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 알약은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기민욱의 손은 허공에 뜬 채 굳었다. 기민욱의 시선은 박태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고, 눈 밑의 빛은 어두웠고, 감정은 모두 그 캄캄한 눈동자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형, 왜 약을 안 먹어? 아닌가…." 뭘 알았어? 기민욱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약이 너무 쓸 것 같아?” 박태준은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하고 있다가 기민욱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기민욱의 얼굴에서 발 위로 향했다. "내 병은 당분간 약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 하지만 너, 눈이 멀었어?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어? 바닥의 깨진 유리 조각이 보이지 않아? 그걸 밟고도 고통을 못 느껴?” 박태준은 카펫을 더럽히고 있는 기민욱의 발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가 연결되자 박태준은 고개를 돌리며 안정된 말투로 말했다. "주 박사님, 육정현입니다. 잠깐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민욱이가 발을 다쳤어요.” "네, 유리 조각에 발을 찔려서 피를 많이 흘렸어요. 상처가 좀 심각해 보여요.” 기민욱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며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풀리는 듯했다. "형, 나한테 신경 써주는 거야?” 기민욱은 일어나 박태준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그가 발에 힘을 주자 발아래 유리 조각이 더 깊이 살 속으로 들어갔다. "아.” 기민욱은 아파서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박태준을 바라보다가 우울했던 감정이 사라지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온순 해졌다. "형,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형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기민욱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억울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박태준은 전화를 끊고 손을 들어 양미간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한숨을 쉬었다. ”뭐가 두려운 거야?” "형이 나를 원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기민욱이 박태준을 처음 본 것은 고아원이었다.그날 박태준은 어린 왕자처럼 차려입었고 그의 모습은
”……” 진유라는 털털했지만 입이 무거웠고, 무의식 중에라도 박태준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에 있는 그 수다스러운 사람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실종되면 아내를 돌볼 필요가 없나요? 박 사장 장부에 기록하고, 그가 돌아오면 갚으면 돼요." 룸 안의 불빛이 어두워 그 사람은 진유라에 가득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했다. 진유라가 자신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클럽 안이 너무 시끄러워 대화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실종된 지 이렇게 오래되었으면 아마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명절날 조상님들 묘에서 제사 지내본 적 없어요? 조상님들께 잘 지켜달라고 빌지 않아요? 아내 옆에 있던 없던 아내를 잘 보호하고, 직접 돈을 벌 수 없다면 아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줘야죠.” 진유라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아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쳐다만 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여자의 남편은 죽어서까지 일을 해서 이 여자를 먹어 살려야 하다니 정말 지독하다. 지금 귀신을 쫓아다닌 방법이 없으니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다니면서 돈을 벌게 일을 시켰을 것 같다. 진유라는 그 사람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직 여기서 뭐해요? 빨리 돈 벌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내를 만나는 것도 힘들어요. 당신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나중에 죽은 사람도 이길 수 없을 거예요.” 1초 전까지만 해도 흉악스럽게 말하던 진유라는 1초 후 전화기 너머 신은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빨리 와. 웨이터에게 술 갖다 달라고 했어.” "알았어."박태준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신은지는 한 번도 엔조이 클럽을 간 적이 없고 접대조차 그곳을 피해서 했다. 진유라는 룸 번호를 그녀에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엔조이 클럽. 웨이터가 문을 밀어주자, 신은지는 정 중앙에 앉아 있는 진유라를 볼 수 있었다. 신은지의 시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흰 셔츠와 검은 양복바지의 무리 속
그러나 신수진이 휘두른 병은 곽동건에게 닿지 않았다. 그 전에 진유라가 그를 옆에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신수진의 손에서 빠져나온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진유라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곽동건 씨, 당신 공부만 하다가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정신 나간 여자한테 법을 설명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주 대놓고 때려죽여달라고 시늉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가만히 있어요?”진유라는 먼저 곽동건을 꾸짖은 뒤, 신수진을 향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그리고 당신,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쪽 아버지가 임금체불로 회사 직원을 자살하게 했으면서,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변호사한테 이런 행패를 부려? 아버지한테 도움이 되고 싶으면, 차라리 죄를 나눠 가져,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신씨 가문이 벌인 일은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어 일반 사람에게도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사람들이 몰려가 신씨 가문 사람한테 계란을 던졌을까? 그만큼 악질적인 회사로,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진유라도 알고 있었다. 물론 신수진도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유라를 노려보며 비꼬기 시작했다.“누군가 했더니 진유라 씨? 