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걸 봐서는 평소에도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스스럼없이 했을 것이다.남자는 여자의 말을 참 잘 들었다.“그래. 그래. 지금 당장 저 연놈 때려죽일게.”“거기 누구 없어?”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머리가 하얗게 센 점잖아 보이는 남자가 걸어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남자는 헐레벌떡 달려온 운전기사 임장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보디가드는?”임장덕이 굽신거리며 말했다.“대표님 지시를 기다리며 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부를까요?”“아니야.”인내심을 잃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네가 하면 되겠네. 와서 저 연놈들 혼 좀 내줘.”임장덕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화들짝 놀랐다.“대표님, 여기는 공중 장소입니다. 오해가 있으면 일단 대화로 푸시는 게...”임장덕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상대가 신발을 임장덕의 얼굴에 내던졌다.“젠장. 하라면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굽이 높은 구두로 얼굴을 맞은 임장덕은 이빨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아빠.”구석진 곳에 서 있던 임서현이 그쪽으로 달려가 머리가 하얗게 센 아빠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아빠, 대표님 왜 저러시는 거예요?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대표님도 아빠 존경한다면서요. 아빠 그동안 나 속인 거예요?”임장덕도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맞고만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이에게 좋은 것만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매번 아들이 대표님은 어떤 사람인지 물을 때마다 아들이 부담을 느끼는 게 싫어 늘 젠틀하고 나이스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아이는 잘 바르게 잘 자라날 수 있었다.임서현이 대표님이라 불리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에 뭔지 모를 힘이 가득 차오르더니 한 글자 한 글자 힘 있게 내뱉었다.“아저씨,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아빠를 때리면 안 되죠. 그리고 아까 한 지시는 잘못된 거라 아빠가 따르지 않는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어요.”임서현이 꿋꿋하게 말을
화가 잔뜩 치밀어 오른 여자는 손톱으로 남자를 마구 꼬집으며 욕했다.“또또. 이러고도 안 봤다고요? 눈알을 뽑아야 정신을 차릴 거예요?”“아니. 아니야. 오해야.”남자가 변명했다.“저 여자 황 대표랑 되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황 대표가 얼굴은 청순한데 몸매는 화나 있는 여자를 좋아하잖아.”황 대표라고 불리는 사람은 그들의 협력사인 것 같았다. 그들은 평소에도 참하고 예쁜 여자를 찾아 황 대표에게 가져다 바치면서 계약을 성사하는 짓을 많이 했다. 일이 끝나면 몰래 찍은 동영상으로 협박하며 신고하지 못하게 협박하기도 했다.이 말에 여자가 바로 알아채고는 웃기 시작했다.“맞네. 저 여자를 황 대표에게 가져다 바치면 되겠네요.”남자는 뱀과도 같은 눈빛으로 윤혜인을 훑어봤다. 황 대표에게 바치기 전에 먼저 따먹을 방법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변태 같은 눈빛과 말투에 이준혁의 눈동자가 역겨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이준혁은 예고도 없이 손에 들었던 지팡이를 그쪽으로 던졌다.쾅.까만색 특제 지팡이가 남자의 머리를 명중했고 이내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아이고...”남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어떤 새끼가 감히 나를 습격해?”깜짝할 사이에 날아든 지팡이에 남자는 날아온 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머리를 맞고 말았지만 여자는 절름발이가 지팡이를 던진 걸 똑똑히 보고는 입을 열었다.“여보, 저 두 사람 당장 묶으라고 해요. 남자는 돈 많고 외로운 여자들 모임에 던져넣고 여자는 황 대표에게 가져다 바쳐요. 지금 당장 저 연놈을 골로 보내라고요.”남자가 여자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운전기사를 불렀다.“어이, 임씨.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왜 그렇게 행동이 굼떠? 거기 서서 뭐 해? 당장 저 남자부터 묶어.”남자는 이준혁이 절름발이라 임장덕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장덕이 묶으면 보디가드가 두 사람을 차에 태우면 되는 것이다.임장덕이 얼른 이준혁 앞으로 다가왔다. 윤혜인은 임장덕도
“아악.”남자가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마가 깨진 것도 모자라 주먹까지 맞았으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임서현이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손뼉을 쳤다.“아빠, 너무 멋있어요.”임장덕은 아들이 선망의 눈빛을 보내자 자신감을 얻고는 남자에게 말했다.“차량 블랙박스를 한국 경찰에 넘길 거예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나쁜 짓 할 생각하지 마요.”임장덕은 그들이 나쁜 짓을 하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자와 그 남편이 차에서 나눈 대화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블랙박스를 경찰에게 넘긴다면 경찰이 그 블랙박스를 단서로 수사하다 보면 뭔가를 조사해 낼지도 모른다남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멍청한 줄만 알았던 임장덕이 어느새 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했을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자주 나쁜 짓을 저질렀기에 절대 증거를 남길 수도 있는 블랙박스를 달 리가 없었다.“빌어먹을. 내가 오늘 너 죽이고야 만다.”남자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때마침 주훈도 도착했다. 보디가드를 데려오지는 않았지만 이 병원 원장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이준혁에게 이 두 남녀는 병원에 의료 설비를 납품하는 사업을 하는데 북안도의 정부 의료 부문 관리자 매수해 북안도에 있는 병원의 의료 설비를 독점 공급하면서 떼돈을 벌었다고 보고했다. 돈이 들어오니 점점 행보가 오만해지게 된 것이다.남자는 원장과 사이가 좋았기에 원장을 보자마자 달려와 울부짖었다.“원장님, 이것 좀 보세요. 원장님 병원에서 저희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좀 보시라고요. 얼른 저 사람들 다 쫓아내요.”남자는 원장이 이 사람들을 쫓아내면 보디가드를 시켜 하나씩 손봐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운전기사 임장덕은 알고 있는 비밀이 많아 싹을 잘라야 했다.원장은 이 말을 듣자마자 손을 흔들더니 병원 보디가드를 불렀다.북안도는 한국과 달리 총기에 관한 사건 사고가 많았고 병원에도 가끔 총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환자가 응급 수술에도 살아나
