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 생각했다.두 사람의 문제는 결국 그들이 직접 마주하고 해결할 일이다.윤혜인이 죄책감이나 동정심 때문에 돌아오기를 이준혁이 원하지 않는다면 곽경천은 잠시 사실을 숨기고 윤혜인의 진심을 지켜보기로 했다.만약 윤혜인이 그의 상태를 보고 마음을 놓지 못한다면 그 마음속에 아직 이준혁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그때가 되면 상황을 설명하고 곽경천은 윤혜인이 스스로 선택하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윤혜인의 마음속에 이미 이준혁이 없다면 설령 동정심을 느끼더라도 함께할 일은 없을 테 그때는 이 일을 끝까지 비밀로 하고 가슴속에 묻을 작정이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다른 감정 때문에 얽매여 억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곽경천이 떠난 후, 윤혜인은 한참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오빠가 말한 ‘조금 좋지 않다’는 말이 얼마나 나쁜 상태를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녀가 너무 깊이 개입할 일이 아닌 듯했다.하루 동안 고민하던 윤혜인은 결국 다음 날 작은 정원으로 산책을 나섰다.산책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발걸음은 2층 VIP 병동 구역으로 향해 있었다.작은 정원과는 전혀 다른 길로 걸어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이왕 온 김에 살짝 이준혁의 상태를 엿보고 싶었다.그렇게 병실 안을 살펴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 씨?”주훈이 그녀를 불렀다.“대표님 보러 오셨나요?”윤혜인은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전... 그냥 지나가다가...”주훈은 VIP 병동이 사생활 보호가 철저해 지나가다 우연히 올 만한 곳이 아니었음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그는 친절하게 말했다.“대표님은 방금 옆 정원으로 산책 가셨습니다. 그쪽에서 찾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이준혁의 현재 상태를 잘 아는 주훈은 윤혜인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윤혜인이 망설이자 주훈은 한 번 더 물었다.“제가 안내해 드릴까요?”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말했
이준혁이 아무 반응도 없자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뚱보도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던 장면을 보고 큰소리로 웃었다.“어이, 거기 휠체어 탄 절름발이, 못 들은 척하는 거 아니지?”이준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지금 나 말하는 거야?”뚱보는 이준혁의 눈빛에 깜짝 놀랐지만 자기 부모님도 대단한 사람들이니 전혀 꿀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가오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기에 큰소리로 비웃었다.“네가 아니면 나겠냐? 여기에 절름발이가 너 말고 또 있어?”이 말에 뚱보와 같이 온 꼬맹이도 껄껄 웃더니 말했다.“하하하, 저 절름발이 너무 웃기는데? 아까 일어서려고 하는 거 봤어?”윤혜인은 화가 치밀어올라 당장이라도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에게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었다.하지만 이준혁이 신경 쓰여 그럴 수가 없었다. 이준혁의 자존심이 센 건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윤혜인이 지금 나선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일단은 꾹 참고 계속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긴 건 정말 죽인다.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고.”옆에 서 있던 말라깽이가 이렇게 말하며 상대가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 쉽게 비웃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뚱보가 불만을 드러냈다.“예쁘면 뭐 해? 누가 절름발이를 좋아하겠어?”뚱보가 손을 탁탁 털더니 이준혁에게로 성큼 다가가 비웃었다.“어이, 절름발이. 나 대신 공 주어주면 우리 아빠한테 부탁해서 의족이라도 만들어줄게.”옆에 있던 꼬맹이가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의족을 어떻게 달아요? 다리가 있는데.”“다리가 있으면 뭐 해. 걷지도 못하는데. X신이나 마찬가지지.”뚱보는 잔혹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윤혜인은 뚱보가 교양 없이 오냐오냐 키운 망나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평소 집에 돈이 조금 있다고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괴롭히면서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뚱보가 쉬지 않고 비아냥댔다.“내 생각에는 저 쓸모없는 다리 그냥 잘라버리는 게 좋을