그 하루에 남자를 여덟 번이나 바꾼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한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왜 아직도 시집 못 갔지? 설마 밖에서 찾다 못해 부족해서 클럽까지 온 거야?”진유라는 어이가 없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그사이 이상한 소문이 사교클럽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더 쪽팔릴 것 같아 차라리 이대로 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비꼬지 말고,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해. 하긴 남의 피땀을 쥐어짜 자기 배를 불리는 집안 따위, 환영하는 사람이 없긴 하겠다. 그러게, 잘 좀 살지 그랬어?”그 말을 들은 신수진이 발끈하며 반박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 해! 너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그 뒤로 기민욱은 한참 얌전히 지냈다. 심지어 일자리까지 구해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리고 더 이상 박태준에게 억지로 약을 먹게 하거나, 예전처럼 자주 회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재경 그룹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새벽에 고연우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했으니까, 안심해도 돼. 빨리 발견돼서 큰 손실은 없었어.”“그런데 목소리는 왜 이렇게 다 죽어가?”고연우가 거의 속삭이듯이 말하는 목소리를 보고 박태준이 물었다.“너 때문에 나 지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어.”정민아는 잠이 얕아 조금만 소음이 있어도 깨기 일쑤였다. 그리고 일단 한번 깨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고연우는 집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11월 추운 날씨에 정원에서 찬바람 맞고 있었다. 추위에 몸은 식어갔지만, 반대로 고연우의 마음은 화로 인해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너 도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이야? 언제까지 내가 네 똥 닦아야 해?”그도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예상했던 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미안. 조금만 참아. 거의 끝나가.”고연우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어디서 여자한테나 쓰던 수법으로 날 달래려고 들어? 3달이야. 3달 안에 안 끝나면, 나도 이제 몰라.”물론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불알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3달이 아니라 3년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라 화풀이가 필요했다. 박태준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으며 물었다.“그래서 지금 어딘데? 집 정원?”고연우가 미간을 누르며 짜증스레 말했다.“안 들려? 지금 바람 부는 소리?”“정민아한테 전화해 볼게.”“됐어. 하지 마.”고연우가 급하게 말렸다.“깨우면 혼나.”박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밖에서는 날아다니는 고연우가 집에서는 마누라 때문에 집도 못 들어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괜히 더 약 올리고 싶어졌다.“
나유성은 원래 쇼핑백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박태준이 있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손에 있던 물건들을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이거 가져다주는 김에 커피나 한잔하려고 왔지.”박태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유성, 내 와이프한테 찝쩍대지 마.”나유성이 코웃음치며 반박했다.“아니, 이젠 남남이지.”그리고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작년에 이혼했잖아.”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신경전을 벌이니, 신은지는 이제 끼어들기조차 싫었다. 그저 괜히 이러다가 말싸움이 격해져 소란을 만들까 봐 걱정이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신은지는 얼른 물을 열어젖히며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런데 이때, 나유성이 옆에서 집주인 행세를 하며 말을 덧붙였다.“그래, 어서 들어가자. 복도에서 이러는 거, 좋을 거 없어.”“….”그의 태도에 박태준은 순간 울컥했다. 그는 나유성을 제치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유성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현관에서 박태준의 얼굴을 마주한 나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너 얼굴 왜 그래? 다크서클은 왜 또 그렇게 내려오고? 괜찮은 거, 맞아? 의사 불러줄까?”박태준은 새벽에 고연우한테서 전화를 받은 다음 쭉 잠을 못 이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은지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차마 재경그룹으로 갈 순 없어 집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그 때문에 당연히 얼굴색도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유성의 말처럼 그렇게까지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박태준은 단번에 나유성이 일부로 신은지 앞에서 꼽주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차갑게 답했다.“은지는 너한테 관심도 없는데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한번 끝났으면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이제 그만 좀 우리 사이에 끼어들래?”나유성이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남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뭐 어때서? 너야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자꾸 끼어들지 마.”신은지는 두 사람의 유치함에 한숨을 내쉬었
