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라니, 실종 전에도 그는 신은지한테 그저 남자 친구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박태준의 신분도 아니니, 그마저도 아니었다. 신은지의 선을 긋는 태도에, 육정현은 커다란 비수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기분이 들었다."저 미혼이에요. 임신한 약혼녀도 없고요."그러자 옆에 있던 진유라가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참 인연이네요. 은지가 마침 유아용품을 사러 왔는데, 그쪽도 이유 없이 유아용품을 사러 왔다니... 설마 처음부터 은지한테 사주려고 온 건 아니겠죠?"육정현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유라의 아픈 곳을 콕하고 찔렀다."그러게요. 인연이 참 묘하긴 하네요. 진유라 씨도 곽 변호사님이랑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한테도 청첩장 보내주실 건가요?"진유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위협을, 곽동건과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또 어디서? 진유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막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이때 직원이 포장해 놓은 물건을 가져오며 친절한 미소로 물었다."다른 것도 보시겠어요? 저희 가게 임부복도 아주 예쁘고 품질이 좋아요. 저희 제품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임산부의 민감해진 피부에도 자극 주지 않으며, 세탁하기도 용이하게 만들어졌어요."신은지는 임산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아요. 감사해요."하지만 옆에 있던 육정현은 달랐다."그것도 포장해 주세요."그는 빠르게 진열대에서 옷 몇 벌과 분유 등, 전에 한번 구매했던 적이 있던 제품들로 골랐다. 비록 그때 보낸 물건들은 모두 나유성이 기부해 버렸지만, 이번에야말로 신은지에게 이 물건들을 성공적으로 전해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육정현이 계산을 마치자, 신은지와 진유라는 가계를 나선 뒤였다. 진유라가 베개를 신은지 배에다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건... 너무 티 날 것 같은데. 실수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가짜 임신이라는 거 단번
신은지는 눈을 크게 떴다."육 대표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열쇠를 사용해요? 지금은 다 지문으로 사용하는 거 아니에요?” 육정현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심리 컨트롤을 잘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해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는 시골에서 살다 왔어요. 산에서 장을 보러 가려면 한나절이나 걸어야 하죠.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물건을 접하기 힘들어 비교적 전통적이에요.” 육정현은 엘리베이터가 35층에 멈추는 것을 보았다. "신은지 씨, 그럼 오늘 밤은......” 신은지는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저한테 열쇠 가게 전화번호가 있는데, 육 대표님이 필요하시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 육정현이 대답하지 않자 신은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육정현이 황급히 따라 내리며 말했다. "신은지 씨, 열쇠 가에게서 사람이 오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날씨도 추운데 신은지 씨 집으로 가서 차 한 잔 마시죠. 열쇠 가게 사람이 오면 내려갈게요.” 육정현은 정말 솔직하게 말했다. "……” 육정현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가 신은지 얼굴 앞에서 대놓고 꼬리를 치고 있다. 신은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현관 도어록을 열었지만 바로 문을 열지 않고 큰 가방과 작은 가방을 익살맞게 들고 있는 육정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육 대표님을 집에 초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남편이 얼마 전에 죽고 혼자 사는 여자라서 조금 불편도 하고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신은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 말하다가 곧 감정을 조절했다. 신은지는 속으로 자신이 배우가 되지 않은 것이 연예계의 손해라 생각했다. "이 아이는 공교롭게도, 제 전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어요.사람들은 제가 이미 이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모두들 이 아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신은지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너무 오해를 한 것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신은지는 뒤늦게 육정현의 말을 이해하며 말했다. "안 돼요.” 육정현은 실망하며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저는 이미 여기에 들어왔어요. 지금 제가 다시 나가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함부로 혀를 놀릴 거예요. 그리고 복도는 너무 추워요. 열쇠 가게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면 안 될까요?” "지금 나가시면 다른 사람들은 별생각 없을 것 같은데요.” 3분이면 옷을 벗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오해할 것이 뭐 있겠나? 육정현은 손을 뻗어 신은지의 손등을 만졌다. 그의 손가락은 차가웠고, 그가 만진 곳은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밖은 너무 추워요.” 아직 11월도 되지 않아, 저녁 최저 기온이 모두 영상 8, 9도 이상이고 춥다고 해도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다. 신은지의 마음은 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육정현을 힐끗 본 후 거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소파 위에 얇은 담요가 있어요. 들고 복도 비상구 통로로 가세요. 거긴 바람도 안 불어서 춥지 않아요.” 