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학교로 돌아가 수업이나 들어. 또 땡땡이치면 다리 하나 부러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진유라는 진영수를 째려보며 경고한 뒤,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 "우리 이만 갈까?"나유성한테서 전화를 받자마자 온 탓에 진유라는 아직 밥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제야 신은지가 휠체어에 앉은 것을 발견한 진영수가 물었다."은지 누나, 다리 왜 그래요?""실수로 좀 삐었어."신은지는 진영수에게 말한 뒤, 곽동건에게 인사를 건넸다."곽 변호사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곽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핸드폰이나 이런 전자 기기는 해킹 위험이 있으니, 앞으로 이런 부탁 있으면 가급적 대면으로 해요."변호사로서 많은 경험을 해온 사람의 조언이었다. 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오늘 통화할 때 박용선에게 육정현이 박태준인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앞으로 더 조심히 움직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두 사람은 나온 김에 밖에서 식사를 대충 해결한 뒤, 다시 신은지 자취방으로 향했다.가는 길, 차 안에서, 신은지는 곽동건에게 받은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민욱, 현 22세. 아버지는 한때 재경 그룹의 주주였으나 횡령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며,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한 걸로 알려졌다. 이후, 7세에 보육원에 맡겨졌으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8세에 보육원 교사한테 학대에 죽을뻔했지만, 박용선을 만나 잠시 거주지를 바꿨으나 이내 10세에 해외로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신은지는 눈썹을 찡그린 채 내용을 읽었다. 열 살에 박용선이 기민욱을 해외로 보냈다니, 그녀는 문득 전에 강혜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태준에게 형제는 없지만, 동생이 생길뻔 했던 적은 있다고. 그렇다면 기민욱이 바로 그 입양할 뻔했던 아이인걸까?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서류를 살피는
진유라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본 신은지가 물었다. "왜 그래?"진유라가 핸드폰 화면을 뒤집으며 신은지 앞으로 내밀었다. "실수로 육 대표한테 전화가 걸린 것 같아.""...."공식적으로 육정현과 신은지는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이 번호는 얼마 전에 입찰 건 때문에 연락하려고 신은지가 따로 진영웅에게 알아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용선이 막아서서 직접 연락이 닿은 적은 없었다. 신은지는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연결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에요?"스피커를 틀지 않았음에도 육정현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들렸다. 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진유라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이런, 피가 나잖아!"그런 다음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신은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되물었다."어디서 피 나는데?"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피가 베어 나왔던 걸까? 신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긴, 네 마음에서 나지."진유라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그 사람이 박태준이 맞는지 알고 싶다며? 오면 박태준이고, 안 오면 육정현인 거야. 그럼 다시는 이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박태준이 실종된 뒤로, 진유라는 신은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때로는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될 정도로 신은지의 상태는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약 박태준이 죽은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면, 진유라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도 아니고, 굳이 남의 신분으로 뭔가 처리해야 한다면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신뢰도 없으면, 헤어져야지."본인인 거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일을 마무리한 다음에 찾아와야 할 거 아닌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진유라는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화가 치밀어올랐다.하지만 신은지는
밤을 새우고 새벽 5시에 해 먹는 김치볶음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잘 익은 묵은지의 새콤함과 기름에 볶아진 밥의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요리 솜씨 점점 늘어나는데?"신은지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볶음밥을 조심스레 입으로 넣으며 감탄했다. 그 말을 들은 진유라가 흥하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요즘 밖에서 사 먹으면 얼마인 줄 알아? 아주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요. 그런데 급여는 그대로지, 이러다가 밥만 퍼먹고 살게 생겼다니까? 정말 젊은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됐어. 우리 세대는 죽으면 아마 자식한테 물려줄 것도 없을 거야. 아니지, 출산율이 세계 최악인데 물려줄 필요 없겠구나? 정말 말세야, 말세."그녀의 말을 들은 신은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네가 그 젊은이에 속하는 줄 알겠다."진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뭐 다를 줄 알아? 요즘 세대면 다 비슷하지 뭐."이때, 소란스럽게 울리던 구급차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유라와 신은지의 눈동자가 동시에 동그랗게 떠졌다."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너. 이번에야말로 좋게 넘어갈 생각하지 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해."진유라는 습관적으로 현관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기다리던 육정현은 온데간데없고 병원 구급대원 모습만 보였다. 그제야 진유라는 아까부터 울렸던 구급차 소리를 떠올렸다."...."뜻밖의 등장에 진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 찾으세요?""저희는 구급대원입니다. 좀 전에 임산부가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신고자분이실까요? 임산부는 어디에 있어요?"육정현이 직접 오는 대신, 구급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진유라는 속으로 그를 향해 욕설을 날리며, 겉으론 미안한 미소를 지은 채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아, 죄송해요. 아까 다른
