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름은 통증을 잊기 위해 진우희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두 사람의 대화 방식은 아주 특별했다.서로 종이에 한 마디씩 적는 방식이었고 그 종이는 물에 닿으면 바로 불타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원진우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윤아름이 고안한 방법이었다.윤아름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선생님, 어쩌다 원씨 가문의 주치의를 하게 됐어요?]그러자 진우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 채 글을 적었다.[제가 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오셔야 해서요.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셔서 실수하실까 봐요.]진우희의 아버지는 북안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의술을 배웠고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었다.아버지가 한국으로 의학 공부를 하러 갔을 때 어머니와 만나게 되어 그녀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결혼 후, 아버지는 아내와 진우희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북안도로 돌아왔다.이곳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이었고 각 재벌 가문이 자신들의 영역을 나누고 있었다.조금이라도 잘못된 편에 서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하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그들에게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진우희의 아버지는 무법천지인 북안도에 지쳐 할아버지를 봉양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살기로 결심했다.한국은 북안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살기 좋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얼마나 늦은 시간에 나가더라도 총알에 맞을 걱정이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원씨 가문의 전 주치의가 의문사한 후, 진우희의 아버지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겸비한 의사로 추천받아 원진우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진우희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미리 유언 같은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진우희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오랫동안 먹먹했다.그래서 일찍 아침부터 용기를 내어 원진우의 저택으로 가서 스스로를 추천하게 되었다.그녀는 뛰어난 침술 솜씨로 원진우를 만족시켰고 그곳에 남는 것이 확정된 후에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부모는 화를 내며 진우희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진우희는 도망자가 되
윤아름은 방금 겪은 굴욕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다시 원진우와 마주친 후부터 그녀의 악몽은 또 시작됐다.처음 그가 자신을 서울의 별장에 가둔 후, 악몽 같은 반달이 지나가고서야 윤아름은 원진우가 방심한 틈을 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탈출은 무려 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그때 윤씨 가문은 위태로운 시기를 겪고 있었고 곽씨 가문에게도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윤아름은 홀로 한적한 어촌에 몸을 숨겼고 그곳에서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원진우의 부하들이 그녀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윤아름은 어촌의 착한 이웃에게 아이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그 후 윤아름은 다시 원진우에게 붙잡혀 북안도의 법 없는 원시적인 부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그가 윤아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그녀를 더 완벽하게 가두고 한국과의 모든 연결을 끊기 위해서였다.처음에 윤아름은 온 힘을 다해 탈출하려 했고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포기하지 않았다.하지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의 세계는 무너져버렸다.사람들은 윤아름이 발코니에서 실수로 떨어졌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렇게 윤아름은 5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시간이 흘렀음에도 원진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여전히 편집적이고 잔인하며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원진우는 자신이 윤아름을 붙잡고 있는 한, 몇 명을 죽이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리고 윤아름은 자신이 기억 상실을 연기하는 것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원진우처럼 영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은 곧 모든 것을 알아챌 테니 말이다.하여 깨어나자마자 그녀는 결심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이상, 포기하지 않겠다고.원진우가 윤혜인을 언급한 전화 통화를 들은 후부터, 윤아름은 그녀의 딸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그리고 오늘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이미 긴장한 나머지 입에서 나온 건 단 한 마디였다.“무서워요.”간단한 말이었지만 흥미롭다는 듯 원진우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려워해야 배신하지 않고 자신 몰래 행동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원진우는 얇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무슨 머리 세 개에 팔이 여섯 개는 달린 괴물이라도 돼?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을 텐데.”진우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긴장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그는 무심하게 물었다.“방금 방 안에서 무슨 얘기를 했나?”진우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그러자 원진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그럼 둘이서 방 안에 한 시간이나 있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가?”그 미소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뻔했다.진우희는 그 미소에 겁을 먹고 두 다리가 풀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가주님.”원진우는 느긋하게 다리를 내리고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그래, 뭐가 그렇게 죄송한데?”“저... 제가.”진우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사모님께서 부탁하신 약을 사기로 한 게 제 잘못입니다.”“어떤 약을 사기로 했는데?”진우희는 녹는 종이를 내밀었고 그 위에는 윤아름의 필체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진우희는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가 사모님의 돈 5만 유로에 눈이 멀어 그만 약을 사기로 했습니다.”하지만 원진우는 그 종이를 다 읽고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5만 유로라니 통이 크긴 하군.”“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사 줘.”남자는 냉담하게 말을 끊었다.“...네?”원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녹는 종이를 다시 진우희 앞에 던졌다.“사주라고.”진우희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도 여전히 주저하며 종이를 줍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겁에 질린