고연우랑 나유성이 알고 있다는 건, 그의 부모님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박태준은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아무리 신은지가 그에게 화가 났어도 결국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일한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태준이 손에 들린 아기 베개를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신은지가 그에게 아기 베개를 선물로 줬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박태준은 바보 같았던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신은지는 실망한 그의 표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이럴 것 같아 시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결국 오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당신이 사라진 뒤에 주주들이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아버님에겐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어. 안 그랬으면 난 재경 그룹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럼 회사는 주주들 손에 넘어갔겠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려면, 이렇게 해야만 했어.”신은지가 말하지 않아도, 박태준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실제로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베개를 꽉 그러쥐며 힘겹게 말했다.“알겠어. 오늘은 일단 가볼게.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뻔뻔히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유성이 눈에 들어왔다. 박태준이 그를 잡아끌며 말했다. “이 지경이 됐는데, 넌 왜 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그러자 얼떨결에 박태준한테 밀려 나온 나유성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신경 꺼. 너면 모를까, 은지는 날 쫓아내지….”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그렇게 둘은 허망하게 문밖에 남겨지고 말았다. 신은지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두 사람의 인기척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두 사람이 유치하게 싸우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초딩 같
신은지는 그의 문자를 보고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은지야, 우리 진짜 아이를 가질까? 라니… 미쳤나 봐.’그런데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서둘러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러 갔다. 신은지의 예상대로 박태준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문을 살짝 연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간 거 아니었어?”“나유성을 내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어.”그 말과 함께 박태준은 코를 으쓱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신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신은지는 별 다른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이번에 유성이 덕분에 회사도 많이 득을 봤어. 만날 때마다 신경전 그만 벌이면 안 돼?”“그건 그거고, 네가 걸려 있는 문제에 물러날 순 없지. 경쟁상대한테 친절하게 대할 수는 없잖아?”박태준과 나유성은 친구로서 서로를 아끼는 것은 분명하나, 암묵적으로 연애 문제에선 서로 양보하지 않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가 처음에 배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유성이 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신은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곧바로 바다로 향했다. 그만큼 둘은 연애와 우정에 모두 진심이었다.이때, 박태준이 품에 안겨 있던 신은지를 내려다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은지야, 네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아. 우린 언제든지 만들 수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 어때?”그가 신은지의 귓불을 깨물며 욕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응? 은지야.”좀 전에 문자로 볼 때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며,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이 짜릿함에 소름이 돋아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박태준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어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었다.“자주 여기 드나들면, 기민욱한테 들키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가 신은지 집이라는 것을 상기한 박태준은 긴장을 풀었다. 그는 얼른 샤워기 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로 바꿨다. 그런데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다른 의미로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태준이 침을 꼴깍 삼키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은지야….”11월 경인은 한참 날씨가 쌀쌀할 때였다. 신은지는 화장실에 맴도는 차가운 기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안 추워? 네가 무슨 철인이야? 아니면 뜨거운 물 켤 줄 몰라? 내가 켜줘?”그녀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박태준이 답했다.“아냐, 뜨거운 물 켰어.”그가 거짓 하나 섞이지 않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뒤늦게 켠 건 맞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그리고 박태준의 말 따라, 어느새 화장실은 조금씩 수증기가 차기 시작했다. 욕실 안에 옅은 안개가 꼈다. 그런데 이때, 신은지의 눈에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이 보였다. 예전에도 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서인지 흉터가 많이 옅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니, 신은지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계속 자신의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박태준은 조용히 물을 끄고 옆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미안, 보기 좀 그렇지?”목욕 가운이 여성용이라 전체적으로 길이가 좀 짧았다. 하지만 품은 넉넉해, 팔다리가 좀 많이 빠져나왔어도 다른 부분을 가리는 데는 문제 없었다.박태준이 모욕 가운의 허리띠를 묶을 때, 갑자기 신은지가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으나, 그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은지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깍지를 꼈다. “아니, 난 괜찮아.”그리고는 가운이 채 가리지 못한 그의 가슴 흉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많이 아팠어?”박태준은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던 고문과 최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팔다리가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피냄새와 먼지가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