육정현은 신은지를 뒤따라 거실로 들어오며 탁자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강혜정이 고택 서재에 두었던 것인데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신은지는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다가 고개를 돌려 육정현이 그 액자를 들고 있는 걸 보며 말했다 "내려놔요. 만지지 말아요.” 육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박 대표님인가요?” “……” 신은지는 육정현이 들고 있는 액자를 보았다. 사진 속 박태준은 검은 셔츠에 바지를 입은 채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육정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나쁜 놈, 어떻게 연기하나 보자. "네, 죽은 귀신같은 전남편이에요. 생긴 건 귀신같이 생겨서 명은 짧았어요.” 신은지는 낙담한 표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육정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박 대표님도 이름이 있죠?” 말끝마다 죽은
신은지는 그가 진지하게 다가오자 급히 제지하며 말했다. "육 대표님, 아무리 목이 말라도 임산부인 저에게 마음을 쓸 정도는 아니시겠죠” “……” 육정현은 그녀의 배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동작을 멈추고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 앞에 가서 앉았다. "지난번에 넘어졌을 때도 배가 아파했는데 지금도 아파요?” 당시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구급차를 불렀지만 상태가 심각하지 않아 병원에는 가지 않았었다. 육정현의 말투에서 걱정과 긴장감을 알아챈 신은지는 몇 초간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신경 쓰이나요?” “……” 육정현은 아이보다 신은지가 더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육정현의 신분이었다. 육정현이 걱정된다고 하면 그녀는 뛰어다니지 않을까? 그리고 걱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신은지는 또 화를 낼 것이다. 게다가, 이 아이는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존재인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시험이다. 육정현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신은지는 이미 그를 내쫓으며 말했다. "어차피 당신 아이도 아니고 육 대표님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녀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나가면 경비원을 부를 거예요.” 육정현은 시선을 내리며 애처롭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싫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육정현이 머뭇거린 이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육정현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신은지가 듣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정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를 좋아해요. 당신 아이를 좋아해요.” 신은지는 육정현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휴대전화를 꺼내서 그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관리실 전화를 찾고 있었다. 육정현은 뒤늦게 입술을 오므리고 마지못해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 육정현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신은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현관 앞에 서서 답답한 듯 숨을
다음날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에서 기민욱을 본 육정현은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재빨리 감정을 감추었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 그는 기민욱이 맞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호영과 점심약속을 잡았다. 이것은 기민욱의 일었기에 본인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기민욱이 말했다. "병원에 있는 것도 심심하고 형이랑 같이 가고 싶었어. 의사가 퇴원해도 된다고 했고 기다렸다가 깁스를 풀러 병원으로 오면 된다고 했어.” 육정현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며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 "아직,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여기로 바로 왔어.” 육정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꾸짖었다. "의사의 당부가 기억나지 않으면 사람을 붙여서 의사의 말을 네 옆에서 상기시켜 주라고 시킬게." "형, 화내지 마. 왕 비서님께 사다 달라고 부탁했어.” 기민욱은 어제 육정현이 신은지와 또 함께 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매우 초초하고 불안했다. 기민욱은 무언가가 서서히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조금씩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형, 어젯밤에 왜 병원에 안 갔어?” "공적인 일이 좀 있었어.” 기민욱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 그의 눈에 어둡고 불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박씨 가문과 관련된 일이야? 두 가문은 이미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어? 또 무슨 할 말이 있어?” 육정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기민욱이 말했다. "어제 내 친구가 길에서 형이 신은지 씨랑 임신부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우연히 보고, 나와 얘기하면서 나에게 형 결혼했냐고 물었어.” "협력업체 직원 아이가 이틀 뒤 백일잔치를 하는데 마침 임신부 가게를 지나다가 적당한 게 있으면 사려고 들었했는데 거기서 우연히 신은지 씨를 만났어.” 육정현이 대충 얼버무리자 기민욱은 화가 났다. "그럼 신은지 씨를 데려다주고 그 집에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도 우연이야?" 기민욱의 얼굴 표정은 굳어졌다.
