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 알약은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기민욱의 손은 허공에 뜬 채 굳었다. 기민욱의 시선은 박태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고, 눈 밑의 빛은 어두웠고, 감정은 모두 그 캄캄한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형, 왜 약을 안 먹어? 아닌가…." 뭘 알았어? 기민욱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약이 너무 쓸 것 같아?” 박태준은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하고 있다가 기민욱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기민욱의 얼굴에서 발 위로 향했다. "내 병은 당분간 약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하지만 너, 눈이 멀었어?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어? 바닥의 깨진 유리 조각이 보이지 않아? 그걸 밟고도 고통을 못 느껴?” 박태준은 카펫을 더럽히고 있는 기민욱의 발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가 연결되자 박태준은 고개를 돌리며 안정된 말투로 말했다. "주 박사님, 육정현입니다. 잠깐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민욱이가 발을 다쳤어요.” "네, 유리 조각에 발을 찔려서 피를 많이 흘렸어요. 상처가 좀 심각해 보여요.” 기민욱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며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풀리는 듯했다. "형, 나한테 신경 써주는 거야?” 기민욱은 일어나 박태준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그가 발에 힘을 주자 발아래 유리 조각이 더 깊이 살 속으로 들어갔다. "아.” 기민욱은 아파서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박태준을 바라보다가 우울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온순 해졌다. "형,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형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기민욱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억울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박태준은 전화를 끊고 손을 들어 양미간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한숨을 쉬었다. ”뭐가 두려운 거야?” "형이 나를 원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기민욱이 박태준을 처음 본 것은 고아원이었다.그날 박태준은 어린 왕자처럼 차려입었고 그의 모습은
”……” 진유라는 털털했지만 입이 무거웠고, 무의식 중에라도 박태준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에 있는 그 수다스러운 사람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실종되면 아내를 돌볼 필요가 없나요? 박 사장 장부에 기록하고, 그가 돌아오면 갚으면 돼요." 룸 안의 불빛이 어두워 그 사람은 진유라에 가득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했다. 진유라가 자신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 대화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실종된 지 이렇게 오래되었으면 아마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명절날 조상님들 묘에서 제사 지내본 적 없어요? 조상님들께 잘 지켜달라고 빌지 않아요? 아내 옆에 있던 없던 아내를 잘 보호하고, 직접 돈을 벌 수 없다면 아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줘야죠.” 진유라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아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쳐다만 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여자의 남편은 죽어서까지 일을 해서 이 여자를 먹어 살려야 하다니 정말 지독하다. 지금 귀신을 쫓아다닌 방법이 없으니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다니면서 돈을 벌게 일을 시켰을 것 같다. 진유라는 그 사람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직 여기서 뭐해요? 빨리 돈 벌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내를 만나는 것도 힘들어요. 당신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나중에 죽은 사람도 이길 수 없을 거예요.” 1초 전까지만 해도 흉악스럽게 말하던 진유라는 1초 후 전화기 너머 신은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빨리 와. 웨이터에게 술 갖다 달라고 했어.” "알았어."박태준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신은지는 한 번도 엔조이 클럽을 간 적이 없고 접대조차 그곳을 피해서 했다. 진유라는 룸 번호를 그녀에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엔조이 클럽. 웨이터가 문을 밀어주자, 신은지는 정 중앙에 앉아 있는 진유라를 볼 수 있었다. 신은지의 시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흰 셔츠와 검은 양복바지의 무리 속
그러나 신수진이 휘두른 병은 곽동건에게 닿지 않았다. 그 전에 진유라가 그를 옆에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신수진의 손에서 빠져나온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유라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곽동건 씨, 당신 공부만 하다가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정신 나간 여자한테 법을 설명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주 대놓고 때려죽여달라고 시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가만히 있어요?”진유라는 먼저 곽동건을 꾸짖은 뒤, 신수진을 향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그리고 당신,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쪽 아버지가 임금체불로 회사 직원을 자살하게 했으면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변호사한테 이런 행패를 부려? 아버지한테 도움이 되고 싶으면, 차라리 죄를 나눠 가져,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신씨 가문이 벌인 일은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어 일반 사람에게도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사람들이 몰려가 신씨 가문 사람한테 계란을 던졌을까? 그만큼 악질적인 회사로,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진유라도 알고 있었다. 물론 신수진도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유라를 노려보며 비꼬기 시작했다.“누군가 했더니 진유라 씨? 