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이 잔뜩 묻어나는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윤혜인은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기애애한 이 모습을 지켜보다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곽아름에게 물었다.“아름아, 아빠는?”곽아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아빠가 뭐예요?”“…”순간 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다시 물었다.“아름이 아빠 말이야. 아까 밖에 서 있지 않았어? 얼른 아빠 들어오라고 해.”사실 눈을 뜨자마자 본 사람이 이준혁이 아니라는 생각에 윤혜인은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이준혁이 제일 처음으로 두 사람의 아이를 봤으면 했는데 말이다.하지만 곽아름은 여전히 못 알아들은 듯한 눈치였다.“엄마, 아빠가 어딨어요? 아름이는 아빠가 있은 적이 없는데?”윤혜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아빠가 있은 적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윤혜인이 얼른 곽진명에게 물었다.“아빠, 준혁 씨 못 봤어요? 아까까지 밖에 서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줘요. 네?”곽진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우리 아이들 앞에서는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왜 얘기하면 안 되는데요?”윤혜인은 왜 갑자기 이준혁을 꺼내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친부이자 윤혜인의 남편인데 안 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윤혜인이 혼자 낳은 아이도 아닌데 말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이상했다.“오빠…”윤혜인이 곽경천에게 도움을 청했다.“준혁 씨 좀 불러줘.”“…”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혜인아, 내가 어디 가서 찾아줄까?”윤혜인이 말했다.“멀리 안 가겠다고 했으니까 복도에 있을 거야.”곽경천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혜인아.”곽진명이 입을 열었다.“이준혁은 진작에…”“아빠.”곽경천이 곽진명을 말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아이들 데리고 먼저 나가 있어요. 아름이도 잠깐 나가 있어.”곽진명이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은 이
윤혜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곧이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어떻게 이럴 수가…”윤혜인은 믿을 수가 없었고 믿기도 싫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방금 전까지 나랑 얘기도 나누고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인데…”“혜인아, 진짜야.”곽경천이 그런 윤혜인을 안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꿈을 꾸고 있는 윤혜인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시간은 예전으로 돌아갔다.아무런 온도 없는 철문에 영안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중간에 놓인 침대에 하얀 천에 가려진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게 보였다.윤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그 몸을 보자마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준혁 씨…”윤혜인이 이준혁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다.‘왜… 도대체 왜…’하늘은 늘 그랬듯 무심했고 이준혁에게만 매정했다.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원지민의 목소리가 윤혜인의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넌 준혁이를 죽이려고 태어났어. 두 사람이 만난 것부터 잘못이야. 넌 언제가 준혁이를 죽이고 말 거야…’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원지민의 말은 지독한 저주와도 같았다.“아니야… 안 돼…”윤혜인이 갑자기 대성통곡했다.“다시 돌려내. 하느님, 저 사람 좀 다시 돌려주세요.”“다시 돌려만 준다면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그러니 제발 돌려만 주세요…”두 사람의 만남이 잘못이라면 만나지 않아도 된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일어나. 혜인아. 일어나봐…”꿈결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애써 눈을 떠보니 어렴풋했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곽경천이었다.“혜인아, 깼어?”곽경천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윤혜인이 가냘픈 목소리로 아니야, 안 돼라고 외칠 때 곽경천의 마음도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그 이…”곽경천이 윤혜인의 생각을 읽어내고는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준혁은 아직도 수술 중이야.