상대방이 말을 가지리 않자 육정현의 안색이 약간 변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형, 제가 이미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이 일은 오해예요. 제 동생은 단지 우연히 그곳에서 술을 마셨을 뿐이고, 호영 씨 사람이 먼저 제 동생을 건드렸어요.” "그가 못생겼다면, 거기에 있던 여자 눈에 띄지 않았을 것 아니야. 네 동생이 너무 잘생겨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해. 네 동생이 그 술집에 나타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네 동생이 재수 없는 것을 탓해.”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사람 앞에서는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육정현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말했다. "호영 씨, 제 동생은 나이가 어려서 이번 일로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호영님이 그날 형님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 제 동생에게 사과하길 바랍니다.” "당신 작년에 육씨 가문에서 경인시로 데려온 작은아들이지?” 호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육정현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돌려 앞에 있던 잔들을 모두 바닥에 떨어뜨렸다. 만약 테이블이 커다란 대리석 원탁이 아니었다면 테이블마저 젖었을 것이다. 호영은 육정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 네 아버지도 감히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하지 못했어! 육씨 가문이 최근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한들 이 경인시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호영은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기민욱을 보았다. "이 놈은 내가 때렸어. 사과는 불가능해. 오늘은 네놈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에 또 내 눈에 띄면 또 때릴 거야. 밥맛 다 떨어졌네, 가자. 정말 재수 없어.” 호영이 말을 마치고 나가자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즉시 우르르 그를 따라 나갔다. 아수라장이 된 룸 안이 곧 조용해졌고, 육정현과 기민욱만이 남았다. 기민욱은 입술을 오므리고 육정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형, 화내지 마. 저런 사람은 조만간 벌을 받게 될 거야. 누군가는 저런 꼴을 참지 못하고 혼내 줄 거야.” 기민욱은 눈을 가늘
육정현의 목젖이 움직였다.”아니, 됐어. 안 친해”진선호와 신은지는 들어오면서 방금 둘의 대화를 들었다.신은지는 문 옆에 서 있는 육정현과 이민욱을 보지 못했는데 대화소리를 따라 가보니 두 사람이었다. 기민욱은 신은지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은지 누나, 친구랑 밥 먹으러 왔어요?”"…네.”기민욱과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신은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옆에 있던 진선호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요.”진선호는 요 몇 달 동안 군대에 있어 박태준 사고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방금 신은지와 육정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본 진선호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둘이 싸웠어요?”보아하니 싸운 것 같지 않고 헤어졌거나, 아니면 얼굴을 붉히면서 격렬히 싸워 서로 꼴도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신은지는 진선호가 사람들 앞에서 박태준의 이름을 부를까 봐 걱정했다.특히 육정현은 어젯밤 그녀에게 기민욱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그리하여 서둘러 진선호를 붙잡았다. "이분은 육영 그룹의 육 대표님, 육씨 가문의 작은 아드님이세요.”진선호는 눈살을 찌푸렸다."아, 육 대표님 안녕하세요.”인사를 마친 진선호는 신은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기민욱의 외모와 말투는 요 몇 년 동안 유행하는 강아지남과 같이 생겨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은지 누나, 저랑 형이랑 아직 식사 안 했어요. 이렇게 우연히 만났으니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요? 지난번에 누나랑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그때 누나가 너무 바빠서 내가 말을 못 했어요. 오늘은 형도 같이 있으니 식사같이 해요.” 기민욱은 말을 마친 후 신은지를 향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육정현은 변명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 만약 정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큰 경인시에서 지인과 자주 마주칠 수 있었을까? 설령 재경 그룹을 탐내고 신은지의 마음을 반쯤 떠 보고 싶다 해도 그녀가 무엇을 알겠는가? 오늘도...… 육정현
손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육정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을 놓아주어야 했지만 놓아주기는커녕 참지 못하고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신은지의 피부를 스치자 따끔따끔한 감촉이 솟아오르며 혈관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랐다. 수많은 불꽃이 미세한 전류를 타고 마음속으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육정현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신은지와 눈을 마주쳤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마치 그 공간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 눈치가 없이 입을 열어 좋은 분위기가 깨지며 육정현의 손이 누군가에 의해 밀려났다. "육 대표님, 묵주가 필요하세요? 은지 씨 손이 당신 손에 잡혀 있네요. 은지 씨 남편이 실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육 대표님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아서요.” 진선호는 의자를 거칠게 빼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후 다시 왼쪽 의자를 당겨 신은지를 앉혔다. 육정현이 들어가 그녀의 반대편에 앉으려 하자 진선호가 그를 막으며 자신의 오른쪽에 있던 의자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육 대표님, 여기 앉으세요. 남자끼리 같이 앉아야 편해요.” 육정현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았지만 진선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육정현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결벽증이 있어서요. 남자한테 나는 땀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요.” 천성적으로 뻔뻔하고 반쯤 건달인 진선호는 그런 말을 듣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그는 오늘 진씨 가문 저택에서 나오면서 아침에 샤워를 했다. 게다가 지금은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고 오는 내내 차 안에 있었다. 땀이 날 틈이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육 대표님 분명히 고의로 이러는 것이다. 진선호는 일어나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는듯 육정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를 자신의 오른쪽 의자에 앉혔다. "그럼 육 대표님은 병이에요. 남자, 여자는 모두 땀을 흘려요. 저는 지금까지 땀 냄새를 맡은 적이 없어요. 그런 병이 있으면 나중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