“아니에요. 아니에요...”진우희는 감히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원진우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진우희, 내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에 반박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 말 한마디에 진우희는 두려움에 떨며 종이를 주워들고는 벌벌 떨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가주님...”진우희가 방을 나가자 원진우의 우아한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아이를 갖자고 했던 원진우의 말은 그저 농담이었다. 설령 윤아름이 임신을 하더라도 그는 그녀가 아이를 낳게 하진 않을 것이다.나이가 든 사람에게 아이를 낳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원진우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고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는 편이 나았다.하지만 윤아름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는지 진우희에게 피임약을 부탁한 모양이었다.‘자기 몸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건가? 정말 임신할 수 있다고? 하지만...’원진우는 곧 윤아름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떠올렸다.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아직 열여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개를 푹 숙인 채 원진우는 방으로 돌아갔고 윤아름은 몸을 숙이고 쉬고 있었다.원진우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자 윤아름은 살짝 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참으며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왜 아직도 안 자?”원진우가 물었다.“잠이 안 와...”윤아름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진우 씨... 나 돈 좀 줄 수 있어?”그 말투에 원진우는 웃음이 터졌다.자존심 강한 윤씨 가문 아가씨인 윤아름이 자신에게 지금 돈을 달라고 하니 말이다.하지만 이 말은 진우희의 말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녀가 돈을 원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매수하려는 목적일 것이다.그러자 원진우는 경계심을 서서히 풀었다.윤아름은 그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순간 화가 나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안 줄 거면 됐어.”“안 준다고 한 적 없는데.”원진우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심 어린 웃음을 띠며 말했다.그러더니 팔을
가족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완전하지 않다.진우희는 종이를 물에 던져 넣으며 마음속의 신념을 더욱 굳건히 했다....윤혜인이 출근하자 비서가 와서 보고했다.“원지민 씨 쪽에서 또 일단 예복은 필요 없다고 하네요.”윤혜인은 원지민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에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확인해봐요. 만약 보름 뒤가 결혼식이라면... 지금 확정하지 않으면 예복이 준비되지 않을 텐데 나중에 우리가 처리 못 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네, 제가 다시 연락해볼게요.”“그리고 만약 정말로 취소한다면 계약금 전액은 돌려주지 않는다고 확실히 알려줘요.”디자이너의 가치는 그 디자인에 있으므로 여러 번 협의 끝에 취소한다면 업계 규칙에 따라 추가 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원지민과 그 문제로 더 얽히고 싶지 않았고 계약금 정도는 보상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곧 비서가 다시 와서 보고했다.“확실히 취소한다고 하네요. 원지민 씨 남편분께서 한 달 전에 이미 V사 찬란한 인생 컬렉션의 같은 시리즈로 예복을 예약했대요. 원지민 씨가 그 사실을 모르고 오해가 생겨서 저희 쪽 예복은 취소하겠답니다.”‘찬란한 인생’은 V사의 고급 맞춤형 럭셔리 드레스 라인으로 한 벌에 수억에서 수십억까지 할 수 있는 고가의 예복이었다.고급 맞춤형 의류는 미리 주문해야 하니 이준혁이 신경을 써서 비밀리에 드레스를 준비해둔 모양이었다.“알겠어요. 그렇게 처리해요.”윤혜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한동안 우울하게 지냈지만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계속해서 자신을 가두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도 하고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원지민과의 일이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감정의 파도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머지않아 윤혜인은 이 아픔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배남준이 윤혜인을 데리러 왔다.두 사람은 도시안의 도시라 불리는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배남준의 팔을 잡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유리 회전문이 돌아가며 두 사람의 모습은 이준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식사 중 윤혜인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배남준은 신사적으로 그녀의 스테이크를 잘라서 건넸지만 윤혜인이 많이 먹지 않자 물어보았다.“입맛에 안 맞아?”“아니요. 오후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배남준은 근처에서 혼자 식사 중인 이준혁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윤혜인을 불렀다.“혜인아.”“네?”곧 배남준이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혹시...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된 거야?”포크를 놓은 손을 잠시 멈칫했지만 윤혜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배남준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안타깝게 여겼다.