경천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그는 이 두 사람이 가짜 결혼을 했고 함께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어떻게 핑계를 대야 할지 고민하는 그때, 배남준이 온몸에 빗물을 뒤집어쓴 채 급히 다가와 초조하게 말했다.“혜인이는 어디 있어?”하지만 곽경천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준혁의 주먹이 배남준의 얼굴에 강하게 꽂혔다.그러자 배남준은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불같은 분노가 서린 눈으로 이준혁은 한마디씩 또렷하게 말했다.“말해 보세요. 무슨 일로 임신한 아내를 집에 혼자 두고 나올 수 있었는지!”온몸에 살기를 가득 띤 채 이준혁은 위협적으로 다가갔다.“그쪽이 맞아 죽지 않을 만큼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한번 말해 보세요!”배남준은 목소리가 잠긴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자책감에 휩싸여 있었고 그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모든 게 그의 잘못이었다. 경험이 부족해 윤혜인이 아무거나 먹게 한 것이 화근이었다.그게 아니었더라면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일찍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이 배남준을 때리는 건 당연했고 그 역시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에게 이준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연달아 날렸다.곽경천은 이준혁이 배남준을 때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그러나 가짜 결혼 사실을 밝힐 수 없었고 배남준이 윤혜인 곁에 없었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하여 곽경천은 이준혁의 팔을 잡고 외쳤다.“이준혁 씨, 진정해요!”그러자 이준혁이 매서운 눈빛으로 곽경천을 밀쳐냈다.“뭐요? 이 남자가 곽경천 씨 여동생을 신경도 안 썼는데 그냥 넘어가겠다는 겁니까?”“아니, 그런 게 아니라...”말을 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고 사실 배남준이 윤혜인 곁을 지키는 것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세 명의 남자는 분만실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고 아무도 아이들을 데리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러자 의사가 재차 물었다.“어느 보호자분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시겠어요?”이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윤혜인이 나올 때까지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의사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쌍둥이 아기들을 데려가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말이다.곽경천은 이준혁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제가 가겠습니다.”어차피 이준혁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그도 안심이었다.얼마 후 곽경천이 아이들의 유모차를 밀고 나왔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윤혜인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오히려 곽경천이 진지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참, 저 남자랑 똑 닮았네. 완전 붕어빵이야.’아이들의 일에 대해 정리한 뒤 곽경천은 여은과 도지훈에게 철저히 지키게 하고는 배남준에게 다가가 말했다.“남준아, 얼굴에 있는 상처 좀 치료하러 같이 가자.”배남준도 떠나기를 꺼려했다. 전의 일로 이미 잔뜩 후회하는 중이었기에 윤혜인이 나오기 전에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그러자 곽경천이 설득했다.“걱정 마. 여긴 이준혁 씨가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네 상태를 보면 혜인이가 좋아하겠어?”배남준은 이준혁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곽경천을 따라가 얼굴의 상처를 처리하기로 했다.그들이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몇 명의 의사가 급히 분만실로 뛰어 들어갔다.표정이 굳어지더니 이준혁은 한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 산모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의사는 대답했다.“산모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요...”남자의 손이 순간 힘없이 축 처졌다.의사들은 다시 급히 분만실로 뛰어 들어갔다.곽경천과 배남준도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이런 일이!”아무도 그에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잠시 후
의사는 잠시 멈칫했다.‘방금 뽑아낸 혈액에 왜 질병 검사를 해야 하지?’그녀는 답했다.“가장 빠르면 40분, 인원이 많아지면 90분 이상, 또는 그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이준혁의 단호한 말에 옆에 있던 두 남자도 정신을 차렸다.‘그래. 혜인이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직 있을 수 있잖아. 바이러스를 의료진 중 누군가에게 주입했을 가능성도 있어.’때문에 질병 검사 없이 혈액을 바로 사용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누구도 윤혜인의 목숨을 두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의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혈액을 헬기로 긴급 수송한다 해도 4시간 이상 걸릴 겁니다. 지금은 눈보라가 심해 날씨 조건도 좋지 않아 하룻밤이 지나도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산모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어요...”곽경천은 초조했다. 그는 물론이고 배남준도 윤혜인과 혈액형이 맞지 않았다.그때 이준혁이 말했다.“제 피를 사용하세요.”의사가 물었다.“B형 혈액형인가요?”이준혁은 답했다.“제 혈액형은 RH NULL입니다.”의사는 깜짝 놀랐다. 이는 흔히 초희귀 혈액형으로 알려졌으며 어떤 혈액형에게나 수혈이 가능했다.곽경천도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이준혁의 혈액형이 공개 자료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이렇게 희귀한 혈액형이 적에게 알려진다면 큰 위험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적당한 함정만 설치해도 이준혁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의사는 망설이며 말했다.