육정현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고연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올드한 인테리어를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취향이 참...."육정현이 육영 그룹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이 자리를 지킨 사람은 공식적으로 그의 아버지인 육명선이었다. 육명선의 취향대로 꾸며진 사무실은 전체적으로 아저씨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고연우 씨, 투자하러 오셨다고요?"육정현의 억양은 박태준과 상당히 달랐다. 살짝 외국에서 오래 산 교포 느낌이 났다. 고연우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유심히 육정현을 살펴보았다. 고연우와 박태준은 가족끼리 친했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거의 형제처럼 붙어서 지냈다. 그래서 고연우는 박태준의 아내인 신은지보다도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잘 안다고 자부했다.박태준이 외동인 건 확실한데,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똑같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연우는 심각하게 고민됐다."설마 육명선 전 대표가 낚시하다 널 낚은 건 아니겠지?"육명선은 바다낚시를 매우 좋아했다. 육영 그룹이 빚 때문에 막다른 길목에 몰려 집과 차, 심지어 딸까지 늙은 남자에게 팔아치우면서도 낚시 장비만큼은 건드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딸을 시집보낼 때, 대외적으로는 자발적인 의사로 결혼한다고 공표했었다. 실제로 그의 딸은 큰 소란 없이 결혼까지 골인했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실로 알고 있었다.하지만 고연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정민아에게 웨딩드레스를 주문하던 날, 그도 사무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연우는 본의 아니게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됐었다.그 여자는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정민아에게 얘기를 꺼낸 것이었겠지만, 정민아의 성격상 그것을 받아줄 위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민아는 자신의 웨딩드레스에 행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걸 참아 줄 리 없었다. 정민아는 그 여자에게 그럴 시간에 스스로 운명을 개조할 용기를 가지거나, 자신의 웨딩드레스 브랜드에 누가 되지 않도록 불만을 티 내지
신은지가 대기실에 십여 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고연우가 모습을 들어냈다. "가요."그가 대기실 문턱에 서서 신은지에게 외쳤다. 신은지는 말없이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확인했어요? 태준이 맞아요?"그리고 잠시 후, 차에 올라탄 뒤에야 그에게 질문했다. 육정현이 박태준일 거라는 확신이 80, 90프로는 들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은 사람한테 확인을 받는 편이 힘이 됐다. "확실히 똑같게 생긴 건 맞더라고요."질문을 받은 고연우가 덤덤히 답했다."...."신은지는 긴장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말 대신 신은지 앞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거기엔 막 뽑힌 듯, 뿌리가 생생한 머리카락 한 움큼이 놓여 있었다. "맞는지 아닌지, 이걸로 직접 확인해보면 되죠."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박태준의 죽마고우는 달라도 뭐가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 머리카락들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제가 직접 의뢰를 맡기면 중간에서 또 누군가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까, 일단 아버님이 내일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걸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아직 기민욱의 일도 박용선에게 말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혜정한테 샘플을 받아도 되긴 하지만, 그 과정에 누군가가 개입할 수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고연우는 조용히 차 서랍 안에서 봉투를 꺼내 머리카락을 담았다."결과 나오면 알려줄게요."그는 신은지를 재경그룹에 데려다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런데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중, 한 여자가 갑자기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신은지 씨."이 여자는 재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이름모를 주주의 조카였다. 삼촌백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전공은 확실히 재무 쪽이였다. 아마 그 주주의 지시로 신은지를 매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은지가 냉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도 인사하는 척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평평한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은지 씨, 임신 4개월 아닌가요? 그런 것치고는 배가 너무 밋밋한
