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꺼내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곽경천은 결국 힘겹게 입을 떼야만 했다.배남준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만약 배남준이 초희귀 혈액형이라면 그 역시 윤혜인을 위해 주저 없이 헌혈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곽경천은 알고 있었다.윤혜인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배남준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윤혜인은 똑같이 그를 위해 그랬을 것이다.하지만 감정이란 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뀌는 것도, 나중에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곽경천은 제삼자로서 그저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곽경천은 제삼자로서 윤혜인의 마음이 사실 겉과 같이 이준혁에게 완전히 냉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들끼리의 오해가 더 이상 깊어지지 않길 바랬는데 서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없이 더 많은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곽경천이 먼저 배남준에게 말했다. “내 동생을 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그 두사람을 갈라놓고 싶지 않아.” 배남준은 곽경천의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곽경천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때로는 사람이라는 게 스스로를 세뇌하고 속이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곽경천의 말에 대답했다.“경천아, 네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해.”...윤혜인은 자신이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꿈속에서 누군가 계속해서 그녀를 격려하고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있었다.곧 눈을 뜬 윤혜인의 시야에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곽경천이 들어왔다.그의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도 촉촉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다독인 사람이 바로 곽경천이라고 생각했다.“오빠...” 윤혜인은 온 몸에 힘이 없었고 곽경천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자신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었음을 짐작했다.“깨어났구나.” 곽경천이 깨어난 윤혜인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힘이 없어 기운이 나지 않는 것 말고는 괜
말하지 않아도 곽경천은 윤혜인이 누구를 말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아이를 그렇게 아낀다면서 왜 내가 아이를 낳은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한번을 보러 오지 않는 거지? 혹시 그날 공원에서 했던 말 때문에 상처받았나?’윤혜인은 믿지 않았다.‘그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그날 공원에서의 일은 내가 아니라 준혁 씨가 먼저 잘못한 거잖아.’곽경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아마 요즘 일 때문에 일 때문에 바쁘지 않을까 싶은데? 곧 최종 확정이 난다더라고.”윤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무리 바빠도 아이를 보러 올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게 말이 되나?’“너도 이준혁 씨 너무 나무라지 마. 요즘 정말 정신없을 거야.”자꾸만 해명하려 드는 곽경천에 윤혜인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오빠,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선물이라도 줬어?”‘이젠 오빠마저 그 사람 편을 드는 건가...’그러자 곽경천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사실 이준혁 씨는 너한테 관심이 참 많거든.”뭔가 이상한 낌새에 윤혜인은 잠시 침묵했다.곽경천은 그동안 누구보다도 이준혁을 강하게 반대해 온 사람이었는데 설령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바뀌는 건 낯설었다.“오빠,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면 그 사람이 정말 무슨 좋은 거 줬어?”윤혜인의 물음에 곽경천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했다.“아니라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어. 단지 그냥 이준혁 씨도 아이의 아빠이니까... 너랑 조금 가까워지는 게 너와 아이에게도 나쁘지는 않잖아.”“그리고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너희를 더 신경 쓸 거야.”한동안 말이 없다가 윤혜인은 곽경천의 팔을 덥석 잡았다.“오빠, 솔직히 말해줘. 우리 집 파산이라도 한 거야? 나랑 아기를 부양할 수 없어서 빨리 우리를 떠나게 하려는 거야?”그러자 잠시 말을 잃더니 곽경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집 사업은 잘되고 있어. 네가 아이 열 명을 더 낳아도 오빠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제정신이야?”윤혜인은 엿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녀의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이때 여자가 다시 말했다.“이하진, 미리 말해두는 데 난 그냥 남자 만나서 널 열받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나 진짜 다른 남자랑 자서 네 자존심을 짓밟아 줄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분홍색 모피 코트를 입고 버릇없게 말하는 여자, 그녀는 바로 정유미였다.이하진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정유미,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난 너 안 좋아해. 예전에 캠핑 때 텐트에서 네가 술 취해서 나한테 매달려 키스한 거 기억나지? 그게 내 첫 키스였어. 난 그 일 문제 삼지도 않았는데 네가 나한테 들러붙은 거잖아!”화가 난 정유미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이하진, 너 진짜 남자 맞아?”“내가 왜 남자가 아닌데?”이하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남자라면 다 참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네가 다른 남자들이랑 잔다고 해서 나한테 상처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해가 되냐?”정유미는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구르며 울음을 터뜨렸다.“알았어. 지금 당장 가서 잘 거야!”그러더니 이내 돌아서며 말했다.“팔백 명이 아니라 팔천 명이랑 잘 거야. 지금 바로 가서 남자 찾을 거라고!”하지만 이하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어서 가봐. 근데 이 근처에선 팔천 명 찾기 좀 힘들걸.”그러자 정유미는 울음을 멈추고 살짝 뿌듯해하며 물었다.“나한테 미련 남은 거 아니야?”이 말에 이하진은 어이없어하며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니, 그냥 너가 여러 클럽을 돌아다녀야 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한 군데로는 부족하겠지.”정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얼굴을 감싸고 도망치듯 울며 사라졌다.윤혜인 옆을 지나갈 때도 정유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하진 역시 망설임 없이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이 나쁜 계집애!”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준혁 오빠?”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적당히 해.”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송소미!”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요…”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