여자도 같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너희들 눈멀었어? 끌어내야 할 사람은 저기 있잖아.”여자가 손을 내밀어 멀지 않은 곳에 놓인 휠체어에 앉은 남자와 기세등등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연놈들 끌어내라고.”하지만 여자도 이내 보디가드에게 끌려 나갔다.원장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중요한 손님을 욕보였으니 양국의 화목을 깨트린 죄로 상부에 보고할 거예요.”“뭐라고요?”여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엄중한 후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양국의 화목을 방해한 죄는 북안도에서 본토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설립한 죄명이었다. 만약 죄가 성립된다면 북안도에서 영영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국제 통행증에 빨간 줄이 그어지면 다른 나라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어진다.여자는 아직도 원장이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노망이라도 난 거예요?”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내가 누군지 봐요. 나야말로 당신들과 협력을 맺은 사람이에요. 끌어내려면 저기 앉은 저 쓰레기 같은 연놈들을 끌어내야지.“맞아요.”남자도 보디가드가 방심한 틈을 타 원장을 향해 달려오더니 소리를 질렀다.“나 정부 의료 부문 관리자와 친해요. 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요.”보디가드는 원래 두 사람을 끌어낼 때 그렇게 큰 힘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까만 해도 병원의 귀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장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두 사람을 끌어내라고 하자 원장이 잘못 지시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남자가 원장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요. 내가 누군지. 끌어내야 할 사람은 저 절름발이라니까요.”남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원장은 남자의 싸대기를 힘껏 후려갈겼다. 남자의 입에서 금세 피가 흘러나왔고 넋을 잃은 채 원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원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남자의 오른쪽 입가에도 피가 새어 나왔다. 화풀이한 원장이 휠체어에 앉은 이준혁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준혁은 여전히
그러다 한쪽 이익이 침범을 당하면 사이는 바로 틀어지게 된다. 지금처럼 남자가 멍청하게 하나로 프로젝트의 총괄 담당자를 욕보인 이상 위쪽에서 조사하기 시작하면 병원을 폐쇄해야 할지도 모른다. 폐쇄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장은 당장 해임될 수도 있다.여자와 그 남편도 너무 멍청했다. 아직도 누가 최종 보스인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북안도의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최고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일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남자가 지내는 데 불편한 게 없이 극진히 모실 수밖에 없었다.원장은 보디가드처럼 날마다 단련하는 것도 아니니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발차기 몇 번에 숨을 헐떡이더니 바로 뒤에 선 보디가드에게 말했다.“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안 튀어와?”보디가드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귀한 손님이었던 두 사람이 더 귀한 손님을 욕보인 게 틀림없었다. 이제 더는 눈치 볼 거 없이 있는 힘껏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3, 4명의 보디가드가 부부를 에워싸고 매질하기 시작했다. 과정에 뚱보와 뚱보가 데려온 졸병들은 내보낸 상태였다. 임서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윤혜인이 주훈에게 아이들은 일단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아이가 보는 건 적절치 않았다.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맞는 게 맞았다.원장이 보디가드에게 멈추라고 하지 않은 건 이준혁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이준혁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릴 만큼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휠체어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데리고 나가세요.”“네. 네. 알겠습니다.”원장이 연신 대답했다.“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남자는 너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원장이 남자에게 굽신거리는 모습과 대표님이라는 호칭에서 금세 알아챘다.‘대표님...’남자는 서울 갑부 이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등급을 보아하니 이씨 가문을 이끄는 사람 같았다. 그제야 남자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망했다는 걸 직감한 것 같았다.북안도에서 조사가 끝나면 서울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한편, 밖에서 기다리던 뚱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쭐대고 있었다.“봤지? 아빠랑 엄마가 저 절름발이 혼쭐을 내줄 거야. 그리고 나를 욕한 저 여자도 무사하진 못할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들어서 룸살롱에 팔아버릴 거야.”임서현이 콧방귀를 뀌었다.“꿈 깨. 예쁜 누나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아.”뚱보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너야말로 딱 기다려. 아빠, 엄마 못 하는 게 없어. 