“그 약에 들어있는 성분에 마침 이 약재가 있어서 제련해 냈는데 이준혁이 깨면 바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윤혜인은 이 말을 들으면서도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아까 꿨던 꿈이 너무 생생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차가운 흰 천에 감싸진 뻣뻣한 시체를 보고 느꼈던 찢어질 듯한 고통이 아직도 뚜렷했지만 이 모든 게 갑자기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것이다.‘설마 하늘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건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걸까?’윤혜인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윤혜인은 곽경천을 보며 자기 배를 가리켰다.곽경천이 바로 알아채고는 말했다.“아이는 큰 문제 없어. 그냥 네가 많이 놀라기도 했고 영양실조도 있어서 누워서 일주일 정도 몸조리하래.”곽경천은 이미 살짝 불러온 윤혜인의 배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이들이 참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튼튼한 거 같아. 언니를 잘 보호해 줄 수 있겠어.”윤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곽경천이 그런 윤혜인을 관심하며 말했다.“피곤하면 더 쉬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필요하면 부르고.”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곽경천이 나가고 윤혜인은 아까 들은 것들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꿨던 꿈을 그냥 꿈으로 흘려보내려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죽었다는 걸 안 순간 느꼈던 고통은 정말 너무 생생했다. 도대체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꿈인지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이튿날.곽경천은 윤혜인에게 물을 따라주며 윤혜인이 하는 손짓과 말을 유심히 보고 들었다.“그 범인…?”윤혜인이 범인의 정보를 묻는다는 걸 알아채고 곽경천이 입을 열었다.“지금까지 나온 조사결과로 보면 찰스 쪽 사람은 아니고 다른 팀 소속인 것 같아. 아직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라 나도 조사하고 있어. 여기도 사람 보내서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윤혜인이 종이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그 사람이 원하는 게 나야?”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
마치 이준혁을 전혀 관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윤혜인은 모르지만 곽경천은 알았다. 윤혜인은 여러 번 꿈결에 울면서 안 된다고 연신 외쳐댔다. 그 외침이 얼마나 처절한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지게 했다.깨어나면 곽경천에게 들키지 않게 간병인에게 젖은 베개 수건을 바꿔 달라고 했다. 곽경천은 그런 윤혜인의 노력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모른 척했다.그러다 언젠가 윤혜인의 태도를 슬쩍 떠봤다.“이준혁이 깨어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해도 뭐라 하지는 않을게.”이준혁은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곽경천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남자라면 윤혜인이 진심을 다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그리고 전에 가져갔던 유서도 이준혁이 가짜 결혼을 하면서 다시 보내왔다.혹시나 자기가 안 좋은 일을 당할까 봐 최대한 윤혜인에게 유리하게 유서 내용을 바꿔서 곽경천의 사무실로 보내왔다.그 결혼식을 올린 것도 윤혜인을 위협하는 찰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올린 가짜 결혼식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곽경천은 더는 이준혁의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이준혁은 애초에 윤혜인과 만날 때 곽경천에게 했던 약속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다.이번 기회에 이준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곽경천도 더는 두 사람 사이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곽경천은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준혁은 열흘 넘게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처음 며칠이 제일 위험했고 몇 시간에 한 번씩 의사가 상태가 위중하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할 정도였다.윤혜인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고 이준혁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셋째 날 밤 휠체어를 끌고 몰래 이준혁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하지만 중환자실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주훈이 분주하게 돌아치다 의사가 위중한 상태를 알릴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가슴이 점점 더 아팠다.윤혜인은 지금 졸병이나 다름없었다. 이준혁의 그 어떤 소식도
이진숙은 원지민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고 원씨 가문에 있으면서도 원지민의 괴롭힘을 수도 없이 받았던 터라 원지민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나마 총명했던 이진숙이 빨리 원씨 가문에서 도망 나와서 망정이지 아니면 원지민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진숙은 원지민의 유골조차 받으러 가고 싶지 않아 보디가드에게 아무렇게나 처리하라고 시켰다. 얼마나 미웠으면 묫자리 하나도 사주기 싫어했다.원지민의 결말이 아무리 비참해도 윤혜인은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았다. 그런 짓을 저지를 때부터 이런 결말을 가져올 거라는 걸 알아야 했다.원지민이 정말 미래를 내다봤다면, 그래서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과연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윤혜인을 죽이려고 한 남자에 관해 여은이 조금 알아냈다. 그 남자도 북안도에서 온 사람이었다.북안도, 윤혜인은 그 지명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다. 가본 적도 없는 섬인데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건지 궁금했다.하지만 윤혜인은 아직 힘이 부족했기에 섣불리 조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곽경천은 이에 관해 자기가 조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그렇게 병원에서 보름 정도 더 입원해 있는데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이준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아직 눈만 깜빡일 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말할 수도 없어 아무 의사 전달도 하지 못했다.게다가 약물 중독에 무릎 골절, 그리고 총상 합병증까지 더해져 아직 시름 놓기는 어려웠다.김성훈은 심사숙고 후 이준혁이 깨어난 지 3일째가 되는 날 수술로 이준혁의 몸에 해독제를 심어 넣기로 했다.독액이 이준혁의 체내에 남아있으면 자체의 치유 능력이 떨어져 아무리 치료해도 결국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정도로 회복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수술 전날 김성훈이 윤혜인을 찾아왔다.김성훈은 여전히 친화력 있고 유머러스했다. 마음속으로 친구의 건강을 걱정했지만 그 초조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는 않았다.특히 윤혜인처럼 조용히 몸조리해야 하는 경우