“혼자서 산모에게 필요한 혈액량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지금 출혈량을 감안하면 최소 다섯 명이 수혈해야 산모의 피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어요.”그러나 이준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매를 풀어헤치며 말했다.“그럼 충분해질 때까지 뽑으세요!”당황한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곽경천 또한 이 상황이 무리라고 느꼈다. 다섯 명이 최대한 헌혈해야 할 양을 한 사람에게서 뽑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산모가 더 많은 혈액이 필요하더라도 이제는 이준혁의 피를 뽑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준혁이었다.밖에 있는 곽경천에게서 안전한 RH NULL 혈액과 B형 혈액이 긴급 수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아무리 빨라도 도착까지 두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그러나 두 시간은 현재 산모의 상태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고 이준혁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심박 수가 불안정한 윤혜인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계속해요!”그러자 난감해진 의사가 말했다.“더 이상 수혈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이준혁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했다.“계속하라고 했습니다.”의사는 이렇게 무모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게다가 이준혁의 경호원들도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만약 산모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결국 의사는 다시 800mL의 혈액을 채취했다.이 피를 수혈한 후 윤혜인의 심박 수가 잠시 상승하여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수술실 안에서 다시 의사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산모의 출혈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피가 엄청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고 막 회복했던 심박수는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준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뽑으세요! 1500mL를!”의사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제는 이성을 좀 찾으세요. 지금까지 이미 2600mL를 뽑았습니다. 더 뽑아 1500mL를 추가하면 몸에 남은 혈액이 거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RH NULL 혈액 팩이 모두 오염된 상태에서 무리한 채취는 산모뿐 아니라 보호자분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거예요.”의사는 부담을 견디기 힘들어 단호히 수혈을 거부했다.그러나 이준혁은 침묵 대신 수술용 메스를 손에 들고 자신의 손목 동맥을 향해 들이밀며 말했다.“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할까요?”의사는 완전히 겁에 질려 그를 설득했다.“우선 메스를 내려놓으세요.”“뽑을 거예요 안 뽑
이 말을 꺼내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곽경천은 결국 힘겹게 입을 떼야만 했다.배남준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만약 배남준이 초희귀 혈액형이라면 그 역시 윤혜인을 위해 주저 없이 헌혈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곽경천은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배남준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윤혜인은 똑같이 그를 위해 그랬을 것이다.하지만 감정이란 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뀌는 것도, 나중에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곽경천은 제삼자로서 그저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곽경천은 제삼자로서 윤혜인의 마음이 사실 겉과 같이 이준혁에게 완전히 냉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들끼리의 오해가 더 이상 깊어지지 않길 바랬는데 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없이 더 많은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곽경천이 먼저 배남준에게 말했다. “내 동생을 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 두사람을 갈라놓고 싶지 않아.” 배남준은 곽경천의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곽경천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때로는 사람이라는 게 스스로를 세뇌하고 속이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곽경천의 말에 대답했다.“경천아, 네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해.”...윤혜인은 자신이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꿈속에서 누군가 계속해서 그녀를 격려하고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있었다.곧 눈을 뜬 윤혜인의 시야에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곽경천이 들어왔다.그의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도 촉촉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다독인 사람이 바로 곽경천이라고 생각했다.“오빠...” 윤혜인은 온 몸에 힘이 없었고 곽경천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자신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었음을 짐작했다.“깨어났구나.” 곽경천이 깨어난 윤혜인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힘이 없어 기운이 나지 않는 것 말고는 괜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