한참 기다려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뚱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빌어먹을 새끼가 숨어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원장한테 CCTV 확인해 보라고 할 거야. 내가 저 새끼 무조건 잡아낸다.”주변이 잠잠해지자 뚱보는 그를 공격한 사람이 얼굴을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아 숨은 거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기세등등해졌다.뚱보가 이준혁을 가리키며 말했다.“절름발이 이 새끼가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알면 깜짝 놀라. 나한테 손댔으니 이제 병원에서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이준혁이 차갑게 물었다.“아버지가 누군데?”뚱보가 비웃었다.“우리 아빠가 누군지 너 같은 절름발이가 알아서 뭐 하게?”그것도 모자라 뚱보는 친구들을 데리고 같이 이준혁을 욕하기 시작했다.=“X신 새끼.”뚱보가 한마디 욕하자 옆에 있던 꼬맹이가 따라서 욕하기 시작했다.“X신 새끼.”“...”말라깽이 차례가 되었지만 그는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 나는...”“너... 너는 뭐. 모자란 새끼.”뚱보가 욕설을 퍼부었다.“운전기사 아들인 너를 데리고 다니면 감지덕지해야지 이렇게 멍청해서야 되겠어? 지금 당장 아빠한테 전화해서 밥버러지 같은 너희 아버지 자르라고 할 거야. 착한 우리 아빠가 일자리 줬으니까 망정이지 아니면 네가 나 따라다니면서 팔자 필 수 있었겠어?”욕을 먹은 말라깽이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맞장구를 쳐주던 다른 친구가 따라서 말라깽이를 욕하기 시작했다.“죽었어? 왜 욕도 못 해? X신 새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꼬맹이가 재촉하기 시작했다.“빨리 해. 도련님 화나면 무섭다?”“난... 난 싫어.”말라깽이가 용기 내어 말을 이어갔다.“아빠가 욕하는 건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했어. 다른 사람을 비웃는 것도 안 되고.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다르게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격려와 도움이 맞는 거라고 했어.”뚱보는 화가 치밀어올라 가슴을 움켜
윤혜인이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이준혁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들었던 지팡이를 천천히 내려놨다.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윤혜인이 뚱보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누가 똥이라도 먹은 것처럼 말하길래 헤이즐넛으로 입가심이라도 해주려고 그랬지. 근데 이렇게 비곗덩어리일 줄은 몰랐지.”윤혜인이 비곗덩어리에 힘을 주며 말꼬리를 천천히 길게 내뺐다. 남을 놀리기 좋아하는 뚱보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뭔지 톡톡히 보여줄 생각이었다.“너... 너 누구... 아야... 감히 나를 때려? 주... 죽고 싶지?”헤이즐넛에 맞아 입술이 터진 뚱보는 발음이 새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나는 너를 구하러 온 여신이지.”윤혜인이 오만한 표정으로 뚱보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윤혜인의 말에 마음이 불안해져 얼른 윤혜인을 째려봤다.“얼굴이 너무 신기하게 생겨서 그래. 약간 씹다 만 반죽 같달까? 이빨은 왜 그렇게 커? 옥수수 두 개 심어놓은 것 같네. 그렇게 대충 생겨놓고 무슨 자신감으로 다른 사람 놀리는 거야?”“너...”뚱보의 졸병인 꼬맹이가 뚱보를 대신해 윤혜인을 욕하려다 뚱보 얼굴에 난 상처와 멍을 보고 얼른 하려던 말을 고치며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욕하고 그래요?”“왜 모함하고 그래? 나는 욕 같은 거 안 해. 그냥 본 그래도 얘기하는 거지. 그리고...”윤혜인이 예쁜 눈망울로 두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를 욕하게 만드는 건 일반적으로 사람이 아니야.”뚱보와 꼬맹이는 속에 든 게 없었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크게 한 방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자기들을 비꼬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뚱보가 말했다.“너... 감히 나... 나를 욕해?”“좀 닥치고 있어.”윤혜인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얼마 있지도 않은 교양 다 보여주지 않아도 돼.”윤혜인이 뚱보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생긴 건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하는 짓은 왜 그리 야비한 거야?”“흑흑... 흐앙...”뚱보가