안에 두 명 혼내주고 나오면 바로 밥버러지 너희 아빠랑 네 차례야. 감히 나한테 대들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임서현은 나이가 어렸기에 뚱보가 이렇게 말하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예쁜 누나와 잘생긴 삼촌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뚱보가 더 만만하게 볼 것 같아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매섭게 쏘아붙였다.“어떡하지? 나는 너 하나도 안 무서운데.”“너... 내가 너 죽일 거야.”뚱보는 당장이라도 임서현을 덮치려고 했지만 뒤에 서 있던 보디가드에게 잡히고 말았다. 만약 보디가드가 뚱보와 꼬맹이를 감시하지 않았다면 뚱보는 진작 꼬맹이와 손잡고 임서현을 매질했을 것이다.“젠장. 아빠, 엄마 나오면 넌 죽었어.”뚱보는 평소 보고 들은 게 부모님이 한 나쁜 짓이었다. 문제는 부모가 돼서 아이를 앞에 두고 말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쩍하면 아들에게 돈만 있으면 권력과 유착해 북안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뚱보도 믿는 구석이 있어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갔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맞고 나온 남자가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 이런 봉변을 당한 것도 다 아들이 시발점이었다. 아들이 밖에서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이런 대단한 사람을 욕보일 일도 없
뚱보는 갑자기 날아든 따귀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빠에게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여자가 비명을 지르더니 뚱보에게 달려가며 남자를 노려봤다.“미쳤어요? 왜 애를 때리고 그래요?”“고작 이걸로 때렸다는 거야?”남자가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내가 어떻게 오늘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당신이 낳은 모자란 새끼 때문에 다 망했다고.”여자가 뚱보를 마음 아파했다.“내가 낳은 거라니요. 그러면 당신 아들이 아니라는 소리예요?”“내 아들?”남자가 갑자기 서늘하게 웃기 시작했다.“그래. 내 아들이 아니지.”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헛소리에요? 어떻게 갑자기 당신 아들이 아닌데요?”“나 무정자증이라 친구 찾아서 낳은 거야.”남자가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줬다. 아이를 갖는 게 목적이기도 했고 여자를 옆에 묶어두고 싶기도 했다. 그땐 여자의 가문에 돈이 꽤 많았지만 남자는 별 볼 일 없는 백수였다. 출세하기 위해 외동딸인 여자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 앞으로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여자가 조금 못생겨도 참았다. 얼굴까지 예쁘면 절대 남자 차례가 올 리가 없었다.일단 먼저 여자에게 접근하고는 친구에게 부탁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게 하고 임신하면 아이를 빌미로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못생겨도 너무 못생겨서 부탁을 들어주려는 친구가 없어 큰돈을 들여서 일을 성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남자는 하고 싶은 사업을 마음껏 하면서 오늘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늘 자랑으로 여겼던 사업이 한순간 망하고 말았다.남자가 저지른 일은 북안도에서는 사형까지 갈 것 같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까지 들춰낸다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인생이 쫑났다는 생각에 남자는 이성을 잃고 벨트를 풀어 손에 들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빌어먹을 새끼.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내가 오늘 너 죽이고 만다.”여자가 뚱보를 감싸자 남자는 여자와 뚱보를 같이 패기 시작했다. 순간 병원 앞은 비명
정원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뒤따라온 건 지울 수 없는 어색함이었다.윤혜인은 기세등등해서 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꼬시고 싶다고, 두 사람 다 싱글인데 좋아한다고 뭐가 문제냐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아까는 정말 뭐에 홀린 것 같았다. 이준혁의 체면을 가리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할 말 못 할 말 한꺼번에 다 내뱉었지만 그 말이 휩쓸고 간 자리가 너무 어색했다. 윤혜인은 혹시나 이준혁이 난감해질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아까는 급해서 헛소리했는데 신경 쓰지 마요. 필요하면 내가 해명...”윤혜인은 정유미가 생각났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이준혁이 정유미가 한 말들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정유미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하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윤혜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필요하면 내가 해명할게요.”윤혜인의 해명을 다 듣고 나서야 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괜찮아 난 신경 안 써.”이준혁이 신경 쓰지 않는다니 윤혜인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 윤혜인은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그가 아까 몰래 일어서는 연습을 하려던 모습이 생각나 코끝이 찡했고 심장이 저릿했다. 이런 고통은 겪어도 겪어도 적응하기 어려웠다.‘다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에겐 관심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두 사람 곁에는 이미 각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지금 관심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윤혜인은 다른 사람과 애매모호한 관계를 가지는 게 싫었다.“푹 쉬고 빨리 나아요.”윤혜인은 그래도 이 말만은 참을 수가 없어 말하고 나서 얼른 몸을 돌렸다.“혜인아.”이준혁이 윤혜인을 불러세웠다.“아이는 잘 지내?”이준혁이 물었다.윤혜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약간은 울먹이며 말했다.“아이는 아주 잘 지내요. 아주 귀여워요. 준혁 씨 나으면 같이 놀아줘요.”“그래. 아이들 꼭 잘 챙겨야 해.”두 아이는 한번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