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학교로 돌아가 수업이나 들어. 또 땡땡이치면 다리 하나 부러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진유라는 진영수를 째려보며 경고한 뒤,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 "우리 이만 갈까?"나유성한테서 전화를 받자마자 온 탓에 진유라는 아직 밥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제야 신은지가 휠체어에 앉은 것을 발견한 진영수가 물었다."은지 누나, 다리 왜 그래요?""실수로 좀 삐었어."신은지는 진영수에게 말한 뒤, 곽동건에게 인사를 건넸다."곽 변호사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곽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핸드폰이나 이런 전자 기기는 해킹 위험이 있으니, 앞으로 이런 부탁 있으면 가급적 대면으로 해요."변호사로서 많은 경험을 해온 사람의 조언이었다. 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오늘 통화할 때 박용선에게 육정현이 박태준인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앞으로 더 조심히 움직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두 사람은 나온 김에 밖에서 식사를 대충 해결한 뒤, 다시 신은지 자취방으로 향했다.가는 길, 차 안에서, 신은지는 곽동건에게 받은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민욱, 현 22세. 아버지는 한때 재경 그룹의 주주였으나 횡령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며,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한 걸로 알려졌다. 이후, 7세에 보육원에 맡겨졌으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8세에 보육원 교사한테 학대에 죽을뻔했지만, 박용선을 만나 잠시 거주지를 바꿨으나 이내 10세에 해외로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신은지는 눈썹을 찡그린 채 내용을 읽었다. 열 살에 박용선이 기민욱을 해외로 보냈다니, 그녀는 문득 전에 강혜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태준에게 형제는 없지만, 동생이 생길뻔 했던 적은 있다고. 그렇다면 기민욱이 바로 그 입양할 뻔했던 아이인걸까?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서류를 살피는
진유라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본 신은지가 물었다. "왜 그래?"진유라가 핸드폰 화면을 뒤집으며 신은지 앞으로 내밀었다. "실수로 육 대표한테 전화가 걸린 것 같아.""...."공식적으로 육정현과 신은지는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이 번호는 얼마 전에 입찰 건 때문에 연락하려고 신은지가 따로 진영웅에게 알아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용선이 막아서서 직접 연락이 닿은 적은 없었다. 신은지는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연결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에요?"스피커를 틀지 않았음에도 육정현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들렸다. 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진유라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이런, 피가 나잖아!"그런 다음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신은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되물었다."어디서 피 나는데?"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피가 베어 나왔던 걸까? 신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긴, 네 마음에서 나지."진유라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그 사람이 박태준이 맞는지 알고 싶다며? 오면 박태준이고, 안 오면 육정현인 거야. 그럼 다시는 이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박태준이 실종된 뒤로, 진유라는 신은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때로는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될 정도로 신은지의 상태는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약 박태준이 죽은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면, 진유라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도 아니고, 굳이 남의 신분으로 뭔가 처리해야 한다면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신뢰도 없으면, 헤어져야지."본인인 거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일을 마무리한 다음에 찾아와야 할 거 아닌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진유라는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화가 치밀어올랐다.하지만 신은지는
밤을 새우고 새벽 5시에 해 먹는 김치볶음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잘 익은 묵은지의 새콤함과 기름에 볶아진 밥의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요리 솜씨 점점 늘어나는데?"신은지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볶음밥을 조심스레 입으로 넣으며 감탄했다. 그 말을 들은 진유라가 흥하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요즘 밖에서 사 먹으면 얼마인 줄 알아? 아주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요. 그런데 급여는 그대로지, 이러다가 밥만 퍼먹고 살게 생겼다니까? 정말 젊은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됐어. 우리 세대는 죽으면 아마 자식한테 물려줄 것도 없을 거야. 아니지, 출산율이 세계 최악인데 물려줄 필요 없겠구나? 정말 말세야, 말세."그녀의 말을 들은 신은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네가 그 젊은이에 속하는 줄 알겠다."진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뭐 다를 줄 알아? 요즘 세대면 다 비슷하지 뭐."이때, 소란스럽게 울리던 구급차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유라와 신은지의 눈동자가 동시에 동그랗게 떠졌다."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너. 이번에야말로 좋게 넘어갈 생각하지 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해."진유라는 습관적으로 현관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기다리던 육정현은 온데간데없고 병원 구급대원 모습만 보였다. 그제야 진유라는 아까부터 울렸던 구급차 소리를 떠올렸다."...."뜻밖의 등장에 진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 찾으세요?""저희는 구급대원입니다. 좀 전에 임산부가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신고자분이실까요? 임산부는 어디에 있어요?"육정현이 직접 오는 대신, 구급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진유라는 속으로 그를 향해 욕설을 날리며, 겉으론 미안한 미소를 지은 채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아, 죄송해요. 아까 다른