그 하루에 남자를 여덟 번이나 바꾼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한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왜 아직도 시집 못 갔지? 설마 밖에서 찾다 못해 부족해서 클럽까지 온 거야?”진유라는 어이가 없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그사이 이상한 소문이 사교클럽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더 쪽팔릴 것 같아 차라리 이대로 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비꼬지 말고,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해. 하긴 남의 피땀을 쥐어짜 자기 배를 불리는 집안 따위, 환영하는 사람이 없긴 하겠다. 그러게, 잘 좀 살지 그랬어?”그 말을 들은 신수진이 발끈하며 반박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 해! 너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그 뒤로 기민욱은 한참 얌전히 지냈다. 심지어 일자리까지 구해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리고 더 이상 박태준에게 억지로 약을 먹게 하거나, 예전처럼 자주 회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재경 그룹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새벽에 고연우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했으니까, 안심해도 돼. 빨리 발견돼서 큰 손실은 없었어.”“그런데 목소리는 왜 이렇게 다 죽어가?”고연우가 거의 속삭이듯이 말하는 목소리를 보고 박태준이 물었다.“너 때문에 나 지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어.”정민아는 잠이 얕아 조금만 소음이 있어도 깨기 일쑤였다. 그리고 일단 한번 깨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고연우는 집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11월 추운 날씨에 정원에서 찬바람 맞고 있었다. 추위에 몸은 식어갔지만, 반대로 고연우의 마음은 화로 인해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너 도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이야? 언제까지 내가 네 똥 닦아야 해?”그도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예상했던 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미안. 조금만 참아. 거의 끝나가.”고연우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어디서 여자한테나 쓰던 수법으로 날 달래려고 들어? 3달이야. 3달 안에 안 끝나면, 나도 이제 몰라.”물론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불알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3달이 아니라 3년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라 화풀이가 필요했다. 박태준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으며 물었다.“그래서 지금 어딘데? 집 정원?”고연우가 미간을 누르며 짜증스레 말했다.“안 들려? 지금 바람 부는 소리?”“정민아한테 전화해 볼게.”“됐어. 하지 마.”고연우가 급하게 말렸다.“깨우면 혼나.”박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밖에서는 날아다니는 고연우가 집에서는 마누라 때문에 집도 못 들어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괜히 더 약 올리고 싶어졌다.“
나유성은 원래 쇼핑백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박태준이 있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손에 있던 물건들을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이거 가져다주는 김에 커피나 한잔하려고 왔지.”박태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유성, 내 와이프한테 찝쩍대지 마.”나유성이 코웃음치며 반박했다.“아니, 이젠 남남이지.”그리고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작년에 이혼했잖아.”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신경전을 벌이니, 신은지는 이제 끼어들기조차 싫었다. 그저 괜히 이러다가 말싸움이 격해져 소란을 만들까 봐 걱정이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신은지는 얼른 물을 열어젖히며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런데 이때, 나유성이 옆에서 집주인 행세를 하며 말을 덧붙였다.“그래, 어서 들어가자. 복도에서 이러는 거, 좋을 거 없어.”“….”그의 태도에 박태준은 순간 울컥했다. 그는 나유성을 제치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유성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현관에서 박태준의 얼굴을 마주한 나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너 얼굴 왜 그래? 다크서클은 왜 또 그렇게 내려오고? 괜찮은 거, 맞아? 의사 불러줄까?”박태준은 새벽에 고연우한테서 전화를 받은 다음 쭉 잠을 못 이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은지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차마 재경그룹으로 갈 순 없어 집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그 때문에 당연히 얼굴색도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유성의 말처럼 그렇게까지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박태준은 단번에 나유성이 일부로 신은지 앞에서 꼽주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차갑게 답했다.“은지는 너한테 관심도 없는데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한번 끝났으면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이제 그만 좀 우리 사이에 끼어들래?”나유성이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남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자꾸 끼어들지 마.”신은지는 두 사람의 유치함에 한숨을 내쉬었