“정말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시간이 지나면 분명 치유될 거야.”곽경천과 친구라 배남준은 윤혜인에 대한 감정이 미묘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여동생처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고 어떤 감정이 좋아한다는 것인지도 잘 몰랐다.다만 배남준이 원하는 것은 윤혜인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 행복 속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위로에 감사했다.때로는 오빠인 곽경천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배남준에게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배남준은 언제나 윤혜인의 생각을 헤아리고 부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대해주었다.“알겠어요. 남준 오빠.”그녀도 그의 생각과 같았다. 억지로 마음을 차갑게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자는 것이다.지금처럼 이준혁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할 수 있을 만큼은 되어야 했다.평생 피해 다닐 수는 없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결국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윤혜인은 믿었다.저녁 식사는 예상보다 일찍 끝났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혜인의 눈에 멀리 이준혁이
윤혜인은 택시를 기다리며 홀로 문 앞에서 서성였지만 오늘따라 차를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20분이 지나도 차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술에 취한 몇몇 남자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윤혜인이 예쁘다고 하며 연락처를 요구했다.윤혜인은 대꾸하지 않고 찡그린 채로 경비실 쪽으로 걸어가며 그들을 피하려 했다.하지만 술에 취해 무모해진 남자들은 경비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경비원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상황이 심상치 않자 경비원은 무전기를 꺼내 로비에 있던 경비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그러나 경비가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날카로운 경적 소리와 함께 검은색 마이바흐가 엄청난 속도로 그 술 취한 남자들을 향해 돌진했다.술에 취한 남자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고 그중 두 명은 바닥에 주저앉아 몇 바퀴 굴렀다.엄청난 속도의 차에 이 작은 경비실이 차에 밀려 뒤집힐까 봐 경비원은 겁에 질려 있었다.윤혜인 역시 크게 놀라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손으로 복부를 감쌌다.다행히도 마이바흐는 경비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췄다.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미안하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그 말을 들은 술 취한 남자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운전 기사에게 덤벼들려 했으나 바로 그때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도착해 그들을 막아섰다.그렇게 경비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술 취한 남자들은 소란 혐의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경비실에서 나온 윤혜인은 자신이 부른 택시가 도착한 것을 보았다.검은색 마이바흐의 옆을 지나칠 때 윤혜인은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등 뒤로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차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번호판을 보고 안에 그녀는 누가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하지만 방금 본 운전기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니 단순히 실수로 브레이크를 잘못 밟았을 수도 있었다.어쨌든 윤혜인은 이준혁이 자신을 구해주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차에 타고나서 운전기사는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바로 앞에 있는 체육관에서 유명 연예인의 공연이
밤이 깊어지면서 이슬이 내려 윤혜인은 얇게 입고 나온 탓에 코끝이 빨갛게 얼었다.옥빛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아 그녀를 더욱 가냘파 보이게 했다.“괜찮아요.”윤혜인은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몇 발짝 앞으로 걸었다. 앞쪽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이미 버스 운행은 끝난 상태였다.그래도 버스 정류장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곳에 앉아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마이바흐는 그녀를 뒤따라 정류장까지 천천히 움직였다.윤혜인이 앉자 이준혁은 차에서 내려 그녀 앞까지 걸어왔다.“차에 타. 내가 직접 모셔야 하겠어?”‘지난번에 만났을 땐 한마디도 안 하더니... 오늘은 원지민이 없다고 몇 마디 더 하려는 건가?’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냉담한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관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이미 기사가 오고 있어요.”이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이곳에서는 차를 잡기 힘들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릴 생각이지?”“괜찮아요. 얼마 안 걸릴 거...”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혜인은 갑작스런 팔의 통증을 느꼈다.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강하게 끌어올린 것이었다.그가 잡은 위치는 하필이면 배남준의 팔짱을 끼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나한테서 먼저 등 돌린 게 누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곧 이준혁은 몇 발짝을 끌어가다가 불편하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들어 올려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리고 자신도 뒷좌석에 올라탔다.하지만 이준혁이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윤혜인은 가방을 들어 던졌다.“쾅!”가방은 남자가 피하는 바람에 차 창문에 부딪혔다.차가 이미 출발한 상태에서 윤혜인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이 대표님, 당장 차에서 내려주세요.”그들 사이는 이미 끝난 사이였고 이준혁은 곧 결혼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윤혜인은 더 이상 이런 모호한 상황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약혼자가 있는 남자의 차를 타는 것 자체가 잘못이니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