윤혜인은 꼬맹이를 딱히 건드리지 않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옆으로 쓱 비켰다. 허탕을 친 꼬맹이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윤혜인은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 있는 두 꼬마 악마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잘 들어. 가정 교육을 잘못 받은 거 같은데 뭐 괜찮아. 너희 같은 철부지 혼내줄 사람은 많으니까.”윤혜인이 두 녀석을 욕한 것도 두 녀석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딱지가 붙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어서지 정말 두 녀석을 욕해서 화풀이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쪽으로 인도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에게 물렸다고 해서 반대로 개를 물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저 똑같은 일을 당하게 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그러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이 입을 열었다.“기억해. 잠깐은 너희들이 더 강해 보일지 몰라도 계속 지금 막 나가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윤혜인은 끝까지 두 녀석에게 굴복하지 않은 말라깽이를 당겨오더니 말했다.“얘, 넌 이름이 뭐야?”말라깽이는 윤혜인의 얼굴이 너무 예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윤혜인이 방금 한 말이 너무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뚱보와 꼬맹이가 톡톡히 혼나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부득이한 상황만 아니라면 절대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말라깽이는 윤혜인이 너무 눈부시게 멋있었다. 하여 얼른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임서현이에요.”윤혜인이 웃으며 칭찬했다.“임서현 어린이, 아주 잘했어요. 아버지가 참 잘 가르친 것 같아. 너만 봐도 아버지가 얼마나 바르고 존경할 만한 어른인지 알겠다.”윤혜인이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서 임서현의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줬다.“계속 이렇게 바르게 자라줘야 해.”임서현은 아까 많이 아플 때도 울지 않았는데 윤혜인이 칭찬하자 그새 눈시울이 붉어졌다.“예쁜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악한 세력에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을게요.”윤혜인은 그제야 이준혁을 챙길 겨를이 생겼다. 이미 나온 이상 숨을 수도 없었다. 윤혜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휠체어를 앞으로 움직여 윤혜인을 등 뒤로 감췄다.엄마 품에 안긴 뚱보는 사라졌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평소 무슨 사고를 치든 엄마는 늘 그의 편이었다. 오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뚱보를 만든 것도 다 엄마 덕분이었다.뚱보는 윤혜인을 손가락질하며 울음을 터트렸다.“엄마. 아니야. 저 여자야.. 저 나쁜 여자가 나 때렸어. 저 여자 죽여줘. 아니, 저 두 사람 다 죽여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봐서는 한 패인 것 같아.”뚱보는 엄마가 오자 더듬지도 않고 목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때려죽여. 당장.”뚱보의 눈빛은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었다.이를 들은 윤혜인의 눈빛이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뚱보는 아까 받은 수모로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 품에 안겨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딱 봐도 평소에 합심해서 사람들을 여럿 괴롭히고 다닌 것 같았다.여자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절름발이. 아직도 저 여자 감싸줄 용기가 나나 봐? 내가 오늘 너까지 같이 혼내준다. 절름발이도 모자라 장님으로 만들어줄게.”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이준혁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이준혁은 여자가 윤혜인을 해치는 걸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기에 얼른 지팡이를 들어 여자의 다리를 내리쳤다.털썩.지팡이에 무릎을 맞은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고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여자가 고통에 몸부림쳤다.“너... 빌어먹을 절름발이가 감히 나를 습격해?”윤혜인은 모자가 말을 꺼낼 때마다 절름발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걸 보고 더는 참을 수 없어 앞을 막고 있는 이준혁을 등 뒤로 가렸다.“왜 얼굴을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아이한테 물어봐. 말을 그딴 식으로 했는데 오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윤혜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엄마가 돼서 그래도 돼?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내 아이니까 어떻게