육정현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고연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올드한 인테리어를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취향이 참...."육정현이 육영 그룹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이 자리를 지킨 사람은 공식적으로 그의 아버지인 육명선이었다. 육명선의 취향대로 꾸며진 사무실은 전체적으로 아저씨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연우 씨, 투자하러 오셨다고요?"육정현의 억양은 박태준과 상당히 달랐다. 살짝 외국에서 오래 산 교포 느낌이 났다. 고연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심히 육정현을 살펴보았다. 고연우와 박태준은 가족끼리 친했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거의 형제처럼 붙어서 지냈다. 그래서 고연우는 박태준의 아내인 신은지보다도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잘 안다고 자부했다.박태준이 외동인 건 확실한데,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똑같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연우는 심각하게 고민됐다."설마 육명선 전 대표가 낚시하다 널 낚은 건 아니겠지?"육명선은 바다낚시를 매우 좋아했다. 육영 그룹이 빚 때문에 막다른 길목에 몰려 집과 차, 심지어 딸까지 늙은 남자에게 팔아치우면서도 낚시 장비만큼은 건드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딸을 시집보낼 때, 대외적으로는 자발적인 의사로 결혼한다고 공표했었다. 실제로 그의 딸은 큰 소란 없이 결혼까지 골인했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실로 알고 있었다.하지만 고연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정민아에게 웨딩드레스를 주문하던 날, 그도 사무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우는 본의 아니게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됐었다.그 여자는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정민아에게 얘기를 꺼낸 것이었겠지만, 정민아의 성격상 그것을 받아줄 위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민아는 자신의 웨딩드레스에 행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걸 참아 줄 리 없었다. 정민아는 그 여자에게 그럴 시간에 스스로 운명을 개조할 용기를 가지거나, 자신의 웨딩드레스 브랜드에 누가 되지 않도록 불만을 티 내지
신은지가 대기실에 십여 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고연우가 모습을 들어냈다. "가요."그가 대기실 문턱에 서서 신은지에게 외쳤다. 신은지는 말없이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확인했어요? 태준이 맞아요?"그리고 잠시 후, 차에 올라탄 뒤에야 그에게 질문했다. 육정현이 박태준일 거라는 확신이 80, 90프로는 들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은 사람한테 확인을 받는 편이 힘이 됐다. "확실히 똑같게 생긴 건 맞더라고요."질문을 받은 고연우가 덤덤히 답했다."...."신은지는 긴장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말 대신 신은지 앞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거기엔 막 뽑힌 듯, 뿌리가 생생한 머리카락 한 움큼이 놓여 있었다. "맞는지 아닌지, 이걸로 직접 확인해보면 되죠."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박태준의 죽마고우는 달라도 뭐가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 머리카락들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제가 직접 의뢰를 맡기면 중간에서 또 누군가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아버님이 내일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걸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아직 기민욱의 일도 박용선에게 말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혜정한테 샘플을 받아도 되긴 하지만, 그 과정에 누군가가 개입할 수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고연우는 조용히 차 서랍 안에서 봉투를 꺼내 머리카락을 담았다."결과 나오면 알려줄게요."그는 신은지를 재경그룹에 데려다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런데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중, 한 여자가 갑자기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신은지 씨."이 여자는 재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이름모를 주주의 조카였다. 삼촌백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전공은 확실히 재무 쪽이였다. 아마 그 주주의 지시로 신은지를 매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은지가 냉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도 인사하는 척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평평한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은지 씨, 임신 4개월 아닌가요? 그런 것치고는 배가 너무 밋밋한