와이프라니, 실종 전에도 그는 신은지한테 그저 남자 친구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박태준의 신분도 아니니, 그마저도 아니었다. 신은지의 선을 긋는 태도에, 육정현은 커다란 비수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기분이 들었다."저 미혼이에요. 임신한 약혼녀도 없고요."그러자 옆에 있던 진유라가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참 인연이네요. 은지가 마침 유아용품을 사러 왔는데, 그쪽도 이유 없이 유아용품을 사러 왔다니... 설마 처음부터 은지한테 사주려고 온 건 아니겠죠?"육정현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유라의 아픈 곳을 콕하고 찔렀다."그러게요. 인연이 참 묘하긴 하네요. 진유라 씨도 곽 변호사님이랑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한테도 청첩장 보내주실 건가요?"진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위협을, 곽동건과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또 어디서? 진유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막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이때 직원이 포장해 놓은 물건을 가져오며 친절한 미소로 물었다."다른 것도 보시겠어요? 저희 가게 임부복도 아주 예쁘고 품질이 좋아요. 저희 제품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임산부의 민감해진 피부에도 자극 주지 않으며, 세탁하기도 용이하게 만들어졌어요."신은지는 임산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아요. 감사해요."하지만 옆에 있던 육정현은 달랐다."그것도 포장해 주세요."그는 빠르게 진열대에서 옷 몇 벌과 분유 등, 전에 한번 구매했던 적이 있던 제품들로 골랐다. 비록 그때 보낸 물건들은 모두 나유성이 기부해 버렸지만, 이번에야말로 신은지에게 이 물건들을 성공적으로 전해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육정현이 계산을 마치자, 신은지와 진유라는 가계를 나선 뒤였다. 진유라가 베개를 신은지 배에다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건... 너무 티 날 것 같은데.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가짜 임신이라는 거 단번
신은지는 눈을 크게 떴다."육 대표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열쇠를 사용해요? 지금은 다 지문으로 사용하는 거 아니에요?” 육정현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심리 컨트롤을 잘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해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는 시골에서 살다 왔어요. 산에서 장을 보러 가려면 한나절이나 걸어야 하죠.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물건을 접하기 힘들어 비교적 전통적이에요.” 육정현은 엘리베이터가 35층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신은지 씨, 그럼 오늘 밤은......” 신은지는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저한테 열쇠 가게 전화번호가 있는데, 육 대표님이 필요하시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 육정현이 대답하지 않자 신은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육정현이 황급히 따라 내리며 말했다. "신은지 씨, 열쇠 가에게서 사람이 오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날씨도 추운데 신은지 씨 집으로 가서 차 한 잔 마시죠. 열쇠 가게 사람이 오면 내려갈게요.” 육정현은 정말 솔직하게 말했다. "……” 육정현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가 신은지 얼굴 앞에서 대놓고 꼬리를 치고 있다. 신은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현관 도어록을 열었지만 바로 문을 열지 않고 큰 가방과 작은 가방을 익살맞게 들고 있는 육정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육 대표님을 집에 초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남편이 얼마 전에 죽고 혼자 사는 여자라서 조금 불편도 하고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신은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 말하다가 곧 감정을 조절했다. 신은지는 속으로 자신이 배우가 되지 않은 것이 연예계의 손해라 생각했다. "이 아이는 공교롭게도, 제 전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어요.사람들은 제가 이미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모두들 이 아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신은지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너무 오해를 한 것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신은지는 뒤늦게 육정현의 말을 이해하며 말했다. "안 돼요.” 육정현은 실망하며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저는 이미 여기에 들어왔어요. 지금 제가 다시 나가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함부로 혀를 놀릴 거예요. 그리고 복도는 너무 추워요. 열쇠 가게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면 안 될까요?” "지금 나가시면 다른 사람들은 별생각 없을 것 같은데요.” 3분이면 옷을 벗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오해할 것이 뭐 있겠나? 육정현은 손을 뻗어 신은지의 손등을 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차가웠고, 그가 만진 곳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밖은 너무 추워요.” 아직 11월도 되지 않아, 저녁 최저 기온이 모두 영상 8, 9도 이상이고 춥다고 해도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다. 신은지의 마음은 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육정현을 힐끗 본 후 거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소파 위에 얇은 담요가 있어요. 들고 복도 비상구 통로로 가세요. 거긴 바람도 안 불어서 춥지 않아요.” 육정현은 신은지를 뒤따라 거실로 들어오며 탁자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강혜정이 고택 서재에 두었던 것인데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신은지는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다가 고개를 돌려 육정현이 그 액자를 들고 있는 걸 보며 말했다 "내려놔요. 만지지 말아요.” 육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박 대표님인가요?” “……” 신은지는 육정현이 들고 있는 액자를 보았다. 사진 속 박태준은 검은 셔츠에 바지를 입은 채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육정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나쁜 놈, 어떻게 연기하나 보자. "네, 죽은 귀신같은 전남편이에요. 생긴 건 귀신같이 생겨서 명은 짧았어요.” 신은지는 낙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육정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박 대표님도 이름이 있죠?” 말끝마다 죽은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