윤혜인은 아직 산후조리 중이고 모유 수유하고 있었기에 옷을 헐렁하게 입은 것뿐이지만 여자는 알 리 없었다. 그냥 별 볼 일 없는 윤혜인이 돈 많은 남자라면 절름발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게다가 이렇게 헐렁한 옷을 입어도 예쁘기만 한 윤혜인을 보고 질투 나 미칠 지경이었다. 하여 모욕적인 말로 윤혜인을 공격하면서 끌어내리려 했다.이를 들은 윤혜인이 웃음을 터트렸다.“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다리는 글쎄 안 좋다 하지만 얼굴 못 봤어? 얼굴만 봐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끔뻑 죽겠어. 내가 좋아서 내가 꼬시는 건데 뭐가 문제야?”여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윤혜인이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도 윤혜인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가 정말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던 것이다. 여자가 그동안 만나봤던 남자들을 놓고 봐도 이 남자와 비길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예쁘장한 여자를 보면 눈을 찢어버리고 싶었다.“퉤. 걸레 같은 X.”여자가 비꼬기 시작했다.“그게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녀? 얼굴 하나 빨개지지 않는 것 봐. 뻔뻔하긴.”“내가 뭐가 뻔뻔한데?”윤혜인은 들으면 들을수록 웃음이 났다.“둘 다 싱글인데 서로 좋아하면 어때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색안경 끼고 사람 보는 거 그거 되게 안 좋은 거야.”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진실한 상황을 얘기했다. 물론 MSG를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좋아한다는 말 말이다. 여자의 말과 행동에 약이 잔뜩 올라서 말을 가려서 할 수가 없었다. 윤혜인은 여자에게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원래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마음도 더러운 편인데. 더는 역겨워서 상대 못 해주겠네.”잔뜩 약이 오른 여자가 말했다.“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사람 불러서 그 입 찢어줄까?”“예쁜 게 어때서? 내가 예쁜 게 거슬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걸 봐서는 평소에도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스스럼없이 했을 것이다.남자는 여자의 말을 참 잘 들었다.“그래. 그래. 지금 당장 저 연놈 때려죽일게.”“거기 누구 없어?”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머리가 하얗게 센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걸어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남자는 헐레벌떡 달려온 운전기사 임장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보디가드는?”임장덕이 굽신거리며 말했다.“대표님 지시를 기다리며 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부를까요?”“아니야.”인내심을 잃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네가 하면 되겠네. 와서 저 연놈들 혼 좀 내줘.”임장덕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화들짝 놀랐다.“대표님, 여기는 공중 장소입니다. 오해가 있으면 일단 대화로 푸시는 게...”임장덕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상대가 신발을 임장덕의 얼굴에 내던졌다.“젠장. 하라면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굽이 높은 구두로 얼굴을 맞은 임장덕은 이빨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아빠.”구석진 곳에 서 있던 임서현이 그쪽으로 달려가 머리가 하얗게 센 아빠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아빠, 대표님 왜 저러시는 거예요?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대표님도 아빠 존경한다면서요. 아빠 그동안 나 속인 거예요?”임장덕도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맞고만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이에게 좋은 것만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매번 아들이 대표님은 어떤 사람인지 물을 때마다 아들이 부담을 느끼는 게 싫어 늘 젠틀하고 나이스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아이는 잘 바르게 잘 자라날 수 있었다.임서현이 대표님이라 불리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에 뭔지 모를 힘이 가득 차오르더니 한 글자 한 글자 힘 있게 내뱉었다.“아저씨,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아빠를 때리면 안 되죠. 그리고 아까 한 지시는 잘못된 거라 아빠가 따르지 않는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임서현이 꿋꿋하게 말을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