와이프라니, 실종 전에도 그는 신은지한테 그저 남자 친구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박태준의 신분도 아니니, 그마저도 아니었다. 신은지의 선을 긋는 태도에, 육정현은 커다란 비수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기분이 들었다."저 미혼이에요. 임신한 약혼녀도 없고요."그러자 옆에 있던 진유라가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참 인연이네요. 은지가 마침 유아용품을 사러 왔는데, 그쪽도 이유 없이 유아용품을 사러 왔다니... 설마 처음부터 은지한테 사주려고 온 건 아니겠죠?"육정현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유라의 아픈 곳을 콕하고 찔렀다."그러게요. 인연이 참 묘하긴 하네요. 진유라 씨도 곽 변호사님이랑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한테도 청첩장 보내주실 건가요?"진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위협을, 곽동건과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또 어디서? 진유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막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이때 직원이 포장해 놓은 물건을 가져오며 친절한 미소로 물었다."다른 것도 보시겠어요? 저희 가게 임부복도 아주 예쁘고 품질이 좋아요. 저희 제품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임산부의 민감해진 피부에도 자극 주지 않으며, 세탁하기도 용이하게 만들어졌어요."신은지는 임산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아요. 감사해요."하지만 옆에 있던 육정현은 달랐다."그것도 포장해 주세요."그는 빠르게 진열대에서 옷 몇 벌과 분유 등, 전에 한번 구매했던 적이 있던 제품들로 골랐다. 비록 그때 보낸 물건들은 모두 나유성이 기부해 버렸지만, 이번에야말로 신은지에게 이 물건들을 성공적으로 전해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육정현이 계산을 마치자, 신은지와 진유라는 가계를 나선 뒤였다. 진유라가 베개를 신은지 배에다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건... 너무 티 날 것 같은데.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가짜 임신이라는 거 단번
신은지는 눈을 크게 떴다."육 대표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열쇠를 사용해요? 지금은 다 지문으로 사용하는 거 아니에요?” 육정현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심리 컨트롤을 잘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해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는 시골에서 살다 왔어요. 산에서 장을 보러 가려면 한나절이나 걸어야 하죠.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물건을 접하기 힘들어 비교적 전통적이에요.” 육정현은 엘리베이터가 35층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신은지 씨, 그럼 오늘 밤은......” 신은지는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저한테 열쇠 가게 전화번호가 있는데, 육 대표님이 필요하시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 육정현이 대답하지 않자 신은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육정현이 황급히 따라 내리며 말했다. "신은지 씨, 열쇠 가에게서 사람이 오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날씨도 추운데 신은지 씨 집으로 가서 차 한 잔 마시죠. 열쇠 가게 사람이 오면 내려갈게요.” 육정현은 정말 솔직하게 말했다. "……” 육정현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가 신은지 얼굴 앞에서 대놓고 꼬리를 치고 있다. 신은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현관 도어록을 열었지만 바로 문을 열지 않고 큰 가방과 작은 가방을 익살맞게 들고 있는 육정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육 대표님을 집에 초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남편이 얼마 전에 죽고 혼자 사는 여자라서 조금 불편도 하고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신은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 말하다가 곧 감정을 조절했다. 신은지는 속으로 자신이 배우가 되지 않은 것이 연예계의 손해라 생각했다. "이 아이는 공교롭게도, 제 전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어요.사람들은 제가 이미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모두들 이 아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신은지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너무 오해를 한 것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신은지는 뒤늦게 육정현의 말을 이해하며 말했다. "안 돼요.” 육정현은 실망하며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저는 이미 여기에 들어왔어요. 지금 제가 다시 나가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함부로 혀를 놀릴 거예요. 그리고 복도는 너무 추워요. 열쇠 가게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면 안 될까요?” "지금 나가시면 다른 사람들은 별생각 없을 것 같은데요.” 3분이면 옷을 벗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오해할 것이 뭐 있겠나? 육정현은 손을 뻗어 신은지의 손등을 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차가웠고, 그가 만진 곳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밖은 너무 추워요.” 아직 11월도 되지 않아, 저녁 최저 기온이 모두 영상 8, 9도 이상이고 춥다고 해도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다. 신은지의 마음은 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육정현을 힐끗 본 후 거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소파 위에 얇은 담요가 있어요. 들고 복도 비상구 통로로 가세요. 거긴 바람도 안 불어서 춥지 않아요.” 육정현은 신은지를 뒤따라 거실로 들어오며 탁자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강혜정이 고택 서재에 두었던 것인데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신은지는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다가 고개를 돌려 육정현이 그 액자를 들고 있는 걸 보며 말했다 "내려놔요. 만지지 말아요.” 육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박 대표님인가요?” “……” 신은지는 육정현이 들고 있는 액자를 보았다. 사진 속 박태준은 검은 셔츠에 바지를 입은 채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육정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나쁜 놈, 어떻게 연기하나 보자. "네, 죽은 귀신같은 전남편이에요. 생긴 건 귀신같이 생겨서 명은 짧았어요.” 신은지는 낙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육정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박 대표님도 이름이 있죠?” 말끝마다 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