고연우랑 나유성이 알고 있다는 건, 그의 부모님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박태준은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아무리 신은지가 그에게 화가 났어도 결국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일한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태준이 손에 들린 아기 베개를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신은지가 그에게 아기 베개를 선물로 줬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박태준은 바보 같았던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신은지는 실망한 그의 표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이럴 것 같아 시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결국 오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당신이 사라진 뒤에 주주들이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아버님에겐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어. 안 그랬으면 난 재경 그룹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럼 회사는 주주들 손에 넘어갔겠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려면, 이렇게 해야만 했어.”신은지가 말하지 않아도, 박태준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실제로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베개를 꽉 그러쥐며 힘겹게 말했다.“알겠어. 오늘은 일단 가볼게.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뻔뻔히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유성이 눈에 들어왔다. 박태준이 그를 잡아끌며 말했다. “이 지경이 됐는데, 넌 왜 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그러자 얼떨결에 박태준한테 밀려 나온 나유성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신경 꺼. 너면 모를까, 은지는 날 쫓아내지….”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그렇게 둘은 허망하게 문밖에 남겨지고 말았다. 신은지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두 사람의 인기척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초딩 같
신은지는 그의 문자를 보고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은지야, 우리 진짜 아이를 가질까? 라니… 미쳤나 봐.’그런데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서둘러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러 갔다. 신은지의 예상대로 박태준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문을 살짝 연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간 거 아니었어?”“나유성을 내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어.”그 말과 함께 박태준은 코를 으쓱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신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신은지는 별 다른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이번에 유성이 덕분에 회사도 많이 득을 봤어. 만날 때마다 신경전 그만 벌이면 안 돼?”“그건 그거고, 네가 걸려 있는 문제에 물러날 순 없지. 경쟁상대한테 친절하게 대할 수는 없잖아?”박태준과 나유성은 친구로서 서로를 아끼는 것은 분명하나, 암묵적으로 연애 문제에선 서로 양보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가 처음에 배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유성이 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신은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곧바로 바다로 향했다. 그만큼 둘은 연애와 우정에 모두 진심이었다.이때, 박태준이 품에 안겨 있던 신은지를 내려다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은지야,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아. 우린 언제든지 만들 수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 어때?”그가 신은지의 귓불을 깨물며 욕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응? 은지야.”좀 전에 문자로 볼 때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며,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이 짜릿함에 소름이 돋아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박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어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었다.“자주 여기 드나들면, 기민욱한테 들키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가 신은지 집이라는 것을 상기한 박태준은 긴장을 풀었다. 그는 얼른 샤워기 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로 바꿨다. 그런데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다른 의미로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태준이 침을 꼴깍 삼키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은지야….”11월 경인은 한참 날씨가 쌀쌀할 때였다. 신은지는 화장실에 맴도는 차가운 기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안 추워? 네가 무슨 철인이야? 아니면 뜨거운 물 켤 줄 몰라? 내가 켜줘?”그녀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박태준이 답했다.“아냐, 뜨거운 물 켰어.”그가 거짓 하나 섞이지 않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뒤늦게 켠 건 맞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그리고 박태준의 말 따라, 어느새 화장실은 조금씩 수증기가 차기 시작했다. 욕실 안에 옅은 안개가 꼈다. 그런데 이때, 신은지의 눈에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이 보였다. 예전에도 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서인지 흉터가 많이 옅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니, 신은지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계속 자신의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박태준은 조용히 물을 끄고 옆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미안, 보기 좀 그렇지?”목욕 가운이 여성용이라 전체적으로 길이가 좀 짧았다. 하지만 품은 넉넉해, 팔다리가 좀 많이 빠져나왔어도 다른 부분을 가리는 데는 문제 없었다.박태준이 모욕 가운의 허리띠를 묶을 때, 갑자기 신은지가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으나, 그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은지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깍지를 꼈다. “아니, 난 괜찮아.”그리고는 가운이 채 가리지 못한 그의 가슴 흉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많이 아팠어?”박태준은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던 고문과 최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팔다리가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피냄새와 먼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