사실 보름 동안 윤혜인도 매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아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부터 윤혜인은 이미 고통의 심연에 빠져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래도 원지민의 말을 무시하고 두 사람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이준혁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여생을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아쉬움이 남지 않게 노력할 생각도 했다.가족이 되어 한 지붕 아래 오손도손 살 수만 있어도 전생에 쌓은 덕이라고 했다.그러다 한 사람이 갈지라도 추억만 있으면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다 같은 곳으로 갈 거라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마음은 아프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이준혁의 곁을 지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다.윤혜인은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건 없다고, 같이 이겨내다 보면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모든 생각이 바뀌었다.원지민의 지독한 저주가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이준혁과 만난 뒤로 자꾸만 안 좋은 일만 생겼다. 윤혜인을 대신해 칼을 맞는가 하면 벼락에서 추락했고 윤혜인의 실종으로 배에서 지내며 윤혜인을 찾을 때까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도 독액과 폭탄, 그리고 총상까지…어느 하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게 없었다. 마치 이준혁이 죽어야만 끝나는 악순환 같았다.병원에 보름 정도 있으면서 윤혜인도 끊임없이 반성했다. 정말 몸에 살이 많아서 그녀를 가까이하는 남자마다 만신창이가 될뿐더러 온갖 고난을 겪는 게 아닌지 말이다.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들었고 깨어나서도 회복이 빠르지 않다는 소식만 여러 번 들었다. 전부 안 좋은 소식이었다.그럴 때마다 윤혜인의 마음은 큰 돌덩이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윤혜인에게는 이제 선택지가 없었다. 떠나주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윤혜인도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아직 이준혁을 사랑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이준혁이 다치고 망
이준혁의 수술이 내일 잡혀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려면 무균복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주훈은 윤혜인이 이준혁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알아서 밖으로 나갔다.침대에 누워 있는 이준혁의 몸에 장기를 검사하기 위해 넣어둔 튜브가 보였다.윤혜인을 무균복을 입었지만 이준혁의 몸에 달린 튜브를 보고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먼 발치에서 이준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보고 이준혁의 심장 박동과 숨결을 느꼈다. 만질 수 없다고 해도 그걸로 충분했다.“준혁 씨, 앞으로 내가 없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요. 난 그걸로 돼요…”병실에서 나가기 전 윤혜인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얼굴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매만지며 수척해진 이준혁의 얼굴을 손으로 그려냈다.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수술 성공을 기원하려고 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준혁 씨, 미안해요…”윤혜인은 아쉬움이 남는 듯 이준혁의 얼굴을 허공에 그리며 울먹였다.“약속 못 지킬 거 같아요. 우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꼭 잘 지내야 해요…”“약속해요. 이번 생은 꼭 건강하게 무사하게 아무 일 없이 오래오래 살아야 해요.”윤혜인이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가, 너희들 생각도 엄마랑 같지? 아빠가 무사히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아빠한테 인사해야지?”윤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아랫배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에 윤혜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선 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아까 느꼈던 태동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시 잠잠해진 아랫배를 보며 윤혜인은 태동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아가, 아빠랑 인사하고 싶으면 다시 한번만 움직여 볼래?”5초 후, 윤혜인은 아랫배가 다시 움직이는 걸 느꼈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태동이었다.아이들이
윤혜인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티를 낼 수가 없어 슬픔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네. 나아질 거예요. 앞으로 준혁 씨 잘 부탁드려요.”“제 일인걸요.”주훈이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하고 나니 어딘가 이상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니, 윤혜인이 어디 간다는 말로 들렸다.하지만 더 묻기도 애매해 고개를 들어 윤혜인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이라 오히려 더 이상했다.“비서님, 그러면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윤혜인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이튿날, 7시.윤혜인은 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옆에는 여은과 곽경천도 보였다.곽경천은 윤혜인이 계속 창밖으로 이준혁의 병원이 있는 쪽을 내다보자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혜인아, 걱정되면 지금 돌아가도 돼.”“아니야. 오빠.”이 말을 뒤로 윤혜인은 담요를 뒤집어쓰더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곽경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혜인이 정말 떠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곽경천도 알고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도 몸이 진작에 나았지만 이준혁이 걱정돼 퇴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이준혁이 수술하는 날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아마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서일 것이다.외국 시간으로 새벽 세 시에 곽경천은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이준혁의 수술은 아무 문제없이 끝났고 3, 4개월 천천히 몸조리만 하면 침대에서 내려와 설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중요 장기를 피해 갔다고는 하나 가슴에 총알을 맞았기에 관절의 활동 능력은 조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릎뼈가 아작난 터라 잔뼈를 제거하고 3D 프린터로 프린트한 관절뼈를 장착하긴 했지만 상처가 아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적어도 회복에 반년은 걸린다는 소리였다. 어느 하나 바로 되는 게 없었다.곽경천은 이 좋은 소식을 윤혜인에게 알렸다. 윤혜인이 멈칫하더니 덤덤하게 잘됐다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